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하우스(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무사해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유하와 잘난체하는 백은호 밖에 기다려주지 않아도, 돌아오니 기쁘다. 안도가 되었다.
몸 여기저기가 욱신욱신 아픈 것만 빼면 잠시 나쁜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구미호의 소굴이 그만큼 현실감 없다는 게 아니라 이곳이 그 정도로 안심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컴컴하고 조용한 이 건물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엇으로부터든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요금을 정산해 주시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태도로 백은호가 말했다. 그러나 가늘게 뜬 눈이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다. 즐거운 내심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만 숨기는 것 같은 표정이다. 이미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유하가 더 싸늘해졌다. 그녀는 위층으로 휙 올라가더니 금세 도로 내려와 한 손에 들고 있던 하얀 것을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술병이었다. 백은호가 두 번째 왔을 때 술상에 내놓았던 그 술병이다. 18세기의 청화백자라나 뭐라나. 그때 술병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떠오르자 대강 짐작이 갔다.
“설마, 그 술병을 받는 대가로 나를 꺼내준 거야?”
내 말에
“그렇습니다만?”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백은호가 대답하고 유하는 코웃음 소리를 냈다.
“요괴가 대가도 없이 인간을 위해 움직여 줄 리가 없잖아요.”
아니, 난 구하러 와준 줄 알고 조금 감동했었는데. 백은호에게 사용한 약간의 감동이 아까워졌다.
“그런데 안주는 없습니까?”
술병을 흔들어 안에 술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백은호가 물었다.
“여기를 술집 취급하려면 마시고 난 뒤 술병은 두고 가세요.”
유하가 쏘아붙였다. 백은호는 술병을 들어 보인 다음 거기에 입을 대고 조금 마시는 것으로 우아하게 항복을 선언했다. 유하는 그것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가버렸다. 어쨌든 술병을 뺏기게 된 셈이어서 단단히 삐친 것 같다. 그건 나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래서 내게도 화가 난 건가.
유하가 가고 나자 그는 태연히 술병의 입구를 막고 그것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여러 가지로 남는 장사인지 만족한 얼굴이었다.
“네 이름, 은 은(銀)에 여우 호(狐)였지?”
그리고 성은 흰 백(白). 백은호(白銀狐)라니, 정말 쓸데없이 정직한 이름이다.
그러나 어울린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우로 변했을 때의 그는…
“필요 없다는데 굳이 지어준 이름을 도리어 제게 묻는 것도 우습군요.”
“내가 이름을 지어줬어?”
뜻밖의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제가 보낸 손님을 거절하셨다던데, 그러고도 에메랄드 하우스로 찾아간 이유는 뭡니까.”
백은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과거의 일이 조금 떠오른 후로 어쩐지 그가 더 친근해진 느낌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별로 가려고 했던 건 아니…인 건 아니지만 갑자기 끌려들어 갔어. 나도 그렇게 대책 없이 마구잡이로 뛰어들 생각은 아니었다고.”
“반박의 근거로 삼을 전례가 많아서 신뢰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만 일단 믿어드리겠습니다.”
그냥 못 믿겠다고 해.
“어쨌든, 다녀오신 성과는 있습니까?”
글쎄, 있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들어가자마자 먹이 취급이나 당하고 도망쳐 온 상황이라 건진 건 거의 없지만 의문이 몇 개 생기기는 했다.
“별로. 그런데 그 사라졌다는 약혼자, 부자였어? 아니면 뭔가 대단한 직업이라든가.”
졸부 취향의 휘황찬란한 분위기로 보나 구미호가 한 말로 보나 보통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거기에서 본 두 사람. 만난 적 없는데 낯이 익다면 짐작할 수 있는 데는 하나뿐이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얼굴을 볼 방법이야 요즘 같은 때에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분명 컴퓨터 모니터나 TV의 화면 안에서 스치듯이 봤다는 거겠지.
백은호는 조금 생각해 보는 체 하고 나서 이내 답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OT전자 비서실에서 6년째 근무중이고, 나이에 비해서는 직급이 높은 편이라지만 월급쟁이 수준은 거기서 거기겠지요.”
국내에서는 손꼽힌다는 OT그룹 모회사 비서실 소속의 월급쟁이를 두고 고소득 자영업자다운 발언을 한 백은호가 이어서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월급 외의 부분에서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그 회사의 비서실에서 하는 일은 여러 가지로 비밀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더군요.”
에메랄드 하우스도 그 비밀 중 하나일까? 그런 곳에 출입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돈, 혹은…
- 간을 달라면…다른 사람의 간을.
여화가 말했었지.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오싹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내가 에메랄드 하우스 안에 있을 때, 그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 봤어? 여우 말고.”
“보기는 했습니다만.”
왜 묻느냐는 투로 백은호가 대꾸했다.
“사람이었어?”
정말로 궁금했다. 여우에게 공격당하는 나를 보고 즐거워하던 모습도, 잠시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을 여우에게 바친다는 말도 내가 아는 사람의 범주는 아니었다.
백은호는 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한숨 대신 대답했다.
“여우에 대해 한두 가지 알려드리지요. 우리는 잡식성으로 동물이나 열매나 썩은 고기도 마다 않고 먹습니다만, 생계를 위한 식성과 달리 진화를 위한 식성에는 오로지 하나, 인간만을 필요로 합니다.”
