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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스페이스 아이템
“재밌잖아요. 작동하던 걸 작동하지 않게 할 수도 있고 작동하지 않던 걸 작동하게 할 수도 있고요. 부품을 갈거나 내가 고쳐서요. 고친다는 거. 그 말 참 굉장한 것 같지 않아요?”
이승희가 말했다.
“의사랑 비슷한 건가요?”
“의사보다 대단하죠. 왜냐면 사람 몸은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을 갖고 있잖아요. 기계는 안 그렇고요. 고장난 물건을 다시 고치는 건 그런 의미에서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승희는 어떤 차를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고 나는 마음에 드는 건 이것저것 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도 자주 사용할 사람들은 현이나 근도가 될 것 같아서 두 사람에게 톡을 보내 의향을 먼저 물어보기도 했다.
차를 산다면 어떤 게 좋겠냐고.
근도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세 모델을 적어서 보내 주었고 현은, ‘페라리 캘리포니아 T, 빨간색. 그거면 돼.’라고, 별로 부담되지 않는 걸 요구하는 듯이 말했다.
역시 이 자식들은 나를 다룰 줄 알아.
근도는 조금 있다가 하나를 더 보냈다.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또 하나 더.
그만 보내라고 할 때까지 생각나는대로 하나씩을 더 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근도는 내가 내 차를 새로 사려는 건줄 알고 이런 모델들 중에 한 번 골라봐라 라고 보내준 거였고, 자기가 말했던 차들이 전부 들어차 있는 차고지를 보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미친 새끼. 너는 진짜 독보적이야. 인마!”
그게 나중에 내 콜렉션이 완성됐을 때 그걸 보고 내린 근도의 평가였다.
어찌됐건 그건 나중 일이고 나는 이승희와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청담동에 이르렀고 내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건물에 들어가서 크게 다르지 않은 절차를 걸쳐 차들이 들어차 있는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공업사 사장과 대단한 친분이 있는지, 그리고 이승희도 전에 본 적이 많이 있었는지 그 엄청난 컬렉션의 주인은 나를 환영해 주었다. 전화로.
그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인맥 하나 더 만들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으니까.
쓸모도 없는 남자를 새로 알아서 뭘 하겠는가.
여자라면 또 몰라도.
공업사 사장에 대한 신임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나라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런 곳에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였다.
거기에 불 지르고 튀면, 그대로 40억 상당의 손해는 보장될 만한 곳이었다.
나는 이승희에게 내가 봐야 될 모델들을 알려주었고 이승희는 정확히 찾아서 나에게 그 녀석들을 소개해 주었다.
딜러였던 감각과 지식은 녹슬지 않아서 설명이 유려했다.
이승희에게는 내 반응이 조금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승희에게는 내가 고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수퍼 카들이 앞에 쫙쫙 놓여있는데 시큰둥하게 보고 여기 온도가 좀 높네, 습하네 하는 개소리만 해 대고 있었으니 이 남자가 침대에서 쌀 줄은 아는 건지 의심이 든 모양이다.
지금까지 이승희가 만나왔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대충 상상이 됐다.
하지만 이곳은 나에게 그렇게 '굉장한' 곳까지는 아니었다.
리얼 그릴 주차장에는 이보다 훨씬 더 화려한 차들이 서른 배 정도 들어차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승희와 공업사 사장이 보여준 호의에 답하려고 나는 최대한 열심히 놀란 척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나도 할만큼 한 거였다.
이승희는 내가 감동받기를 기다리는 것 같더니 결국에는 포기했고, 자기라도 열심히 구경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았다.
이승희는 차체를 만지면서 황홀해 했다.
지미추 구두에 열광하는 여자 애가 자기 형편으로는 도저히 지미추를 사 신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열심히 윈도우 쇼핑에 몰두하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나란 남자는 그런 이승희를 보면서, 본네트 위에 올려놓고 박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고.
일단 그 생각이 들자 모든 본네트를 볼 때마다 그런 장면을 떠올렸다.
본네트가 널찍한 차를 보면, 이 위에서라면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차체가 낮은 곳을 보면, 이 위에 올려놓고 하려면 다리를 어정쩡하게 구부려야 해서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나는 근도와 현이 원하는 차를 알게 됐으니 거기에서 더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가이드 해 준 값을 하기는 해야 할까 싶어 이승희에게 차를 선택하게 하고 그 차를 빌렸다.
이승희는 스피드광이었다.
의외라는 생각같은 건 들지 않았다.
처음에 본 순간 그렇게 느꼈으니 말이다.
운전을 해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이승희에게 운전을 맡기고 나는 얌전히 조수석으로 들어가 짜져 있었다.
그리고 이승희가 감탄을 해 가면서 신이 나 소리를 지르는 동안 나는 이지도 대대장님과 은수형에게도 원하는 차를 물었다.
값을 떠나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차를 두 세 대 정도 정해서 알려달라고 하자 두 사람은 각자 자기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차를 알려주었다.
뜻이 확고하게 달라서 두 사람은 절대로 같은 차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이 의견을 모아서 한 대로 정해달라고 했으면 그 날 안에 두 사람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을 거다. 확실하다.
부대에서 하던대로 대대장님은 은수형한테 대가리 박으라고 명령을 했을지도 모르고.
