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남(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다. 흐릿하니 밝은 방안에서 반쯤 졸린 채로 앉아있으면 유하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준비한 아침을 먹고 나면 할 일이 없다. 작업장으로 슬금슬금 내려가면 창고 쪽에서 웃고 떠들며 노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문을 열어보면 창고는 감쪽같이 고요한 채로, 그 많은 도깨비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물론 끈덕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둘둘 말아놓은 카펫이 재채기를 한다거나 깜짝 놀란 종이 나비가 포르르 날아가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물건인체 꼼짝 않고 있다가 내가 창고를 나가 문을 닫자마자 다시 소리도 요란하게 떠들고 놀았다.
아무래도 나는 창고의 도깨비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최근에 온 물레 도깨비도 동족들과 노는 데 재미를 붙였는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명색이 이 집 주인은 나인데?
이런 식으로 사흘쯤 지나니 내 방의 컴퓨터와 창고 문 앞만 왔다 갔다 하는 일과에 아주 지쳐버려서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제발 할 일을 좀 만들어달라고 빌게 되었다.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기원했지만 의외로 효험이 있었다. 다음날 유하에게 ‘은호당의 백사장님’이 맡긴 물건이라며 은제식기 하나를 받은 것이다.
말하는 품이 잘 아는 것 같아 물으니 이따금 거래하는 사이란다.
“충장로에서 골동품점을 하셔요. 가끔 와서 물건을 맡기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물건을 사가기도 하고요.”
우리 물건? 우리가 뭘 팔아?
“창고 안의 물건이요. 물론 물건 쪽에서 동의할 경우에만 파는 거지만요.”
아…그렇구나. 내 물건 내가 파는데 물건님께 여쭤보고 허락하시면 파는 거로구나.
나 요새 따돌림 당하고 있어서 삐뚤어진 것 같다. 왕따의 해악이란 이런 거란 말이다. 건전하고 건강하고 건실하던 성인남성이 사흘 만에 쪼잔한 남자가 되어버렸잖아.
백사장이 맡겼다는 은제식기는 쟁반이었다. 타원형에 크기는 A4용지 정도? 양쪽에 손잡이가 붙었고 가장자리에는 포도와 곡물 모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 잘 닦여 하얗게 반짝거리는 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다만 쟁반 정중앙이 망치에 한 대 맞은 것처럼 푹 들어가 찌그러져서 문제일 뿐이지.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것 같아요. 은호당에서 사기 전까지 주인이 여섯 번쯤 바뀌었다는데 추적이 가능한 게 그 정도니까 실제로는 더 많을 수도 있대요. 가는 곳마다 물건을 깨뜨리거나 밤중에 소란을 부렸다고 해요.”
아마도 백사장이란 사람이 알려준 모양이다. 골동품점을 운영한다더니 도깨비 붙은 물건을 싸게 사서 문제가 해결되면 비싼 값에 팔고 그러나? 그렇담 수리비를 비싸게 받아도 되겠는걸.
“이 움푹 들어간 부분도 고쳐야 하는 거야?”
쟁반의 가운데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한다면 이건 유하의 몫일까? 아냐. 이거 은세공품인데 설마 금속 공예 뭐 그런 것까지 할 수 있을 리는 없…
“수리해봤지만 잠시 후에 다시 이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해명씨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고칠 수 없을 것 같아요.”
…는 게 아니구나. 이 여자는 못하는 게 없어. 정체가 뭐야? 혹시 구미호라든가 학이 변한 거라든가 우렁 각시라든가…
유하가 쟁반을 넘기고 총총 가버리자 나는 넓은 작업장에 도깨비 붙은 쟁반과 단둘이 남겨졌다. 아직 예전 기억 같은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도깨비야 한 번 상대해 본 적도 있고.
느긋이 전등을 모두 꺼버렸다. 그리고 캄캄해진 작업장 안에서 이번에는 어떤 도깨비가 튀어 나오려나 궁금해 했다.
