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하우스(7)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돌아갔던 백은호는 그날 밤 늦게 다시 찾아왔다. 그가 온 것을 본 유하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별다른 말이나 행동도 없이 제 방으로 휙 가버리는 게 전부였다.
뭐라고 한 소리 듣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는 안도했다. 백은호가 가고 나서 팔의 상처를 봐주겠다면서 고문 같은 치료를 한 덕분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도 모른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긁힌 자국에 가까웠다. 치료를 당한 뒤 한동안 욱신욱신 아팠지만 지금은 그것도 가라앉아 있었다. 몸 여기저기 멍든 곳은 많았다. 하지만 그뿐, 구미호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사기라고 해도 될 만큼 멀쩡한 것이다. 이런데도 인간이라고?
따져 보면 백은호도 어차피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우 요괴일 뿐이다. 사람이라느니 약속이라느니 모두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어쩐지 안심했다.
내가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불안정한 기분이 이따금 들었었다. 아니면 어때 하고 자신을 위로해도 잠깐의 속임수에 불과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당신은 확실히 사람’이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자 발이 땅에 붙는 것 같았다. 이 세계의 인력권 안에 안전하게 속해있는 느낌이 든다.
뭐, 그렇더라도 평범하고 일반적인 세계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준비 되셨습니까?”
백은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준비 됐어.”
내 준비라야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으로 백은호가 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있는 게 전부다. 붉은 색으로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호한 것을 그려놓은 만 원권 지폐 크기의 노란색 종이였다. 통상 괴황지에 경면주사를 써서 그리는, 말하자면 부적인 것이다.
“정말 이것 하나로 괜찮은 거야?”
백은호에게 설명은 충분히 들었지만 가진 거라고는 부족 쪼가리 하나뿐인 채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역시 불안했다.
“여러 장이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 끝이라는 말은 단순히 이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는 거겠지? 이를 테면 내 생명이라든가 목숨이라든가 내일의 일기예보를 보는 거라든가 그런 게 끝이라는 말이 아니고.
백은호는 내 진심어린 질문을 무시하고 아까 했던 설명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넓은 공간은 피하고 부적을 사용하는 모습을 들키지 마십시오. 시간을 끌어주시는 만큼 더 정교한 술법이 가능합니다만 어차피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으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저도 만일을 위해 준비는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쪽은 회색 슈트와 돋보이는 노란색 넥타이에 조끼는 물론 커프스버튼까지 갖춘 차림이었다. 얘는 싸울 준비를 한 건지 오페라 하우스에 갈 준비를 한 건지 모르겠다. 손에 들고 있는 부적 다발이 꽃다발처럼 보일 지경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면 어쩌지?”
“바깥에서라도 어떻게든 부적을 사용해 보십시오. 제 쪽에서는 건물 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렵겠지만 해명 도령에게 일을 맡기는 마당에 상황 탓을 할 수는 없겠지요.”
탓할 생각도 없을 만큼 기대하지 않는 나라서 미안한데 말이다, 지금부터 여우 소굴로 들어가서 혼자 죽도록 뛰어야 할 사람이 바로 그 나거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불만에 찬 내 얼굴을 못 본 체하며 백은호는 부적을 한 장 뽑아들었다. 뭔가 신기한 걸 보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번 손끝을 털어 부적을 흔들었을 뿐이다. 이걸로 끝? 실망한 순간 흔들린 부적의 끄트머리에서 노란 불꽃이 확 타올랐다.
백은호는 불과 연기가 오르는 부적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손목을 움직였다. 마치 불꽃으로 허공에 뭔가를 쓰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한 자를 썼을 때 부적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 재가 뿌옇게 허공에 퍼지는 것 같다.
아니, 재가 아니라 눈앞이……흐려졌다.
시야가 몽롱하니 흔들렸다가 점점 밝아졌다. 눈이 부시다. 지금은 한밤중인데. 눈앞에 푸른 잎과 청명한 하늘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화창한 봄날의 광경이었다.
‘들어왔다.’
