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3화 (13/218)

가장 가까운 남(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꼬마의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 축축하니 안개가 낀 것 같던 대기에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녁부터 온다던 비가 이제야 내리고 있었다.

“차 안으로 들어가시죠.”

백은호의 말을 들은 다음에야 비를 맞으며 꽤 서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함께 비를 맞고 있었다는 것도.

“아니면 먼저,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실 겁니까?”

백은호가 덧붙여 말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그를 쳐다보자 태연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지금처럼 기분이 나빠지고 나면 늘 그러셨으니까요.”

도대체 내가 뭘 늘 그랬다는 거야? 또다시 기억하지도 못하는 옛날 일을 이야기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너 말이야. 아까 꼬맹이 죽은 이야기 할 때도 그렇고 걔 어머니 모셔온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슨 생각도 감정도 없고 꼭…”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이기주의자? 냉혈한? 몇 개의 단어가 입안을 맴돌다가 그보다 적확하게 그를 표현하는 한마디가 생각났다.

“너 꼭… 요괴 같아.”

우르르릉 -

산 너머 멀리서 울린 천둥소리가 검은 하늘에 아련히 흩어졌다. 백은호는 가는 빗줄기 속에서 물방울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묘한 모습이었다. 내 머리는 이미 흠뻑 젖어 뾰족하게 모인 머리카락 끝으로부터 빗물이 투둑 투둑 떨어지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빗방울을 구슬처럼 흘려버린다. 얼굴도 옷도 젖었다기보다는 물방울이 이슬같이 맺혀 있었다.

‘정말 요괴 같아…’

“요괴이니까요.”

백은호가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지적하실 게 없다면 저는 차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그가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나도 차와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상을 정할 수 없는 짜증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요괴니 유하도 요괴인 거 아닐까?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든가 이무기라든가 호녀라든가. 아니, 유유상종이라고 사실은 나도 요괴인 거 아니야?

홧김에 생각해버리고 나서 아차 싶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닐까. 도깨비와 혼령도 구분 못하는 지경의 나니까. 자신이 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과 불안이 구렁이처럼 몸을 휘감는다. 오싹 추워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부르르 떤 다음 문득 생각했다. 요괴라면 이정도 비 맞는 걸로 감기에 걸리진 않겠지.

하지만 요괴가 아니라면 곤란해지니까 비는 피해야지 싶었다. 자기도 모르게 파출소 옆 주택가를 걷고 있던 나는 어느 집인가의 나무 울타리가 꽤 무성한 것을 보고 그 밑에 쭈그려 앉았다. 아 처량하다. 짜증내지 말고 그냥 백은호가 권할 때 차에 탈 걸. 그런데 보란 듯이 뒤로 휙 돌아서 와버렸으니 금세 되돌아갈 수는 없고. 가뜩이나 추운데 들고 있던 은쟁반은 더 차갑고…

“어라…”

차가운 정도가 아닌 것 같다. 표면의 하얀 건 뭐지?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자 거친 단면위로 미끄러지는 느낌이 있었다. 서리? 쟁반에 서리가 끼고 있어?

“거기서 나와요.”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쟁반을 조금 내리자 몇 걸음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꼬맹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 있으면 얼어 죽어요.”

그렇게 말하는 꼬맹이의 입이 파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얼굴도, 머리카락도, 서리가 앉은 것처럼 희끄무레했다.

“거기서 나와요.”

꼬맹이가 한 번 더 말했다.

비오는 날 나무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다고 얼어 죽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녀석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비오는 날이 아니겠지.

- 집에서 북서쪽으로 작은 언덕이 보이십니까? 아들의 시신은 그 나무들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문제의 트레이를 품에 꼭 껴안고 얼어 죽어있었지요.

백은호가 그렇게 말했었지. 꼬맹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쟁반을 안은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고.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손 좀 잡아줄래?”

나는 거짓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니 도깨비는 아닌 것 같다.

