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6화 (16/218)

에메랄드 하우스(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난감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인공의 흔적이 남아있다. 꽃이 피는 시기와 크기를 고려해 나무를 배치한 것도 그렇고, 화초와 보기 좋은 풀이 잘 드러나도록 잡초를 적당히 제거해 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나무들 사이에 한적한 소로가 보였다. 그 길 양편에 일부러 심은 것이 분명한 데이지와 프리뮬러가 화사하니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 사이에 숨겨진 것처럼 보이는 작은 길이지만 눈이 닿은 이상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달콤한 색의 유혹이었다. 작지만 화려한 빛으로 매혹하는 것이 마치 보석 같다. 이 꽃을 따라 오세요. 이 길을 걸어보세요. 이쪽으로 와요. 여기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길로는 절대 안 가는 게 안전하겠지. 일단 이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게 상책이었다. 산속이 아닌 이상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한 바퀴 돌다 보면 찻길이 보일 터였다. 도로를 따라 가면 전화라도 빌려 쓸 만한 곳이 있을 테고.

마음을 먹고 소로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은 길이 따로 없이 잡목이 우거진 말 그대로의 숲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자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겠다 싶은데 딱히 경사도 없다. 한 방향으로 쭉 가다보면 숲을 벗어나리라 생각하고 성가신 잡초와 관목을 헤치며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숲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풀이 드문드문 난 넓은 공터였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담처럼 주위를 에워싸고 한쪽으로 꽃이 예쁘게 핀 소로가 보였다. 데이지와 프리뮬러라….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내가 방향치였다니.

한 번 더, 이번에는 좀 더 먼 곳을 보며 방향이 바뀌지 않게 주의해서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나는 다시 데이지와 프리뮬러가 보이는 공터로 돌아왔다. 내가 바보거나 이 숲에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태양 아래서도 멀쩡한 나도 그렇고, 이렇게 울창한데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도 그렇고 어딘지 수상쩍은 데가 많은 곳이었다. 아니 애초에 여우의 소굴이라잖아. 홀린 게 아닐까. 이렇게 밝은 대낮에 여우에게 홀려서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오싹하다.

그나저나 어차피 벗어날 길이 없다면 둘 중 하나겠지. 여기에서 누군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든지, 여우굴로 걸어들어 가든지.

하지만 와줄까?

유하는 내가 이쪽으로 오는 것을 봤지만 찾으러 와줄까? 약혼자가 실종되었다는 여자에게 그녀는 매몰차게 말했었다. ‘그런 남자는 잊어버려요.’라고. 나 역시 스스로 여우 소굴에 들어온 셈이니 조건은 비슷하지 싶다. 유하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나를 버려둘까? 아니면 최소한의 정리로 백은호에게 연락하는 정도는 해줄까.

그런데 만일 백은호에게 연락했다고 해도 문제는 하나 더 있다. 그가 올까? 나도 애초에 그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가 구미호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요괴인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가 벌인 일이니 수습할 능력은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니라면? 유하의 말처럼 그가 그냥 무모했던 것뿐이라면?

나는 망한 거지.

‘이렇게 쉽게 와버릴 줄은 몰랐다고.’

나무 조각으로 변한 명함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아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상의 주머니에 넣고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숲길을 노려보았다. 이미 패를 던졌으니 어쩌겠어. 돈을 거는 수밖에.

믿을 수 없는 패에 올인 하는 기분으로 걸음을 디뎠다.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며 구불구불 이어진 소로는 갈수록 아름답고 몽환적인 정경으로 바뀌었다. 양편에서 나뭇가지가 우산처럼 펼쳐져 터널을 만들었고 나뭇잎을 투과한 녹색 햇빛이 길을 에메랄드 색으로 물들였다. 바다 밑을 거니는 것 같았다. 이따금 꽃 위로 나비가 오락가락 하면 그것은 작은 물고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로 홀리겠는걸.’

쓴웃음이 나면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속을 걷는 듯한 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왔다면 넋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길은 점점 넓어졌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들만큼 좁았다가 갈수록 양편과의 거리가 멀어지더니 이윽고 바닥에 널찍한 돌을 깔아 포장한 큰 길로 변했다. 포장된 길을 따라가자 나온 것은 한 채의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저택이라기보다 궁전이라고 해야 할까.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는 인도풍의 건축물이었다. 우아한 돔형의 지붕이나 아치형 출입구는 타지마할을 연상시켰다. 대리석 벽의 상감 장식이나 꽃과 당초를 양각해놓은 것도 놀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멀리서 보면 마치 건물 외벽 전체에 레이스 천을 씌워놓은 것 같았다.

