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9화 (9/218)

가장 가까운 남(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유하에게 전말을 이야기하고 사과했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사과를 받아들였다. 나를 보는 눈이 평소보다 차갑다고 느꼈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망할 도깨비 꼬마 같으니라고. 씩씩거리며 다시 작업장으로 내려가자 은쟁반은 작업 선반 위에 그대로 있었지만 초딩 도깨비는 보이지 않았다. 네가 숨어봐야 도깨비지. 어차피 본체인 은쟁반이 여기 있는데 도망쳐 본들 어쩔 거야.

“야, 꼬마.”

은쟁반을 집어 들며 으르렁거리듯 녀석을 불렀다.

“말로 할 때 나와라. 형 화났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흔들흔들 움직여 위협해 봤다. 사실 도깨비의 본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깨비도 충격을 받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혹은 도깨비의 능력 때문에 본체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가능성이 오히려 많았다.

하지만 상대는 어린 도깨비다. 적당히 겁을 주면 넘어가지 않을까?

“빨리 안 나오면 이거 확 구겨버리는 수가 있다.”

쟁반 양쪽을 두 손으로 잡고 을렀다. 스테인리스도 끊는 팔 힘인데 은쟁반쯤이야 뭐. 겁 좀 먹으라고 살짝 휘어볼까?

“그 트레이는 헤스터 베이트먼의 오리지널 디자인으로, 베이트먼 가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세트 중 하나입니다.”

기대한적 없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입문 쪽이었다. 거기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물론 깨어난 후로 처음이란 말이다.

“예술적 가치도 있고, 세공도 훌륭하고, 스토리도 있고, 보존 상태도 좋습니다. 흠이라면 단품이라는 것뿐일까요.”

남자가 다가오며 말했다. 묘한 남자였다. 젊은 목소리라 생각했는데 다가올수록 예상을 배반하는 분위기가 있다. 멀리서 젊은이 같던 얼굴은 가까이서 보자 40대 초반까지 아우를 것 같은 연륜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노안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단정하고 섬세한 외모에 훤칠한 키가, 학생 취향으로 입으면 캠퍼스를 걷고 있어도 무리 없이 어울릴 것 같았다. 날렵한 핏의 회백색 수트에 검자주색 셔츠를 매치하여 입고, 까만 머리카락은 방금 헤어 디자이너에게 손질 받은 것처럼 매끄러웠다.

그는 팔을 쭉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쟁반을 긴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래서 비싸죠. 조심히 다뤄주세요.”

잘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태도였다. 기억은 전혀 없지만, 만일 내가 이 남자와 아는 사이였더라도 별로 친했을 것 같지 않다.

“누구?”

그래서인지 몰라도 말이 짧게 나온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홑눈꺼풀의 사느란 눈매 안에서 어쩐지 익숙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백은호입니다. 은호당이라는 골동품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열네 번째 소개드리는 겁니다만.”

이름과 상호를 말할 때까지 늘어져 있던 신경이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확 당겨 팽팽해졌다. 뭐랬어? 방금.

열네 번째 자신을 소개했다. 이 남자는 내가 몇 번이나 기억을 잃었던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유하 말고 처음이었다. 물론 유하 외에 만나는 사람이라곤 손님들뿐이긴 하지만. 그보다 유하의 말에 따르면 내 기억상실은 거의 일 년에 한 번 꼴로 생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적어도 14년 전 내가 어린애일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유하보다 먼저.

그에게서 나에 대한 정보를 캐야겠다는 생각과 이 남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동시에 들었다. 유하 때도 그렇고 어째서 만나는 사람마다 믿음이 안 가지? 혹시 내 성격이 문제인가.

새로운 정보로 머리가 분주한 동안 남자, 백은호는 한 발 더 다가왔다. 이제 향수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계속 쟁반을 부수겠다고 위협하면 유령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가까이 있는 내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그가 속삭였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어디까지 방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나는 문득 놀랐다. 유령?

백은호를 올려다보자 얇은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다가 슬쩍 뒤로 물러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도깨비가 아니었다고?

도깨비가 아니었구나. 어쩐지 메밀묵도 싫어하고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더라. 유하가 설명할 때도 도깨비가 붙었다는 말은 없었지. 가는 곳마다 물건을 깨뜨리고 밤마다 소동을 일으키는 혼령이라는 거네. 이 꼬맹이 귀신. 이제 보니 삐뚤어진 10대잖아. 죽은 다음에 관심 못 받고 방치 되거나 나쁜 친구귀신이라도 사귄 거냐.

이건 확실히 내 실수다. 집안에 도깨비가 우글거리고 처음 고친 물건도 도깨비니 아무 생각 없이 이번에도 도깨비일 거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지. 하…·. 혼령을 도깨비와 헷갈리다니. 그치만 겉보기에 똑같잖아! 사람 같고. 어두컴컴해지면 나오고. 성격 이상하고.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군요.”

백은호가 어쩐지 즐거운 얼굴로 내 기색을 엿보았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해명 도령.”

도령은 또 뭐야.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말라고 대꾸하려는 참에 계단에서 도각도각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도.

“잠이 덜 깨서 그래요.”

냉랭한 목소리였다. 유하가 커다란 쟁반에 다기세트와 다식 접시를 올려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평소에도 무표정한 얼굴이 지금은 더 딱딱해 보였다. 지은 죄가 있는 나는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작업 선반 위에 다과상을 차려놓고 다기에 찻잎을 덜어 넣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세차한 다음 옥색 찻물을 우려내는 손놀림이 재빨랐다.