여우의 소굴이다. 명함을 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끌려 들어왔던 그 장소였다. 나무 사이로 화사하니 꽃을 피운 데이지와 프리뮬러가 보였다. 불과 10시간 전의 과거에 저 길을 지나갔다가 인도 왕비의 무덤을 닮은 건물에서 여우에게 사냥 당했었다. 그래놓고 만으로 하루도 안 되어서 다시 여기로 왔다는 말이지.
여화와 마로, 두 여우의 사이에서 도망치고 던져지고 나뒹굴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온몸이 욱신거렸다.
내가 미쳤지.
투덜거리며 그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꽃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공기는 따뜻했으며 냄새는 향기로웠다. 눈을 홀리는 숲속의 광경도 여전했다. 그리고 그 길이 끝나자 금빛의 벽과 녹색 지붕의 에메랄드 하우스가 나타났다.
건물의 출입구 앞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석고 가면을 쓴 남자, 마로가 서 있었다. 나를 봤을 테지만 미동도 않고 있다. 하얀 석고 가면에 가려져 이쪽을 바라보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움직임 없는 모습이 오히려 이쪽을 단단히 겨누어 노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기색이 바뀌면, 걸음걸이 하나만 흐트러지면, 시위에 매겼던 살처럼 날아들 것 같다. 잔뜩 당겨놓은 팽팽한 경계가 느껴졌다.
일부러 의식해서 숨을 쉬어야할 만큼 긴장해서 칼날 위를 걷듯 걸음을 내딛었다. 마로와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젠장, 어차피 거쳐야 할 관문이다. 저 에메랄드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였다. 어차피 기대 안 하니까 부담 갖지 말라느니 하는 백은호였지만 이쪽도 체면이라는 게 있다.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분명히 가면 너머에서 들려왔다. 저 가면 안의 얼굴은 지금 사람일까 여우일까.
“통행증은 없지만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썩 잘해낸 것 같다. 긴장한 기색을 감추고 태연히 말을 걸자 마로는 어깨가 굳은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오가고 있는지 몰라도 잠시 말이 없다.
“어제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야 해서 말이야. 여화씨도 서운했을 걸.”
생각을 방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곤란한가? 여의치 않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잡아먹힐 뻔했다가 다른 여우의 도움으로 도망친 인간이 하루도 안 되어 다시 왔다.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래 뵈도 수백 년 만에 만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먹이거든. 업이 없는데도 잡아먹으려 할 정도로 말이다. 거절할 수 없다. 그 가면 안에서 나를 보는 눈은 분명 그때와 같이 굶주림과 식욕으로 가득차서 이글거리고 있을 테니까.
안 그래?
“기다려라.”
마로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화에게 보고할 셈인가 보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좋다던 백은호의 말도 있으니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건물 벽을 따라 세워진 작은 장식용 대리석 조각들을 하나 둘 세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마로가 다시 나오더니 말없이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기는 했지만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다는 듯이 노려보는 여우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니 긴장으로 허리가 아파왔다. 마로는 내 뒤에서 서너 발짝 거리를 두고 조용히 따라왔다. 서너 걸음이라야 여우의 도약력이라면 한 순간이다.
등 뒤가 간질거리는 채로 복도를 따라 쭉 걷다 막다른 곳에 있는 여화의 방에 이르렀다. 방안은 처음 들어갔을 때와 별로 차이가 없었다. 싸우느라 깨지고 부서진 것들은 감쪽같이 제 모습으로 돌아가 그 일이 정말로 악몽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오늘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이다. 기둥 사이마다 놓인 카펫이며 쿠션들이 한산했다. 춤추는 무희도 없었고 가면을 쓴 여자들도 없다. 방안에는 오직 하나, 휘장 안에 도사리고 있는 여화뿐이었다.
[네놈…]
나를 보고 적의를 감추지 않으며 으르렁거리는 구미호 한 마리가.
“아직 손님 맞을 준비가 안 되었는데 너무 빨리 방문했나?”
구미호의 찌르는 듯한 요기를 받아넘기며 내가 물었다. 이래놓고 뒷감당은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뭐 겸손한 먹이나 버릇없는 먹이나 잡아먹기는 매한가지고.
