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뭔지 몰라도 오랫동안 골치 아팠던 문제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몸도 마음도 홀가분했다.
밤새 편히 잘 잔 모양이다.
주위가 밝았다. 조명 때문이 아니었다.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유리창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전체를 롤스크린이 가리고 있어 밖은 보이지 않았으나 본래 갈색이었을 천이 거의 황금색으로 보일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너무 오래 잤나 싶었다. 유리로 만든 뭔가가 깨지는 시끄러운 소리만 아니었으면 더 잤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뭐가 깨진 걸까. 바로 옆이었던 것 같은데.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양손과 양발에서 저항을 느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고서야 손목과 발목이 침대에 묶인 것을 알게 되었다.
네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 번째 의문은 내 사지를 묶은 줄이 너무 가늘다는 점이었다. 수놓는 데나 쓸 것 같은 굵기의 붉은 실이었다. 그것을 단 한 번 돌려서 묶었을 뿐이다. 두 번째 의문은 누가 나를 묶었나 하는 건데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내 주변에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생각하면서 세 번째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뭐지?’
아니 나는 누구지? 라고 물어야 할까. 내 주변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 반응해서 이 질문에 있어 실과 바늘 같은 의문 하나가 더 생겼다. 여기는 어디지?
마지막 의문은 그래도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충 해소할 수 있었다.
침대가 있는 곳은 세 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그 끝이 철제 난간으로 막혀 있었다. 벽을 타고 복도 같은 공간이 쭉 이어졌고 그 끝에 이쪽과 비슷한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침대 발치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래층의 길이가 꽤 길었는지 누운 채로도 방바닥 끝이 살짝 보였다. 위층과 마찬가지로 밝은 원목무늬 타일이 깔려 있었다. 복도 맞은편은 전면이 유리창이지만 무늬 없는 갈색 롤스크린 때문에 마치 벽처럼 보였다.
이 길쭉한 직사각형 내부며 벽 한 면의 전체가 유리창인 점이나 복층 구조,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여기는 원룸형 오피스텔일 가능성이 높다.
가만. 원룸형 오피스텔이니 복층구조니 하는 걸 알고 있다니 자기가 누군지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다른 부분의 지식은 잊어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안심이 됐다.
그렇다고 이 상황까지 안심되는 건 아니다. 일단 안전을 확보하고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중인지 알아내야 했다. 손을 묶은 실이 가늘어서 조금 힘을 주면 끊어지겠지 싶었다. 손목을 당겼으나 철제 헤드가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릴 뿐이다.
수실 주제에 뭐 이리 강도가 높단 말인가. 짜증을 내며 손목을 확 당겼다. 다음 순간 실 끝에 묶여 있던 침대 헤드가 통째로 날아들었다. 상체를 납작 엎드려 피했으나 손목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헤드는 허공을 한 번 친 다음 내 무릎 위에 떨어졌다.
설마 프레임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던 거겠지. 싸구려 침대인가.
나는 한 손으로 헤드를 잡고 다른 손을 당겨 줄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묶인 부분의 철제 기둥이 우그러들 뿐 몇 번을 당겨도 줄은 말짱했다. 이건 실이 아니라 철사인가? 아니, 힘을 주지 않을 때 늘어지는 모양이나 겉보기나 광택이나 어떻게 봐도 그냥 실인데. 그러나 아무리 당겨도, 이 사이에 물고 끊어내려고 해봐도 실은 멀쩡했다.
이쯤이면 오기다. 실이 끊어지든 손목이 끊어지든 결판을 내겠다며 있는 힘껏 손목을 당겼다.
팅 소리를 내며 줄이 끊어졌……아니네. 줄이 아니라 헤드의 기둥이 끊어졌다. 실에 묶인 내 손목을 확인했다. 붉은 자국조차 생기지 않고 멀쩡했다. 여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헤드의 철제 기둥이 의외로 약하다는 거겠지.
……말이 되나?
휘어진 채로 두 토막이 난 헤드의 기둥을 확인했다. 5mm두께에 지름 3cm의 파이프다. 재질은 아무리 봐도 스테인리스강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을 새로 내리면 내 손목과 거기 묶인 붉은 실은 스테인리스보다 강도가 높다. 추가로 팔 힘은 안심될 만큼 세다.
