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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불편하면. 자리를 옮기는 게 나으려나?”
그 사람이 말했다.
“아. 그게 좋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긴 하겠네요. 밖에 있는 사람들이 긴장할 테니까요. 아. 그런데. 내가…. 나한테…. 존댓말 해야 되나?”
“머리 굴리지마.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역시 안 통하네.
우리는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고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혹시... 순간이동 능력자인 거예요?”
내가 물었다.
“실체가 사라지면 많은 게 가능해지지.”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내 옆에서 같이 걸었다.
그럴 거면 내가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내 옆에 있으면서 그때부터 먼저 말을 해 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지 않는가.
그 사람은 나라고.
그 사람도 아마 한 두 템포 늦게 그 생각이 나서 뒤늦게 후회를 했을 거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집 안에 들어가서, 이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됐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유령처럼.
“방금 내가 유령 같다고 생각했지?”
그 사람이 말했다.
나를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나는 둥둥 떠올라서 자리를 옮겨다니는 그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유령을 보면 그게 꼭 콘돔 같다고 생각했지?”
내 옆에 대충 앉으면서 그 사람이 말했다.
“네…. 콘돔에 눈 그려 놓은 것 같다고….”
“고무줄이 끊어진 콘돔.”
“네.”
우리는 같이 웃어버렸다.
적어도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그 후의 몇 년의 기억도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건지 들을 시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뭐예요? 내가 혹시 미래에서 돌아온 거예요?”
“몇 가지 일이 잘못 됐지.”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잠깐만요. 아저씨가 츠유리 타테오인 거죠?”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키샤장인 거고요?”
“그래.”
“몸캠 영상 사이트를 만든 사람도 아저씨예요?”
“그거. 엄청 힘들었다.”
그럼……. 그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나였다니….
나는 그래도 아주 잠깐동안은 흥분을 했다.
“아저씨는 그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는 거네요?”
“오해하는 모양인데. 내가 살던 미래는 내가 돌아오면서 바뀔 거야.”
“그럼 그 소설들은 어떻게 쓰셨어요? 알고 쓰신 거잖아요.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쓰신 걸 제가 번역했는데요?”
“짧은 시간의 앞 일을 미리 볼 수는 있지. 나한테도 아이템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나잖아. 네가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할지 아는 건 어렵지 않고.”
“그럼 여자들은요? 연우랑 핫 걸…. 그 행동까지 예측이 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아니. 알아.”
“어떻…게요?”
“나는 필요없지만 마실 걸 좀 챙겨라. 듣는 것만으로도 목이 탈 테니까. 얘기를 듣다가 마실 걸 챙긴다고 내 얘기를 중단시키지 말고.”
“네. 근데. 어. 카린도 불러도 될까요? 같이 들어도 되는 내용이예요?”
나는 갑자기 카린이 생각나서 물었다.
“아니. 카린한테는 네가 나중에 얘길 해 주던가 해.”
그 사람이 말했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뭔데?”
“나중엔 저도 그렇게 돼요?”
나는 홀로그램이 된 그 사람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너는 살아야지. 제대로 살아야지.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네 소중한 사람들이랑. 그렇게 하려고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이렇게 돼 버린 거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 사람에게서 나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뭐라고 말하는 게 편할까.
'미래의 나'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표현말고.
역시 그냥 임정우인 건가?
정우 형?
정우 형?
일단은 정우 형이라고 해야겠다.
정우 형은 자기가 살았던 세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 미래에 일어났을 일들.
정우 형이 시간을 건너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굳어졌을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정우 형에게서 나는 처음 들어보는 여러 회사의 이름들을 들었다. 그 형이 뉴욕의 높은 빌딩에서 근무하면서 채권과 딜을 팔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형이 하는 얘기의 절반 정도나 알아들을까 말까 했다.
그 형이 내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을 거란 말인가?
형은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8개월인가 하다가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가 MBA과정을 마치고 에너지가 넘치는 뱅커가 되었다고 했다.
형은 기업의 인수 합병을 위해서 시장에서 4조가 넘는 돈을 모집하기 위해 채권을 팔았던 전략이며, 자기가 구매자금 모집에 성공해서 8천억에 사들인 회사를 2년 만에 2조에 판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얘기였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안에서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좋아했을 법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평가된 기업을 사서 꽃단장을 시키고 다시 팔아치우는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 그런 일을 하면 맹수를 사냥해서 무력화시킨 것 같은 정복감도 들었지. 피도 끓었고 돈은 엄청나게 벌었고."
"굉장한데요?"
나는 진심으로 흥미가 돋았다.
그러나 정우 형은 그 생활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자리에 누울 때가 되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연애할 시간도 없었고 가끔 섹스 파트너나 만나는 정도였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근도한테서 연락이 왔어.”
형이 말했다.
“근도도…. 아. 그렇죠. 근도도 있었겠죠. 근도한테도 형이라고 해야 되나?”
내가 말했더니 형이 웃었다.
