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21화 (21/218)

에메랄드 하우스(8)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구미호의 약점인 급한 성미를 이용하자고 했을 때 백은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적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에메랄드 하우스에서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를 이용한 것처럼, 부적을 이용하면 허공에 수면과 같은 반사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때는 소굴 안의 모든 반사체를 다 확인하고 다닌 끝에 도령을 찾았지만 말입니다.

잘난 체 공치사하는 것도 빼먹지 않으며 그가 설명했다. 부적을 이용하여 눈앞에 커다란 반사체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반사된 공간을 백은호의 영역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마치 전면 거울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부적을 집어던져서 반사된 공간은 맞은편 벽까지의 몇 걸음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화가 나서 단순해진 구미호는 나를 잡으려는 욕심으로만 가득해 자신이 백은호의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그 결과 두 평 남짓의 공간에 갇혀 백은호에게 팔목이 잡힌 채로 떨게 된 것이다.

그녀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젊은 쪽이었다. 괴기스럽던 할머니 구미호의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도 야릇하니 몸을 틀면서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심장이 떨리는 걸 보면 역시 요물이지 싶다.

“섭…”

애처로운 눈길로 백은호를 올려다보며 구미호가 속삭이듯 불렀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아마도 본명일까? 그러나 이름을 불린 백은호는 내가 익히 아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숨 쉬기 직전의.

“연기가 무뎌졌구나. 타이밍도 둔해지고.”

가차 없는 평가에 여화의 표정이 돌변했다. 김샜다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인다.

“무서워하는 연기를 할 일이 도무지 없으니까요.”

연기였어? 뭐 이런 여우같은 여자가 아니, 같은 게 아니고 정말 여우이기는 한데.

여화의 대꾸를 들은 백은호가 입술 끝을 당겼다. 어딘지 무서운 미소였다.

“그렇다면 오랜만에 도움이 되어 볼까? 이대로 밖에 나가면 분명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어볼 기회가 얼마든지 생기겠지.”

말하며 구미호의 손목을 조금 당기자

“섭!”

그녀가 외치며 반대편으로 힘을 줬다. 놀란 기색이었다. 이것도 연기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실감나게 창백한 얼굴이다.

“알았으니까 원하는 걸 말해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조금 팔을 끌어당기는 것만으로 질색을 하며 그녀가 외쳤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그녀에게는 그만큼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백은호는 당기던 손을 조금 늦추고 주머니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사진 속의 사람을 본 여화가 힐끗 백은호의 눈치를 살폈다.

백은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이 늦거나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질문이 없으니 그가 원하는 답이 뭔지 모르는 여화는 아는 대로 모조리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본 적 있어요. 이 남자, OT의 박회장을 따라서 두 번인가 함께 왔었으니까요. 꽤 신임 받는 비서라고 들었어요. 두 번째 왔을 때는 시끄러운 일이 있어서 중간에 떠났지만 첫날에는 회장님과 함께 끝까지 있었어요.”

시끄러운 일? 질문이 나올까 싶었으나 백은호는 내리뜨고 있던 눈 안에서 눈동자만을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여화가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 말했다.

“그날 손님들의 뒤에 꼬리가 붙었지 뭐예요. 어떻게 준비를 해 왔는지 제 소굴까지 발을 들이는 바람에, 제게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손님들에게는 뜻밖의 여흥이 되었지요. 평범한 인간 주제에, 끝까지 발버둥치는 모습이 즐거웠거든요.”

그 이야기인가? 어제 구미호에게 공격당하고 있을 때 구경하던 사람들이 말했던.

- 일전의 그 친구 때는 꽤 즐겼으니 오늘은 참아주지.

그렇게 말했었지.

- 주제를 모르고 발버둥치는 꼴이 볼만했지. 죽을 때까지 말이야.

그런 말도 했었고.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참지 못하고 내가 묻자 백은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해당해서 기분 나쁜 모양이지만 뭐라고 나무라지는 않자 여화도 그의 눈치를 본 다음 순순히 대답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어. 예전에야 사냥꾼이니 도사니 하는 작자들이었지만 요즘에는 경찰이나 어설픈 무당 따위가 죽은 사람의 뒤를 따라 내 굴로 기어들어오고는 하지. 물론 들어오면 먹이가 될 뿐이지만.”