나는 실을 힘껏 당겨서 스테인리스를 자른다는 무식한 방법으로 사지의 자유를 되찾았다. 묶은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신기한 소재의 실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내가 이만큼 힘이 셀 줄은 몰랐나 보다. 나도 몰랐지만 알아서 다행이다.
손발에 실이 묶여 나폴 나폴 따라다니는 게 귀찮았으나 두세 번 감아 정리하면 될 뿐이다. 침대에서 내려가려다가 바닥에 깨진 유리파편이 널린 것을 보았다.
산산이 부서져서 본래의 모습을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원래는 침대 머리맡의 탁자에 놓여있었을지 모른다. 잠결에 뒤척이던 내 손이 닿아서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유리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가서 대충 둘러보자 어디선가 홀아비 냄새가 풀풀 날 것 같은 삭막하고 궁색한 정경이었다.
가구는 티브이 앞의 소파 하나와 컴퓨터 책상 하나가 전부. 장식이라 볼만한 건 눈 씻고 찾아도 없고 사진도 없고 동거인의 흔적도 없다. 내게 적대적일지도 모르는 이 방 주인의 인생에 갑자기 동정심이 생긴다. 아니 이건 동병상련인가.
설마.
문득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내가 이런 방에 사는 사람과 같은 종류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외적 가치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실로 들어가 불을 켜자 큰 거울에 뽀얀 조명의 은혜로 포샵 처리 된 20대 중반의 동양인 남자가 보였다. 음. 외모가 취향은 아닌 것 같다.
잠이 덜 깬 것 같이 보이는 멍한 표정도 마음에 안 들고,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부스스한 머리도 별로고, 입고 있는 옷이 구깃구깃한 회색 셔츠인 것도 싫고, 얼핏 듬직한 데 없는 체격도 불만스럽다. 다행히 키는 큰 편이구나. 면상도 표정만 좀 펴면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같고.
자신의 모습을 남의 것 보듯 뜯어보다 문득 생각했다.
여기에 욕실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곧장 왔지? 어두운 욕실에서 어떻게 스위치가 있는 장소를 알고 바로 불을 켰지? 불을 켜기도 전에 어떻게 정면에 거울이 향하도록 서있을 수 있었지?
제기랄.
낭패감이 차올랐다.
이런 결과가 가능한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이 장소에 매우 익숙한 것이다. 내 집이거나 내 집처럼 느껴질 만큼 여기에서 오래 지냈다.
아니. 그렇다고 확인도 안 하고 믿어버릴 필요는 없다.
욕실을 나와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장 안을 뒤졌다. 온통 남자 옷뿐이고, 대체로 무난한 디자인 무난한 색상의 편한 옷들이 걸려 있었다. 셔츠를 한 벌 꺼내 갈아입자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옷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깨선도 팔 길이도 핏도 적당하다.
좋아.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좀 털털하고 욕심 없게 살았나보지. 사람이 너무 겉모습에만 치중하고 내적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법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여기가 내 집이라고 쳐도 도대체 어느 도시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현관에 놓인 신발을 꿰어 신자 가죽 몸체가 발에 익숙하니 착 붙는다. 오랫동안 신은 내 신발이 확실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정면과 오른쪽은 벽이고 엘리베이터는 없다. 왼쪽에 계단이 있었다. 위아래로 이어진 것을 보니 위층도 있나보다. 계단 쪽 벽에 길쭉하니 창이 있었지만 불투명하게 코팅되어서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가자 바깥과 통하는 문이 나올 거라는 생각과 달리 다시 넓은 실내 공간이 나타났다.
15평 정도? 사방이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였다. 좌우 벽은 막혀 있고 계단 정면에 셔터가 내려진 커다란 문과 블라인드로 감춰진 창문이 하나 있었다. 이따금 찻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문 밖이 도로인 모양이다.
위층의 방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꽁꽁 가려져 있었다. 햇빛이 들어올 만한 곳은 모두 단속해 놓은 것이다.
혹시 나는 적혈구조혈 프로토포르피리아, 일명 뱀파이어 환자인가? 잠깐 의심했지만 그런 것 치고 아까 거울로 본 피부 상태나 혈색이나 모두 정상적으로 건강했었다. 아니, 실은 스테인리스를 뚝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건강하잖아.