내 말에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근도는 한국에 있고 나는 미국에 있으니까 가끔 전화 통화나 하는 게 다였지. 근도가 톡을 보내서 바쁘냐고 묻더라고. 바쁘다고 했어. 진짜로 뒤지게 바빴어. 다음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비행기를 타고 투자자들을 만나는 일에 같이 나서야 됐거든. 그래도 그 새끼가 말이야. '나 조금 있으면 죽을 건데 목소리나 좀 들려달라'고 솔직히 말을 했으면 전화를 걸어줬겠지. 그 새끼는 그런 말도 안 했다고."
나는 정우 형이 하는 말을 듣고 놀라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멍한 얼굴로 정우 형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정우 형은 화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일을 다시 떠올리면서 정우 형이 굉장히 흥분한 것 같아서 나는 정우 형에게 담배라도 권해주고 싶었다.
아니면 술이라도.
하지만 정우 형이 그런 걸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건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 형은 그냥.
하나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담배를 물 수도 없다.
"나는 바로 잠들었어. 그리고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나서 미친 놈처럼 돌아다녔어. 투자는 대성공이어서 몇 개 도시를 더 돌려고 했던 계획이 변경될 정도였어. 반응이 좋아서 더 돌아다닐 것도 없이 우리가 목표했던 금액이 일찍 채워졌거든. 근도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는데 어른이 받으시더라. 그리고 근도가 죽었다는 거야.”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자식.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아웃팅을 당했대. 게이라는 게 소문이 나서 직장 생활이 어려워졌고 관련 업종에 재취업하는 것도 어려웠대. 그런 일이 있고 7개월이 지난 후였던 거야. 나한테 전화를 한 게."
형은, 화를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근도 그 자식. 작은 반지하 방에서 월세를 밀리다가 집주인이 열쇠를 바꿔버려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한테 연락을 했었던 거야. 겨울이었다고. 고추도 얼 것 같은 추운 날.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통화를 했었어. 그런데도 그런 말은 없었단 말이야. 그러고는…. 도저히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하겠어서 나한테 연락을 했던 모양인데 나는 씨발. 돼지새끼들 살 더 찌워주겠다고 그 지랄을 하고 바쁜 척을 하고 연락도 제대로 안 받고 전화도 안 해 주고 그 자식을 잃었어."
형의 목소리가 분노로 거칠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웃팅을 한 건 근도가 믿었던 여자 동료였더라고.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커밍아웃을 했는데 근도 앞에서는 이해하는 척 하더니 뒤에서 소문을 내고 다녔나봐. 그게 그 자식 일기장에 써 있더라."
무거운 한숨을 쉬며 형이 말했다.
듣는 나는 울컥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걸 그냥 가지고 나왔어.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 근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회사로 돌아갔어야 됐는데. 못 갔어. 안 갔어. 갈 수가 없더라고."
나는 정우 형을 바라보았다.
정우 형은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있을 곳이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근도가 죽기 전까지 살던 원룸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 근처에 나와있던 방을 얻어서 거기에서 그대로 머물렀어. 근도가 살던 그 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 왜냐면. 집주인을 마주하고 화를 폭발시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거든.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사람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그래도 그 추운 날 문을 잠가 버린 건 용서할 수가 없었어. 그때까지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내 잘못이 더 컸겠지만."
지금 정우 형이 하고 있는 말이 모두 다 사실이라면 나라고 해도 화가 났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근도가 살던 그 방으로는 못 들어가고 근처에 다른 방을 얻어서 들어갔어. 그러면서 며칠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그냥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 근도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서 근도 유품은 내가 다 가져갔어. 전부 다 태울 거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그 자식이 살던 방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데, 그 자식이 살아있는 것 같더라.”
멍한 눈으로, 형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슬픈 얘기였지만 감정이입을 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 친구, 마성의 게이 최근도는 잘 살고 있으니까.
자기가 므로를 데리고 있고 싶어서 연우랑 신경전을 벌이면서.
손가락에서 거품기를 꺼내보이고 자랑을 하면서.
그 비싼 손을 자랑할 일이 별로 없어서 뜨거운 냄비를 맨 손으로 들고 옮기며 잔뜩 뻐기면서.
사바스 용병들한테 당할 뻔 했었지만 이겨냈고 그 전보다 막강해진 팔을 얻고서 그걸로 별별 어려운 일들도 거뜬하게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근도였다.
때로는 내가 겁을 낼 정도로 냉정하고 잔인하게 자기 일을 확실히 끝내 버리면서 그렇게 존재 의미를 실현해 가고 있는 근돈데.
살아있는 근도의 죽음을 애도할 수는 없었다.
형의 말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있는 근도를 위해서 슬퍼해 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은 내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아무튼 그랬다고.”
형이 말했다.
“네. 거짓말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예요.”
내가 재빠르게 말했다.
형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됐다.
형이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었다.
“근도 스마트 폰을 해지를 안 했어. 해야 됐는데 못 하겠더라. 그런데 어느날 근도 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오는 거야. 포털사이트 주소였어. 주소를 입력했더니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그게 뭔지 알아?"
"네?"
내가 알 리가 없지 않나.
"그게. 딥 웹이었지.”
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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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제 나 대신 네가 싸워야 된다'는 부분들이 전부 솎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