꼬맹이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잡아주는 것과 두려운 장소인 나무들 사이로 가까이 가는 것을 저울질하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한발 한발 다가온다. 용감하네, 꼬맹이.

작고 차가운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한 손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으로 꽉 잡고는 힘껏 당겼다.

“읏차.”

당기는 대로 일어나며 동시에 내 쪽에서도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일어서고 나서도 손목을 놓지 않자 꼬맹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당했다고 알아차린 것이다.

“놔요.”

꼬맹이가 팔을 당겼다. 팔목 피부에 주름이 잡히도록 애쓰고 있었다. 그래봐야 어린애의 힘이라서 내 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나만 물어보고. 아니, 그 전에…방금은 도와줘서 고맙다. 내가 얼어 죽을까봐 걱정했냐?”

“얼어 죽어버리게 놔둘걸.”

꼬맹이가 사납게 대꾸했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에 속은 것이 꽤 분한 모양이다.

“미안해. 그냥 가 버릴까봐 그랬어. 물어볼 게 있다고 그랬잖아.”

“누가 말해준대? 놔.”

“너네 집 안에 혹시 촛대나 전등 있냐? 내 창고에서 네가 부순 촛대랑 비슷한.”

꼬맹이의 반항을 무시하고 물었다. 손안에서 녀석의 팔이 움찔 흔들렸다.

“그거 확인하려고 너네 집에 들어가려다 내가 파출소 신세까지 졌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냥 너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였잖아.”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꼬맹이니까 물어도 도움이 안 되겠지 그런 생각조차 사실 해보지 않았다. 녀석은 그냥 나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그 존재가 불과 1년 전까지 나와 같이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나 대화의 가능성 자체를 제쳐두고 있었다.

바보 같다.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그거, 왜 떨어뜨리려고 한 거야?”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흔들리던 꼬맹이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녀석이 고개를 젖혔다.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들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까만 하늘이 사실 하늘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곳인 것처럼. 거기에 호박색 전등이 빛나는, 이파리 모양의 유리장식이 된 샹들리에가 걸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짝거리는 크리스털 펜던트와 유리로 만든 심장형 이파리 장식이 아름다운 샹들리에였다. 도금된 가지가 우아하게 늘어지고 가지 끝에 유리 잎 장식이, 그 장식 위에서 촛불 모양의 전등이 빛나고 있었다.

샹들리에를 쳐다보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 시선을 따라 드러난 눈앞의 정경에 나는 숨을 죽였다. 비 오는 거리도 나무 울타리도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곳은 서재라고 해야 할지 창고라고 해야 할지 모호한 넓은 방이었다. 한쪽 벽 전체를 커다란 책장이 가렸고 그 양쪽 벽에는 선반이 있어 층마다 온갖 물건들이 쌓였다. 마치 내 건물의 창고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이쪽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값비싸 보인다는 점일까.

방안을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선은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작은 손에 들린 은쟁반이 보였다. 지금과 달리 가운데가 멀쩡하니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 눈길이 다시 위로 되돌아갔다. 샹들리에의 한 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이파리 장식 중 하나였다. 거기에 뭔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자세히 보려는데 시야 가장자리에서 뭔가 움직였다.

까앙 - !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희뜩한 것이 휙 지나갔다. 놀라서 눈을 깜박인 순간 내가 보던 천장의 샹들리에는 사라지고 차가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검은 하늘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환상을 보고 있는 동안 꼬맹이는 다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이나마 해준 것 같다.

나는 왔던 길을 도로 짚어 백은호가 있던 곳으로 갔다. 가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철컥 하고 자동차 도어락 풀리는 소리가 났다. 쫄딱 젖은 채로 비싸 보이는 가죽 커버 위에 앉으려니 미안하기는 했다.

“그 집으로 가는 겁니까?”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차를 움직이며 백은호가 물었다.

“그러려고. 시간도 늦고 비도 오는데 어르신들이 또 나와 계시는 건 아니겠지….”

