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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나는 다시 일어서서 싸우기 시작했어. 녀석들이 원했던 게 그거였을 테니까. 자기들 때문에 내가 약해지는 건 싫었을 테니까. 레벨을 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레벨을 올려서 하고 싶었던 것들이 전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아이템을 모으기 위해서 퀘스트를 수행했어. 성공하면 랜덤으로 아이템이 나왔으니까. 헤드의 힘이 집약된 아이템. 그걸 너한테 물려주고 싶었어. 그렇게 해서 네가 놀 판을 제대로 짜 주고 싶었어.”
형이 말했다.
“그리고 아이템을 얻었어. 그걸로 내 npc들을 태어나게 했지. 더 이상 npc나 홀로그램이 아니라, 어설픈 형체가 아니라 사람이 되게 했어. 그리고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면서 너를 만날 시간을 기다리게 했어. 그 녀석들이 어떻게 살지, 어떻게 자랄지 거기까진 관여를 할 수는 없었지만. 시간을 이동하는 아이템도 얻었고 파트너 아이템도 얻었어. 나를 대신해서 너를 도와줄 사람들을 찾느라고 딥 웹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지.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이 카린과 한세영이야.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 너를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아이템도 얻었고 그걸로 은 과장을 선택했지. 마음에 드는 선택일 거라는 거 알아. 아버지는 그때까지 혼자 사셨거든.”
“정말이예요?”
“응. 아버지는 엄마한테 계속해서 삥 뜯기고 있었어. 그걸 한참 후에야 알았지. 엄마는 진짜 별별 거짓말을 다 해 가면서 아버지한테서 돈을 뜯어내고 있었어. 내가 아버지한테 용돈으로 드리는 게 전부 엄마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지.”
“세상에.”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정우 형은 내가 그 상황을 바로잡게 하려고 아예 처음부터 나한테 암시를 걸었었다고 말했다.
왜 그때까지 기다렸던 거냐고 묻자 형은 내 몸에 생기는 독소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해서 그때는 거기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고 했다. 그때가 몸캠 영상 사이트의 마무리 단계와 맞물리기도 해서 혼자서 엄청나게 바빴다는 말도 했다.
나는 정우 형의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됐던 그 기습 방문이 내 계획이 아니라 형이 암시 때문에 이루어진 거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내가 내린 결정들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형의 조종을 받아서 이루어진 거냐고 물었다.
형은 내가 꼭 만나야 했던 사람들, 카린과 세영 누나, 그리고 은 과장님을 만나는 과정 말고 형이 개입한 것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핫 걸을 통해서 나에게 정보를 주기는 했지만 형은 핫 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도 없었다고 했다.
형은 자기가 딥 웹에서 npc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나에게 몸캠 영상 사이트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내가 핫 걸의 정체를 알아내고 키샤에 대해서까지 알게 됐더라고 했다.
그 후에는 자기가 일을 하는 게 쉬웠다는 말을 하면서 '역시 너는 나'라는 괴상한 말을 했다.
키샤에 대해서 묻자 형은 자기가 키샤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냥, 형이 미국에서 뱅커로 일하면서 알게 된 상원 의원을 통해 우연히 키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고 언젠가 자기가 그 조직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형이 여러 가지 상황들을 되돌리기 위해 시간을 이동했으면서 왜 아버지를, 그러니까 우리 친아버지를 살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아버지까지 살아난다고 하면 솔직히 그 변수를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 헤드는 인과율을 통제해야 돼. 인과율을 통제하지 못하는 헤드는 헤드로서 자격 상실이야. 내가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건 내 헤드의 승인이 있어서 그런 거였는데 여기에 와서 승인받은 내용을 벗어난 일을 했다면 징계가 따랐을 거야."
형이 말했다.
아버지하고는 어떤 추억도 없었다는 것 또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형도 역시 아버지를 그리워할래야 그리워할 기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파트너 아이템이나 그런 것 말고 다른 아이템은 없었어요?”
내가 물었다.
“예지 아이템이 있었는데 그건 불량품 같았어. 그래도 근미래의 일을 볼 수는 있어서 츠유리 타테오로 활약을 할 수는 있었지. 그런데 그건 효력이 점점 약해지더니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어. 연우랑 아버지가 사나에서 납치되는 건 아예 몰랐어. 키샤의 정보망이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몰랐을 거야. 그때는 진짜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서지영한테 이 모습으로 나타났고. 어두우면 별로 구분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 티 났다고 해?”
"아뇨. 아뇨. 형이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몰랐으니까 형이 왜 전화를 하지 않고 직접 왔는지 그걸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어요."
"아아. 그럴 수도 있었겠네. 어쨌든 그런 것들이야."
형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만났으니까 이제는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형의 npc 중에 제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으면 형이 알려주면 되잖아요.”
내가 말하면서도 좀 찔리긴 했다.
접속하고 싶지 않았던 몸캠 영상 사이트에 그동안 억지로 접속했다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서.
“안 돼. 거기에 있는 아이템은 네가 거기에서 획득을 해야 돼. 헤드가 그렇게 만들어 놨어.”
형이 말했다.
“몸캠 영상 사이트는 형이 만들었다면서요.”
“거기 있는 아이템 중에 쓸만한 건 헤드가 만들어 준 거거든.”
"아아."
"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당연하잖아. 왜 그렇게 보냐?"
형을 보는 내 눈에 진심이 담겼나?
형은 무시하는 눈으로 보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진작 나타나지 않았어요? 저한테 더 일찍 찾아올 수도 있었잖아요. 형이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걸 알았잖아요.”