어설픈 무당 비슷한 나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막 해도 되는 거냐. 비위 상하는 것을 참으며 듣고 있자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그 날도 비슷했어. 경찰이었는데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어디선가 도움을 받았는지 부적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우리 아이들도 그만 손님들과 함께 내 방까지 데려와 버렸지 뭐야. 조용히 구경만 하다 돌아갔으면 별 탈이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날 손님이 내게 주려고 가져온 선물을 훔치려다 들켰지.”

말하는 사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여화는 붉은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선물?”

기분 나쁜 예감에 휩싸여 내가 물었다. 여화의 얼굴에 요사한 미소가 번졌다.

“깨끗하고 맛있는 사내아이를 선물로 받았거든.”

명치 쪽에서부터 울컥 하고 욕지기가 느껴졌다. 구미호의 요염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한 순간 새까맣게 물들었다가 구물구물 들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썩은 살에 엉켜 구물거리는 하얀 벌레들이 그 피부 위에서 기어 다니는 것을 본 것처럼 아니, 본 것이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지?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구미호가 날카롭게 물었다. 내 표정에 기분이 상한 목소리였다. 백은호의 한숨이 들려왔다.

“네 본성을 본 거다. 여화. 이제 그에게 네 미혹은 통하지 않는다.”

차분한 그의 설명에 여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대신 거기에는 늙고 추악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

“그래서 네가 그 경찰과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것이 왜 비서가 도중에 돌아가야 할 일이었지?”

자신의 미혹이 깨져서 당황한 구미호와 구미호의 추한 모습에 충격 받고 있는 나는 상관 않고 백은호가 담담히 물었다. 여화도 여화지만 백은호의 이 태연함 역시 요괴의 본성인가 싶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경찰을 데려온 사람이 비서였으니까요. 박회장에게는 하루 동안 임시로 일하는 운전사라고 말한 모양이지만요. 원래대로라면 그 자도 여기에서 나갈 수 없지만 박회장이 VIP고객이라서요. 데려가서 확인할 게 있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어요. 그 후로는 본 적이 없어요. 나도 굳이 묻지 않았고요.”

여화의 말대로라면 실종되었다던 약혼자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 혹은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박회장이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다짐하며 묻는 말에 여화가 나를 흘겨보았다.

“조금이라도 속임수가 있었다면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거울을 볼 때마다 나를 만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될 테지.”

백은호가 담담히 말하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여화는 아픈 얼굴로 잡혔던 팔을 쓰다듬었다.

“흥! 그런 건 알고 있어요. 볼일이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게 해줘요.”

당당한 요구에 백은호는 어깨를 으쓱 움츠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여화는 훌쩍 뛰어서 단번에 마로가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놀라서 외쳤다.

“놔주는 거야? 저 여자가 한 짓을 알…”

그리고 외치다 말고 문득 깨달았다. 저 여자가 한 짓은 동시에 백은호가 하고 있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역시 여화와 마찬가지로 여우 요괴, 그것도 훨씬 강하고 두려운 존재가 아닌가. 그 역시 인간의 살과 피로 배를 채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한 번도 본 적은 없는 것 같지만 배가 고파지면 어디선가 사람을 공격해서 잡아먹는 것이 아닐까.

굶주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를, 과거에 몇 번이나 봤었다.

백은호를 처음 만났을 때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 생각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괴이니까.

말하다 입을 다물어버리자 백은호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질문이 남아있습니까?”

혹시 너도 사람을 잡아먹어?

“…없어.”

묻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어도 괜찮을까. 태연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물론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내 입을 막았다.

백은호가 부적 한 장을 꺼내 뿌리치듯 흔들자 불꽃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라 다시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잠시 후 나는 그와 함께 어두컴컴한 작업실로 돌아왔다.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무사히 돌아온 셈이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게다가 알아낸 것은 남자가 실종된 배후에 요괴가 아닌 인간의 괴물 같은 탐욕이 있다는 것. 거기에 문제는 흐린 날이 아니면 이 건물 밖으로 나가기 힘든 내게 이 이상의 조사가 어렵다는 점이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나갈 수 있다고 해도 상대는 굴지의 재벌가인 OT그룹 회장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접근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백은호라면 방법을 알지 않을까. 돌아온 후로 그는 아까 구미호에게 보였던 사진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손님의 약혼자라던 그 남자의 사진이다. 뾰족한 수는 없지만 일단은 호기심이 있어 나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어?”