건물 앞으로 길쭉하게 만들어진 수로도 그렇고 첨탑이 없을 뿐 타지마할을 본 따 만든 것 같다. 지붕과 아치형 창문이 녹색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녹색의 돔은 마치 커다란 보석과 같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그 위대한 타지마할은 사실 무덤인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걷고 있던 내 앞에 누군가 와서 인사했다. 인도식의 옷을 입은 남자였다. 목소리로 젊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얼굴은 하얀 석고 가면에 가려져 코 아래쪽부터 턱까지만 살짝 드러났다.

“산책은 즐거우셨습니까. 들어가시기 전에 통행증을 확인하겠습니다.”

묻는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몬드형으로 뚫린 눈구멍 너머에서 까만 눈동자가 번득였다. 그럴 리 없지만 마음속을 읽힌 기분이었다. 윗주머니에서 나무 조각을 꺼내 보여주자 그가 이번에는 좀 더 확실히 웃는 낯을 했다.

“손님이 머무실 곳을 미나가 안내할 겁니다.”

그의 손짓을 보고 여자 한 명이 재빨리 다가왔다. 역시 사리를 닮은 옷을 입고 얼굴에는 금박장식이 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드러난 입술에 칠해진 립스틱이 요요하니 붉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더니 사뭇 친근하게 몸을 기댔다.

“여기는 처음이시죠? 뭐든 궁금한 게 있으면 제게 물으세요.”

댁이 혹시 여우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물으면 안 되겠지. 석고 가면의 남자를 힐끗 돌아보자 그가 내 쪽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보였다.

“에메랄드 하우스에 잘 오셨습니다. 모쪼록 머무시는 동안 좋은 꿈을 꾸시기를.”

나도 이게 꿈이었으면 싶다. 혼자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뚝 떨어져 여우인지 사람인지 모를 여자에게 이끌려 여우 소굴로 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미나라고 불린 여자는 나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도 밖에서 보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황금색과 바닷물처럼 진한 녹색의 향연이었다. 넓은 홀을 지나 이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자 긴 복도가 나타났고 복도 양편에 아치형 문이 엇갈려 만들어진 것이 보였다.

문이지만 문은 없었다. 여닫을 수 있는 문 대신 구슬을 엮은 수렴이 드리워져 안이 보일락 말락 가려져 있었다. 복도에 비해 약간 어두운 방안의 조명 속에서 이따금 웃음소리나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도 있었지만 어디에도 불이 꺼진 곳은 없었다.

“손님이 많은가 보네?”

슬쩍 묻자 미나가 가면 아래에서 생긋 웃었다.

“여기는 최고이니까요. 돈은 얼마를 써도 좋으니 올 수만 있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내 주머니에는 먼지밖에 없는데.”

나의 대꾸에 미나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까르르 웃었다.

“먼지밖에 없어도 저 사람들 모두 손님을 부러워할 걸요. 여화 언니의 명함을 받을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으니까요.”

여화 언니의 명함이란 내가 갖고 있는 나무 조각을 가리키는 말인가 보다. 손톱으로 모자이크 하는 취미를 가진 여우의 이름은 여화인 모양이었다.

미나는 나를 복도 끝 막다른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만은 손잡이 달린 문이 있었다. 그것을 열고 안에 들어가자 생각보다 널찍한 방이 나타났다. 거의 홀이라고 봐도 좋을 크기였다. 벽과 천장은 아름다운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고 장식용 선반이나 의자는 물론 작은 분수대까지 있었다. 꽃과 늘어뜨린 천으로 장식한 기둥이 벽을 따라 놓였고 기둥 사이에 카펫과 쿠션이 있어 사람들이 거기에 기대거나 누워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쳐다보았다.

남녀가 섞여 스무 명 가량이다. 대부분 편한 옷차림에 맨발이었다. 여자들은 한결같이 인도풍의 얇은 옷에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남자들은 각양각색이다.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있었고 흐트러진 수트 차림이거나 잠옷 바람인 사람도 있었다. 모두 여자와 뒤엉켜서 그녀들이 먹여주는 과일을 삼키거나 술을 마시거나 정체를 모를 연기가 나오는 긴 담뱃대를 빨았다.