이번에도 도깨비는 쉽게 나와 주지 않았다. 물레 때는 체감상 길게 느껴졌어도 5분 안팎이었을 텐데 꽤 지루해하며 10분 넘게 기다린 것 같다. 얘가 사회성이 부족한가. 아니면 나랑 밀당을 하자는 건가.
20분쯤 지나자 슬슬 짜증이 나는 와중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이 은제식기는 영국에서 만들었단 말이지. 한국에 온지 오래 되었다지만 영국산에 도깨비가 붙었으면 이 녀석은 우리나라 말을 할까 영어를 할까.
“아저씨, 여자 친구 없죠?”
정답은 한국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열두어 살쯤 됐음직한 사내아이 하나가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작업 선반 위의 쟁반만 노려보고 있었으니.
나타난 녀석은 어디로 봐도 전형적으로 버릇없는 초딩 꼬마의 모습을 한 도깨비였다. 모든 동물의 어린 것들은 보통 귀여운 법인데 인간계통은 예외다. 일단 혼자서 책 읽을 수 있는 나이로 성장하고 나면 귀여움이나 사랑스러움은 분실한 다음 도로 찾아가는 일 따위 없는 것 같다.
가늘게 뜬 눈하며 부루퉁하게 내민 입이며 사회에 불만 있는 표정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게 영락없이 그랬다.
녀석의 버릇없는 첫인사를 나는 어른스러운 아량으로 받아넘겼다.
“그런 것 같네. 어떻게 알았냐?”
“머리가 구려서요. 옷도 구리고.”
뭐, 임마?
나도 내 외모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너 같은 초딩 도깨비에게 구리다는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네요. 너 크면 나보다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멋지고 매력적이고 섹시한 남자가 될 것 같지? 아니거든. 너 대한민국 평균 초딩이거든? 200% 확률로 정변해도 그 머리 크기는 안 변하거든?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어요?”
주먹으로 턱을 괴고 나를 올려다보며 초딩 도깨비가 물었다. 방금 이마에서 정맥 혈관이 튀어나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 귀가 그렇게 좋을 리는 없고. 그보다 이 찌그러진 쟁반 도깨비를 뭐로 두들겨서 좀 펴줘야 할 것 같네.
“너……메밀묵 좋아하냐?”
훌륭하다, 김해명. 나는 자신을 칭찬했다.
그래. 아마도 20대 중반인 내가 하룻강아지 같은 어린 도깨비 상대로 화를 낼 수는 없지. 릴렉스. 릴렉스.
“그게 뭔데요.”
하룻강아지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도깨비가 메밀묵도 안 먹어봤을 리는 없고 모르는 척 심통 부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몸은 아침마다 면도해야 하는 성인 남성으로서 그 정도 도발에 안 넘어간단다. 애송아, 어른의 레벨을 보여주마.
“맛있는 거야. 먹어보면 분명히 맘에 들걸. 메밀묵도 있고, 메밀 전병도 있고, 메밀 범벅이랑 메밀죽도 있어.”
심통에 개의치 않고 다정하게 말하며 냉장고로 갔다. 말한 대로의 음식이 모두 있었다. 일단 외견상 미성년자니까 술은 빼고. 메밀로 만든 요리들을 작업 선반에 차려놓은 다음 쟁반 도깨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때? 도깨비가 가장 좋아하는 메밀 요리 뿐이다. 안 오고는 못 배길 걸?
과연 쟁반 도깨비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도 슬금슬금 작업 선반 앞으로 다가왔다. 요리들을 둘러본 다음 메밀묵 하나를 덥석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렇지. 역시 도깨비에게는 먹을 게 정답이지.
“퉷! 에이씨, 뭐야.”
퉷? 메밀묵을 뱉었어?
묵을 뱉어버린 녀석이 입가를 훔치며 인상을 썼다.
“맛있는 거라더니. 뭐에요? 떫고 짜고 이상한 맛이잖아.”