이 작업 선반은 본래 식탁으로 쓰려고 설치한 건가. 기억하는 건 일주일 정도지만 그동안 여기에서 작업은 한 적 없고 음식만 몇 번 차려놓았던 것 같다. 내가 작업 선반의 정체성에 대해 심사숙고 하는 동안 유하가 잘 우려진 찻물을 찻잔에 따랐다.

“물건만 맡기고 가실 줄 알았어요.”

손님에게 먼저 차를 내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백은호는 하얀 찻잔을 긴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물건도 물건이고 오늘쯤이면 해명 도령도 어지간히 잠이 깨서 술 한 잔 나누기 좋을 때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이래서, 도깨비와 혼령도 구분 못하는 지경이니 오늘은 차로 만족해주세요.”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해명 도령이니까 잠이 깨도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을.”

“그건 그러네요.”

어차피 이런 나라서 미안한데, 이봐요들. 장본인 보는 앞에서 뒷담화 하지 마!

마음에 안 드는 만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으려니까 유하가 내 쪽에도 찻잔을 하나 내놓았다. 훈김과 함께 다향이 퍼졌다. 쌉싸래한 녹차향에 자스민의 그윽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자스민 향을 맡자 조건반사적으로 욕실의 광경이 확 되살아났다.

“그래도 건강해 보이시니 안심입니다. 혈색이 좋으세요, 해명 도령. 음, 지나치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구경이라도 하셨나 봐요.”

유하의 대꾸에 나는 입에 머금었던 차를 통쾌하게 뿜어버렸다. 무지개라도 뜰 것 같은 고속 분사였다. 백은호가 번개같이 은쟁반으로 얼굴 앞을 가로막아서 뿜어낸 찻물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얄미울 정도로 재빠른 행동이다. 그런데 그 쟁반 비싸다며. 조심히 다뤄달라며?

“수건을 가져올게요.”

유하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일어섰다.

저 여자 뒤끝 있어. 자스민 녹차로 내온 것도 분명히 고의야. 차분히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흘겨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트레이에 붙은 유령은, 어떻게 없앨 생각이십니까?”

쟁반을 흔들어 찻물을 떨치면서 백은호가 물었다.

“모르겠는데.”

절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이쪽도 어쩐지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였다. 기생오라비 같이 멀끔한 것도, 연상일 것 같은데 깍듯한 태도도, 나보다 키가 큰 것도 기분 나쁘다. 기억은 없지만 예전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싶게 불편했다.

“원념은 약한데 집념이 강한 혼입니다. 어려서 그런지 감정도 불안정하고요. 잘 달래셔야 할 겁니다.”

달래기는커녕 자린고비의 자반고등어처럼 천장에 매달아놓고 밥 먹을 때마다 쳐다보고 싶다. 자반고등어는 짜겠지만 녀석은 고소할 거 같은데.

“어…?”

뒤늦게 깨닫고 백은호를 돌아보았다.

“너 혼령이 보여?”

“도령이 볼 수 있는 거라면 저 역시 대체로 볼 수 있습니다.”

골동품점 사장이라더니 동종업계 종사자인가? 아냐. 그랬다면 직접 해결했겠지.

“뭐 직접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만…”

내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었는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억지로 떼어 내면 물건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예약되어 있는 거라 결손이 생기면 곤란하지요. 이런 면에서는 역시 해명 도령만큼의 실력자가 없으니 말입니다. 매번 그렇지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새삼 부탁하는데 정중한 모습이 역시 아니꼽다. 나 아직 쪼잔한 상태인 것 같다.

백은호는 그 후로도 20분쯤 머물며 유화와 함께 내 뒷담화로 시간을 보냈다. 저러고 놀면 재밌나?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에게 소외된 채 나는 자스민 녹차나 실컷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녹차와 다식으로 배가 제법 부르기 시작할 때였다. 대화를 가장해서 나를 디스하는 둘에게 신경 끊고 지루한 시선을 이리저리 보내고 있던 참에 작업장 구석에서 창고 쪽으로 조르르 달려가는 혼령 꼬마가 보였다.

녀석은 창고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노는 도깨비들 소리가 아직도 들렸다. 저것들은 지치지도 않나. 혼령 꼬맹이도 그 소리에 이끌렸는지 문에 귀를 대보고 있다가 이윽고는 슬그머니 문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유령은 편하네. 문 열 필요도 없고. 꼭 단두대에서 모가지만 사라진 것 같은 뒷모습을 하고 잠시 창고 안을 염탐하더니 다음에는 팔 하나가 슬쩍, 그 다음에는 몸통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윽고 남아있던 다리마저 하나씩 문 안으로 들어갔다.

도깨비들에게 걸려서 몽둥이 찜질이나 당해라.

아직 녀석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내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리자마자 창고에서 들려오던 시끌벅적한 소리가 뚝 끊어졌다. 어라, 정말 걸렸나.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창고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걸린 게 아니라 내가 들어갔을 때처럼 따돌리는 건가? 혼령이나 도깨비나 비슷하니 통하는 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낯가리는 것 같다.

고소해 하는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안이었다. 유하와 백은호도 동시에 창고 쪽을 돌아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뒤이어 와장창 하고 단단한 것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저 자식이 창고에서 뭐 하는 거야?”

서둘러 뛰어가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보았다.

“아 진짜…”

오늘 들어 두 번째로 뒷골이 땅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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