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족자(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로 가면 우체국 맞은편에 3층 건물 있거든. 거기 2층에 문내과라고 의사 선생님 실력이 좋다네.”
“아아, 그 병원. 간호사 중에 이양이 성격도 싹싹하고…”
오늘은 병원 이야기다.
도로 쪽으로 나 있는 창문가에 기대고 서있자면 이따금 누군가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몇 번 들으니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구분도 되었다. 어쩌다 낯선 목소리가 끼어드는 때도 있지만 보통은 두 명이다. 늘 같은 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조용해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는 각자 집으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발소리 같은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아 나는 이 두 사람이 도대체 어디 사는 누구인지 꽤 궁금해 하고 있었다.
올해는 가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가 오지 않아서, 깨어난 이후 하루 빼고는 계속 화창한 날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해 옆 건물에 무슨 상점이 있는지 주인은 누군지조차 몰랐다.
그러니 매일같이 같은 장소에 나와 동네 안의 이런저런 소문들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본 적 없는 마을의 여기저기를 상상하고 한편으로 정보도 모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문내과의 의사 선생님이 점심에 뭘 먹었는지나 이 간호사에게 유치원 다니는 아들이 있다거나 병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폭이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은 한참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뚝 끊어지듯 말을 멈추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들으면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누가 오는 것을 보고 입조심 하듯이, 그들은 갑작스럽게 말을 멈추고 사라져버렸다.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쉬워하는데 길가에 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2차선인 좁은 길이지만 달리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상점가 앞의 도로는 늘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그래도 보통은 볼일이 있는 건물 앞에 차를 세워두는 법이라 작업장 앞에서 차가 서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김사장 계신가아?”
오늘이 그 좀처럼 없는 날 중 하나인 것 같다.
차에서 내린 발소리가 출입문 앞으로 다가오더니 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불쑥 들어왔다. 완전히 대머리는 아니고, 귀 위에서 뒤통수 쪽으로 조금은 남아있어 흔히 주변머리라고 하는 부분이 백발인 노인이었다. 머리숱에 비해 혈색이 좋은 얼굴은 약간의 주름이 있을 뿐이다.
어두운 작업장을 보고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들어오더니 나를 발견하자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처럼 활기찬 느낌이 있었다.
“거기 있으면 대답이라도 하지. 오랜만이네.”
이 사람이 누구인가, 나와는 안면이 있나 본데 어떤 관계인가, 호칭으로 봐서는 일로 알게 된 사이 같고. 그런 생각이 주르륵 지나가는 동안 내 눈은 나를 향해 손짓하듯 흔든 그의 손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에 들린 길쭉한 것을.
그는 내 데면데면한 태도에도 별로 상관 않는 기색이었다. 내가 열린 문에서 빛이 번지는 것을 보고 슬금슬금 구석으로 피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자연스레 들어와서 작업 선반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더니 털썩 앉는다. 여기에 많이 와본 사람 같았다.
“음, 오늘은 뭘 살 게 아니고. 이것 때문에 말일세.”
그는 대뜸 용건으로 들어가 손에 들고 있던 길쭉한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두 개의 봉을 축으로 비단 천이 둘둘 말려 있고 한 쪽 봉의 양끝에는 끈이 이어진 것, 즉 두루마리 족자였다.
‘오늘은 뭘 살 게 아니고’라는 말로 짐작컨대 전에도 여기에서 뭔가 사간 적이 있는 모양이다. 백은호와 가끔 거래하는 것은 알지만 이 사람은 아니, 어쩌면 이 자도 백은호와 같은 요괴일까? 의심이 깃든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보아도 도깨비나 혼령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 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나를 구원할 목소리가 들렸다.
“박선생님 오셨네요. 오랜만이셔요.”
유하가 계단에서 내려오며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드물게 살가운 태도였다. 표정도 밝은 것 같고.
“어이쿠, 선녀님 아니신가. 봄이 되니까 이제 봄처녀시네.”
선녀님은 또 뭐야. 밝은 녹색 원피스에 꽃장식과 레이스가 달린 머리핀을 하고 있으니까 이은상의 봄처녀가 생각나기는 했다.
“진기한 물건을 수집하는 수집가예요. 가끔 찾아오세요.”
내 옆을 지나가며 유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기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귀하고 묘하다는 뜻이지만 여기 와서 귀하고 묘한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단순한 수집가는 아니지 않을까.
“백은호와 관계없이?”
노인에게 차를 내주기 위해 오가는 유하에게 슬쩍 물었다.
“그는 겉보기에 아름다운 물건만 취급하니까요.”
유하가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 노인은 겉보기와 상관없이 신기한 거라면 뭐든 수집한다는 말이겠지. 그래서 그런가. 그가 가져온 두루마리 족자는 상태가 매우 나빠 보였다.
본래는 아름다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보호천이 빛바래고 해진데다 주지인 소나무 그림도 시커멓게 얼룩져 있었다. 족자 아래쪽에 달린 풍진(족자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구슬 등을 꿰어 장식한 것)은 금세 부스러져버릴 것처럼 온통 하얀 실금으로 덮여 있었다.
“일전에 사갔던 족자일세. 한동안 잘 썼네만, 이것이 한 두 달 전부터 슬슬 낡아가기 시작하더니 요새 이 모양이 되더란 말일세.”
두 달 만에 멀쩡한 물건이 이렇게 변했다고요? 혹시 습기 많은 지하실이나 비바람 들이치는 곳에 방치하신 건가요? 족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마뜩찮은 표정을 하고 족자를 내려다보자 노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손을 휘저으며 열심히 변명했다.
“난 자네가 알려준 대로 다 했어. 햇빛 잘 들고 바람 좋은 방에 걸어놓고, 하루에 한 번씩 맑은 물을 한 대접 갖다 주고.”