그 남자다. 손님인 그 여자가 왔던 날 창고 안에 조용히 서 있던 존재감 없는 혼령. 그렇다는 것은 여자의 약혼자가 이미 죽었고 그 혼이 떠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는 뜻일까.

“왜 그러십니까?”

백은호가 내 기색을 읽고 물었다. 나는 사진을 가리켰다.

“이 남자, 그 날 여기 있었어. 약혼녀가 찾아왔던 날. 말이 없어서 무슨 일인지 몰랐는데 저쪽 구석에 멍하니 서서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거든.”

“그것뿐입니까?”

백은호는 탐색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다른 것을 냄새 맡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아까부터 마음속에 꾹 누르고 있던 질문 같은 것.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술술 알려주고 싶지는 않으니 모른 체하며 대답했다.

“말도 없고 행동도 없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런데 혼령이 되었다는 건 확실히 죽었다는 뜻이고. 이렇게 된 이상 추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인가?”

“손님이 납득해 준다면 그렇겠지만 보통의 경우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왜 죽었는지까지 알고 싶어 하지요.”

하기는 그것이 당연하겠지.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왜 죽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인간을 먹는 여우라든가 괴물 같은 사람들의 낙원인 에메랄드 하우스라든가. 믿어줄 리가 없다.

“시체는 곧 나오겠지만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겠군요.”

백은호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 그 반대 아니야? 그리고 뭘 근거로 시체가 곧 나오겠다는 거지?

“시체가 나오지 않으면 사건도 끝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성의 없는 대답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9시간쯤 지난 뒤였다.

백은호가 떠난 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유리 깨지는 소리에 일어나자 아침이었다. 날씨가 계속 좋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에메랄드 하우스에서 본 사람들을 찾았다.

OT그룹의 회장이라는 사람은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24시간 안에 올라온 기사들 중에서만도 비자금이라든가 뇌물수수와 관련된 것을 몇 개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경제 뉴스, 정치 뉴스, 최근의 이슈, 이미지 검색에 만평까지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밤까지 헛수고 하고 뻑뻑해진 눈을 비비고 있는데, 모니터 아래에서 메신저에 새 메시지가 온 것을 알리는 아이콘이 깜박거렸다.

정직하게도 ‘Silver Fox’란 아이디로 백은호가 두 개의 인터넷 주소를 보내온 것이다. 모두 사건 기사였다. 교통사고로 죽은 경찰 한 명과 바다에서 발견된 자살자의 시신에 관한 짧은 기사가 사진 한 장 없이 게재되어 있었다.

죽은 경찰은 불탄 차량 안에서 새까맣게 탄 채로 발견되었다. 자살자의 옷 안에서는 유서가 나왔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백은호에게 전화하자 불평이 섞인 목소리로 식사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하얀 털을 붉게 물들이며 살아있는 짐승을 뜯어먹는 모습을 연상해 버렸다. 움찔하는 이쪽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그는 ‘식당이라’ 오래 통화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기사, 어떻게 된 거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곧 나올 거라고.”

다짜고짜 묻는 내게 주변을 의식해서 시체 이야기를 빼고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나직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상대는 VIP손님이니 여화는 그쪽에 우리 이야기를 알려줬을 겁니다. 뒤를 더 캐기 전에 서둘러 사건을 종료시킨 겁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뭘 말입니까?”

백은호가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시체도 찾았고, 죽은 이유는 유서에 있을 텐데 뭘 더 할 생각입니까?”

“그 유서가 진짜일 리가 없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백은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건지 그냥 말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다. 조용한 수화기에서 식당 안의 소음이 음악과 섞여 아련하게 들려왔다.

“손님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잔금은 조금 전에 모두 받았으니까요.”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울컥했으나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냐. 여우 소굴에 경찰을 데려갔다가 끌려 나가서 살해당해 버렸다고.

내가 할 말을 잃고 있자 백은호는 식사를 마저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건가?

여화를 놔준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요괴가 인간을 먹는 일은 끔찍하지만 어떻게든 이해가 가능한 범주였다. 종족이 다른 생물을 먹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라면.

인정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까 뭐든 말 좀 해보라고!”

답답한 마음에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까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 때부터 줄곧 내 방의 한 구석에 서서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혼령에게.

말도 없고, 행동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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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하우스(9)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은, 기억이 시작된 이후 최악의 시간이었다.

