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하우스(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 그게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보고 나서 대응하면 이미 늦다고, 이 수련을 시작한 뒤로 서른일곱 번 말씀드렸습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차분하게 나무라는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 당신이 저보다 빠를 수는 없습니다. 저보다 날랠 수도 없고 저보다 예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보고 따라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실패합니다.
잘난 체 심하고
- 조금 힘들다고 자살하시려는 겁니까? 아, 공격이었군요. 실례했습니다.
독설가에
- 뭘 하시는 겁니까? 뼈가 부러졌으니 먼저 병원에 다녀오라고 하는 요괴는 없습니다. 아직 잡혀 먹히지 않아서 잊으신 것 같은데 저 역시 요괴입니다. 먹음직스러운 당신의 몸을 무방비로 만들지 마시죠.
인정사정없는 잔소리꾼 여우였다.
나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생각하지만 여우 쪽에서는 열등생 제자의 무료과외 정도였을지 모른다. 그런 나날을 꽤 오래 보냈었다.
죽을힘을 다했으나 결과는 백전백패.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 구미호에게 이길 가능성도 사실은 거의 없을지 몰랐다. 나를 짓누르고 목 위에 손톱을 세우는데도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당장 반격할 방법도 구미호로부터 벗어날 길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 조각의 기억이 되살아난 이후로 나는 좀 더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구미호는 한 발과 한 손만으로도 효과적으로 나를 제압한 뒤, 뾰족한 손톱으로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붉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의사가 수술 전 환자의 몸에 마킹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대로 선을 따라 살을 찢고 나를 산채로 잡아먹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주둥이로 흥건히 침이 고여서 셔츠 위에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침이 셔츠에 닿으면 기분 나쁘게 젖어드는 것과 달리 유독 주머니 위에 떨어지는 침방울만은 지글거리며 기화해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어서 나도 두 번째로 일어났을 때에야 확실히 알아차렸고 구미호는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상의의 주머니…그 안에는 여화의 명함이라던 나무 조각이 들어 있다. 하지만 왜? 아니, 그것을 알아내려고 할 때가 아니다. 여유가 없었다. 구미호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주둥이를 쩍 벌린 것이다.
먹이에 집중한 구미호의 손에서 조금 힘이 풀렸다. 한 번이자 마지막인 기회였다. 있는 힘껏 손목을 돌려 왼팔을 풀어서 주머니 안의 나무 조각을 꺼냈다. 꺼내서 목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한계였다. 거의 동시에 구미호의 이빨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목을 가린 내 손과 함께 나무 조각을 콱 물었다. 코앞에서 구미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캐앵!
여우의 비명이라고 할 소리를 내며 구미호가 튕기듯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괴로운 신음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예상외의 효과였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도망치려면 지금 뿐이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출입문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쾅 - !
통째로 뜯겨져 날아온 문짝에 부딪쳐 나는 다시 방 한가운데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밖에서 문과 함께 나를 날려버린 장본인, 석고 가면을 쓴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마로! 그 놈을 놓치지 마!]
바닥을 뒹굴던 구미호가 이빨을 으드득 갈며 외쳤다. 고개를 든 구미호의 주둥이는 한쪽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 이빨과 붉은 잇몸이 드러나 있었다. 참혹한 상처를 보고 석고 가면의 남자, 마로가 가면을 벗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이국적인 외모가 드러났으나
크르릉…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그 얼굴과 몸은 곧 짐승의 것으로 변했다. 여화와 다른 점이라면 꼬리가 세 개 뿐인 것. 산 넘어 산이라더니 구미호 넘어 삼미호다. 하지만 나무 조각은 구미호의 이빨에 산산조각 나버렸고 괴로워하던 여화도 이제 악에 받친 표정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두 마리의 화난 여우 요괴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쪽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포악한 짐승의 모습 위로 분노를 담은 요기가 서리서리 맺혀 공기를 흔들었다. 피부가 간질거린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불편한 얼굴을 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가운데서 여우들의 기운을 제대로 맞고 있는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처럼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러나 힘든 것과 별개로, 양쪽의 여우 두 마리가 쏟아내는 기운을 느끼면서 내 몸은 확실히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몸 안의 근육을 고르고 있으려니 기억 속의 목소리가 바로 조금 전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온다.
- 언제라도 포기하시면 잡아먹어 드리겠습니다.
그럴 생각 없었다.
크릉!
거칠게 포효하며 꼬리 셋인 여우가 먼저 움직였다. 그쪽으로 잠깐 신경 쓰는 사이에 시간차를 두고 구미호가 달려들었다. 앞뒤에서 좌우로 피할 범위까지 고려하여 엇갈리듯 조이는 포위였으나 나는 이미 그곳을 벗어나 있었다. 마로가 움직이는 순간 바닥을 찬 다리가 내 몸을 3m 위까지 끌어올렸다.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를 붙잡아 매달리기 충분한 높이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뛰어오를 거라고 생각 못했는지 여우들이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저 놈이!]
구미호가 약 오른 얼굴로 다리를 굽혔다.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다. 팔에 힘을 줘서 샹들리에 위로 몸을 끌어올리자 천장 안에서 뭔가 우두둑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미호가 뛰어오르는 순간, 체중에 힘을 실어 발을 밀었다. 천장이 확 뜯겨나가며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샹들리에와 함께 구미호를 짓눌러 버릴 셈이었지만 그녀와 부딪친 순간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화는 도약하던 그대로 팔을 휘둘러, 나를 샹들리에와 함께 출입문 쪽 벽까지 날려버렸다. 날려가며 몸을 웅크렸지만 등과 다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벽과 샹들리에 사이에 끼어버린 채로 짓눌린 쪽은 나였다.
