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24화 (24/218)

심심풀이 족자(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는 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림으로 대화하는 족자가 개울과 뱀, 산과 나무 그림을 보여주더라는 게 사정 이야기의 전부이기는 하지만.

사람에게라면 못할 이야기였다. 그림이 바뀐다든가 의식을 가진 족자라는 건 동화에서나 나올 이야기니까. 그런데 내 앞에는 동화에서나 나올 말하는 뱀이 있었다. 그러니 못할 것도 없지.

내 이야기를 들은 뱀은 작고 뾰족한 머리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소나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천막이나 나무 아래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아…곤란한데. 징검다리 중간에 쭈그리고 앉아 뱀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같은 걸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구먼.”

생각에 잠겨 있던 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나는 마음이 급했지만 뱀은 양반처럼 느긋했다. 상체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그가 이야기했다.

“아마 그때가 명종 임금 치세였던가 보오. 화담 선생이 인세를 떠나 개성 송악산에 심거할 적, 앞뜰에 자귀나무를 한 그루 심으셨다오. 이 나무가 금세 자라 십 년 만에 그럴듯한 모양이 되었는데, 밤이면 밤마다 어찌 그리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지 화담 선생이 주무실 수가 없었다지 뭐요.”

화담 선생이면 화담 서경덕 말인가? 황진이와 썸 탔다던 그 선비? 점잖은 뱀 앞에서 차마 그렇게 물어볼 수는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경청했다.

“그래 참다못한 선생이 어느 날 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필묵을 챙겨서 나오시더니, 큰 붓을 한 차례 휘둘러 자귀나무를 그려놓고 네 이놈 자귀나무야아 하고 부르셨다오. 부르시니 자귀나무가 예에이 하고 대답을 하는데, 대답하자마자 그 나무의 목신(木神)이 쑥 빠져 나와 그림에 갇혀버렸다는 게요. 그 후로 목신은 족자에 갇혀 말은 못하고 대신 그림으로나마 수다를 떨었더라는 이야기가 있소.”

어쩐지 아기자기한 그림이 있고 글자가 큰 책에서 읽어야 할 것 같은 내용이다.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족자가 그 목신이 갇힌 족자라는 겁니까?”

이 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싶지만 생각해보면 그럴듯하기는 했다. 심심풀이 족자는 햇빛과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보관하고 하루에 한 번 물을 줘야 한다. 마치 나무를 키우는 것 같았다. 숲에 갔다 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흥겨운 곡을 즐겨 듣는다. 비가 오면 잠시 내놓고 벌레가 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목신이 갇혀 있는 족자라….

목신이 개울의 그림과 뱀의 그림을 보여준 것도 이 뱀을 만나보라는 의미였을까? 그렇다면 다른 두 개의 그림, 소나무와 산은 무슨 뜻일까.

내가 본 소나무와 산의 그림을 상세히 설명하자 뱀은 한 번 더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몇 명의 사람들이 개울을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를 지났다. 그때마다 나는 돌다리 끝으로 바짝 서 있어야 했고 한 두 명이 개울가의 뱀을 발견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엄마, 저 아저씨 뱀하고 이야기 해.”

“쉿, 아는 체하지 마.”

멀찍이서 이런 소리도 들렸는데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그래. 그렇겠구먼.”

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난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뱀이 홍채를 가늘게 세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나무는 아마 신목(神木)일 게요. 예서도 보이는구려. 저어기, 산 정상 가까이, 사람 눈에 가려진 곳이 신목의 거처라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거기 가려는 걸 보니 신목의 지혜가 필요한 모양이오.”

저기로 가려는 거라고요? 저 산? 저기 저 멀리 보이는 저 아득한 산꼭대기요?

구름 위에 정상을 걸치고 도시를 내려다보는 듯 오연히 선 산자락에 나는 조금 기가 질렸다. 목신이 저기로 가고 싶어 한다면 그걸 해줘야 할 사람은 바로 나란 거잖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유하가 전담하고 있다지만 신목이 있는 곳은 사람들 눈에 가려지고 아무나 갈 수 없다고 하니.

하지만 등산은 고사하고 집근처 산책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나다. 무엇보다 날씨가 흐리기 전에는 어림도 없었다. 족자가 보여준 그림의 의미는 알게 되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곤란했다.

