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2화 (2/218)

물레(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특별하고 위급한 순간이 닥치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보다 본성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이다.

눈앞에서 잡동사니들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비상식적인 위기 상황이 되고 보자, 나는 자기 이름도 모르는 주제에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서나 알 수 있을 자신의 본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인 뻔뻔함.

“내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나? 다들 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도 내가 이런 목소리를 낼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하고 있던 거겠지. 울림이 좋은 중음역대의 음정에 완벽한 표준 억양이었다. 태연히 묻는 나에게 삽살개 소년이 파닥파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석 달이나 잤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내가 막 발도 꽉 물고 팔도 꽉 물었는데 안 일어나잖아. 그래서 다들 불러왔어. 우리가 밤마다 명 옆에서 막 노래 불러주고 춤도 추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 먹었다?”

그러니까 자는 사람 괴롭히면서 옆에서 잘 먹고 잘 놀았다는 말이냐. 그것도 석 달 동안….

“그랬구나. 고맙다.”

내심과 관계없이 강아지에게 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삽살개 소년이 기쁜 얼굴을 하고서 목을 움츠렸다. 나는 잡동사니 사람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건넸다. 와줘서 고맙다든가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든가 말하고 있는 내 얼굴이 흠잡을 데 없이 다정하게 웃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직 아무 기억도 안 나는 거 맞다. 심지어 저것들이 귀신인지 환상인지 혹은 멀쩡한 사람들인데 내 눈에만 잡동사니로 보였던 건지도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내 상황을 정확히 알기 전에 약점을 노출할 수는 없다. 나는 최대한 말을 조심하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쉴 것을 권했다.

기억상실인데다 환각증상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뻔뻔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생각한다. 이것이 정신착란으로 인한 환상이라면 정상적인 사람의 눈에 나는 지금 쓰레기장에서 귀신과 대화하는 음침한 남자로 보이겠지.

불과 십 분 전쯤에 자신이 기억상실인 채로 침대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냉정했다.

잡동사니 사람들은 내게 다행이라든가 나중에 놀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나 둘 떠나갔다. 그들이 모두 가고 나자 쓰레기장 같던 곳이 사실은 대리석 타일 깔린 깨끗한 바닥이라는 게 드러났다. 쓰레기는 삽살개가 덮고 있던 신문지 한 장 뿐이었다.

다들 가는데 삽살개 소년만 안 가는 걸 보니 역시 내가 기르는 개가 맞는 것 같다. 삽살개 소년은 입을 벌리고 혀를 귀엽게 내밀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망울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양이 주인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밥 달라는 건가? 놀아달라는 건가?

시험 삼아 한 손을 내밀자 곧장 맞은편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척 얹었다. 그리고는 “칭찬해줘! 칭찬해줘! 칭찬해줘!”라는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런 단순한 명령을 수행하는 정도로 칭찬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처럼 말도 하는 것과 달리 지능은 역시 개와 비슷한 건가. 이 녀석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자 삽살개 소년은 몸을 흔들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내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세 바퀴쯤에서 소년의 몸은 다시 삽살개로 돌아갔다. 조그만 개의 캉캉 짖어대는 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소년일 때도 개일 때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감이 강해서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건물 밖으로 나가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잡동사니 손님들이 나갈 때마다 열렸다 닫히며 바깥 풍경을 잠깐씩 보여줬던 나무문 앞에 서서, 나는 도금된 스테인리스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움찔 멈추었다.

뭔가 불안했다.

기억이 없어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불안감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뭐지? 왜 열면 안 되는 거지?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알 턱이 없다.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이유는 고사하고 나는 지금 세 살짜리도 아는 자기 나이조차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어쩌면 기억도 안 나는 그 이유라는 건 그냥 착각이 아닐까?

하지만 이 불안감이 막연하고 근거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처음 정신이 든 방에서부터 여기까지는 일관된 하나의 규칙이 있었다.

바로 외부와의 시각적 차단.

안에서 밖을 볼 수 없으며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없다.

모든 창은 가려졌거나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여기만 해도 안이 어두컴컴할 정도다. 안에서 밖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인지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강박적일 정도로 차단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왜 그랬을까?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안의 정경이 꽁꽁 감춰야 할 정도로 이상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아까 그 잡동사니가 사람으로 변하던 광경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이는 거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설마 그것 때문일까? 기억을 잃기 전에도 나는 그런 광경을 자주 보았던 걸까? 그래서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모든 창을 가려둔 걸까?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나는 밖에서도 그런 광경들을 봐온 걸지도 모른다. 물건이나 동물이 사람으로 변해서 말을 걸어오면 나는 거기에 반응했을 테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봇대나 간판과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게 된 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것 같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이상자로 여겨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밖으로 나가서 지금의 가정을 확인한 다음 절망하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밖에서 아까의 잡동사니 사람 중 하나를 만나게 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난감하다.

그렇다고 내가 미친놈 취급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채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다.

어쩌지?