도무지 말도 없고 대화도 안 되고 반응조차 없는 혼령이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이 이렇게나 스트레스 쌓이는 일인 줄 몰랐다. 한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업장으로 내려가면 작업장 한 구석에, 방으로 돌아오면 방의 한편에, 창고로 들어가면 창고 입구에 서서 지켜보았다. 물끄러미, 그렇다고 나를 똑바로 보는 것도 아닌 어딘지 모호한 눈이었다.

물론 대화는 충분히 시도해 보았다. 달래도 보고 협상도 해보고 애원도 하고 협박도 해봤다. 술상을 차려놓고 권해보기도 하고 혹시 듣지 못하나 싶어 수화도 해보고 노트에 자음과 모음을 써놓고 하나씩 짚어가며 물어보기도 하고, 심지어 그림까지 그려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실패. 이 남자는 나와 대화할 용의가 없다는 것만 거듭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용건이 없다면 왜, 왜, 왜 나만 따라다니면서 쳐다보느냐는 거다. 식사 시간에 유하의 방으로 가면 거기에서도 구석에 조용히 서 있다가 내가 방으로 돌아가면 다시 내 방에 나타났다. 유하의 말에 따르면 식사시간 외에는 3층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타나지 않는 곳은 드레스 룸과 욕실뿐이었다. 최소한의 배려라고 해야 할까. 옷 갈아입거나 씻을 때만은 혼자 있게 해준다니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어떨지. 그렇다고 하루 종일 좁은 드레스 룸이나 변기에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어째서 인간관계도 좁고 그 사람들에게조차 인기 없는 내가 파파라치에 시달리는 스타가 된 기분을 깨달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생활한다는 게 이렇게 끔찍할 줄이야.

아침에 일어나면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서 어슬렁어슬렁 욕실로 가던 내가 잠옷 매무새부터 챙기고 머리도 대충 손가락으로 정돈하고 욕실 문도 꼭 닫고 볼일을 보고 하품할 때도 입을 가리고 방귀도 소리 없이 뀌고 멍청한 얼굴로 TV를 보다가 문득 시선을 의식하고 표정관리 하고 옷 갈아입을 때는 꼬박꼬박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가고 벗은 옷도 아무데나 휙휙 집어던지지 않고 어쩐지 백수처럼 보이기 싫어서 뭔가 열심히 하는 체한다.

그리고 이런 생활이 사흘을 넘기자, 그때부터 나는 슬슬 말없는 시선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한계가 온 것일 수도 있고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다. 내 행동은 다시 하나씩 예전으로 돌아갔다. 결국 혼령에게 스토킹 당한지 닷새 만에 나는 그를 의자나 식탁 같은 집기로 취급하게 되었다.

그래. 창고가 도깨비 소굴인 곳에 스토커 혼령 하나 늘어났다고 별다를 거 있을라고. 무당집다운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생각하지 뭐.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길거리에 흔한 감시 카메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뭐……?’

그리고 그 순간 우연하게도 힌트를 찾아냈다.

‘감시 카메라…?’

정말 그렇잖아.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말없이 지켜보기만 한다. 어디에나 있지만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할 곳, 욕실과 드레스 룸에는 없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혼령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그가 보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방에서도, 작업실에서도, 창고로 가서도.

과연 그랬다. 구석에 멍하니 서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실내의 모든 광경을 조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출입구로 오가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볼 수 있는 곳.

“감시 카메라야? 그걸 말하고 싶은 거야?”

혼령에게 물었지만 닷새 동안 그랬듯이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자 나를 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그의 시선이 모호하게 따라왔다. 첫날에도 그랬었다.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고 눈앞의 광경 전체를 조감하는 눈이었다.

‘아니, 잠깐.’

그가 내내 감시 카메라와 같았다고 하지만 그날 단 한 순간만은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녀가 왔을 때다. 명함을 가지고 그의 약혼녀가 왔을 때 그는 단 한 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었다. 그리고 잠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건 대체 뭐였을까. 약혼녀를 알아봤다고 하기에는 그때 역시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모호한 시선이었다. 그 눈으로, 유하와 이야기하느라 그에게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거기에 의미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감시 카메라 같은 혼령이 되어버렸어도 잠시나마 기억을 되찾고 사랑했던 사람을 바라본 걸까.