[천둥벌거숭이 같으니라고…]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장 안에서 구미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넘실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 짐승의 뾰족한 귀, 흉맹하게 뻗은 팔과 그 손끝에서 갈고리 모양 휘어진 손톱이 불빛과 함께 흔들렸다.
[네가 그의 위세를 믿고 어리석은 걸음을 했구나.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더냐. 이곳은, 이 자리는, 나 여화의 굴이다. 내 숲 안에 내가 판 내 여우굴이다. 제 아무리 그인들! 이곳만은 범하지 못할 터인즉!]
누런 털로 덮인 몸이 휘장을 뚫고 튀어나왔다. 총알 같은 빠르기였다. 대비하고 있어서 간신히 피했지만 돌아보기도 전에 그 몸은 맞은편 벽을 박차고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몸을 숙여 피했으나 어깨에 긁힌 상처가 생겼다.
[감히 돌아와?]
짐승의 것으로 변한 여화의 얼굴이 일그러져 꿈틀거렸다. 탐욕과 굶주림에 더해 분노까지 겹친 그녀의 눈은 마주보기 힘들만큼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로는 출입문 옆에 지키듯이 서서 고요히 노려볼 뿐 움직임이 없다. 그 편이 더 곤란했다. 백은호는 넓은 곳을 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적을 사용하라고 했다. 그러자면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복도 정도가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무리다. 게다가 화가 나서 달려들기만 하는 여화에 비해 그는 아직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산채로 사지를 뜯어내 주마!]
노한 구미호의 포효가 울렸다. 여화의 날카로운 발톱이 몇 번이나 내 코앞을 스친다. 과연 백은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이 속도도 힘도 반응도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분노에 휩싸인 그녀의 공격은 터무니없이 정직했다. 공격의 패턴도 단순했고 사전 동작도 알아차리기 쉬웠다. 생각 없이 분노를 쏟아내고만 있기 때문이다.
여화의 공격을 피하며 마로를 확인했다. 아직 나설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만일 그까지 합세한다면 분명 위험했다. 그러나 방에서 나가려면 그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쯤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이노옴!]
으르렁거리는 외침과 함께 구미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바로 어제 1톤에 가까워 보이는 커다란 샹들리에를 나와 함께 날려버렸던 그 공격이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낸 순간 내 몸이 뒤로 날아갔다.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려간 몸이 출입문에 부딪쳤다. 그리고는 출입문과 함께 복도로 내동댕이쳐졌다.
어제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어제는 마로가 밖에서 부수고 들어온 문에 함께 방 안으로 나가 떨어졌었지. 구미호의 주먹을 막았던 양팔에서 뼈가 갈라지는 듯한 고통이 번졌다. 이번에야말로 부러진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쨌든 아직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방에서 여화와 마로가 뒤쫓아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속도에서는 분명 진다. 그러니 오래 끌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래 끌 필요도 없었다.
있는 힘껏 달려 복도의 모퉁이를 돌며 소매 안에 끼워둔 부적을 꺼냈다.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허공으로 던진다.
내 손을 떠난 부적이 허공에 찰싹 붙듯 멈췄다. 아주 잠깐 부적이 붙어있는 허공에 희뿌연 반사광이 스치는 듯 했지만 곧 부적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바로 뒤에서 구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을 떨쳐내며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앞으로 한 발, 그리고 한 발을 더 뛰었다.
두 번째 발을 디뎠을 때 구미호의 손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그것을 매단 채로 한 발 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걸어가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앞은 막다른 벽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성공.”
목이 꽉 움켜잡혀 숨쉬기 곤란한 채로도 히죽 웃음이 나왔다.
“너는 무엇보다 그 성미를 고쳐야 하는 거다. 팔백아흔일곱 번째 말한다만.”
내 목에 감긴 여화의 손을 아주 쉽게 떼어내 버리며 백은호가 말했다.
[여화님!]
마로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구미호를 돕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수면에 비친, 물그림자 속의 이곳은 오로지 백은호의 영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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