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4화 (14/218)

에메랄드 하우스(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공주에 다녀온 후로 일주일. 내 하루는 일주일 전과 별로 다를 바 없다. TV와 인터넷과 도깨비 창고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할 일이 없는 것이다.

평균을 내보면 하루에 1.1666666667명인 손님은 대부분 고장 난 선풍기나 손잡이가 떨어진 냄비 같은 걸 맡겼다. 선풍기쯤이야 하고 나사를 풀었다가 내가 전자제품과 안면 튼 적 없는 서먹한 관계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냄비 쪽은 그래도 도움이 될까 했는데 나사를 돌리려고 힘껏 힘을 줬다 나사의 홈만 뭉개버리는 일이 생긴 이후 유하는 주로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나 락킹 플라이어와 스냅링 플라이어도 구분 못하는 내가 “옵셋 렌치 중간 거 주세요. 숏타입으로요.”나 “소켓 스패너 12mm요.”라는 주문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냄비 고치는데 정말 그런 긴 이름의 쇠뭉치가 필요한지, 아니면 내 주제를 알고 백수 코스프레나 하고 있으라는 건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반면 도깨비들과의 관계는 약간이나마 진전이 있었다. 예전에는 내가 문만 열면 감쪽같이 조용해졌지만 지금은 내가 들어가도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대로 계속 논다. 정말로 전혀, 조금도, 요만큼도 신경써주지 않아서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지만 기피인물에서 투명인간으로 한 단계 레벨 업 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옆에서 도깨비들이 노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된 덕분에 한 가지 좋은 점이 생겼다. 도깨비의 느낌을 확실히 구분하게 된 것이다. 혼령과 도깨비도 구분 못하는 지경은 이제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혼령 쪽도 상당히 감을 잡고 있었다. 공주에서 꼬맹이와 접촉했던 시간이 유효한 셈이다.

아마도 그 덕분에 나는 깨어난 후 처음으로, 작업장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 모습을 보고서 첫눈에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 음울하게 어두운 느낌이라든가 온기를 끌어당겨 흡수하는 듯한 차가움에서 알 수 있었다.

혼령이다.

20대 후반쯤이나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나이치고는 격식을 갖추어 정장을 하고 있었다. 스핀 펌으로 멋을 낸 댄디한 헤어 때문에 어리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서글서글한 눈에 선이 고운 단정한 외모도 남자답다기 보다는 소년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러나 동안이고 뭐고 이미 죽은 사람.

갑자기 웬 혼령이 찾아왔나 하고 쳐다보는데 생기 없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출입문 쪽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돌리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문이 열렸다.

“아무도…안 계세요?”

문을 연 사람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안은 어두컴컴하니 창고 앞에 있는 내가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는 젊은 여자다.

달칵 소리와 함께 작업장 안이 밝아졌다. 어느새 내려왔는지 유하가 스위치 옆에 서있었다. 문을 연 여자가 눈을 깜박거리다가 천천히 작업장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나와 유하를 발견하자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나이답지 않은 침착한 태도였다.

유하는 작업 선반 위에 있던 선풍기를 한편으로 치우고 손님을 위해 커피를 내왔다. 그동안 손님인 여자는 인조가죽 시트가 닳아빠진 낡은 의자에 앉아 쓸데없이 넓은 작업장을 두리번거렸다.

사장인 만큼 내가 접대를 해야 하겠지만, 고객과 어떻게 상담하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손님인 여자도 나보다는 유하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비서보다 존재감 없는 사장은 그냥 구석에 말없이 서 있을 뿐. 아, 그러고 보니 존재감 없는 존재가 하나 더 있구나. 나는 어쩐지 동료애를 느끼며 동안의 남자 혼령을 힐끗 쳐다보았다.

혼령은 여자가 들어온 후로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보고 있다고 하기에는  왠지 초점 없는 시선이어서 그녀 쪽을 향해 멍하니 딴생각 중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어쨌든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같은 묘한 눈길이었다.

“이것을 봐주세요.”

맡기실 물건이 뭐냐고 묻는 유하에게 여자가 뭔가를 내밀었다. 손지갑 안에 들어갈 만큼 작고 얇은 종이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빳빳한 재질의 직사각형 종잇조각이라는 건 역시 명함이겠지만 그 양상에 있어서 내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금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번쩍거리는 황금색 바탕에 동그란 크리스털 장식이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짙은 녹색으로 ‘에메랄드 하우스’란 글자가 반질거리는 윤기를 흘렸다. 마치 보석으로 만든 글자 같았다. 말 그대로 에메랄드로.

그러나 비싸 보이는 외견과 달리 명함으로서의 용도는 좀 부족하다 싶은 게, 그 일곱 글자 외에 다른 정보라고는 없었다. 전화번호라든지 팩스라든지 하다못해 약도라든지. 앞뒤로 뒤집어 확인해 봤지만 달랑 일곱 글자가 전부다. 뭐 내 것도 상호명과 내 이름만 달랑 적혀 있기는 하다만.

