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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스페이스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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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프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형과 조용한 작별을 나누었다.
근도하고의 작별이 형에게는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별로 슬프지 않다. 이제 내가 돌아가면 거기에는 그 녀석들이 전부 있을 테니까. 근도도. 그리고 내 npc들도.”
형이 말했다.
“너한테 부담주고 싶지는 않지만 정우야.”
“네.”
“네가 잘 해야 내가 편해. 알지?”
형이 씨익 웃었다.
“혹시 형이 너한테 섭섭하게 한 게 있어도 그런 건 그냥 다 잊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알았냐? 괜히 막, 뛰어오는 기차에 달려든다거나 빌딩에서 떨어진다거나 그런 짓 하면 안 된다. 너는 신체 강화가 돼서 그런 걸로 바로 죽거나 장애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너라면 온갖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형이 진지하게 말했다.
“형을 엿먹이려고 제가 고생을 사서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
나를 뭘로 보는 거냐고 하고 싶었지만.
형은 난데.
흠.
나를 잘 아는 건 당연한 거구나.
그러니까 진작 잘 하지.
형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것 같았다.
“스페이스 아이템을 모으고 내 npc들을 잘 지켜줘. 내 npc들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네 여자들이니까 네가 알아서 잘 지켜. 알았냐?”
“네. 형.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내가 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헤드가 우호적으로 나와서 다행이다. 스페이스 아이템만 있으면 따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나도 형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한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잘 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믿어줘서 고마워요, 형."
형은 할 말을 다 마치고도 휴가 가기 전에 집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빠뜨린 게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 뭐. 이제는 생각이 안 난다. 너도 나한테 할 말 없는지 빨리 생각해 내. 물어볼 건 없는지."
"그러게요. 저도 생각나는 게 없네요."
"그래. 그럼.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옆에 많으니까 따로 걱정은 안 된다. 그럼 건강하게 잘 지내고."
형은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나는 형이 떠나는 게 아쉬웠지만 형이 돌아가야 채워질 또 하나의 세계가 오랫동안 형이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형이 꼭 가야 한다는 걸 이해했기에 나는 형을 의젓하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제부터는 스페이스 아이템을 모으는데 주력해야 했다.
다른 어떤 일보다도 거기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내가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은호 형에게 맡기고 나는 발을 뺐다.
은호 형은 내가 직접 일에 관여를 하지 않아도 정직하게 내 몫을 나눠 주었다.
일을 그만두면서 학교도 휴학을 할까 했는데 어딘가에는 적을 두고 있어야 할 거라는 게 준위의 말이었다.
스페이스 아이템을 모으려면 여자들과 만나야 하는데 그 여자들에게 뭘로 어필을 할 거냐는 거였다.
나는 내가 여자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준위에게 말해 주었다.
준위는, 그럼 강간이라도 해서 사정을 하기만 하면 스페이스 아이템이라는 걸 얻을 수 있는 거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를 변태보듯이 하면서 말이다.
내가 왜 강간을 하겠느냐고, 나는 오히려 더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나를 원하지 않는 여자라니.
그런 건 상상하기가 어려우니까.
(흠. 이 따가운 눈초리는 어디에서부터 쏟아지는 거지? 혹시 모니터 저편?)
일단 준위에게는 그렇게 말해 놓았지만 나는 준위의 말대로 학교에 적을 남겨 놓기로 했다.
그렇다고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다.
학점 관리에 막 힘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그건 그게 꼭 필요한 사람에게서 기회를 뺏는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스페이스 아이템을 모으기 위해 사이트에 다시 접속했을 때.
나는 내가 모으는 사이에 몇 가지 룰이 멋대로 바뀌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게 뭐야!’
[스페이스 아이템은 일반적으로 화장지 세 개로 구매할 수 있음. 단, 화장지 한 개(통상 화장지 한 개의 길이는 30m임)를 다 채우지 못하면 하나로 인정되지 않음. 총 90미터가 채워져야 화장지 하나로 인정됨.]
