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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는 나조차 분간해내지 못하는 능력자들의 존재를 분별할 수 있었다.
나는 유나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유나는 뜻밖의 구원투수가 나타난 것처럼 유나를 반겼다.
내가 유나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은 알았겠지만 유나가 npc로서의 기억을 갖고 있거나 능력자들을 미리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나를 볼 때마다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우한테 정말 큰 도움이 되겠다."
정우 형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유나는 생전처럼 자기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유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모두가 잊은 기억을 홀로 안고 있는 자의 부담감과 괴로움에 대해서.
나는 유나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
그 후로 정말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씩 바로 바로 기록을 해 두지 않으면 나조차도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가 버릴만큼.
하나는, 유나를 통해서 능력자들을 분간해내고 그들을 내가 공격하는 것에 대한 거였다.
형은 아마도 그게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공격을 받기 전에 내가 더 많은 능력자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능력을 흡수할수록 나중에 유리할 거라고 말했다.
일단 그렇다고 하는데 더이상 생각할 것이 없었다.
카린이 꾸렸던 팀은 이제 다른 임무를 받는 것이 금지되었고 우리를 돕기 위해 거기에 모든 것이 맞춰졌다.
이지도 대대장님은 우리를 본격적으로 훈련시켰다.
대대장님은, 자기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만 남에게 기술을 습득시키는 것은 정말 잘했다.
대대장이 괜히 대대장인 게 아닌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켜놓고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한 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그 고집이, 민간인 신분이 된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
나와 근도는 대대장님이 시키는 걸 어느 정도 무리없이 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대장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도 우리가 그것까지 해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순식간에 지구를 돌고 오라는 것 같은 건 시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정말로 그걸 시켰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 비슷하게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게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열등하다는 느낌을 받을 틈이 없었다.
자괴감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의 수준이 달라지고 대대장님이 내 앞에 나타나면서 나는 어느새 열등감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나보다 못한 현이는 가끔 칭찬도 해 주면서.
아, 진짜 그냥 확 삐뚤어져 버릴까!
현이는 자기가 근도나 나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이는 우리를 기준으로 해서 열등감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날 나는, 현이가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나 해서 아주 진지하게 현이에게 그 문제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말야. 나같은 형이랑 같이 있으면 막 네 존재 자체가 쓰레기같다는 생각 같은 거 안 드냐?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 따위일까. 나는 언제쯤 돼야 저 사람의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막 그런 절망감이 들고 그러지 않냐? 나는 네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봐서 막 무쟈게 걱정된다?"
정말로,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현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전혀 안 그래, 형.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해? 나는 서 있는데. 이렇게 서 있을 수 있게 됐는데."
그 말에 한순간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현은 쓸데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형이랑 근도 형은 정말로 대단하지. 정말 굉장하고. 하지만 내가 형들이랑 경쟁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형. 나는 서 있잖아. 이 자체로도 나는 내가 너무 위대해 보여. 나한테 일어난 일들이 전부 다 너무 감사하고. 그러니까 나도 조금은 형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도움도 안 될 녀석을 형이 옆에 두지도 않을 거잖아."
현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소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범해지고 싶었다는 말.
드디어 평범해졌다는 것 때문에 감격했던 말.
결여를 겪었던 사람은 그 경험만으로도 엄청나게 강해지는 거구나 라는 것을 나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현을 놀리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대대장님이 현이만 칭찬을 해 주니까 나도 모르게 현을 괴롭히고 싶어졌었던 것 같다. 나도 지금 깨달은 바다) 둘 중에 바보가 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자만심에 방방 떠 있었다면 현은 자존감으로 굳세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장님이 현을 칭찬할 때마다 현이 나와 근도에 한참 못미치니까 토닥거려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에게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다른 강점이 있었다.
나는 현을 안아주려고 했다.
"형 기분이 어떤지는 알겠는데. 나, 이런 거 굉장히 싫어한다? 누가 함부로 나 만지고 안고 그러는 거. 머리 쓰다듬는 것도 싫어하고."
현이 말했다.
이노무시키. 내 친척 아니랄까봐 겁나게 단호박이다.
대대장님은 어쨌거나 그렇게 우리를 훈련시켰다.
내가 군대에서 겪었던 어떤 악마들도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혹독하게.
현이는 나와 근도보다 더 열심이었다.
다 죽어가는 우리 곁에서 같이 달리면서 환하게 웃는 녀석.
그래. 너, 다리 있고! 너, 서 있어.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웃을 수 있는 놈은 그놈밖에 없을 것이다.
어쩐지 갈수록 무서워진다.