문손잡이를 잡고 고민하는 내게 삽살개가 다가왔다. 녀석이 내 발치에 앉더니 뭐 하냐는 표정으로 빤히 올려다보았다. “혹시 사람들이 나더러 미쳤다고 하지 않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기르는 개에게 내 평판을 묻는 거야말로 미친 짓이란 생각에 꿀꺽 삼키기는 했다.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삽살개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녀석이 낑낑대며 앞발로 문을 긁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지? 용변이라도 마려운 거냐. 지금 네 주인님은 기억상실에 정신이상 의심이라는 일생의 위기를 겪고 있는데 넌 생리적 용무가 더 중요하다는 게 당연하잖아. 얘는 개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비록 잠시나마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어도 이 녀석은 말 못하는 짐승일 뿐이다. 훨씬 진화한 생물체인 내가 배려하고 보살펴 주는 게 당연하겠지. 일단은 밖으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에 문손잡이에 힘을 싣는 순간이었다. 삽살개가 예고도 없이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펑 하고 변해버렸다.

“유하! 유하! 유하 누나!”

변했을 뿐 아니라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노래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누나 온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한 건 취소다.

그나저나 유하 누나라는 건 또 뭐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옆집 개라도 지나가는 건가. 그리고 내 생각에 답하듯이 문밖에서 뭔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람의 발소리? 신발의 굽이 보도블록에 다각다각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어서 손잡이가 달칵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들린 순간 나는 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멀리인가 하면 거의 맞은편 벽까지.

문으로부터 10m 가까운 거리를, 그것도 중간에 놓인 큰 작업 선반을 뛰어넘어 어떻게 순식간에 이동했는가는 둘째 치고 문이 열렸을 때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빛을 두려워한다.

문이 열리며 바깥의 빛이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오는 바로 그 찰나에 깨달은 것이다. 분명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 빛이 내게 닿아서는 안 된다는, 닿는 순간 두려운 일이 벌어진다는 확신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확신이다.

나는 혹시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보에 당황하고 있는 동안, 열린 문으로 젊은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재빨리 문을 닫았다. 잠시 문이 열려서 환해졌던 내부가 금세 어두컴컴해졌다. 문이 열렸을 때도 역광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본 나는 눈이 어둠에 적응하도록 기다렸다.

그런데 제대로 못 봤으면서도 젊은 여자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이것은 20대 남성의 본능적인 희망사항일까 아니면 욕실을 찾아갔을 때처럼 나도 모르게 알고 있던 것을 떠올린 걸까. 궁금해 하는 가운데 내 눈은 천천히 시력을 되찾았다. 미광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나는 뭔가 두려운 것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었다가 그보다 강한 호기심에 밀렸다.

생각대로 젊은 여자였다. 어둑한 속에서도 하얗게 돋보이는 피부나 날렵한 몸피가 그려놓은 것처럼 우아했다.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 눈썹이며 홑눈꺼풀의 얇은 눈매, 물감이 번진 것 같은 붉은 입술이 정말로 그림에서 금세 빠져나온 것 같았다.

멈칫하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상아색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녹색 카디건을 걸친 걸 보니 계절은 봄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녀가 점점 다가왔다. ‘누구일까’나 ‘나와 어떤 관계일까’보다 먼저 든 생각이 있었다.

- 이 여자를 믿어도 될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욕실을 쉽게 찾은 것이나 자세히 보기도 전에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이 의심은 내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해진 정보였을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일까.

“일어나셨네요. 식사준비를 할게요.”

여자가 내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내가 석 달 만에 깨어났다는 삽살개 소년의 말이 거짓인가 싶을 정도로 태연하다. 아니지. 사실 따지자면 석 달 동안 자고 있었다는 소리가 거짓말일 게 당연하잖아. 어째서 그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믿어버린 거지. 아무래도 나는 별로 똑똑한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는 천으로 만든 장바구니가 묵직하니 불룩한 모양으로 들려있었다. 반찬거리라도 사서 오는 모양이다.

누굴까?

1.아내 2.여자친구 3.메이드. 설마 4.잡동사니 인간 중 하나거나 5.환상인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민 손에 여자의 손목이 잡혔다. 부스스하니 솜털이 오른 카디건 소매의 푹신한 감촉이 손안에 가득 찼다.

이 감각은 확실히 현실이다. 삽살개 소년이 허리에 매달렸을 때 5kg 정도의 중량을 느꼈던 걸 생각해 보면 눈으로 보는 것과 상관없이 직접 닿아서 느끼는 감각은 정상이었다. 그러니 4번과 5번은 아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잡동사니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속이고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할까? 아니면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에 한 번 더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정말로 그녀를 믿어도 돼?

그 목소리에 거스러미 일듯 여자에 대한 거부감이 일었다.

여자가 내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까만 속눈썹을 밀어 올리며 나를 쳐다본다. 비현실적으로 티 하나 없이 하얀 얼굴에 질책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잡아도 되는 사이는 아닌 모양이다. 1번과 2번도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3번뿐인가.

내가 손목을 놓자 그녀는 장바구니를 고쳐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한 뒷모습에 말을 걸 타이밍조차 놓쳤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며 그녀가 한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버렸다.

식사 메뉴라도 알려주듯이 그녀는 태연히 말한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김해명(金孩明). 이 건물의 주인이고 함께 사는 가족은 없어요. 다른 궁금한 것은 식사 후에 물으세요. 요리할 때 방해받기는 싫으니까요.”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