뱀이 이야기를 마치고 제 갈 길로 떠나자 나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더 있고 싶어도 잠깐 모인 소나기구름이 슬슬 옅어지고 있다. 햇빛이 나오기 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래서는…’

어두컴컴한 작업장 안에서, 도로 화창해진 날씨와 반대로 내 기분은 우울해졌다.

유하는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 가져간 도시락을 깨끗이 먹었는지 바구니가 가벼워지고 책의 앞쪽에 꽂혀 있던 서표가 끝부분까지 옮겨가 있었다. 소풍을 잘 즐기고 온 모양이다. 그녀는 족자를 작업 선반에 내려놓고 저녁 준비를 하겠다며 서둘러 올라갔다.

족자는 별로 달라진 데가 없어 보였다. 펼쳐 놓자 전과 다름없이 네 개의 그림을 번갈아 보여줄 뿐이다.

“산 정상 근처에 있는 신목에게 가고 싶다며, 맞아?”

내가 묻자 이번에는 족자의 그림이 소나무로 바뀐 다음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족자가 원하는 것은 분명했다. 신목이다. 문제는 거기로 가려면 날씨가 흐려져야 한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족자에게 해주자 소나무 그림이 흐릿해졌다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종이 위에는 이제 얼룩덜룩한 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침울해진 것 같은 족자에게 계속 말을 걸어 봤지만 그림은 생기지 않았다. 삐친 것 같다.

삐쳐도 할 수 없다고. 못 하는 건 못하는 거니까.

그 후로 며칠간 족자는 유하의 손에 맡겨, 밖에서 햇빛을 쬐거나 물을 뿌려주거나 하는 방법으로 치료를 해보았다. 그러나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비단천이 바삭바삭 삭아가는 느낌이었다. 가끔 말을 걸어도 여전히 그림은 생기지 않는다. 단단히 토라진 아이 같았다.

그러다 닷새쯤 지나, 잠들기 전에 상태가 어떤지 보려고 갔더니 슬쩍 건드리는 순간 풍진의 녹색 옥구슬이 바사삭 부서져버렸다. 본래부터 금이 잔뜩 가 있기는 했지만 구슬의 모양은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힘들어진 것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예보는 변함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이주 내내 맑다. 그러니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족자가 아주 망가져버릴지도 몰랐다.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햇빛도 물도 숲에서 소풍도 다 소용이 없었다.

음악이라도 들려줘 볼까? 아직 안 해본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피리가 하나 있었지. 이따금 혼자서 소리 대신 먼지를 뿜곤 하던 대나무 피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늦은 시각이라 도깨비들의 놀이가 한창이었다. 알록달록한 초롱에 불 밝히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누구는 연주하고 누구는 노래하고 또 누구는 춤을 춘다. 흥겨운 광경이었다.

선반에 걸터앉았던 물레 도깨비가 어깨를 들썩이고 곰방대를 문 영감님 모양의 도깨비가 껄껄 웃으며 놋화로를 쳤다.

내가 찾던 피리는 그들 가운데에 있었다. 거문고와 비파 옆에서 달그락달그락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데 피리 소리가 아니라 김새는 소리였다. 도깨비답지 않게 연주하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다가가서 피리를 집어 들자 손안에서 움찔했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보통 피리인 것처럼 위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잠깐 좀 빌리자.”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하고 창고를 나오는 동안에도 피리는 얌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막상 족자 앞에 다시 섰지만 내가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먼지로 희뿌연 피리를 쓱쓱 문질러 닦고, 머리에는 기억이 없지만 몸은 기억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대충 나란히 붙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자세를 잡아봤지만…기억이 안 난다.

운지법도 모를 뿐 아니라 취구라고 생각되는 곳에 바람을 불어 넣어 봐도 김새는 것 같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바람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 옆으로 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혹시 피리 도깨비가 일부러 소리를 안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봐, 이거 중요한 일이라서 그러는데. 좀 도와줄래? 네가 재주 없는 건 아까 봐서 아는데, 그래도 소리는 낼 수 있겠지? 피리라는 게 그렇잖아? 바람이 들어가면 소리가 나오는 거라고.”

피리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김새는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구멍 안에서 먼지가 확 뿜어졌다. 이 녀석, 기분 상한 것 같다. 콜록거리며 자리를 옮기자 손 안에서 피리가 버둥거렸다.