무심한 질문에 역시 무덤덤하게 대답한 다음 나는 좀 뜸을 들였다가 결국 말했다.

“파출소에서 빼내준 건 고마운데 말이야, 그 아주머니 모시고 온 건 잘못한 거야. 뭐라고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이 원혼이 되어서 트레이에 붙어 있어 저와 제 고객들이 금전상 손해를 보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동의하에 함께 온 겁니다만.”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그래. 이 작자는 요괴다.

“우리 때문에 괴로운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으니까 잘못한 거라고. 너 요괴라도 사람 기분 정도는 알 수 있지 않냐. 그리고 아들이 원귀가 되었다는데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

“아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던 것은 저를 만나기도 전부터의 일입니다. 아들이 원혼이 된 것은 사실이고요.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따박따박 말은 잘해.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는 거야.”

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필요에 대한 부분, 아직 제게는 구분이 무리입니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다면 도와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다음부터 그럴 때는 그냥 파출소에 잡혀있으라고 놔둬.”

백은호의 차분한 말대꾸에 지쳐서 내가 쏘아붙였다. 백은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왜 이런 피곤한 요괴와 가까이 지냈던 걸까. 그러고 보면 내가 공주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이 녀석 때문이잖아.

피곤한 요괴는 어두운 밤길을 솜씨 좋게 달려 다시 꼬맹이의 집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오지 않고 차 안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조금 굵어져 있었다. 시야도 어둡고 빗소리도 시끄럽고,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다. 은쟁반을 한손에 들고 나는 다시 2층 테라스 밑으로 갔다. 그리고 한 손을 위로 뻗었다. 난간은 손끝으로부터 1m정도였다.

체포되고 나서 생각했던 건데, 나는 처음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풀려나기 위해 스테인리스 기둥을 끊었을 정도로 팔 힘이 셌었다. 그 힘으로 자신의 몸무게도 끌어올리지 못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못한 걸까. 안한 걸까.

- 잠이 덜 깨서 그래요.

유하의 냉랭한 목소리와

- 당신은 기억할 수 없는 건지 기억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군요.

백은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기억났다. 어째서 다들 내게 화를 내는 거지. 기억 못해서 제일 곤란한 사람은 나잖아.

뻗은 팔로 테라스의 난간을 겨누며 무릎을 조금 굽혔다. 도움닫기 없이 제자리에서 1m정도의 도약이 가능한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굽혔던 무릎을 펴고 발끝이 바닥의 흙을 파내며 떠오르는 순간에 느꼈다. 할 수 있다. 분명 훨씬 더 높이.

마지막으로 쟀을 때 72kg이었던 몸이 중력을 부정하고 훌쩍 떠올랐다. 난간을 잡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난간 위에 발을 딛고 있었다.

스스로 하고도 어리둥절한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면으로부터 4m에 가까운 높이다. 인간의 근육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뒤늦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빠르게 도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거 웃기잖아.’

도깨비를 요물취급 했던 주제에 자신이야말로 무슨 요괴일지도 모른다니. 난간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훌쩍 뛰면 마당을 가로질러 백은호의 차가 있는 곳까지 곧장 닿을 것만 같았다. 아니 닿을 수 있다. 직선거리로는 20m쯤? 이쪽의 높이를 생각하면 4m 제자리 도약에 비해 오히려 쉬운 일일지도 몰랐다.

몸속에서 혈관이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몸 이곳저곳의 근육들이 간질거리는 기분, 기지개를 쭉 켜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야가 명료해지고 잠들었던 감각이 깨어나는 듯한, 그런 기분.

뭔지 몰라도 터무니없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 기분으로 나는 말했다.

“나와라. 같이 가자.”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다.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부르는 것과 함께 한손에 들려있던 은쟁반의 손잡이가 차가운 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내려다보자 은쟁반 대신 꼬맹이가 내 손을 잡고 서있었다. 끌려온 것처럼 겁먹은 얼굴이었다. 머리에 손을 얹자 녀석이 조그마한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겁먹지 마. 같이 가줄 테니까.”