근도도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내 말에 적극 동의를 해 주었다.
대대장님이 그러는 건 정우 형과 이미 얘기가 돼있는 내용이었던 듯했다.
정우 형은 대대장님에게 내가 어떤 사람들과 싸우게 될지를 말해 주었고 대대장님은 은수 형의 도움을 받아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각각 어떤 훈련들이 필요할지 맞춤형 훈련을 시켜 준 것이다.
우리는 인식제어자들의 공격에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훈련도 같이 받았다.
그때는 세영 누나가 동원됐다.
세영 누나는 최면에 걸리지 않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답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였다.
아주 강력한 최면술사나 인식제어자에게 걸리면 무슨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거라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훈련 시작이다."
세영 누나는 그 말을 하면서 우리 앞에서 동전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동전으로 향하게 하고 동전을 이쪽 손에서 저쪽 손으로 옮겼다.
동전을 어디로 옮겨야겠다고 누나가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의 각 부위가 나서서 동전을 서로 가져가 삼켜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전은 전혀 이상한 곳에서 나왔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곳,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몸에서도 나왔다.
사라진 동전이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또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생전 쓸, ‘감쪽같다’는 말을 그 날 다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어깨에서 팔을 타고 손바닥까지 굴러온 동전이 허공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는 모두 입을 턱 벌리고 있었다.
“눈속임이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기도 한다는 걸 기억해야 돼.”
세영 누나가 말했다.
“패러다임이 그림을 상상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의 그림을 만들어내거든. 모자를 쓰고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집에 들어간 장면을 보고 난 다음에, 몇 분 후에 똑같은 모습의 남자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보면 그걸 본 사람들은 그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집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어. 똑같이 모자를 쓰고 흰 셔츠를 입고. 그런데 그런 남자가 들어가는 걸 애초에 본 적도 없는 사람은 모자를 쓰고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나오는 걸 봐도 아무 것도 오해하지 않지. 그냥 그 사람한테는 어떤 남자가 집 밖으로 나왔다는 인식만 있을 거야.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실제로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되는 일은 달라. 나는 모두를 속였어. 그럼 나한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세영 누나의 말에 우리는 모두 대답을 찾으려고 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돼. 무시하면 안 속아. 너희들이 속은 건 내가 보여주는 걸 조금도 놓치지 않고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너무 집중해서 봐서 그런 거야. 동전이 어디로 가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동전이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져도 놀라지 않아. 사라진 줄도 모르거든.”
“그게 뭐예요!”
대단한 비기가 풀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실망해서 마구 투덜댔다.
“이제는 속지 말아봐.”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동전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잡아 쥐었다.
누나한테서 이미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건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도 눈이 어느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도도, 현도, 대대장님도 마찬가지였고 정우 형도 황홀한 듯이 누나의 동전마술을 구경했다.
누나는 인식 제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마술사들이 하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수준이 뛰어났다.
누나는 현의 손바닥에서 손을 찢고 그 살을 뚫고 그 속에서 동전을 꺼내는 것처럼 할 수도 있었다.
으악, 으악 하는 비명이 계속 우리 입에서 나왔다.
거기에 덤덤해지고, 자극을 무시하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게 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 분명히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데 무시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환상을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입체감과 열기, 냄새까지는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상이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마치 정우 형과 같았다.
“허상을 구분해. 실체가 없는 건 굳이 피할 필요가 없는 거야.”
세영 누나가 말했다.
근도와 현은 내가 만들어 보이는 갖가지 환상들을 보면서 허상과 실체를 구분하는 훈련을 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기분.
죽을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딥 웹의 다른 능력자들을 만나기도 전에 과로로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려고 하면 세영 누나가 됐건 대대장님이 됐건 정우 형이 됐건 우리를 훈련시키던 사람은 현에게 물었다.
힘드냐고.
그러면 그 자식은 늘, 언제나, 항상! 한결같이 대답했다.
“아뇨. 재밌어요! 한 번 더 하죠?”
저 새끼는 그냥 미친 거다.
그냥 하나의 정신병자인 거다.
“야, 임정우.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일단 추측이긴 한데 맞는 것 같아. 잘 들어봐. 민현 있잖아? 저 자식이 능력자야. 형태변환자 같은 그런 종류의 잘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인 거야. 그래서 저 자식이 네 사촌동생인 것처럼 하고 우리한테 나타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말려죽이려고 항상 저렇게 헤벌쭉 웃고 다니는 거야. 어때. 맞는 것 같지?”
나보다 더 심각하게 맛이 간 근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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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와 정우 형이 커플링되는 것을 바꿨습니다. 정우 형은 곧 미래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