“왜 기분이 나빠졌는데? 내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어? 혹시 재주 없다는 말에 기분 상한 거냐? 미안. 미안.”

사과해봤지만 더 심하게 날뛸 뿐이다.

“이봐! 잘못했다니까! 좀 진정해. 아, 맞다. 메밀묵 줄까?”

손이 아플 정도로 버둥거리던 피리가 한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단번에 용서하는 건 너무 속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바르작거리는 시늉을 시작한다. 냉장고에서 메밀묵을 꺼내주자 움직임이 현저하게 부드러워졌다. 메밀묵 옆에 녀석을 내려놓으니까 피리인 주제에 꿈틀 꿈틀 다가가서 취구를 메밀묵 위에 올려놓고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커다란 초록색 벌레가 메밀묵을 먹는 것 같았다.

아아, 뭐람. 피리 좀 쓰려다가 메밀묵만 한 접시 날리고. 역시 리코더나 사와서 동요라도 한곡 불러주는 게 낫겠다.

한숨을 쉬는데 계단 쪽에서 굽 있는 신발이 천천히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하가 계단을 내려오며 아래를 둘러보더니 메밀묵 접시위에 놓인 피리를 보자 눈썹을 모았다. 피리 도깨비는 어느새 보통 피리인 체하며 얌전해진 상태였다.

“아…이건 말이야. 사실 저게…”

사실 저게 도깨비인데 조금 전까지 벌레처럼 꾸물거리며 메밀묵을 먹고 있었다고 말해도 되나.

“대금에 양념이 묻잖아요.”

유하가 나무라듯 말하며 피리를 집었다. 그리고 피리에 묻은 것을 옷소매에 쓱쓱 닦았다. 대금? 아아, 이 대나무 피리는 대금이었구나.

유하는 잘 닦은 대금을 내게 돌려주었다.

“연주하려고요?”

“그러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대답했다.

“불어보면 기억이 날 거예요. 곧잘 연주하곤 했으니까.”

돌아서서 계단으로 가며 유하가 말했다.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도 모르겠던걸.”

“청가리개부터 열어놓으세요.”

한숨을 섞어 그녀가 충고했다.

청가리개? 그게 뭔데요? 새삼 대금을 뜯어보자 취구와 손가락을 얹는 구멍 사이에 반통형 대나무를 가죽 끈으로 묶은 것이 보였다. 표면에 나비 문양이 근사하게 음각되어서 장식용인가 생각했던 것이다. 가죽 끈을 풀자 뭔지 얇은 막이 씌워진 것 같은 구멍이 하나 더 드러났다.

막혔던 숨이 트인 것처럼, 손 안에서 대금이 긴 숨소리를 냈다. 메밀묵 때문인지 청가리개를 풀어서인지는 몰라도 대금 도깨비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딱딱대는 것 같던 대금이 손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대금의 표면을 쓸면서 미끄러진 손가락이 여섯 개의 지공에 부드럽게 얹혔다. 손가락이 제자리를 잡자 팔이 저절로 들렸다. 옆으로 길게 누운 대금이 입술에 닿을락 말락 가까워지며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 없는 대나무 향을 풍겼다. 마른 대나무의 달짝지근한 냄새가 아니라 아직 새파랗게 살아있는, 파릇하고 떫은 향기였다.

그 향기가 기억을 불러온 것처럼, 폐안에서부터 숨이 끓어올랐다.

춘야연. 봄날 밤의 연회.

그러나 내 손과 숨이 기억하는 춘야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남청색 하늘에 금가루 같은 별빛, 시커먼 숲 그림자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초롱, 왁자한 웃음 가운데 흥겨운 곡조, 노래하고, 뛰고, 춤추고, 술 마시고, 서로 희롱하며,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람 없는 곳에서 벌이는 요사한 연회다.

그 음울하면서도 흥겹고, 두려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광경이 날숨을 타고 대나무 몸통을 울렸다.

서양음악이 반음이라고 정해놓은 음역을 긴 한숨이 몇 등분으로 나누어 파도치듯 오르내렸다가 도깨비불 같이 번쩍, 날뛰고, 휘돌고, 끊었다가 되살리며 조롱조롱 구슬 같은 숨을 굴려 도르르 밀어낸 음이 꽃잎처럼 떨어진다.