조금 힘을 주어서 손을 잡자 꼬맹이 쪽에서도 작은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내 손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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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남(7)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2층의 베란다문은 잠기지 않은 채였다. 들어가니 오래 사용하지 않은 방 특유의 가구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두컴컴한 방을 나가자 조명등으로 희미한 복도가 보였고 그 끝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거실에 불이 환히 밝혀져 계단 끄트머리가 잘 보였다.

밖에서 볼 때 캄캄한 집이었으니까 불이 밝혀진 집안의 풍경은 꼬맹이가 보고 있는 환상일 터다. 아까 샹들리에를 봤을 때처럼.

복도를 걸어 계단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꼬맹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거를 보고 있는 혼령의 기억 속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스테인리스를 끊거나 4m를 뛰어오르는 것과 다른 문제일 수도 있었다. 사실 다른 문제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런데도 갓 깨어난 것 같은 심장이 두근두근 속삭이고 있었다. 문제없어. 걷는 것과 같아. 한발 한발 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걷는다. 한 칸 한 칸 남은 계단의 수가 줄어든다. 조금씩 조금씩 빛이 가까워진다. 조금씩 조금씩 천장이 높아진다. 아니…천장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내가 작아진 거다. 정확히는 내 시선이 낮아진 것이다. 지금 나는 꼬맹이의 눈으로 보고 있다.

계단을 내려간 꼬맹이가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주방 쪽에서는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물소리가 났다. 현관 오른편 문이 조금 열려서 그 사이로 방안이 엿보였다. 불빛 속에서 나무로 틀을 짠 선반과 그 위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그 매혹적인 정경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웃은 건 내가 아니다. 꼬맹이다.

꼬맹이는 힐끗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살금살금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마치 보물창고 같았다. 하얗게 빛나는 은제 식기들과 화사한 문양의 접시들, 크리스털 잔, 도자기, 도금된 그릇. 눈을 유혹하는 광채가 그 매끄러운 표면에 흘렀다. 멋지다. 예뻐. 만져보고 싶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 생각인지 꼬마의 생각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잠깐만 만져 보고. 조금만. 아빠는 모를 거야. 손끝으로 살짝 반질반질한 접시를 매만져 보고, 양손으로 들어서 이리저리 각도를 바뀌어 하얀 반사광이 흐르는 모양을 본다. 포크와 스푼을 들어서 가볍게 쨍쨍 부딪치고 투명한 유리잔을 기울여보고, 발돋움을 해서 옥색 도자기를 만져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위로…

책장 아래에서 꺼낸 두꺼운 책을 딛고 올라가자 한 칸 더 위쪽이 겨우 보인다. 팔을 뻗으니 닿을락말락했다. 마음에 드는 쟁반이 손끝에 닿지 않자 안타까워하며 책 위에서 폴짝 뛰었다. 쟁반은 닿지 않고 그 옆에서 뭔가가 손끝에 부딪쳐 툭 부딪쳤다. 그것이 쟁반 반대편에 놓인 샹들리에 안으로 굴러들어가는 바람에 뎅그렁 하는 소리가 나버렸다.

들렸을까? 두근두근하며 귀를 기울이지만 문 너머에서는 주방의 달그락거리던 소리도 이제 없다.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책장 아래 칸에서 두꺼운 책을 하나 더 꺼내 발판을 높였다. 발끝을 돋우고 팔을 쭉 뻗자 쟁반 손잡이가 겨우 닿았다.

힘들여 꺼낸 쟁반을 전리품처럼 들고 꼬맹이는 거기에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반사되는 것을 보았다.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여보, 내 흡입기 못 봤어?”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안 좋아요?”하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주방 안쪽에서 울렸다.

“아까부터 좀 그러네. 어제 쓰고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어.”