“네가 스스로 궁금해하고 여기까지 답을 찾아내지 않았으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다 믿지 못했을 걸?”
나는 형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 더 빨리 나타나 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마음을 지우지는 못했다.
“연우는…. 형을 기억할까요?”
내가 물었다.
“아니.”
“서지영도 형을 못 알아봤어요?”
“알아볼 수가 없는 거지. 나를 본 적이 없는데.”
형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내가 있던 곳에서의 npc랑 지금 네 인벤토리에 있는 여자들은 같다고 볼 수 없어."
정우 형이 말했다.
"그래도요. 형."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했지만 그게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형도. 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거죠? 헤드가 바꿔줄 수 있는 거죠? 전에 npc들도 그랬다면서요. npc가 홀로그램이 되고 형체를 갖게 되기도 하고요. 그럼 형도 가능한 거잖아요.”
내가 형에게 물었다.
“나한테는 근도가 살아난 게 중요하고 내 npc들이 행복한 게 중요해. 그러려고 온 거야. 한 세계에 같은 사람이 둘이나 존재할 수는 없어. 같은 형태로 말이야. 그게 내가 이 세계에 홀로그램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야. 타임 슬리퍼들은 예외지만. 만약에 내가 그 능력을 정밀하게 습득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는 있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어. 나한테는 내가 있을 자리가 있어. 네가 독소 물질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야지. 네가 죽으면 미래도 없고 나도 없어지잖아. 그 세계에도 이제는 근도랑 npc들이 다시 살아 있겠지. 내가 돌아갈 곳은 그 곳이야.”
“근도. 만나보실래요?”
“아니. 싫어.”
“왜요오!”
“너라면 그러고 싶을 것 같냐? 너라면 네 몸이 이렇게 됐는데 근도나 연우나 아버지를 만나고 싶을 것 같아?”
형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내가 형의 상처를 건드려 버렸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냥…. 서로 시간 좀 갖자. 간다.”
고개를 들었을 때 형은 사라진 후였다.
***
므로가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계속 앞다리로 나를 톡톡 치더니 나중에는 내 팔 위에 앞발을 얹고 흔들어댔다.
“어?”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므로를 바라보았다.
므로는 내가 자기를 바라보자 앞발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모양이었다.
“어. 응.”
나는 므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므로는 얌전히 머리를 대고 있었다.
나는 서너번 쓰다듬어 주고 다시 정우 형에 대해서 생각했다.
딥 웹과 헤드에 대해서도.
내가 알파 수치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 명확해졌고 앞으로도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해서 아이템을 얻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런데 므로가 또 앞발로 내 손을 건들었다.
“응?”
므로는 또 앞발로 자기 머리를 문질렀다.
“그래.”
나는 다시 므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므로야. 이제 그만하자? 혼자 가서 놀아.”
내가 말했지만.
므로는 잠시 후에 또 똑같은 짓을 했다.
“므로야. 오늘은 혼자 놀아. 다음에 내가 많이 쓰다듬어 줄게. 알았지? 미안.”
그렇게 부드럽게 말을 했단 말이다.
내가 그렇게 부드럽게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부드럽게 말을 해 줬는데 이 자식이!
또 그러는 거다.
므로가 나를 앞발로 톡톡 쳤고, 나는 녀석을 쏘아 보았다.
므로도 대충 짐작을 했는지 움찔하면서 몸을 긴장시키는 게 느껴졌다.
“므로. 그만하자고.”
그런데 이 자식이 나한테 도전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앞발로 내 손을 톡톡 건드리는 거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가.
상상하던 일이 벌어졌다.
므로가 연우의 고양이라서 그동안 그나마 예뻐해 주고 있었던 거였는데 이 자식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 제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성질이 폭발했다.
“아, 그만 하라고!!”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아 복잡해 죽겠는데 므로 이 자식이 내 성질을 돋군 것이다.
처음부터 화를 냈으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거다.
근데 이 자식이 내가 알아듣게 다 말을 했는데도, 아예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그 짓을 했던 거다.
내가 므로를 발로 밀어서 침대에서 떨어뜨리는 걸 연우가 봤다.
냐아아아앙! 소리를 들은 것이다.
저 자식이!
그건 꼭 연우한테 나를 이르는 것 같았다.
므로가 그런 소리를 내는 걸 나는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우 앞에서.
연우는 므로에게 달려오더니 므로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므로 저 자식이!”
“이렇게 어린 므로를 어떻게 발로 차요?”
연우가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런데 므로 이 새끼가 연우 품에 안긴 채로 나를 보고 조그만 혀를 쏘옥 내밀었다.
“아니, 근데 저 개새끼가!”
내가 화가 나서 쿠션을 들고 확 던지려고 했더니 연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빠!”
“연우야. 너 좀 비켜봐. 저 자식이 지금 나한테 메롱 했단 말이야!”
연우는 므로를 내려다보았다.
므로는 혀를 쏙 집어넣고 불쌍한 표정으로 연우를 보면서 앞발로 연우 팔을 문질렀다.
‘제가 평소에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아요. 에효오오.’
하고 이르는 것 같은.
므로가 나한테 혀를 내밀고 약올렸다는 걸 연우가 몰랐으니까 그런 거지 일단 알게 된 다음에는 당연히 므로를 혼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연우는 오히려 나한테 잔소리 폭격을 시작했다.
오빠가 므로하고 똑같이 굴면 어떡하냐는 거다.
내가 므로하고 똑같이 굴다니?!!
아놔. 그러면 안 되지, 연우야.
그러면 진짜 섭섭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