그야 간장 양념 올린 메밀묵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도깨비가 메밀묵을 싫어하지? 편식? 돌연변이? 혹시 네 유전정보에는 메밀묵 애정 염색체가 없는 거냐? 아냐, 잠깐. 얘는 영국제 은제식기가 변한 도깨비잖아. 어…설마 식성이 영국식인 거야?
잠시 혼란에 빠졌다. 생긴 건 영락없이 토종인데 식성은 서양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영국 도깨비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지? 아니 애초에 영국에 도깨비가 있어?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은제식기 도깨비는 침을 퉤퉤퉤 뱉으며 사라져버렸다. 아…시작이 안 좋네.
별 수 없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영국의 도깨비에 대해 검색했다. 예상한 대로 영국에 도깨비 같은 건 없었다. 전래 동화가 하나 나왔지만 도깨비라고 번역했을 뿐 본래는 오거나 고블린 같은 괴물 이야기일 터다.
도깨비는 일단 정령에 가까우니 요정이나 정령도 찾아 봤지만 그렇게 따지면 범위가 너무 넓었다. 난감하다. 브라우니처럼 빵이나 우유를 줘 볼까? 아니면 픽시처럼 물을? 그냥 영국인이라 생각하고 홍차에 스콘이라도?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다시 작업장에 내려갔다. 은제식기는 작업 선반 위에서 얌전히 고급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음, 확실히 빗자루 도깨비라든가 깨진 그릇 도깨비라든가 물레 도깨비라든가, 이런 것들과 식성이 다를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유하에게 물어보는 편이 나을까? 나와 몇 년간 함께 지냈으니 보고들은 것이 많을 터다. 물레 때도 미리 알고 척척 준비하는 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은제식기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구석진 곳 어둠 속으로 희끗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어린 도깨비였다. 벽을 따라 작업장을 휙 가로지르더니 부를 사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2층 계단 쪽에서 조르르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저씨.”
계단 뒤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을 피해, 그림자를 따라 걸어 내려와서는 나를 불렀다. 내가 아까는 얼떨결에 봐줬는데 나 아저씨 아니고…
“3층에서 어떤 누나가 미끄러져서요. 넘어졌는데 안 일어나요.”
뭐?
“누나 피 나요.”
굉장히 빨리 달렸다고 생각한다. 어린 도깨비의 목소리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정말로 그랬던 건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다. 며칠 후에 그때를 다시 생각해 보고 내가 유령처럼 벽을 통과한 걸까? 하는 망상을 했는데 그럴 리는 없고.
어쨌든 3층에 누나라고 하면 유하 외에 없었다. 문을 열고 신발을 벗을 틈도 없이 뛰어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니, 미끄러졌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욕실이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여는 것과 함께 따뜻하고 습기 찬 공기가 확 밀려나왔다.
쟈스민 향 섞인 수증기 안에서 유하의 흐린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밀빛의 둥근 어깨를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본 순간, 잠시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잊어버렸다. 어깨에 부딪쳐 튀는 물방울들을 하나하나 세어본 것도 같고, 물기 어려 새까맣게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이 하얀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해명씨!”
욕실 안의 거울이 파르르 떨 정도로 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일생의 위기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저…”
변명하려고 입을 열다가 내가 아직도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못 떼고 있다는 것을 겨우 인식했다. 허둥지둥 돌아서서 변명부터 쏟아놓았다.
“내가 아니고 도깨비가, 그 녀석이, 정말이야. 넘어져서 피가 났다고 했는데, 네가. 은제식기 알지? 거기 붙은 도깨비가.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
당황하자 혀가 꼬이면서 말이 토막토막 잘려 나왔다. 그 소리를 더 들어줄 수 없었는지 등 뒤에서 유하가 부글거리는 숨을 한숨처럼 뱉어냈다.
“변명은 나중에 하고, 나가요.”
싸늘한 목소리였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아직 욕실의 광경에서 헤어나지 못한 내 귀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출입문 옆의 벽이었다. 그 벽에서 모가지만 쏙 내민 채로 녀석이 웃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혀를 날름 내밀더니 번개같이 사라졌다.
뒷골이 땅겼다.
“은제식기 이 식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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