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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스페이스 아이템
아크릴이 붙어있는 벽면에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 모양을 단정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거기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일들은 비서들이 하나봐요?”
내가 물었다.
“네?”
“인애씨라고 했나요?”
“네. 이인애예요.”
사람들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내가 들었을 거라는 걸 알았을 거다.
그러니 어떻게 알았냐는 둥, 하나마나한 소리는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이인애는 말을 하면서 내 옆으로 빠르게 걸어와 붙었다.
내 말이 잘 안 들린다는 듯이.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
“그런 일들은 비서가 하냐고요.”
“어떤, 일요?”
“내용 증명을 보내거나 서류를 보내고 사건 접수를 하고 그러는 거요.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내용증명을 안 보내서 난처한 일이 있었다고.”
“아아. 그건……. 별 거 아니예요. 심각한 것도 아니었고요.”
이인애는 난감한 듯이 말했다.
“그런 일을 소홀히 하면 정말 큰일이지 않습니까. 변호사가 아무리 유능하면 뭘 합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비서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미루고 게으름을 부려서 의뢰인이 순위에서 밀려버리기라도 하면. 일단 그렇게 돼 버리면 그걸 변호사가 무슨 힘으로 뒤집을 수가 있습니까?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아. 그건. 그게 그렇게 된 게 아니고요. 그건 별로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일도 아니었어요. 순위가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요…….”
이인애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변명을 했다.
“맡은 일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마음 먹는가에 따라서 일을 한 순간에 완전히 엉망으로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잘 배웠습니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예요.”
이인애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억울합니까?”
“네!”
“정말로요?”
“…….”
양심은 있는지, 재차 물었을 때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당히.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네요. 나는 내가 하는 일만 제대로 하면 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인애씨를 보면서 내가 아무리 잘 해도,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질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이인애의 고개는 점점 숙여졌고 이제는 아예 턱이 가슴에 붙을 것 같았다.
“나는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할 겁니다. 이건 내 문제만은 아니예요. 내 지인들 중에도 이 로펌에 사건을 의뢰한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데 모른 척 할 수는 없겠고요. 아마 이 로펌. 상당히 타격을 받을 겁니다. 로펌이 타격을 받는 걸로 안 끝나겠죠. 이렇게 견고했던 로펌이 흔들리면 사람들은 궁금해할 거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어 하겠죠. 그러면 이 로펌의 비서들이 어떻게 채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질 거고 결국 비서들이 어떤 배경을 등에 지고 들어오게 된 건지도 알려지겠죠. 그럼 자기 자식들을 로펌에 꽂아넣은 사람들도 비난을 받게 될 거고 그러면 도미노 효과가 나타나겠죠?”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이인애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던 얼굴이 나중에는 창백해졌다.
“그, 저, 그게, 정말로 그건, 그건 그냥 실수였어요. 그리고 그렇게 크게 될 문제도 아니었고요.”
“아뇨. 그건 얼마든지 크게 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설명하지 않으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정말 굉장히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요.”
“……. 죄송해요.”
이인애가 말했다.
프로는 아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다니.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이인애가 나를 보며 물었다.
겁 먹은 표정이다.
이런 여자를 겁먹게 하는 일이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누구의 앞에서도 이런 표정을 지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구미가 당겼다.
적당히 주무르기에 좋을 것 같았다.
경영 후계자 급이면 파장이 클 수도 있다.
그냥 적당히 딱 이 정도가 좋다.
별 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굉장히 대단한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윗 단계의 포식자가 나타나면 자존심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
지금까지 제대로 곤경에 처해본 적이 없는 사람.
“어떻게 할지는 방금 전에 다 말했는데요?”
내가 말했다.
“안돼요. 제발요.”
이인애가 내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안돼요. 정말요.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다음부터는 잘 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만 그냥 넘어가 주세요.”
“그냥 쉽게 넘어가면 다음에도 고쳐지지 않죠. 지금 구체적인 위험이 발생한 건 아니지만 추상적인 위험은 발생했죠. 그렇게 됐을 수도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이인애는 다시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기회를 얻고 싶습니까?”
내 말에 이인애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잡고 싶어요?”
이인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뭘 하면 되는데요?”
“벌을 받아야 되겠죠.”
“……. 어떻게요?”
나는 이인애를 바라보았다.
5초 정도.
이인애는 3초 정도 내 시선을 받아내다가 고개를 돌렸다.
“퇴근 후에 뭐 할 겁니까?”
“정해진 건 없어요.”
한 무더기의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인애가 말했다.
“퇴근 후에 같이 얘기를 해 보죠.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내가 말했다.
이인애는 기회를 얻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넘어왔어. 넘어왔어.
나는 헤드가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걸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진 척 개 폼을 다 잡고 이인애에게 말하고 선배의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선배가 내 손을 보았다.
“왜…….요?”
“왜요?”
“음……. 뭔데 그래요……?”
나는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고 선배를 바라보았다.
귀엽고 깜찍한 얼굴로.
선배는 지금 엄청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으니까 일단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아아아아……!!”
커피. 커피.
“아아?”
내가 하는 말은 다 따라할 모양이다.
“나는 죽어야 돼.”
그 말은 따라하지 않았다.
“선배.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요. 나도 늙나보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금방 까먹냐? 그냥 퉁해요. 선배도 나 커피 안 줬고 나도 선배한테 커피 안 줬으니까. 퉁!”
선배 손등을 통 치고서 도망치듯이 내뺐다.
“으이구, 저걸 그냥!! 그래서 그냥 갈 거야? 나도 나갈 건데 밥이나 사.”
“어우. 데이트 신청을 너무 쉽게 하신다. 그런 건 적어도 사흘 전에는 얘기해야 받아줄 수 있어요. 그래야 나올 때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를 하고 나오죠. 오늘 이 모습으로는 선배랑 절대 데이트 못하죠.”
선배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빨리 꺼지라고 말했다.
역시 박력넘쳐.
나를 이렇게 거칠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 뿐이야.
그러면서 나는 선배한테 다시 잡힐까봐 용건만 정리하고 후다다닥 나왔다.
할 일이 없었던 이인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내 차로 움직이죠. 그래도 되죠?”
이인애의 옆을 스치면서 물었다.
“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와요.”
“네.”
일단 술술 풀리는 것 같기는 한데.
수치플을 어느 정도로 해야 돼?
하드 SM은 또 어떻게 해야 되고?
이놈의 변태 헤드 때문에 내 헤드가 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