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1화 (11/218)

가장 가까운 남(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다음날 내 연락을 받은 백은호가 오후 늦게 작업장으로 찾아왔다. 솔직히 부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꼬맹이 혼령이 깃든 은쟁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아무나 소화 못할 톤의 블루 슈트에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한편 눈꼴 시리다는 표정이 저절로 떠올랐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잘나기까지 하면 더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그가 오기 전부터 유하는 식탁으로 용도 변경된 작업 선반에 술상을 제대로 차려놓았다. 술상 한 귀퉁이에 문제의 은쟁반도 놓여있지만 꼬맹이 혼령은 어제 그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후로 아직까지 눈에 띄지 않는다. 난감하게도 녀석을 잡으려고 문에 붙여놓았던 붉은 실까지 같이 사라져버렸다.

유하에게는 단단히 오해 받고 꼬맹이는 놓치고 실은 사라지고 창고정리는 도합 두 시간 동안 하고…. 어제는 정말 최악의 하루였어.

백은호는 작업장으로 들어오자 내게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곧장 술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술상을 내려다보는 눈이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슈트빨 좋은 걸로 봐서 먹을 거 엄청 가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목매는 타입일 것 같았는데 아닌가. 점심 굶었나?

“18세기 후반 이후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편병이군요. 빛도 좋고 결손도 없고.”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술병이었다. 오늘 나온 술은 유하가 보통 냉장고에 넣어두는 소주나 맥주가 아니었다. 뭔지 몰라도 하얀 도자기 술병에 담겨 있다. 목이 길고 아래가 둥근 보통의 술병과 달리 아래의 양면이 납작한 모양이었다. 납작하게 펴진 부분에 폭포수 떨어지는 계곡의 정경이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파는 거 아니에요.”

유하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를 힐끗 올려다본 백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그의 말에 유하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기분 나쁜 말을 들은 표정이다. 방금 백은호가 도발한 건가? 어제는 서로 죽이 맞아 내 뒷담화로 수십 분을 보내더니 지금은 서로를 겨누어 보는 눈빛에 왠지 날이 서있었다. 뭐 이렇게 변덕이 심해? 그런데 이런 대치가 2분쯤 이어지자 지켜보는 내가 더 불안해졌다. 영문도 모르겠고 차라리 내 험담을 하던 때가 더 편한 것 같다.

별 수 없이 끼어들었다. 백은호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내밀며 한 잔 달라고 하자 유하를 향하고 있던 시선이 내게 내려왔다. 방해받아서 기분 나쁜 듯이 가는 눈매 속에서 갈색 눈동자가 짜증으로 번득였다.

“당신은 기억할 수 없는 건지 기억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군요.”

내게 하는 말인데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유하가 움찔 어깨를 떠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휙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그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다투는 것을 싫어하는 도령의 귀찮은 성격이 지겹다는 뜻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각도가 많이 틀어져 있기도 했다. 유하와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도 않는다.

그는 납작한 도자기 병을 기울여 내 잔에 술을 채웠다. 붉은빛을 띤 술이 흰 잔에 채워졌다. 그것과 함께 꽃나무 아래 선 것처럼 기분 좋은 화향이 풍겨왔다. 잠시 머릿속의 생각들이 뒤로 밀려날 만큼 매혹적인 향이었다.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만…”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면서 백은호가 입을 열었다. 참 그렇지. 그에게 은쟁반의 소유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불렀지. 술잔에서 한 번 더 아까의 향기가 풍겨왔다. 백은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술잔 안의 불그스레하고 말간 액체를 내려다보며 그가 이어서 말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1년 전쯤입니다. 대전의 한 골동품점에서부터인 듯합니다. 거기에서도 이곳과 유사한 일이 여러 번 생겼고 원인을 알게 되자 사실을 감추고 물건을 팔아버린 겁니다. 처음 사간 사람은 몇 달 동안 별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물건들이 떨어지거나 깨지는 소동이 생기고, 원인을 알게 되면 또 팔고. 그런 식으로 반년 동안 주인이 다섯 번 바뀌었습니다. 결국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아무도 사지 않게 되었지요.”

그걸 댁이 싼 값에 사고 말이지?

“그럼 대전의 그 골동품점 이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야?”

“그 전에는 공주의 한 수집가가 주인이었습니다. 몇 년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물건을 부수거나 소동을 피우는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신 다른 사고가 있었지요.”

“무슨?”

“아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집밖에서 동사한 채 발견되었지요.”

수집가의 아들이 죽었다?

“몇 살이었는지 알아? 죽은 아들.”

내가 묻자마자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이것이 사진입니다.”

백은호는 대답하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꼬맹이 혼령과 똑같은 녀석이 사진 안에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진 속에서 녀석은 웃고 있다는 정도.

그런데 이쯤 되자 혼령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보통 뭐 하나 사면 이렇게까지 조사하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주인이 누구였는가를 여섯 단계씩이나 거슬러 추적하지 않나 그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캐질 않나 게다가 한눈에 봐도 그 집 앨범에서 빼왔을 것 같은 사진까지.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내가 의심에 찬 눈으로 보고 있자 백은호가 물었다.

