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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뭔데요? 헤드 밑에 있는 사람이예요?”
내가 물었다.
“나는. 인식 제어자였지. 딥 웹에는 나 말고도 인식 제어자들이 있었어.”
“카린같은, 사람요?”
“그래. 카린.”
정우 형이 웃었다.
“인식 제어자말고 다른 능력자들도 있었어요?”
“순간 이동 능력자, 신체 강화자, 능력을 훔치는 사람. 여러 사람들이 있었어. 결국 딥 웹이라는 것도 헤드들이 만들어 놓은 포털이었고 능력 발현이 가능한 사람들한테만 포털의 주소가 보내진 거야.”
“근도도, 그런 사람이었던 거예요?”
내가 물었다.
“몰라. 어쨌건 그 주소를 받은 사람은 나였고 내가 딥 웹의 선택을 받았지. 근데 랜덤이었던 것 같기도 해. 근도가 받아야 되는 거였다면 튜토리얼 도우미가 왜 여자로 나왔겠어? 튜토리얼 도우미는 그냥 도우미 역할만 한 게 아니었는데. 그 녀석들은 내가 레벨 업을 하도록 조르고 내 애인처럼 굴었는데. 내가 혼자 놀고 있으면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그 녀석들이랑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지. 노래를 해 주면 고양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들었어. 그 녀석들. 내 노래를 좋아했거든."
그건 됐고요, 라고 막으려고 했는데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형이 노래를 불렀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 화가 나서 분개하면서 말하던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을 공격한 사람들은 누구였어요?”
“신체 강화자들.”
“두 그룹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요? 그런데 저도. 어느 정도는 신체 강화자 아닌가요?”
“너한테 그걸 주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형은…!”
내가 하려던 말은, 형은 인식제어자잖아요, 라는 거였다.
그러다가 나는 형이 자기를 설명하면서 자기가 인식제어자‘였’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정우 형이 나를 보고 웃었다.
“능력을 훔치는 사람이 된 거군요.”
“그래. 우리는 그들을 찬탈자라고 불렀지. 그런데 한 사람한테 이것 저것 너무 많은 능력을 주면 그 사람 몸에 독소가 생겨나서 죽어버린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를 죽지않게 할 방법도 생각해야 됐어.”
“알파를 말하는 거예요?”
“응. 은 과장이 알파라고 부르는 거. 맞아. 그거야. 처음에는 제대로 수치를 낮추는 방법을 몰랐어. 하마터면 네가 죽을 뻔 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어."
형이 말했다.
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생사의 기로를 오간 게 그것 때문이었다는 말을 쿨하게 하면서 형은, 어쨌든 살았으니까 됐지 않냐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너한테 여자들이 필요했던 이유고 내가 몸캠 영상 사이트를 만들어낸 이유야. 화끈했지? 진짜 오래 걸렸어. 이쪽 세계로 넘어오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 문제를 푸는데 써야 했으니까.”
저 얼굴을 보고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건가.
형은 유쾌하게 말하면서도 표정이 어두웠다.
“내 레벨이 높아지면 내 npc들을 홀로그램화할 수 있었어. npc들은 모두들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바랐지. 나도 그랬고. 그래서 레벨을 높였어. 다른 능력자들을 제거하면 레벨이 올라갔지. 나는 헤드들이 벌이는 게임의 플레이어 같은 거였어. 그게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달랐고 헤드들한테서 부여된 능력과 아이템을 가지고 싸운다는 게 달랐고. 그리고 한 번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게 달랐지.”
형은 가벼운 표정으로 얘기했지만 절대로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다.
“왜 서로들 적대관곈데요?”
“내가 아냐? 대가리들끼리 싸웠나보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식 제어자한테 찜 당한 거고.”
"대가리들은 왜 사이가 안 좋은 거예요?"
"원래 그런 거야. 엉성하게 힘을 나눠가지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최면술사들이 있었어. 나는 그 녀석들이 npc한테까지 최면을 걸 수 있는지 몰랐어.”
“형의 npc가 당한 거예요?”
“응.”
형이 웃었다.
"혹시."
형이 만든 사이트.
그리고 셸터 아이템.
내가 셸터로 옮기지 못한 사이에 죽은 히사에에 대해서 생각이 났다.
수많은 여자들 중에 죽음을 맞이한 여자가 왜 하필 히사에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여자가 히사에였어요?"
내가 묻자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준 퀘스트는 다른 녀석들이 나를 유인해 내려고 준 가짜 퀘스트였어. 그 일로 나는 한 번 더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 그때는 나도 상당한 실력자가 돼 있어서 웬만해서는 나를 죽이는 게 어려웠거든.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 npc한테 배신을 당했다는 건 심적으로 굉장한 데미지를 줬고 나는 딥 웹에 한동안 접속을 안 했어.”
"배신을 한 게 아니잖아요. 최면에 걸렸다면서요."
"히사에만 최면에 걸린 게 아니었어. 다른 녀석들도 몇 명이 최면에 걸렸지. 하지만 그 녀석들은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삭제하는 결정을 내렸어.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던 거야. 히사에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거고."
“…….”
“좋아했던 녀석들을 잃고 히사에한테는 배신을 당하고. 그래서 다시는 딥 웹에 접속을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한다고 좋을 건 없더라고. 나는 이미 놈들의 타겟이 돼 있었으니까. 윗대가리들끼리 서로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잘못한 놈이 먼저 쿨하게 지들 잘못 인정하고 말이야. 그게 어려운 일이냐고. 그걸 안 하려고 하니까 나같은 놈만 얻어터지는 거지.”