이쯤 되면 갈비뼈나 팔다리 중 몇 개는 부러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바닥에 떨어진 몸이 의외로 멀쩡하게 움직였다.
[하! 네가 감히…]
샹들리에를 날려버리고 도로 착지한 여화가 나를 보더니 이빨을 바득 물었다. 이 정도의 타격을 받고도 움직이자 기분상한 모양이었다.
[여화님, 저 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마로가 여화의 반대편에서 나를 포위해 오며 말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알았어!]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여화가 소리쳤다. 나를 노려보는 눈에 노기와 굶주림이 섞여 이글거렸다.
[좋은 냄새가, 수백 년 만에 맡아보는 맛있는 냄새가 났단 말이다. 평범치 않고말고. 모를까보냐!]
여화의 손톱이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들이닥쳤다. 그것을 어떻게 피하고 있는지 나도 모른다. 독 오른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뺨이나 목 앞으로 지나갔다. 피하고 도망치는 나를 쫓아 온 여화의 손에 방안의 집기며 장식물 따위가 산산조각 났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둥 뒤로 우르르 숨었다.
[망할! 어째서!]
잡힐듯 말듯 하면서 좀처럼 손끝에 걸리지 않는 나에게 여화가 외쳤다. 화가 단단히 난 기색이었다.
[인간 따위가!]
외치며 휘두른 손에 분수대가 깨져서 흩어졌다. 대리석 파편이 사방으로 날리고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여화가 파르르 떠는 눈꼬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여우와 겨룬단 말이냐.]
질문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서 묻는다. 가능할 리 없는 현실을 보고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듯이, 기억 속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그가 내쉬곤 하던.
나를 노려보던 여화의 눈이 커졌다.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은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여화는 바닥을, 정확히는 바닥에 흥건히 고인 물을 보고 있었다.
깨진 분수대에서 쏟아진 물이 퍼져 만든 웅덩이다. 그 표면이 거울처럼 방안의 풍경을 반사하고 있었다. 깨지고 부서진 벽, 기둥, 집기들과 웅덩이 옆에 서 있는 여화의 모습, 그녀의 뒤로 다가온 마로가 보였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가 더 있었다. 분명 방 안에는 없는 한 명이.
[너는 무엇보다 그 성미를 고쳐야 한다고 팔백아흔여섯 번 말했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깔보듯이 이야기하는, 사람 모습을 한 요괴가 있었다. 그를 본 여화가 움찔 뒷걸음쳤다. 두려움으로 인한 행동이라는 것을 짐승으로 변한 얼굴임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뒷걸음치는 것과 함께, 털이 부스스한 그녀의 몸은 씻어낸 것처럼 매끈해지고 뾰족한 얼굴이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여화가 몸을 오싹 떨었다.
“살아있었나요? 그럴 리가 없…”
[너와는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여화의 말을 자르며 그가 대꾸했다. 여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처음 만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단단히 겁에 질린 모습이다. 어떤 사이인지 몰라도 여화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기는….
조각 나 떠오른 기억 속에서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는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였다. 내게도 확실히 그랬다. 코앞에서 짐승의 얼굴로 으르렁거리면 서리서리 뻗어 나오는 요기에 밀려나 대항하려는 의지가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 요괴를 상대로 싸우려면 죽을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우들 사이에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성미 고약한 구미호라도 두려워할만 했다.
웅덩이에 반사된 방 안에서 그가 귀찮은 얼굴을 하며 내게 시선을 옮겼다.
[그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취향은 존중 하겠습니다만 일단 의뢰를 받은 몸이라 억지로라도 모셔가야겠습니다.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사무적으로 내게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나가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그가 물속에서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웅덩이의 표면에서 흔들리는 물그림자에 불과한 손이었다. 저것을 잡을 수 있는 건가? 손을 대면 물에 파문이 생기면서 사라져버리는 거 아니야?
의심하면서도 나는 웅덩이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물에 닿자 표면이 조금 흔들린다. 천천히 손을 좀 더 집어넣었다. 바닥에 고인 물의 두께는 기껏해야 1cm, 그러나 내 손은 그 안으로 손목까지 잠기고 있었다. 잠기면서 물 안으로 들어간 손이 표면에 반사되었다. 반사된 방안의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확 끌어당겼다.
“우악!”
잠깐 허공에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가 딱딱한 바닥에 몸이 부딪쳤다. 2m쯤 높이에서 떨어진 기분이었다. 부딪쳐 아픈 곳을 문지르며 일어나자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선반, 공구들, 휑한 바닥. 어두컴컴한 내 작업장이었다. 여우의 소굴을 벗어난 것이다.
“돌아왔군요.”
유하의 목소리가 계단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계단의 모퉁이 앞에서 난간에 붙잡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려던 길인지 거기에서 내려오던 길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자세다.
“구미호와 싸운 것 치고는 멀쩡하네요.”
여기저기 찢기고 상처 난 내 몸을 훑어보는 표정이 냉랭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럴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백은호가 대꾸했다.
“제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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