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족자(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정교한 그림이다. S자를 그리며 움직이는 뱀을 묘사한 수묵화였다. 섬세한 필치로 비늘이 반짝이는 모습이나 뱀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파문을 실감나게 그려놓았다. 그 모양으로 보건데 물을 건너고 있는 뱀의 모습이었다.
그림이 바뀌는 족자란 말이지. 과연 진기한 물건이다. 그래봐야 “야, 참 신기한 족자네!”하고 감탄하는 용도 외에 도무지 쓸 데가 없을 것 같지만.
주변에 도깨비니 혼령이니 여우니 하는 것들만 있어서 그런가. 깨어난지 한 달 만에 난 정서적으로 상당히 메마른 인간이 된 것 같다. 원래 그랬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말없는 족자를 이리 저리 뒤적여보고 있으려니까 한 번 더 그림이 변했다. 다시 풍경화다. 이번에는 수묵담채화였다. 아까의 풍경화는 높은 산자락을 그려놓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흐르는 물가의 풍경이다. 강이라기보다 폭이 넓은 개울 정도로 보였다. 물가 양쪽으로 산책로가 만들어졌고 유채꽃이 피어 봄날 분위기가 완연했다.
산책로 옆으로는 버드나무가 몇 그루, 가로등도 있고 개울 건너 도로가에 꽃은 지고 잎이 푸른 벚나무 가로수도 보인다. 어…이 정경. 어디서 본 듯한데.
왠지 눈에 익은 풍경이다. 개울, 산책로, 나무들, 그 너머에는 건물들이…
“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생각이 났다. 그날, 백은호가 가져온 은쟁반 때문에 공주로 간 날 처음으로 본 바깥 풍경이다. 벚꽃 대신 푸른 잎이 난 것만 다를 뿐이다. 이 개울은 건물 밖 도로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그곳이었다. 그러니까 족자의 그림은 내 집 앞 풍경인 셈이다.
뭐지? 수많은 그림 중에 우연히 이곳 풍경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복잡한 머리로 생각을 고르고 있는데 다시 한 번 그림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인물화였다. 거친 선으로 단순하게 묘사한 남자 하나와 그 남자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족자를 뒤에서 보고 있는 듯한 그림이다. 대충 그린 것 같은 옆모습이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인물화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내가 족자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족자에 생긴다. 그리고 그림의 족자는 족자를 보고 있는 내가 그려지고 그 그림의 안에는 또…. 마치 마주보고 있는 거울 안에서 끝없이 반대편 거울이 이어지는 것 같은 그림이다.
오싹한 한편 깨달았다. 그렇구나. 말을 한다는 건 이런 뜻이었어.
이 족자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도 족자에 잘 어울리는 수묵화로 말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풍경화나 뱀 그림도 모두 뭔가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때.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겠지.
이거 참 누가 볼까 무서운 짓이긴 한데…
“아…그러니까, 심심풀이 족자…씨?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반가워.”
나는 족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족자에게 문진을 시도했다.
“말하는 방식이 그림이라는 건 이해했으니까 가능하면 좀 세밀화로, 그 왜 신사임당 그림처럼 완전 사실적인…”
나는 족자에게 의사소통 방식의 조정을 요구했다.
“…….”
족자는 대답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림이 바뀌지 않았다. 얘가 많이 아프긴 한가보다.
“저기 족자씨, 몸이 많이 안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아야 고쳐주지 않겠어? 물이 마시고 싶다든지 햇볕을 쬐고 싶다든지 뭐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숲으로 산책…은 내가 지금 무리고, 피리…를 내가 불 줄 아나? 물품출납서에 적힌 걸 보니 불 줄 아는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안 나네. 좀 쉬운 걸로 하면 안 될까? 리코더로 동요 정도는…”
“숲으로 가는 건 제가 하면 돼요.”
대답이, 족자가 아니라 뒤쪽에서 들려왔다. 언제 내려왔는지 유하가 묘하게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나를 보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그래, 웃음을 참으려는 표정이다. 예. 나도 지금 족자에게 말을 거는 내 꼴이 많이 이상하다는 건 알거든요. 그런데 방금 유하가 뭐랬지?
“작년에도 족자를 가지고 나갔다 온 건 저니까요.”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깨어났던 날 말했었지.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은 그녀가 전담하고 있었다고.
“그럼 부탁 할까. 낮 동안 이 녀석 좀….”
족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갈 준비를 하러 갔다. 유하가 이층으로 가자 족자의 그림이 다시 바뀌었다. 근사하게 가지를 뻗은 늙은 소나무의 그림이다. 아, 맞다. 저거. 처음 박선생이라는 노인이 가져왔을 때 저 그림이었지.
하지만 소나무를 어쩌라는 건지. 의미를 모르는 채로 지켜보고 있는데 다시 그림이 바뀌었다. 풍경화다. 병풍 같은 바위와 철쭉이 어우러진 산 정상의 풍경이었다. 창고에 다녀온 다음 저 풍경화를 봤었지. 그 다음이 뱀 그림이었고.
기억을 돌이켜보는 동안 족자의 그림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물을 가르며 구불구불 움직이는 뱀의 그림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집 앞의 개울. 그러면 다음은 작업장 안의 나를 묘사한 그림인가 생각했는데 뜻밖에 다시 바뀌었을 때는 소나무 그림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후로 유하가 다시 작업장에 내려올 때까지 소나무, 산 풍경, 뱀, 개울, 이 네 개의 그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림이 변하는 텀은 갈수록 빨라져서, 어쩐지 발을 동동 구르며 뭔가 말하고 있는 기분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다 유하가 오자 그림은 다시 멈춰버렸다.
“그럼, 다녀올게요.”