어디에선가 귀를 어지럽히는 피리소리가 울리고 방의 한가운데에서는 배꼽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무희들이 묘기에 가까운 춤을 추었다. 그녀들이 요가 같은 동작으로 허리를 휘고 몸을 꺾을 때마다 사람들이 탄성을 내거나 꽃을 던졌다.

이색적인 광경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즐길 때가 아니었다. 이 방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전설의 요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 구미호다. 짐승으로 태어나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대부분의 설화에서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던 존재. 어떤 이야기 안에서도 강하고 매혹적인 생물체로 그려졌던, 그리고 이 소굴의 주인인.

“이리 와요.”

미나가 주춤거리는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무희들을 지나쳐 방을 가로지르더니 그곳에서 유일하게 휘장이 드리워진 기둥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은밀히 내 뒤를 따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기분 나쁜 눈길이었다.

“그럼….”

여기까지 안내하는 것으로 그녀의 임무는 끝났는지 미나는 휘장 안쪽을 가리킬 뿐 함께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내 손으로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전설 속의 존재가 도사리고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구미호라더니…’

사기 당한 것 같다.

휘장 안에는 확실히 여성이 한 명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전설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남자를 홀리는 미모와 요사한 매력을 가진 그런 여자가 아니라 아마도 60대 후반 쯤으로 짐작되는 나이 들고 성미 고약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게다가 차림은 춤추던 무희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서 비키니나 다름없는 옷 사이로 윤기 없이 쭈글쭈글하게 처진 살이 거침없이 드러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굳었다.

“이것 참…재미있네.”

나를 보고 그녀가 한 말이었다.

“피라미 미끼로 뜻밖에 대어가 낚였잖아?”

난 대어였나 보다. 그런데 큰 물고기고 작은 물고기고 잡히면 매운탕 되는 건 똑같다. 뭐 상대가 구미호니까 나를 술안주 재료로 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이건 정말 예의가 아니지. 구미호는 말이다, 구미호라는 건…

“왜? 젊고 예쁜 여자가 아니어서 실망인가?”

“바로 그거라고!”

나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버리고 나서 움찔했다. 아…내가 지금 여기서 인간 남성이 가지고 있는 구미호에 대한 환상을 요구할 때가 아니지.

“하여간 사내란.”

할머니 구미호는 주름진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이윽고 말했다.

“바란다면 보여주지.”

그리고는 마른 손가락을 펴서 휘장 너머로 손짓했다.

“너, 이리 오렴.”

손짓을 받은 사람은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미나였다. 그녀는 부름을 받자 조심스럽게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구미호가 한 번 더 손짓했다.

“내 옆에 앉아.”

미나는 마치 여왕님의 부름을 받은 시녀처럼 공손히 다가가서 구미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젊은 여자와 나란히 있으니 할머니 구미호가 더욱 나이 들어 보였다.

“예쁘기도 해라.”

구미호가 가늘고 마른 손가락으로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손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어깨까지 미끄러졌다. 구미호는 허리를 숙이고 미나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젊고, 아름답고, 생기 있는 몸이지. 사내들은 이런 몸을 좋아한단다. 젊으나 늙으나 똑같이 말이야. 그러니 어떤 여인인들 젊음을 마다하고 아름다움을 멀리 하겠니. 안 그래?”

안 그래? 라고 묻는 순간 미나가 우뚝 굳었다. 굳은 몸이 감전당한 사람처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나의 몸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빨대를 꽂아 쭉 빨아 당기는 것 같았다. 몸 안의 것들이 빨려나가는 것처럼 피부가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사람의 몸 하나가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줄어들더니 주먹만 한 크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가 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것을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사람의 가죽이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회색의 털이 부스스 난 짐승이었다. 윤기 없이 빳빳한 털, 네 개의 다리, 둥그스름한 몸 끝에 길고 가는 꼬리. 그 꼬리만 보면 정체를 알 수 있는 동물. 바로 쥐다.

새끼 고양이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회색 쥐가 바짝 마른 몸을 하고 죽어 있었다.

“바로 이런 몸을 말이다.”

고혹적이라고 할 목소리가 쥐의 시체 위에서 울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과연 전설 속의 존재가, 이야기 속에서 전해 내려온 것과 하나도 다름없는 모습 그대로 우아하고도 요염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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