헛수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백은호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미묘하게 텀을 두었다가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그 여성과는 마침 오늘 저녁 약속을 했던 참입니다. 도령이 식사를 준비해 주신다면 거기에서 식비를 아끼는 것도 괜찮겠군요. 유하씨의 요리는 일류 식당에 못지않을 테니까요.”

거래도 끝난 손님과 왜 저녁 식사를 하는지 궁금할 새도 없이 그녀와 함께 와줄 수 있다는 말만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내가 그것을 설명하자 백은호는 뜻밖에도 선선히 응했다.

“그렇게 하지요. 뭔가 새로운 거라도 알게 된 겁니까?”

글쎄 라고, 어중간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여기에 오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백은호는 오후 6시까지 오겠다고 약속하고는 과연 그 시각이 되자 1분도 틀림없이 도착했다. 손님도 함께였다. 그녀는 내가 요구했던 대로, 처음 여기 왔을 때와 똑같은 차림에 똑같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작업장 구석에 서 있던 남자의 혼령은 그때와 똑같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직시하고 있다기에는 모호한 눈빛이었지만 확실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비해 부쩍 수척해진 약혼녀를 보면서도 혼령의 얼굴에 감정 같은 것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만은 절대로 떼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본다. 뭘 보는 걸까.

묶기 어중간한 길이의 단발머리, 목에도 귀에도 손에도 장신구 하나 없고, 옷차림은 크림색 블라우스에 회색 치마, 같은 색 재킷이었다. 굽이 낮은 검은 구두를 신고 유일한 장식일 까만 공단 코사지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그 단정하고 수수한 차림 때문인지 몰라도 2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외모에 비해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약혼자를 잃은 슬픔이 남아 수척한 얼굴에 화장기도 없었다.

처음 왔을 때 유하에게 쫓기다시피 떠났던 걸 생각하니 겸연쩍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식사장소는 작업장이었다. 유하는 작업 선반 위에 식탁보와 촛대와 꽃을 가져다가 레스토랑 못지않게 꾸며놓고 식탁예절을 따로 외워야 할 것 같은 서양식 코스 요리를 대접했다.

나로서는 왜 포크와 나이프가 세 개씩이나 필요한지 유리잔이 네 개나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눈치껏 백은호를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은호는 능숙한 화술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혼령과 그녀를 번갈아 관찰했다. 그러나 식사가 거의 끝나가도록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혼령은 움직이지 않고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변화는 없었다.

여자 쪽으로는, 도대체 뭘 확인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난감한 시간만 보냈다. 성의 없는 맞장구나 치며 대화 가장자리를 맴도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결국 후식이 나왔다. 이제 곧 식사가 끝난다는 뜻이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번 일을 겪는 동안 은호씨가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후식으로 나온 젤리를 포크로 깨작거리다 문득 여자가 말했다. 백은호로부터 뭔가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은호씨라니, 백사장님이라든가 그런 호칭이 아닌 것에 조금 놀라서 백은호를 보자 나무랄 데 없이 다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조금 오싹했다.

어쩐지 맛있는 먹이를 앞에 두고 있는 기분 좋은 여우같았다.

“저도 부모님도 충격이 컸어요. 동우씨가 그런 일을…”

여자는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일이란 시신에서 나왔다는 유서의 내용일 것이다. 자살한 이동우는 운전 중 실수로 어린 소년을 죽게 만들었고 시신을 방화 유기한 뒤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경찰은 소년을 불태우고 남은 흔적을 발견했으며 DNA 검사 결과 며칠 전 실종된 아동임을 확인했다. 그 아동이 에메랄드 하우스에 선물로 보내진 아이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런 사람 아니다. 오히려 아이를 살리려고 노력했었다.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착하고, 소심할 정도로 꼼꼼하고, 겁도 많은 사람이었는데…그래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린 걸까요. 너무 겁이 나서?”

그 반대라고. 여우 요괴 같은, 비현실적인 상대에게도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평범한 인간인 주제에.

백은호가 침울해진 여자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나는 조금도 변함없이 무표정한 남자의 혼령을 쳐다보았다.

이봐, 너. 혼령. 정말 뭐라고 한 마디만이라도 해주면 안 되겠어? 답답해서 미치겠다.

그러나 혼령은 말없이, 흐릿하니 모호한 시선으로 여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여자에게 돌린 내 눈길이 그녀가 아까부터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던 코사지에 닿았다. 어쩐지 엉성한 느낌이 드는 모양새였다. 길거리에서 싸게 팔고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단정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식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코사지에서 손을 떼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예쁘네요, 그거.”