“창고에 둔 거 아니에요? 거기 환기가 잘 안 되서 기침이 심해진다고 갖고 들어갔다가 걸핏하면 두고 나오잖아요.”

“이 사람이, 창고가 아니고 보관실.”

“쓰지도 않을 물건 쌓아두는 데가 창고지 뭐에요.”

큰일 났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꼬마가 당황했다. 아빠가 여기로 올 거야.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꼬마는 쟁반을 올려놓으려고 폴짝 뛰었다. 정확하게 겨냥했다고 생각했지만 무색하게도 방향이 어긋나며 옆에 놓인 은제 화병과 부딪쳤다. 화병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발소리가 커지고 문이 확 열렸다. 아버지의 놀란 얼굴이 화난 얼굴로 변했다. 무서운 얼굴이었다. 꼬마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치는 순간 발이 허공을 밟았다. 책 위에 서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품안에서 뭔가 구겨지는 것 같았다. 화병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쟁반이 화병과 꼬마의 몸 사이에서 꽉 눌린 것이다. 쟁반 한가운데가 우그러진 모습을 보자 꼬마는 바닥에 넘어져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쟁반을 보는 아빠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이쪽으로 팔을 뻗어오자 겁먹은 꼬마가 몸을 움츠렸다.

“너 그거…”

아빠가 입을 열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숨소리가 쌕쌕 새어나왔다.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파리해졌다. 꼬마에게 뻗었던 손이 돌아가 가슴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두리번거리며 방안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찾지 못하자 돌아섰다.

“여보…여보…”

비틀거리면서 부인을 불렀지만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숨소리가 피리소리처럼 날카로워졌다. 비틀거리는 걸음소리가 멀어졌다가 이윽고 “여보! 왜 그래요?”하고 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부산하게 달리는 발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정신 차려요. 여보! 준수 아빠! 여보세요! 119죠? 여기…”

꼬마는 그때까지 웅크린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큰일을 내버렸다. 큰일이 생겨버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나버렸어. 큰일 났어.

쟁반을 안고 있는 몸이 덜덜 떨렸다. 아빠가 큰일 났어. 쟁반이 함께 덜덜 떨었다. 아빠가 큰일 났어. 큰일 났어. 나 때문에 큰일 났어. 나 때문에 큰일 났어. 나 때문에 큰일 날 거야. 죽으면 어떡하지. 아빠가 죽으면 어떡하지. 엄마가 화내면 어떡하지. 나가라고 하면 어쩌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충격과 두려움이 바위처럼 짓눌러서 그 아래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나까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야, 꼬마…”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르는데 성공하자 꼬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처럼 내 시선 안에 녀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시에 환했던 주변이 어두워졌다. 녀석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난 것 같다. 우리는 어두운 창고 안에 있었다.

덜덜 떨고 있던 꼬맹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눈이 초점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같이 가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나 꽤 말주변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상의 응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하고 나서 손을 내밀자 꼬맹이는 덜덜 떨면서도 역시 한 손을 내밀었다.

“용감하네.”

아까는 마음속으로만 했던 말을 소리 내서 해주었다. 팔을 당기자 녀석의 몸이 힘없이 끌려올라왔다. 섰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

“나 숨어 있었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꼬마가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구급차가 와서 아빠랑 엄마랑 데리고 갔어요. 그때까지 계속 숨어있었어요. 다 가버리고 나자 밖으로 도망쳤어요. 아빠랑 엄마가 돌아오면 분명히 혼날 테니까…도망쳐서 숨어 있었는데…”

기껏 도망친 게 집근처 숲속이었다. 거기서 두려움에 떨며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울다가 지쳐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있어야 하는데…”

꼬마가 중얼거렸다.

“그래야 아빠가 숨을 쉬는데…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요.”

그야 엉뚱한 데서 찾고 있으니까 그렇지. 골동품점이나 다른 사람의 집, 내 창고. 그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찾아봐.”