유하가 족자를 둘둘 말아서 들었다. 작은 바구니에 도시락과 책, 숄까지 챙겨서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차림이었다. 그런데 한쪽 팔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걸려 있었다.
“우산을 왜 가져가?”
보라색 도트 무늬의 하얀 우산이 그녀의 손목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일기예보는 날마다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맑음. 우산 쓸 일이 없는 것이다.
“소나기가 올지도 몰라서요.”
기상 캐스터가 들었다면 우울해질 말을 태연히 하고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문이 열렸을 때 힐끗 봤지만 바깥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다. 하늘도 맑아 보이고 바람이 있는지 가로수의 가지가 흔들렸다. 정말이지 소풍 가기 좋은 날씨였다.
이런 날.
햇살이 금색 비처럼 내리는 날, 풀밭에 앉으면 달콤한 흙냄새와 쌉싸래한 풀냄새가 섞여 피어오르는 날, 바람이 꽃향기를 품고 살갗을 간질이는 날, 파란 나뭇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날…
이런 날을 내가 겪은 적이 있던가?
나는 언제부터 햇빛을 두려워하게 된 걸까. 햇빛이 살갗에 닿을 때의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각을 알고 있다는 건 분명 경험이, 기억이 몸에 남을 정도로 많은 경험이 있다는 뜻인데.
그런데 왜 지금은 태양 아래로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걸까. 이유도 모르면서. 어쩌면 이것은 그냥 막연한 두려움일 뿐이고 사실은 밖으로 나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한 순간에 나는 내가 어느새 문 앞에 서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서.
몸이 움찔 흔들렸다. 언제 여기에 왔지? 작업 선반 앞에 서 있었는데. 걸어온 기억 같은 것은 분명 없는데.
손잡이를 잡은 손이 조금 떨고 있었다. 약간의 힘만 주면 된다. 문을 여는 것은 쉽다. 정말로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흐린 날에만 외출했던 건 내가 그냥 좀 이상한 녀석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자외선이 싫다든가 땀이 나서 싫다든가 주근깨가 생기니 싫다든가.
뭐가 그렇게 두려운 일인지, 나가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안 그래?
힘을 조금 주자,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면…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내 안에서, 몸이 움칫거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한 번 뛸 때마다 엄청난 양의 혈액을 밀어내 혈관 속에서 피가 고속으로 달리는 것만 같았다.
조금, 숨이 막혔다.
하지 마.
마음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해 버려.
그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나가서, 알게 되는 거야. 네가…
끼이익 -
열리는 문에서 경칩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얀 빛이 문 사이로 쏟아졌다. 제기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밀어젖혔다. 열린 문이 경칩을 축으로 휙 돌아서 오른편 벽에 부딪쳤다. 하얀 하늘이 보였다.
뭐?
하늘은 파랗잖아. 원래.
그런데 하얗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뒤이어, 툭 툭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가벼운 것이 지면에 부딪치는 소리다. 그 소리가 갑자기 우수수 늘어나더니 눈앞에 차일이 내려진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 소나기가 올지도 몰라서요.
그렇게 말했었지, 유하가.
“하아아…”
나도 모르게 뱉어내는 한숨이 안도 때문인지 한심한 자신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기왕 날도 흐려졌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전에는 차창 너머로만 구경했지만 오늘은 직접 걸어볼 수 있었다.
느닷없는 비에 길을 걷던 여자들이 꺄아 비명을 지르며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인도는 갑자기 텅 비었고 도로는 순식간에 젖었다. 까맣게 반들거리는 차도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가자 사철나무 울타리 너머에 개울이 보였다.
개울의 폭은20m정도지만 양쪽의 산책로와 비탈까지 포함하면 60m 가까운 너비였다. 산책로에서 조깅하거나 운동하던 사람들이 나무 밑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비탈을 내려가 개울로 다가갔다.
휴식용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이상하게 보여도 할 수 없었다.
개울에는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한 작은 수문과 그 앞을 가로질러 건널 수 있도록 일부러 커다란 돌을 가져다 만든 징검다리가 있었다. 비가 와서 지금은 아무도 이곳을 건너고 있지 않지만 덕분에 한적한 징검다리를 혼자서 건널 수 있었다.
성인 남자의 걸음으로도 좀 버거운 큰 돌다리를 훌쩍 훌쩍 뛰다시피 걷는데 오른편에서 물살을 가로질러 파문이 이는 것이 보였다. 빗속이라 어차피 수면은 어지러울 정도로 진탕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보이는 S자 모양의 물결을 내 눈은 확인했다. 개울을 가로질러, 갈색의 뱀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림에서 본 그대로.
“이봐, 너!”
뱀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는 생각도 미처 못 하고, 나는 소리쳤다.
“나 말이오?”
그리고는, 풀숲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추어선 뱀이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에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그럴 리가 없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아닌 게로군.”
뱀이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풀숲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니, 너! 뱀. 댁한테 한 말 맞아.”
그래. 우리 집 강아지도 말을 하는데 뱀쯤이야.
뱀은 대가리를 치켜들고 흔들흔들 잠시 나를 지켜보더니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보아하니 배울 만큼 배우고 사리분별 할 만큼 나이도 찬 것 같은데 그 말하는 품이 무어요, 그래. 양친께 누가 되리다.”
점잖게 말하는데 요점은 내 말본새가 부모 욕먹게 만들기 좋다는 뜻이다. 나 뱀에게 야단맞았다.
그런데 초면에 하대한 건 확실히 잘못이라서 뭐라 할 말도 없고.
내가 할 말을 못 찾고 있자 뱀은 긴 혀를 날름거리더니 내 쪽으로 조금 다가왔다.
“그래, 용건이 무어요.”
관대한 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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