뭐가 이렇게 구질구질해졌냐.
헤드한테는 비서 같은 것도 없나?
아니면 친족을 갖다 꽂아놔서 비서가 아주 능력이 형편없는 건가?
무슨 규칙이 이렇게 조잡한지.
공지 문구를 한 번에 샤프하게 뽑아내질 못하고 여기 저기에 땜질을 한 것처럼 너덜너덜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나는 갑자기 왜 화장지 길이를 문제 삼는 건가 하면서 사이트를 이 잡듯이 뒤졌다.
별 다른 것은 없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사정을 하는데만 집중을 하면서 로맨스 따위를 개한테 줘 버린 게 헤드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라는 추측이 되었다.
'흐음. 이 아저씨 또. 또.'
내 머릿속에 그려진 헤드는 꽤나 관음증에 중독된 변태였다.
헤드는 나한테 몸캠 영상 사이트를 주고 그걸 통해서 여자들을 만나게 하고 그걸 매개로 내가 여자들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꽁냥질을 하는 걸 보면서 나름대로 대리만족을 해 오다가 내가 더 이상 몸캠 영상 사이트의 여자들에게 공을 들이지 않는 걸 보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모든 게 대충 아귀가 들어맞았다.
‘흐으음. 그런 거란 말이지.’
나는 일단 시험을 해 보기 위해서 핫걸을 불렀다.
핫걸은.
엄청나게 바쁜 몸이 되어 있었다.
키샤장은 갑자기 사라졌지만 키샤가 존립할 이유는 계속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키샤가, 조직의 수장이 없는 상태로 유지될 수 있는 기관은 아니었다.
정우 형은 내가 키샤장이 돼야 한다고 말했지만 바로 키샤장이 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이스 아이템을 모두 모은 후에.
그때에 키샤를 접수하라고 했다.
그 동안에는 핫 걸이 내 역할을 대신하기로 했다.
정우 형이 결정했던 일들은 이제 내가 결정을 하면 되었다.
키샤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었고 통제나 보고라는 형식적인 절차가 간단했다.
정우 형은 그동안에도 키샤의 일을 직접 대면해서 보고하는 대신 화상회의로 그런 절차를 해 왔기 때문에 정우 형이 떠난 후에 나도 그렇게만 하면 되었다.
그 일을 지금은 핫 걸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맡아야 할 일이라서 핫 걸은 종종 나를 불러서 나에게 일을 가르쳤다.
핫 걸이 나를 보러 왔을 때 핫 걸은 혀가 댓자나 나와 있었다.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면서 핫 걸은, 키샤장이었던 정우 형이 너무나 그립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불렀어요?"
핫 걸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별 건 아니고요. 몇 가지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뭐에 대해서요?"
그렇게 묻는다면.
음. 화장지의 길이?
지금 급한 것은 핫 걸을 통해서 몇 가지 실험을 해 보는 거였다.
나는 핫걸에게 사정을 하는 것으로 화장지나 스페이스 아이템이 생겨날지 알아보고 싶었다.
핫 걸은 내 분위기를 감지했다.
혹시 지금 자기랑 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는 표정으로 핫 걸이 나를 바라보았다.
"안 벗을 거예요?"
나는 옷을 벗으면서 물었다.
"하! 이제는 옷도 안 벗겨주고 알아서 벗으라는 거예요?"
"에이. 일일이 그런 것 가지고 불평하지 맙시다."
핫 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옷을 벗었다.
그렇게 바쁘다면서도 몸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핫 걸의 몸은 여전히 나에게 경탄의 대상이었다.
핫 걸은 말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태닝이라도 한 것처럼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는 물기를 머금고 있다가 톡톡, 그 방울들을 아래로 떨어 뜨렸다.
핫 걸은 그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핫 걸하고 그렇게 단 둘의 시간을 갖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들어오는 길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핫 걸은 그렇게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둘이서 한 건 오랜만이지만."
아오. 이 주둥이.
그런 말을 해서 뭘 얻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