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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헤드의 도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지 오래 돼서 그런 거라면서 살이 막 썩어 있거나 그러면 진짜 헤드고 대가리고 이거 안 해!
나는 헤드의 아스트랄함을 한 두 번 겪어 본 게 아니라서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은 가 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얼마쯤을 갔을까.
내 눈 앞에 뭔가가 지나갔다.
말했지만 여기는 섬이다.
말. 내가 한 거 맞는 거지?
한 것 같긴 한데.
안 했다면 지금 말하면 되겠지.
여기는 섬이다.
잘 가꿔진 휴양지처럼 보이는 섬.
나름대로 정비도 잘 됐다.
아무 섬에나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가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섬은 꽤 넓고. 음. 넓었다.
그냥 넓기만 하고 뭐. 딱히 볼 게 없기는 하다.
나무들이 많지만 울창하다거나 우거졌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걸었을 때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타다다다다 거리면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몸을 숨길까 하고 있다가 내 눈 앞에 뜨는 상태창을 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거.
상태창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헤드 이 인간, 어디에서 진짜 이런 걸 이렇게 허접하게 배워와서는.
[낯선 이의 접근. 도망칠 필요 없슴. 위험하지 않음.]
아놔.
민망해 죽겠네.
내가 갑자기 쓰러지면 나는 수치사로 죽은 것이다.
이 소설이 갑자기 연중되면 주인공이 수치사로 갑자기 죽어서 더 이상 소설을 이어갈 수 없어서 그런 거라는 것만 알면 되는 거라고.
절대 작가가 무책임하거나 다른 작품이 출간 논의가 돼서 그 작품을 땜질하러 가야 돼서 그런 게 아니라는.
큼.
그렇게 그 소리는 점점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에 집중을 하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이 섬에 있는 여자들은 어쩌다가 이 섬에 오게 된 거고 왜 그런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건가.
이 섬에 있는 여자들도 헤드가 데려다 놓은 거겠지?
혹시 이 섬 자체가 그동안 헤드가 보여줬던 영상의 확장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잠시였고, 내 눈 앞에는 헐떡거리면서 달려오다 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서있었다.
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나 저 모습 딱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목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막상 내가 보지는 않았지만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나올 것 같은 모습이다.
여자가 어찌나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는지 그 소리가 근도에게도 들렸을 것 같았다.
나는 여자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
나라고 해도, 내가 그 여자의 상황이었다면 놀랐을 테니까.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고 그 손을 천천히 내 머리 뒤로 대면서 깍지를 꼈다.
나는 당신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액션이었다.
그 여자는 이제 나보다는 자기가 도망쳐 나온 뒤쪽의 위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상황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는 아마도 그것 때문에 나를 아군으로 여기고 싶은 생각이 컸을 것이다.
여자의 모습은 정말 한마디로 가관이다.
왠지 이 모습에서 헤드의 변태적인 판타지가 은근히 읽힐 것 같단 말이지.
나는 헤드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침대 위에 엎드려서 로맨스판타지 소설을 보면서 으흐흐흐,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턱을 괴고 두 다리를 교차로 흔들어대는 오타쿠 아저씨?
그렇다면 진짜 최악인데?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도 않다.
그 남자 진짜 변태인 거야.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고증 자료로 사용될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 드레스가 거친 길을 뛰어오면서 마구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왠지 정복하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일으키는, 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가늘게 빛나는 목.
과장을 별로 할 필요 없이 주먹만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가 배열돼 있는 귀여운 이목구비.
그 한없이 투명한 것 같은 푸른 눈에는 두려움이 잔뜩 깔려 있었다.
드레스의 가슴 선은 적당히 내려와 있고 뛰다가 나무에 걸렸는데 그걸 모르고 여주인공이 그냥 마구 달렸다는 설정인 건지 윗부분이 마구잡이로 찢어져서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고.
헤드의 연출능력이란.
그때 또 뜬금없이 뜨는 상태창.
[길이: 26센티. 강직도: ]
아니. 안 봐. 안 봐, 이 변태야!
왜 남의 길이에 강직도를!
제발 헤드한테 바쁜 일이 생기기를.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내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뒤를 보면서 나한테 다가왔다.
그리고 대담하게 내 팔에 손을 얹었다.
“배가 가라앉아서 사람들이 죽고 저만 간신히 여기에 떠내려 온 것 같아요. 섬을 돌아다녀 봤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짐승인지 뭔지가 숲 속에 숨어서 저를 노리는 것 같아요.”
아. 그렇단 말이지.
헤드도 참.
독창성도 없어.
그래도 무난하다.
“바이러스에는 아직 감염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다정한 손은 벌써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얼굴의 상처를 확인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듯 턱에 걸쳤다.
여자는 그곳에서의 피로가 누적된 듯 저항이 없다.
캬.
헤드 이거 마음에 들려고 하네?
“섬에 먹을 건 있었습니까?”
“아뇨.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불쌍하게 말하는 여자.
그래서 그렇게 배가 쏙 들어간 거였어?
음.
“옷이 젖은 채로 도망쳐서 그런지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네?”
그런 거라고.
내가 당신 가슴을 만지고 있는 이유는 체온이 떨어진 걸 감지하기 위해서인 거지.
이쪽 체온은?
이쪽은 괜찮나?
너무 대놓고 주물렀나?
“얼굴이 혈색이 안 좋아요. 이렇게 답답한 옷으로 몸을 압박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영양공급도 잘 안 됐을 텐데.”
반쯤 드러난 가슴을 주무르다보니 천조가리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내려보면 유두가 보일 것 같다는 말씀.
“아.”
여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그렇다고 그 뭐가 뭐일까 하는 것 같은 아리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큰 저항은 없고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두기는 했다.
그래.
내가 안 볼 테니까 내 얼굴을 마음껏 보고 감탄을 하도록.
나는 꼼꼼하게 묶여진 끈을 풀었다.
곱게 나비 모양으로 묶인 끈이, 내가 한쪽을 잡아 당기자 스르르르 풀려버렸다.
개봉박두.
그때 홀연히 뜨는 상태창.
[공격력: 1]
그게 어떤 느낌인가 하면.
아, 미안. 내가 아까 이건 말 안 했지? 하고 뒤늦게 와서 주섬주섬 뭘 꺼내놓고 가는 것 같은 느낌?
공격력?
여기에서 공격력이 필요할 게 뭐가 있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나무 사이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3미터는 족히 돼 보임직한 멧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냥 바이러스에 감염된 여자를 만나서 스펌으로 치료해 주고 화장지만 얻으면 되는 거였는데 뭐가 또 이렇게 스펙타클하게 꼬이는 건지.
하긴. 헤드가 이렇게 판을 키워놓고 그냥 그런 것만 구경하고 끝내기에는 아쉬웠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나는 여자를 안아들고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나는 여자를 안은 채 내 모습을 숨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멍청한 짓이기는 하다.
나 혼자만 도망치는 거였다면 그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를 안은 채로 내 몸만 숨긴다고 그게 뭐가 되겠는가.
멧돼지를 좀 당황시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을 했을 것이다.
멧돼지 눈 앞에 두 사람이 있다가 한 남자가 여자를 안아드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부터는 그 여자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곧 내가 무슨 뻘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여자의 몸을 같이 숨기지 못하는 한 그 짓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여자를 내려놓고 옆에 있던 나무에서 굵은 가지 하나를 끊어냈다.
끝이 날카롭게 잘려나와 그걸로 멧돼지를 노리면 죽이는 것도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좋아. 덤벼!”
공격력 1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동안 나한테 익숙해져 왔던 것들이 있으니까 그건 그대로 유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