그나저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이 넓은 공간은 심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기둥 하나 없이 트인 넓은 바닥이 이렇게 난장판이 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벽을 따라 수납용 철제 선반이 쭉 이어졌고 거기에는 중고품이 분명한 전자제품들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커다란 작업용 선반이 있어 그 위에도 갖가지 공구들이 뒹굴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그야 말로 온갖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책상과 의자 같은 가구로부터 세발자전거나 농구공 같은 놀이 기구에 컴퓨터 모니터나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은 물론 악기, 박제, 항아리, 라켓, 인형, 나무상자 같은 도무지 같은 항목으로 묶어놓기 어려운 것들이 쓰레기와 함께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쓰레기들 사이에서 삽살개 한 마리가 신문지를 덮고 도로롱 잠들어 있다가 내 발소리를 듣자 한쪽 귀를 쫑긋 세웠다.
한 번 더 낭패를 느꼈다.
내 집에서 계단이 바로 이리 이어진 것을 보면 여기 역시 내 영역인 것 같은데 난 도대체 뭐하고 사는 인간이었단 말인가. 쓰레기 수집?
자, 한 번 정리를 해보자. 나는 혼자지만 살 곳은 있고 피부의 내구가 높으며 팔 힘도 센데 집 아래층에 쓰레기장을 운영하는 20대 중반의 남자다. 일단은.
아, 그리고 개도 한 마리 키우는 것 같다. 삽살개가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갈색과 황색이 뒤섞인 길고 얼룩덜룩한 털이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부스스한 몰골을 보니 내 개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녀석은 다가오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 다녔다. 밥 달라는 건가? 미안하지만 사료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 못한다. 이 난장판 안에서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
[명! 명! 명!]
삽살개가 나를 보고 짖었다. 소리 참 특이하다. 그런데 짖어도 소용없다, 이 녀석아. 정말 기억이 안 난다니까.
녀석은 내 주변을 다섯 바퀴쯤 돌더니 갑자기 쓰레기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일어나! 일어나! 명이 깨어났어! 다들 일어나!]
개가 사람처럼 말할 수 없다고 믿는 내 상식과 이성에 맹세코, 그것은 열 살 남짓의 소년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쓰레기장에서는 돈 주고도 못 볼 기현상이 일어났다. 쓰레기들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듯이, 의자가 뒤뚱뒤뚱 기울어지며 다가오고 세발자전거가 혼자서 도로록 구르고 농구공이 통통 튀어 오르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이것은 단지 귀신 쫓아다닌다는 케이블 방송이나 심령사진 같은 걸 싣는 잡지책 수준의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뒤뚱뒤뚱 다가오던 의자는 어느새 등받이가 쑥 자라고 다리가 길어지더니 점잖게 빼입은 중년의 신사로 변했다. 세발자전거는 빙글빙글 돌더니 멜빵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대여섯 살 난 소년으로 변하고, 통 튀어 올라갈 때 농구공이었던 게 내려올 때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귀여운 소녀로 변해서 소리도 경쾌하게 착지했다.
쓰레기들이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수많은 쓰레기들이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으로 변한다. 나이도 성별도 차림도 다 다르다. 같은 점은 단 하나. 모두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면서 인사를 건넨다는 점 뿐.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던 삽살개가 마지막으로 변신했다. 목소리와 똑같은 열 살 어림의 소년이었다. 털과 같이 갈색과 황색이 섞인 머리를 산발한 남자아이가 되어서 달려오더니 팔짝 뛰어 내 허리에 매달렸다. 외견상 30kg쯤 되어 보이지만 매달렸을 때 느낀 무게는 5kg정도.
“명! 명!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오래 잤어! 응?”
삽살개였던 소년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본능적인 사랑스러움이 개털 냄새와 함께 풍겼다.
자, 이쯤에서 아까의 정리를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혼자지만 살 곳은 있고 피부의 내구가 높으며 팔 힘도 센데 집 아래층에 쓰레기장을 운영하고 환각증상을 보이는 20대 중반의 남자다.
내가 키우는 것이 개가 맞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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