나폴 나폴 희미해지는 음이 바닥에 닿아 조용해지는 순간에야 나는 겨우 도깨비의 연회에서 어두컴컴한 내 작업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멍하니, 아직 내 귀에 남아 울리는 대금의 소리를 반추하는데 갑자기 목소리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옳거니! 옳거니! 이제야 도령이 제대로 돌아오잖았어?”

“좋을시고! 한 곡조 더 해라!”

“김도령. 김도령. 불어봐! 불어봐!”

“오호라, 놀이로세.”

“얘들아, 춤을 춰라! 술! 술항아리는 어디 있는고?”

도깨비들이었다. 창고 안에 있던 도깨비들이 어느새 내 주변에 몰려와 있었다. 아니, 창고 안에 있던 도깨비들뿐이 아니다. 의자 도깨비, 세발자전거 도깨비, 농구공 도깨비, 컴퓨터 모니터 도깨비…. 바로 그들이다. 막 잠에서 깨어난 내가 이곳에 내려와서 봤던, 잡동사니라고 생각했던.

“한 잔 받고 한 곡조 더 하시구려. 이제 막 흥이 나니.”

창고로 들어간 뒤 나를 본 척도 안 하던 물레 도깨비가 생긋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얼떨결에 술잔을 받은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옛스런 복장을 한 사람 모양 도깨비, 옆집에서 봤음직한 요즘 사람 모양의 도깨비, 물건의 모양 그대로인 도깨비, 흐느적흐느적 형체가 분명치 않은 도깨비, 벌레 모양 도깨비, 짐승 모양 도깨비, 온갖 도깨비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꽤 넓다고 생각했던 작업장이 좁을 만큼 북적거리는 도깨비들 안에서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뒤늦게 대금을 연주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족자!’

작업 선반 위에 펼쳐놓은 족자에 변화가 생긴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룩진 종이 위로 그림이 떠올라 있다. 유려하니 가지를 뻗은, 우아한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족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그뿐인 모양이다.

“다들 미안하지만…지금은 놀기 힘들겠어.”

아픈 녀석이 있어서.

도깨비들이 웅성웅성 서로를 돌아보았다가 나와 족자를 번갈아 살폈다.

“보오, 김도령. 우리가 뭘 도와주면 한 곡조 더 불러줄 거요?”

영감님 같은 모습에 곰방대를 문 도깨비가 목을 쑥 내밀고 내게 묻는다. 도깨비의 도움?

생각 못한 곳에서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날씨를 흐리게 만들 수 있어?”

내 말에 도깨비들이 웅성웅성, 다시 한 번 서로를 돌아보았다. 영감 도깨비가 곰방대로 땅땅 화로를 쳤다. 와글거리던 도깨비들이 입을 다물었다.

“도깨비 조화로 하늘은 못 다스리오. 다른 부탁을 하오.”

영감도깨비가 말한다. 의외다. 옛날이야기의 도깨비들은 안 보이게 만드는 감투라든가 산을 옮긴다든가 사기 같은 재주가 많던데.

“나는 이 족자를 가지고 신목에게 가야 하거든. 그런데 날이 흐리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신목에게 가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도깨비들이 한 번 더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영감 도깨비는 주름진 눈을 꿈적꿈적 하며 수염을 쓰다듬다가 곰방대를 들어 화로를 땅땅 두드렸다.

“불 도깨비 나오너라.”

부름에 이어

“예에이~”

대답을 길게 늘이며 화로 안에서 불덩이 하나가 확 튀어 올랐다. 허공에 튀어 오른 불은 공처럼 덩어리진 채로 둥실 떠서 영감 도깨비 앞을 오락가락 했다. 영감 도깨비가 손짓했다.

“너 요 앞의 개울에 가서 용신께 인사드리고 내가 하룻밤만 개울물을 빌려줍소사 청하더라고 여쭈어라. 용신께서 승낙하시면 말이다…”

영감 도깨비는 가까이 다가온 불 도깨비에게 소곤소곤 할 일을 가르쳤다. 불 도깨비가 “예에이~”하고 대답한 뒤 훌쩍 날아서 가버린다. 영감 도깨비는 느긋이 등을 기대어 앉으며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몰라 내가 멍하니 보고 있자 잠시 후 영감 도깨비는 꿈적거리던 눈을 지그시 휘어 웃었다.

“보오, 도령. 이제 나가보셔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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