“수리해야 할 물건이 이건가요?”

유하가 물었다. 평소보다 냉랭한 목소리였다. 하긴 나도 어이없기는 했다. 명함을 수리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잖아.

여자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중간하게 기른 단발머리가 고갯짓에 따라 흔들렸다.

“아뇨. 전 뭘 수리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저, 이 명함. 혹시 이것에 대해 아세요?”

수리점에 수리하러 온 게 아니면 뭐람? 혹시 아까부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없이 지켜보던 혼령과 관계된 걸까 하고 돌아보았다. 없다. 조금 전까지 같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맡기실 물건이 없다면 그만 가주세요.”

유하가 차갑게 말했다. 손님이 아니라고 해도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태도였다. 말하자마자 더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듯이 일어나서 돌아섰다. 여자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잠시만요! 뭔가 알고 계시면 제발 알려주세요. 동우씨가…제 약혼자가 실종되었어요!”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내용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유하의 걸음이 멈칫거렸다. 그러나 이내 변함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종은 아닐 텐데요. 연락도 정상적으로 되고, 당신과 만날 수 없는 이유도 설명해줬을 거예요.”

묘한 말이었다. 유하는 명함에 대해 분명 알고 있는 것이다. 유하의 대꾸에 움찔거렸던 여자도 곧 그것을 깨달았는지 더 커진 목소리로 외쳤다.

“아는군요! 그렇죠? 여기가 어디인지 아는 거죠?”

유하는 성가신 듯 눈을 찌푸렸다. 짜증을 감추는 표정이었다.

“여기는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에요. 당신을 여기로 보낸 자에게나 부탁해보지 그래요.”

그녀를 여기로 보낸 자?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자 나도 더는 참아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부터 설명해 줘. 그 명함은 대체 뭐야?”

유하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기분 나빠 보이는 것은 알겠지만 영문도 모르면서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지지 않고 마주보았다. 유하는 숨을 꾹 참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말했다.

“여우 소굴로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이에요.”

더 못 알아먹겠다.

“해명씨가 알 필요 없어요. 관여할 이유도 없고요.”

유하는 냉정한 손끝으로 금색의 명함을 여자에게 휙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르듯이 말했다.

“당신의 약혼자는 스스로 여우 소굴에 찾아들어간 거예요. 나라면 그런…”

그런… 뭐?

유하는 갑자기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나 여자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한숨처럼 이어서 말했다.

“그런 남자는 잊어버려요.”

더 이상의 대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유하는 직접 출입문을 열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나가지 않으면 끌어낼 기세였다.

여자는 애원이 섞인 눈으로 유하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유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나는 사정을 정확히 모르니 나서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힘없이 걸어 나갔다.

유하는 여자를 내보내자 곧장 찻잔을 치웠다. 뭔가 묻기 전에 3층으로 가버리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도 그럴 수는 없었다.

“네가 말한 여우라는 건 은유적인 표현이야? 아니면 진짜 여우라는 거야.”

서둘러 다기들을 쟁반에 쓸어 담는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유하는 나를 힐끗 보았다. 아까처럼 날카로운 눈매는 아니었지만 더 마주보기 어려운 것이 담겨있었다. 한순간 ‘알 필요 없다는데 굳이 물어봐야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잠시 후 그녀가 눈길을 떨어뜨렸다.

“한번쯤은 들어보지 않았나요. 사내를 홀려서 간을 빼먹는다는 여우의 전설.”

아, 그 여우? 전설의 고향에서 몇 번이나 리메이크 되었던 구미호 전설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오싹해졌다.

“그 구미호가 정말로 있어?”

질문하지 말 걸 그랬다. 유하가 한심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본 다음 계단을 올랐다.

“그러니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요괴와 엮여서 좋을 일이라고는 없어요. 위험할 뿐 아니라 기껏 도와주러 가도 구미호에게 홀린 이상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비정한 논리인데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냐. 비인간적이잖아. 도움을 원하지 않더라도 간을 뺏겨서 죽도록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요괴한테 잡혀먹는 것 보다는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오는 게 낫지 않을까?”

인류애를 발휘해서 말해보지만

“그래서 구미호와 누가 싸울 거죠?”

라는 현실적으로 냉정한 대답만 들었다. 그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다.

도깨비 같은 요괴에게 주먹질을 당해도 조금 붓기만 하는 맷집에 4m 정도는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는 근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구미호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겠지. 일단은 태생부터가 동물이다. 애초에 동물의 감각과 반사 신경은 인간과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구미호쯤 되면 동물 단계에서 인간을 초월한 수준으로 수백 년에 걸쳐 업그레이드 된 셈인걸.

무리다.

단념하려다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런데 그 여자를 이리로 보냈다는 사람은 누구야?”

계단 끄트머리에서 막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려던 유하가 툭 멈춰 섰다. 아래서 올려다 보이는 얼굴이 조금 굳어있었다. 어쩐지 대답을 알 것 같았다.

“백은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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