거짓말이지만 죄는 아니겠지. 여자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자신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동오씨가 선물해줬어요. 사라지기 며칠 전에…. 갖고 있으면 왠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좀 봐도 될까요?”

내가 묻자 여자는 잠시 멈칫거렸다가 이내 그것을 떼어서 건네주었다. 코사지가 그녀로부터 내게 온 순간에 나는 봤다. 혼령의 고개가 아주 조금 움직인 것을.

“조명이 좀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

중얼거리듯 변명하며 그것을 가지고 식탁을 떠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혼령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온다.

찾았다.

나는 조명등 가까이에서 코사지의 앞뒤를 꼼꼼히 확인했다. 꽃잎 모양의 천이 겹겹이 싸인 앞부분은 헤집어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뒷부분을 보자 검은 천 위에 브로치 핀이 붙어 있었다. 브로치 핀과 천 사이가 뭉툭한 것을 보면 글루건으로 고정한 모양인데 어쩐지 흔적이 난잡했다. 단번에 붙인 것이 아니라 떼었다 다시 붙인 것처럼 가장자리에 하얀 자국이 남아있었다.

“저…왜 그러시죠?”

내가 코사지를 뚫어지게 보는 것이 역시 이상했는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실수가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브로치 핀의 원형 판을 잡고 확 당겼다. 투둑 소리를 내며 뜯어진 천 뒤에서 뭔가 작은 게 나타났다.

엄지손톱 크기의 까만 플라스틱 한 면에 금색 선이 몇 개 그어진, 그러니까 아마도 마이크로 SD카드가 아닐까 싶은 그런 것이 거기에 있었다.

<에필로그>

다음날 인터넷은 누군가 배포한 동영상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군가 라고 하기에는 배포자의 이름이 확실히 적혀 있었는데 문제는 그 이름이 죽은 사람의 것이라는 점일까.

동영상은 길었다. 길뿐 아니라 지루하고 재미없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자동차 안에서 전화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차에서 내려 어딘가 들어간 다음 누군가를 만나고 또 이야기하고 그런 모습을 편집 없이 다섯 시간에 걸쳐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재미없는 영상은 인터넷을 불태우듯 휩쓸었다. 거기에는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며 줘서는 안 될 것을 주고받는 장면이 또렷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제게 빚을 지신 겁니다.”

전날 여자를 보내고 나서, SD카드를 건네 받으며 백은호는 말했었다.

“덕분에 공들인 먹이가 도망갈지도 모르니까요.”

공들인 먹이란 죽은 남자의 약혼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너, 그 여자를 잡아먹을 생각이었어?”

내 질문에 백은호는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런 저속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식으로, 사랑을 나눈다고 하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뭐? 뭐?

어딘지 대화의 포인트가 어긋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당황했다.

“먹…그러니까 식사로, 먹이로 말이야. 그런 식으로 먹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사람을 말입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을 태연하게 지으며 여우 요괴가 물었다. 그는 내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잘 구경한 다음 피식 웃었다.

“저는 여우 요괴입니다. 사람도 당연히 먹었습니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저런 말을 아무렇게 않게 사람 앞에서 하는 저 놈이 잘못된 건지 ‘아, 여우요괴니까 당연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내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잠깐. 그런데 방금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았어?

“어쨌든 제가 사람들을 잡아먹을까 걱정하고 계신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먹지 않고 있으니까요.”

“정말? 왜?”

안도하는 한편 진심으로 궁금해서 대뜸 묻고 말았다.

“어떤 한가한 인간에게 쓸데없이 은혜를 입는 바람에, 그 대가로 잠시 인간을 먹는 것은 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잠시라니 얼마나 말이야?”

무엇보다 유효기한을 확인하려는 내 질문에 백은호는

“백년입니다.”

라는 터무니없는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우에게 백년 정도는 잠시인 거야? 그 시간관념의 차이에 질린 한편, 백은호 같은 여우 요괴에게 백년을 벌어서 여러 사람을 살렸을 한가한 인간이 존경스러워졌다.

“그럼 전 이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 돌아서는 백은호를 보고 나는 뒤늦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는 건, 저 자식은 조금 전까지 내 집 식탁에서 불과 며칠 전 약혼자가 죽은 여자를 꼬시고 있었다는 말이냐!

역시 저놈은 요괴다. 저놈은 요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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