예? 족자에게 왜 물을 줘요…?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기억이 없다는 게 들통 날 터였다. 힐끗 유하의 눈치를 보는 수밖에. 그녀는 태연히 노인을 상대해 수리가 되면 연락하겠다며 그를 보냈다. 노인이 가면서 “산지 6개월 만에 생긴 일이니 애프터서비스겠지?”라고 물었지만 알 게 뭐야. 6개월 전의 일 같은 건 기억도 없는데.
노인이 가고 나서 나는 유하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저 노인은 어디 사는 뭐하는 사람이며 나와는 어떤 사이였으며 이 족자는 무슨 진귀한 물건이었고 족자 주제에 날마다 물 대접을 받는 이유는 뭐며 잘 보관했다는데 이 모양으로 변한 까닭은 뭐냐고.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는 잘 몰라요.”
예?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말했듯이 박선생님은 수집가이고 가끔 찾아오시는 손님이라는 게 제가 아는 전부예요. 그분이나 은호씨와 관련된 물건은 제가 관리하는 게 아니라서요.”
냉정하게 말하고 그녀는 찻상을 챙겨 총총 떠나갔다. 다만 가다 말고 잠시 계단에 멈춰서 옛다 적선이다 라는 식으로 한 마디 던져 주기는 했다.
“창고의 물품출납서는 확인해 보셨어요?”
창고의 물품출납서? 그런 게 있었어?
거기는 어디까지나 도깨비 소굴이라는 이미지여서 심심하면 도깨비 놀이를 구경하러 가는 게 전부였다. 요즘에도 하루에 한 번은 들르고 있지만 여전히 투명인간 취급이다.
창고에 들어가서 입구 근처 선반을 뒤져보자 과연 두꺼운 공책이 몇 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있었다. 가장 위의 것을 펼치니 작년 12월 10일을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네 달 전이니 잠들기 전 마지막 기록인 모양이었다.
그 위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간격을 두고 이것저것 물건이 들어오거나 나간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꽤 꼼꼼하게, 물건의 모양이나 상태도 묘사하고 특징이라든가 주의해야 할 점을 적어두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내가 정기적으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 한 편에서 약간의 기대는 있었다. 그런 일이 자주 생기고 있으니 분명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어딘가에 기록해 두었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말이다. 그리고 내 방을 샅샅이 뒤진 다음 내가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공책이나 메모지는 물론 CD나 USB 같은 것도 없고 컴퓨터는 모든 파일을 그야말로 탈탈 털어보았지만 막 산 것처럼 깨끗했다. 즐겨찾기도 뭔가를 검색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두 개의 쓰레기통 모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쯤 되면 거의 결벽적인 수준으로 뒤처리를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 처리를 한 사람이 나일지 유하일지 모르겠지만, 백은호에게 내가 했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뭔가 기록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나는 남아있었단 말이지.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자 공책 중간쯤에서 박선생에게 팔았다는 족자에 대해 적혀 있었다. 10월 22일. 심심풀이 족자의 동의를 받고 박선생에게 보냄. 수리 및 숙박비 2500만원 현금으로 수령. …비싸네. 이 창고는 호텔인가. 그리고 심심풀이 족자라는 건 또 뭐야?
나간 기록이 있다면 들어온 기록도 있을 터였다. 한 줄 한 줄 확인하며 되짚어 가자 오래지 않아 다시 심심풀이 족자라는 이름이 보였다.
8월 4일. 고물상에서 고사 직전의 족자를 구조. 요구에 따라 물을 주자 상태가 약간 호전됨. 햇빛도 좋아하는 것 같음? 뭐냐. 이 이상한 족자는. 족자라는 건 비단천 위에 그림을 붙여놓은 거잖아. 물이고 햇볕이고 좋을 리가 없는데.
계속 읽어보자 마치 환자처럼 족자를 치료한 과정이 적혀 있었다. 숲으로 데려가서 한나절 내내 있다 오니 기분이 훨씬 나아진 것 같음. 비 오는 날 잠시 밖에 걸어 두니 상태가 호전됨. 흥겨운 곡을 즐겨, 피리로 춘야연(春夜宴)을 연주해 주니 좋아함. 벌레가 꾀지 않도록 조심할 것.
이 환자 족자가 완치된 날은 10월 13일이었다. 그로부터 열흘도 안 되어 팔린 셈이다. 비고란에는 보관할 때 조심할 점과 족자의 성격이 적혀 있었다. 태평하고 수다스러움. 과장이 심하니 적당히 걸러 들을 것. 너무 오래 말을 못하면 우울해짐.
읽고 있자니 내가 우울해진다. 아무래도 이상한 물건이 들어온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요괴라고 해야 할까? 족자의 모습이고 흠이라면 수다스럽고 관리가 까다롭다는 정도겠지만.
작업장으로 돌아가서 족자를 내려다보았다. 수다스럽기는커녕 쥐죽은듯이 조용한 걸 보니 어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기는 했다. 그나저나 이런 걸 수리하는데 정말 숲으로 산책이라든가 피리로 연주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까?
차라리 배접을 다시 하고 그림을 복원한다든가 그런 게 낫지 않나? 하긴 복원한다고 해도 이 풍경화는 보통 섬세한 것이 아니라…어…어?
헷갈린다.
아까도 족자의 그림이 풍경화였던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더 단순하고 큰 그림이었던 기분인데. 나무라든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얼룩덜룩 지저분한 족자의 풍경화가 어딘지 흐릿해졌다. 눈을 깜박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풍경화는 안개가 깔린 것 모양 뿌옇게 변했다가 이윽고 천천히 선명해졌다.
얼룩이 심한 종이 위에는 풍경화도 나무도 아닌, 뱀이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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