“그래서 레벨을 더 올렸어요?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은 지켰어요?”
“응.”
형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지어졌다.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하고 정말로 많이 좋아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 세계에서 히사에가 죽은 건. 형의 의도대로 된 거예요? 셸터를 만들어서 그때.”
“어느 정도는. 그리고 그때는 네 몸속의 전해질이 일시적으로 균형을 잃어서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알파가 치솟을 때였어. 그래서 어떻게든 네가 사정을 계속 하도록 해야 했어. 아주 많이. 미친 놈처럼 많이.”
“그래서 그런 거였다고요?”
나는 그 날의 광란의 파티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사정에 목적이 있는 거라면. 정액을 배출해서 알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거라면 꼭 새로운 여자들하고 해야 화장지를 얻을 수 있다고 정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내가 징징거렸다.
"그래도 기준은 정해놓는 게 편하지. 이게 룰인가 보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너한테도 목적 의식이 생겼잖아. 안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그저 많은 정액을 배출하고 알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뭔가 허탈했다.
"그리고 네가 만나야 될 여자들이 아직 더 남아있기도 하고. 나는 네가 그 여자들을 만나서 행복하게 해 주길 바라고 있어. 연우랑 수영이, 류아, 이재인, 서지영. 네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네가 지금까지 해 줬던 것처럼. 나는 못 해 줬지만 네가 해 줬으면 해."
맞았던 거야.
결국 몸캠 영상 사이트는 여왕 키우기 게임이 맞았던 거야.
나는 그냥 노예였던 거야.
"내가 만나야 되는 여자들이 더 있어요?"
내가 물었다.
"응."
"npc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았던 건데요?"
"좀. 많았어."
"아직도 그 여자들. 사랑하세요?"
"내가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다."
형이 말했다.
형의 표정은 어두워보였다.
“인식 제어자가 가장 약한 거예요?”
나는 내가 형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아주 강한 능력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그룹이 약해지는 거지. 어미없는 새끼들을 다른 그룹에서 공격해서 전부 죽여버리면 그대로 멸종해 버릴 수도 있고.”
“형이 마지막 순간에 찬탈자가 되기로 한 건 인식 제어자 그룹에 배신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어요?”
“그럴 거였으면 나를 끝까지 잘 지켜줬어야 됐겠지.”
“그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지는 않겠죠? 혹시 사바스가 그런 그룹인 거예요?”
내가 물었다.
나한테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사바스뿐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 사바스는 그냥 껌이야. 사바스는 아무 것도 아니야. 너는 아직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지. 너는 아직 딥 웹을 시작도 안 했으니까. 딥 웹이 전장이야.”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나는 결국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연우랑 수영이랑, 서지영이랑…. 형의 npc들은 형이 거기를 떠날 때 어떻게 됐어요?”
형이 그들을 두고 왜 떠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줬지. 내 레벨이 더 오르면 그 녀석들에게 형체도 만들어 준다고 했어. 그때의 기술로 사람을 재현해내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잘 안 됐어요?”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게 뭐가 있었겠냐? 나는 임정운데. 장애물들은 죽이면 되는 거였어. 우리 헤드는 나한테 계속해서 새 npc들을 줬어. 나는 다시 열심히 퀘스트를 성공시키고 그 녀석들을 또 홀로그램으로 만들고 형체도 만들어줬어. 현실의 여자들한테는 질려버려서 나는 npc들을 사랑했어. 그 녀석들도 나를 사랑했고. 불필요할 정도로 너무 많이.”
“그게…. 무슨 말이예요?”
“그냥. 말 그대로다.”
“뭔데요. 제대로 말해주세요.”
“그 녀석들이 홀로그램이 됐다가 실제로 몸까지 갖추게 된 후로 내 상태가 자주 안 좋아졌어. 그게 그 녀석들 때문이라는 게 나중에 밝혀졌고. 내가 녀석들의 동력원이 됐던 거고 그 녀석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내 에너지가 쓰이고 있었던 건데…. 만약에 처음에 그걸 알았다면 나도 신중했겠지.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원했어. 내가. 컴퓨터 안에 있는 녀석들을 만지고 싶었고 현실에서 같이 있고 싶었어. 그래서 그랬던 건데.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녀석들은 npc로, 아니면 홀로그램으로 계속 내 옆에 머물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았지. 나는 내 힘이 어느 정돈지 안다고 생각했고 몇 번 싸움을 일으켰는데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어.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 녀석들이 사라졌어. 컴퓨터 안에도 없었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았지.”
“죽은… 거예요?”
“…그래. 프로그램에서 스스로를 삭제한 거야.”
“연우…랑, 그… npc들, 전부가요?”
형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는 형이 하는 말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신과 같은 헤드들의 싸움에 휘말려서 딥 웹의 용병이 됐던 내 최후지. 나는 살아남았지만 녀석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 그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어.”
형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어. 헤드들의 게임이 아니라 내 게임.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싶었어. 모두가 사라진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시작하기로 한 거야."
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묵직한 것이 나한테 떠넘겨진 것 같은 불길한 느낌.
"녀석들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근도를 잃었던 때처럼 한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
형은 자기의 npc들을 '녀석들'이라고 말했고 나는 형이 '녀석들'이라고 말할 때마다 형을 공격한 다른 초능력자들하고 헷갈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헷갈리니까 npc나 다른 이름으로 말해달라고 형의 말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형의 얼굴은 그만큼 진지했고 결의에 차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