“아니, 신기해서.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낸 거야? 꼭 내가 물어볼 줄 알고 준비해놓은 것 같네.”

“물어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늘 그러셨으니까요.”

내가? 늘 그랬다니. 자주 도움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랬다면 왜 어제 만났을 때 말해주지 않은 거야?”

당연한 질문에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어제는 날씨가 맑았잖습니까.”

동문서답이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자 백은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직 모르고 계시는군요.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뭘? 내가 눈만 깜박이고 있자 백은호는 귀찮다는 얼굴로 일어섰다.

“직접 보시는 편이 빠르겠지요.”

그는 출입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도 블럭과 시커먼 차도, 그 너머의 인도와 울타리용 사철나무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낯선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게 문만 열었다 하면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아예 문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햇빛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어도 어쩐지 쳐다보기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공포에 가까운 그 감정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조금씩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밖은 밝았지만 구름이 끼어서 빛은 흐릿하니 문 안쪽으로 퍼졌다. 흐린 빛 안으로 발을 들였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뱀파이어처럼 불타서 재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 일도 없고 본능적으로 느끼던 두려움조차 일어나지 않자 더욱 대담하게 한 발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한적한 길가의 상가였다. 이차선 도로를 따라 오른 쪽으로는 상점들이 쭉 이어져 있었고 왼편에는 초등학교가 보였다. 학교 옆에 아파트 단지가, 단지 맞은편에 학원이며 상점이며 이삼층의 건물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너비가 15m쯤 되는 천이 흐르고 천 너머로 다시 도로, 아파트, 상가…. 별 특색도 이상한 데도 없는 평범한 도시 한 귀퉁이. 그런 곳에 나는 서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밖에 나올 수 있게 된 걸까. 한밤중에 가로등의 약한 불빛조차 견디지 못했었는데. 비록 흐린 날이라지만 가로등에 비하면 월등히 밝을 터였다.

“구름이 끼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나올 수 있습니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 말입니다.”

백은호가 문가에 서 있다가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해주었다.

“그래서 지금 온 겁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 낮까지 비가 올 예정이거든요. 늘 그러셨듯이 가보고 싶어 하실 테니 지금이 적기겠지요.”

내가? 어디를?

눈으로 묻는 나를 보며 백은호가 씩 웃었다.

“문제가 시작된 곳, 공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백은호와 함께 공주로 향했다.

솔직히 편한 길은 아니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남자 둘이서 나란히 앉아 한 명은 말없이 운전하고 한 명은 창밖을 구경하는 체하느라 목에 담 걸릴 뻔했으니까. 남자 둘 말고 혼령 하나가 동행하기는 했는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뭐 보인대도 도움이 안 되겠지만. 어쨌든 쟁반을 같이 챙겨서 떠났기 때문에 싫어도 꼬맹이 혼령은 우리가 탄 차를 따라왔을 터였다.

공주에 도착했을 때는 사방이 어둑해진 뒤였다. 백은호는 거침없이 차를 몰아 가로등만 이따금 보이는 한적한 길을 달렸다.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고 길도 좁고 구불구불한 이차선이었다. 그런 곳을 한참 지나 논과 밭 사이에 주택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각이라 집마다 불이 켜져서 창이 환했다. 차는 바짝 좁아진 길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그리고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집이 보이자 그제야 멈추었다.

“저기입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오르막길 옆에 차를 세워놓고 백은호가 말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2층 목조주택이었다.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바위나 나무, 자갈을 이용한 조경이 잘 되어 있고 마당에도 잔디가 깔려 있었다.

“불이 안 켜졌네?”

“아들이 죽은 후 부부만 살다가 최근에 남편이 입원해서 부인도 아예 병원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사나흘에 한 번 정도 왔다 간다더군요.”

참 자세히도 알아봤다.

“그럼 지금은 빈집이란 말이지?”

“예. 집에서 북서쪽으로 작은 언덕이 보이십니까? 아들의 시신은 그 나무들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문제의 트레이를 품에 꼭 껴안고 얼어 죽어있었지요.”

그런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백은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힐끗 돌아보자 어딘지 나른한 표정은 지금 하는 일이나 이야기나 모두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것 같았다. 정이 안 가는 인간이다.

“애가 밖에서 얼어 죽는 동안 부모는 뭐 하고 있었대?”

“그날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니 부부가 함께 병원에 있었겠지요. 아이가 집 밖의 언덕에 밤새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머니가 몇 번 전화를 걸어본 모양이지만 받지 않아서 다음날 왔다가 집에 아이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찾아다닌 끝에 발견했지만 이미 늦었고 말입니다.”

어두운 집을 쏘아보고 있던 백은호가 문득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라고. 예전에 뭘 했는지 기억 따위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뭐,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 하기는 해봐야겠지. 이럴 때는 단순하게 가볼까?

나는 뒷좌석에 던져두었던 쟁반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백은호는 유심히 지켜보면서도 따라 내리지는 않았다. 같이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한밤중 혼령이 돌아다니는 빈 집에 혼자 들어가게 생겼다.

하지만 혼령이라야 버릇없는 초딩 꼬마잖아.

나는 쟁반을 휙휙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보자고,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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