내가 속삭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아직 구급차가 안 왔으니까. 아빠와 엄마가 가기 전에.”

진심이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꼬맹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한순간 반짝거렸다.

“정말로요?”

“정말이야.”

대답하자, 꼬마의 눈동자 뿐 아니라 창고 안의 물건들도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밝은 전등 아래에서.

“어디 있는지 알아?”

내 질문에 꼬마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선반의 뒤로 돌아가 고개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있었다. 아름다운 샹들리에였다. 이파리 모양으로 펼쳐진 유리 장식 중 하나가 푸르스름한 그림자로 어룽져 있었다.

꼬마가 팔을 뻗었다. 하지만 닿을 리가 없다. 발돋움을 해도, 폴짝 폴짝 뛰어도 손끝에 간신히 닿을 뿐이다. 아무리 뛰어도 닿지 않자 녀석이 선반의 기둥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조그만 손으로 있는 힘껏 밀었다 당기며 애를 써도 샹들리에는 조금 흔들릴 뿐이다. 비스듬히 세워놓았던 접시들이 떨어져 쨍그랑 깨지고 화병이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샹들리에는 그대로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샹들리에가 흔들리며 유리 장식 안에 있던 것이 이리 저리 굴렀다. 구르지만 장식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간절한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데굴. 데굴. 유리 장식 안에서 그것이 크게 흔들렸다. 한 번 더. 선반이 흔들린다. 데굴. 한 번만 더. 선반이 흔들린다. 데굴. 조금만 더. 데굴. 한 번 더! 데굴. 한 번만 더! 데굴… 구른 그것이 유리장식 가장자리에 모습을 보였다가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툭….

꼬마의 손바닥 위로.

한 손에 잡히는 크기의 ㄴ자 모양 흡입기였다. 그것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꼬마가 뛰었다. 나도 녀석의 뒤를 따라 달렸다.

“엄마! 아빠!”

꼬마의 아버지는 주방 앞에 쓰러져 있었다. 꼬마가 달려가서 흡입기를 내밀었다. 어머니가 흡입기를 흔들어 아버지의 입에 물려주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버지가 약을 들이쉬었다. 1초, 2초, 3초…들이쉰 숨을 참으며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흘렀다. 4초, 5초, 6초…초바늘이 똑똑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7초, 8초, 9초, 10초.

“흐으 - ”

짧게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천천히 길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처럼 날카로운 숨소리가 아니었다. 큰 숨을 몇 차례 쉬고 나서 아버지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괜찮아요, 여보?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우리 준수 아니면 큰일 날 뻔했어요.”

어머니가 말하며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힘없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랬냐? 우리 아들. 아까는 화내서 미안했어.”

다정한 목소리에 꼬마의 몸이 꿈틀거렸다. 어깨를 떨면서 꼬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마도 1년 내내,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을 말을 겨우, 녀석은 울면서 엉망이 된 발음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멍하니 지켜보는 동안 주변은 천천히 어두워졌고 나는 어느새 캄캄한 빈 집 안에 홀로 서있었다.

내가 차로 돌아가자 백은호는 가장 먼저 내 손의 쟁반을 확인했다. 그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얼핏 스쳤다. 쟁반의 가운데 우그러졌던 부분이 감쪽같이 고쳐졌음을 확인한 것이다. 녀석이 떠났다는 증거였다.

“내가 본 게, 과거는 아닌 거지?”

“단순히 혼령의 환상, 그뿐입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물었지만 백은호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러니까 흡입기를 찾아서 가져간 것도, 아버지에게 사과한 것도 그냥 혼령의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뿐이다.

“꼬마 녀석은 이걸로 만족한 건가.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야.”

꼬마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들이 죽은 이유를 몰라서 애태울 것이고, 꼬마의 아버지는 1년 전 아들에게 화냈던 일을 기억하며 누구에게도 말 못한 채 혼자서 자책할 것이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해서 집착이 사라진 꼬마만은 성불했다고 해도 어쩐지 인정하기 싫은 결말이었다.