가는 눈매 안에서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당신들의 피와 살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당신들로부터 얻는 기운이 짐승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만들어줍니다. 사람이었냐고요? 당연히 사람입니다. 여우가 원하는 것은 사람이지 다른 요괴가 아니니까요. 굴에 사는 여우를 제외하고 어떤 요괴도 그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물그림자를 통해서만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금 접한 정보로 나는 혼란해졌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였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그러면 나는 어떻게 거기 들어간 건데? 사람만 갈 수 있다면서.”
지상으로부터 3m를 단번에 뛰어오르고, 벽에 금이 갈 정도로 부딪치고도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고, 구미호의 공격에 짐승의 반사신경과 맞먹는 반응을 보였던 내가 사람일 리 없지 않은가.
타당한 의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백은호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매번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지겹군요. 약속을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어쨌든 말해두겠습니다만 당신은 확실히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약속 때문에 물어도 대답해줄 수 없습니다.”
“약속이라니, 누구와?”
내 질문에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입니다. 해명 도령. 자신에 관해서 무엇도 알려주지 말라고, 당신이 부탁했습니다.”
내가? 왜?
단단한 땅인 줄 알았던 곳에 발을 딛었는데 함정인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스스로 파 놓은 함정이었다. 기억을 되찾는 가장 큰 방해꾼이 바로 나 자신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는 백은호에게 그런 부탁을 한 걸까.
과거의 나를 끌고 와서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누구인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현재를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백은호가 나직이 한 말이 요괴의 성의 없는 생각인지 아니면 뜻밖의 위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감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나를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흙탕물 같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우습기도 했다.
유하도 그렇고 백은호도 그렇고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마다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장 못 믿을 인간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거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 것 같다. 백은호가 나를 향해 “기분이 좋아지셨으면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죠.”라고 말한 것이다. 기분이 좋아서 웃은 게 아니라고 알려주려다가 요괴에게 미소와 조소의 차이를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너도 전설 속의 구미호처럼 누군가와 결혼해서 인간이나 되어버려.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게. 마음속으로만 불평했을 뿐이다.
“여화라는 구미호 말이, 가끔 손님들이 여우에게 줄 사람을 데려온다더라고. 여화가 간을 달라고 할 때 말이야. 최근에도 그런 사람 하나를 손님들 앞에서 먹…죽인 것 같고. 전설에서 여우는 사람이 되려고 간을 먹는다던데 그런 악업을 쌓아서라도 사람이 되고 싶은 건가?”
내 말에 백은호가 무심히 대답했다.
“악업의 의미를 모르니까요.”
그렇게 오래 사는데 모를 리가 있냐. 수백 년을 살았으니 주워듣기만 해도 전문가 수준일 텐데. 그러나 백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날 때부터 짐승인 저희는 영혼이 없습니다. 혼이 없으니 환생한 적도 없고 전생도 후생도 모릅니다. 업은 생을 거듭하여 살면서 전생의 대가를 후생에서 받는 것인데 현생밖에 아는 바가 없으니 업을 두려워 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짐승인 것입니다.”
자신도 요괴인 주제에 냉정한 소리를 한다. 그리고는 차분히 이어서 말했다.
“그렇더라도 보통은 날과 시를 가려 업을 가진 자만 먹습니다. 아무나 잡아먹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는 억울할지 몰라도 그것이 전생의 죄라는 거겠지요.”
그건 너무 요괴편의적인 생각 아니야? 전생이라는 게 전가의 보도처럼 그렇게 막 휘둘러도 되는 건가.
“잠깐, 그럼 나도 업이 있어서 구미호에게 먹힐 뻔했다는 말이야?”
이쯤에서 한 번 더 백은호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저에게 잡아먹혔을 겁니다. 확실히 도령이라면 업이 없어도 탐낼 만합니다만.”
말하면서 이쪽을 보는 눈에는 분명 굶주린 기색이 보였다. 과거에 여우였을 때 몇 번이나 봤던 그 눈이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 으르렁거리는 듯한…방금 내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겠지. 백은호의 눈치를 힐끗 살폈지만 이미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후였다. 그가 굶주린 여우 요괴로 돌아가기 전에 서둘러 대화를 이었다.
“그 구미호와 아는 사이 같던데, 손님의 약혼자가 거기 갔었는지 물어봐 줄 수 있을까?”
혹시 잡아먹었는지 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겁니다. 거짓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너한테 꽤 겁먹은 것 같던데.”
“지은 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거기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작정하면 저도 달리 손을 쓸 방법은 없습니다. 약점이라도 잡지 않는 이상 무리입니다.”
약점이라…. 딱히 생각나는 약점은 하나뿐이다.
백은호의 눈치를 살피며 그것을 이야기하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 여우는 나를 잘 아는 것 같다. 그는 준비를 하겠다며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가려던 백은호는 출입문 앞에서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시다면, 이번 일을 확실히 맡으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못 박아 말한다. 어차피 이렇게까지 연관된 이상 그만둘 수도 없잖아.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그 여자는 그때 왜…
“이봐, 그거. 네가 시킨 거야?”
나가려는 백은호에게 물었다. 백은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명함 말이야. 사라진 약혼자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데, 그걸 깜박 잊고 놓고 갔을 리가 없잖아. 그거, 네가 시킨 거냐?”
단정한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라면, 반드시 손 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짓말도 핑계도 없이 순순히 말한다. 이제 와서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그만 둘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여우는 나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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