두 사람은 나하고 아직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도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차를 찬양하고 상대가 고른 차를 폄하하느라고 설전을 벌였다.
그럼 안녕히 계시라고 말을 했지만 내 말에는 대꾸도 해 주지 않았고 아마 전화가 끊긴 것도 몰랐을 것이다.
접수가 된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승희에게 내가 사고 싶은 차들의 목록을 알려 주었고 그 과정을 맡아 처리해 주면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승희는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죠?”
이승희는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다.
“차를 받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이 중에 특별히 오래 걸리는 차도 있어요? 나는 기다리는 건 싫어하는데.”
내가 그렇게 묻자 이승희는 내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차량들을 인도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혹시 돈 많은 남자 코스프레를 해서 나를 꼬시려고 한 거면요. 그런 거면 성공한 것 같네요.”
이승희가 말했다.
“그래요? 먹혔어요?”
사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데 꼭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일일이 거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내 생각은 점점 부정적이 돼 갔다.
이것 저것 재고 따지고 잴 것 없이 그냥 눈빛 통하면 침대 위로 가서 잘 맞는지 확인해 보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재고 따지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너무나 많은 변수로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승희는 내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그 많은 차들을 한꺼번에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나하고 빨리 헤어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승희와 함께 식사를 했고, 편안한 곳에 가서 같이 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내가 그랬다고, 그리고 그게 통했다고 여러분도 막 따라하면 안 된다.
그럴 때는 함부로 용기를 내면 안 됩니다.
적어도 나처럼 생겼을 때 가능한 것 같음.
그리해서.
이승희는 나를 따라 나섰다.
내가 말하는대로 나를 따라나선다고 해서 이승희가 가볍거나 천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따라와 줘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나는 모텔이나 호텔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승희와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둘 중 한 사람의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희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처음 보는 남자를 따라서 그 사람의 집으로 가는 것과, 자기 집을 공개하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부담스러웠을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이승희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나쁜 놈이고 뒤끝이 있는 놈이고 버려지는 것을 못 참는 성격이라서 나중에 자기 집에 쫓아가서 깽판을 부리면 어쩌려고 그런 제안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내가 나중에 술 먹고 찾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이승희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5일 후에 이사가거든요."
"하!"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지만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승희와의 만남은 끝까지 유쾌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승희의 집은 보통 정도 되는 집이었다.
우리 가족이 위기를 겪기 전에 살았던 집 같은 그런 모습.
그래서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왜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호텔로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이승희가 물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하다가 결국 사실대로 실토했다.
일단 질리기도 했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만나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호텔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서.
언젠가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짤 하나를 봤는데 영상 속에서 여자 하나가 호텔 객실로 보이는 곳에서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냥 돌아다닌 거면 말을 안 하겠는데 그 여자는 무슨 희한한 정신병에라도 걸렸는지 모든 침구류와 가구류에 거기를 문지르면서 액을 묻혀댔다.
화장대 앞의 의자에 앉아서도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의자 모서리에 그곳을 문질렀다.
의자의 앉는 부분은 천으로 씌워져 있었다.
세탁도 따로 하지 않을 텐데.
에로틱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역겹고 더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우리 호텔에서도 저런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까봐 기겁을 했다.
아무리 잘 세탁한다고 하더라도 소파나 의자 같은 것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건데 그 여자는 그런 곳에도 그걸 문지르고 다녔다.
보고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익명성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짓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뻔뻔하게 체크 아웃을 하고 자리를 떠 버리는 것이다.
몰랐다고,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모른 척 해 버리면 될 줄 알고 말이다.
하긴. 그런 건 알아낼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일에는 사실 여자보다 더한 게 남자이긴 하다.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은 악마적인 창의력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앙증맞은 호스를 갖고 있다.
꽤 높은 벽도 더럽힐 수 있는 호스를.
이야기가 옆으로 흐르기는 했지만. 궤도에서 이탈한 김에 생각나는 것 하나만 더 말해보자면, 내가 호텔에 있을 때, 자꾸 욕실 샤워 호스에서 헤드가 분리된 채 발견된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저어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헤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분리가 된 채 샤워 호스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순진한 사람들은 그게 뭔지 이해가 안 됐나보다.
그게 후장 청소를 위한 거라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정말 모른 모양이었다.
관장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 종종 그렇게 그곳을 청소하는데, 애널 섹스에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대단한 미스테리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한 곳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잊을만하면 욕실에서 목 떨어진 샤워 호스가 나오니까 그게 기괴해 보였을지도.
애널 섹스가 게이 섹스는 아니다.
애널 섹스는 이성 간에도 많이 하니까.
아시겠지만 특히 나는 애널 섹스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가끔 애널 섹스를 게이 섹스의 다른 표현 정도로 생각하고 애널 섹스하는 사람들은 지옥행이 예약돼 있다느니 뭐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인간들을 보면 나는 그저 뜨끔할 뿐이고.
무슨 말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일단 몇 줄 위로 올라가서 읽어보고 수습을 해야겠다.
내가 요즘 정신이 많이 없기는 하다.
음. 이승희와 호텔로 가지 않고 이승희의 집으로 간 이유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해서 그게 목 떨어진 샤워 호스 얘기까지 왔다니.
아무튼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