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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스페이스 아이템
그러는 사이 정우 형과 형의 npc들의 대면식 준비는 착착 진행이 되었다.
그때만큼은 근도도 예전의 실력을 발휘해서 파티 플래너와 마스터 셰프로 변신했다.
근도에게서 얘기를 들은 카린은 자기가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했고 우리는 카리브 해가 보이는 섬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별장에 모이게 됐다.
은호 형은 카린에게 선수를 뺏기고 억울해하는 것 같더니. 그럼 내 여자 친구들을 최고의 모습으로 꾸미기 위한 비용은 자기가 전부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근도가 그 일을 자기가 하고 싶어서 미치려고 했다.
근도는 그걸 인형놀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근도가 그 일을 너무너무너무너무 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국 은호 형은 그 일을 근도에게 뺏겨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은호 형이 하려던 것은 돈을 내는 거였으니 그 일을 뺏겼다고는 할 수 없는 건가?
돈은 은호 형이 냈으니까 말이다.
근도는 내 여자 친구들과 몇 시간동안이나 통화를 하고 헤어 스타일에서부터 악세사리, 드레스의 종류와 구두, 거기에 같이 들 가방까지 전부 결정을 했다.
바다에서 놀 때 입을 수영복과 안에서 입을 평상복에 이르기까지.
근도의 손틈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근도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카린이 미리 준비해준 개인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카린의 제국을 목도했다.
동유럽식 고성의 구조로 현대식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그 건물 하나 하나가 대도시 중심의 랜드 마크가 될 수 있을 것만큼 화려하고 세련되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언제든지 요트를 타고 근처에 있는 또다른 섬으로 가서 놀 수도 있었는데 그 섬들도 전부 카린의 것이라고 했다.
수퍼 리치란 이런 거구나 하고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은호 형도 엄청나게 놀랐고 우리도 더 분발해야겠다고 말하면서 내 팔을 팔꿈치로 쿡쿡 찍었다.
압도적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곳을 소유하고 건물을 짓고 해변을 배타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전부 다 가능한지 궁금했지만 미국 대통령의 비호 아래에 있으면 많은 법규와 규제의 적용에서 예외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세청도 카린을 사사로이 조사할 수 없었다.
카린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 하나뿐이라면 카린에게 공격을 시도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도 있었겠지만 곳곳에 카린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든 조직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카린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자기 조직에 유리한 법률이 제정되도록 도와달라고 카린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카린은 빚을 지웠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원들을 찾아다니거나 여론을 움직이려고 하겠지만 유능한 입법 로비스트들은 카린에게 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률 조항 하나가 새로 생기고 없어지고 자구가 수정될 때마다 카린의 주머니는 두둑해졌다.
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미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터라 나 역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카린의 명성은 카린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졌고 그 결과 카린의 제국은 탄탄하게 성장해 갔던 것이다.
샤리프 섬이라고 카린이 새로 이름 지은 (공식적인 명칭은 다르지만 카린 제국의 사람들은 카린이 원하는대로 그곳을 샤리프 섬이라고 불렀다) 그 곳으로 가는 걸프슈트림에는 나와 연우, 핫걸과 수영, 그리고 수영과 많은 시간을 붙어 지내는 소이가 타고 있었다. 거기에 유나가 같이 탔다.
나는 유나가 아주 섬세한 아이니까 유나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주고 유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좋겠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나는 내 손목을 들어보이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긋는 제스츄어를 했다.
모두들 그걸 보고 유나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내 여자 친구들은 그 동작을 보고 난 이후 유나에게 잘해주겠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가장 성격 안 좋은 것 같은 핫 걸조차도 유나에게 잘 해 주었다.
유나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유나가 그동안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느꼈던 것은 사람들이 유나가 하는 말을 과대망상쯤으로 여기고 유나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유나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 속에서 유나는 더 이상 그렇게 주눅들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유나는 가끔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게 잘 진행되었다.
정우 형은 아마 지금쯤, 먼저 샤리프 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정우 형이 뭘 하고 있을지 잘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형도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자신의 npc들과 대면하는 자리인 것이다.
형은 내 여자 친구들이 형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이야기를 믿어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형에게 정말로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각각 따로 오게 됐다.
수영은 연우 때문에 시간을 같이 맞췄다가 핫 걸이 탄 걸 보고 한숨을 쉬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핫 걸은 까마득한 후배라고 수영을 부려먹었다.
그러면 소이가 가만있지 못하고 선생님 대신 몸을 일으켰고 핫 걸은 수영이 하게 놔두라고 했다.
그러나 소이가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매번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핫 걸도 ‘후배 길들이기’가 더 이상 재미있지 않게 된 듯했고 수영은 소이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소이는 수영이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마주 웃어주었다.
연우는 혼자서 멀찍이 앉아 책을 읽었다.
내가 연우에게 놀아달라고 하자 지금 읽는 책만 읽고 놀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연우에게서 책을 뺏어서 책이 몇 페이지짜리인지 보았다.
장장 540페이지짜리 책을, 그것만 읽고 놀아주겠다는 거다.
행간이나 자간도 촘촘한 책을.
착륙할 때까지 절대로 다 못 읽을 것 같은 책을, 그 책만 다 읽고 놀아주겠다고 말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재밌어?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열심히 봐?”
“책 내용보다도.”
연우가 말했다.
“그냥 그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요.”
“외적인 것?”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무시무시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연우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읽히지 않는 책은 버려진 아이와 같은 운명이래요, 라면서 연우가 책을 나한테 읽어줬던 것도 생각이 난다.
연우는 버려지는 아이를 구출하려고 그렇게 책을 읽어대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눈이 나빠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자기가 책을 처음부터 사서 보는 건 아니고 도서관에서 먼저 빌려보고 그 중에 좋았던 책을 서점에 가서 사는 식이었다.
그렇게 사는 책이 일주일이면 열 권이 넘을 것이다.
한 작가에게 꽂히면 그 작가의 책을 전부 구했다.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있으면 해외 직구라도 했다.
한 번 본 책은 그대로 방치되지 않고 수시로 연우의 손을 탔다.
연우는 자기가 특히 좋아했던 장면이나 에피소드를 다시 찾아서 읽는 걸 좋아했다.
연우는 그런 식으로 시간과 분위기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있었던 습관은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뭔가 대단하게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필요하겠다면서 가진 취미였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뜨끔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연우는 자기 책만큼이나, 빌려보는 책도 좋아했다.
빌린 책에는 그 전에 본 사람에 대해 추측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게 연우의 얘기였다.
지금 읽는 책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언뜻 보니 책 상태가 굉장히 더러웠다.
“이렇게 두꺼운 책에 날파리가 앉았는데, 그대로 덮었어요. 지독한 압사잖아요. 손으로 쫓기만 해도 됐을 테고 페이지를 그냥 넘기기만 해도 됐을 텐데 이 사람은 왜 꼭 여기에 얘를 끼워 죽였을까요?”
연우가 말했다.
세상에.
내가 살면서 수많은 독후 감상을 들었지만 이런 감상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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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앍하앍. 표지 선물 받았습니다.
류은립 작가님의 축복이 저에게 임하사...
하아아아. 개 감격!!!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