“업보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지요. 아이의 부모라면, 분명 전생에 지금의 슬픔을 겪을 만한 잘못을 했을 겁니다.”

백은호의 의견은 그랬다. 업보라니. 그 말이 맞다고 해도 억울하긴 마찬가지잖아. 기억도 못하는 전생의 잘못을 왜 지금 갚아야 하는데? 그리고 전생까지 이야기하자면 꼬맹이도 어린 나이에 죽을 만한 잘못을 전생에 한 거 아냐? 그런데 녀석은 성불하고 부모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면 불공평하잖아.

그런 생각을 말해봤지만

“저에게 따지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이가 죽은 데에는 아버지의 잘못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물건을 자식보다 중요하게 여긴 결과지요.”

같은 말이나 들었다.

“물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아이가 금지된 일을 하면 보통 부모는 화를 내는 법이라고.”

“그것이 잘못 아닙니까? 상대가 자식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 실수로 겁에 질릴 만큼 화를 내지는 않을 테지요.”

“그야 남에게 하는 것과 자식을 대하는 방식은 좀 다르겠지. 어쩔 수 없잖아. 부모에게는 자식을 가르칠 책임이 있어. 그것 때문에 남보다 더 강압적으로 대하게 돼.”

“이상한 말이군요. 자식도 남이잖습니까.”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물으려다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전적 의미로 남이란, 나 외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니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아냐, 아냐. 역시 이 작자는 요괴다.

찝찝한 기분으로 그를 외면하고 어두운 차창 밖을 보고 있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얕은 잠이 깨어난 것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지만 알려 드…방금…라서 정상적인 금액으로 팔릴 수…”

백은호다. 누군가와 거래 문제로 통화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돈만 밝히는 요괴 같으니라고. 잠은 깼지만 아는 체 하기 싫어서 자는 척했다. 잠기운이 사라지며 통화하는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상대편 여자의 목소리도 약하게나마 들려왔다.

“그럼 우리…가 이제 …다는 거예요?”

“예. 제대로 성불한 것을 우리 쪽 사람이 확인했습니다.”

백은호의 대답에 상대방은 잠시 말이 없었다. 10초쯤 기다리다 백은호가 “그럼…”하고 전화를 끊을 기색을 보이자 “정말이죠?”하고 수화기 너머로 다급히, 그러나 간절히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지 않으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백은호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러나 그 말에 이어 수화기 안에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요괴라도 움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좀 전에 왔었어요. 잠깐 잠들었는데 우리 아들이 생전처럼 이쁘고 행복한 얼굴로…내가 꿈을 꿨나보다 했어요. 억울하고 서러워서 이런 꿈까지 꾸나보다 하고…”

어? 이 목소리. 그 아줌마잖아.

“우리 아들이 정말로 왔었던 거군요. 우리 아들이 정말로 편히 갔군요. 어흐윽…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 어쨌든 끊겠습니다.”

백은호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힐끗 돌아보자 어딘지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은 일 하고 감사받았으면서 표정이 뭐 저래?

“구분하는 게 힘들다니까…”

백은호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 그래. 이 자는 요괴였지.

피식 웃어버리고, 이번에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비에 젖어 축축한 옷을 갈아입으려고 옷장 문을 연 나는 거기에 꼬맹이의 작별인사가 남겨져 있는 것을 봤다.

“이 자식이…”

창고에서 사라졌던 붉은 실이 거기에 있었다. 옷장 안 모든 옷의 단춧구멍을 통과한 채로.

묶은 사람만 풀 수 있는 붉은 실에 옷이란 옷이 다 걸려있었다 라는 말이다.

꼬맹이 너, 너 임마. 성불하면 다시는 나 볼일 없을 것 같지? 아니거든? 너 환생 할 거거든?

환생하면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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