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족자(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가도 된다고?
영감 도깨비의 말을 못 믿어서 머뭇거리고 있자 도깨비들이 깔깔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떠미는 손에 출입문 앞까지 닿았다. 뒤에서 펄럭 소리를 내며 족자가 날아왔다. 누군가 족자를 집어던진 것이다. 코앞으로 날아온 족자를 받아드는데 바로 옆에서 경칩의 부대끼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문이 열린다. 움찔해서 돌아보는 순간 열린 문틈으로 뿌연 것이 덮쳐들었다. 습한 기운이 온몸에 확 끼쳤다.
“안개…?”
문밖에는 코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안개가 끼어 있었다. 오늘 밤에 안개가 심할 거라는 일기예보는 없었는데….
“도깨비 조화로 하늘을 다스리지는 못하나 땅위를 조금 가리는 것쯤이야.”
입으로 하얀 연기를 뱉어 고리를 만들어 내며 영감 도깨비가 중얼거렸다.
안개라. 하늘에 있으면 구름, 땅에 있으면 안개라는 건가. 구름을 만들 수는 없어도 안개를 만들 수는 있었던 것이다. 구름 대신 안개가 자욱하니 가린 바깥은 과연 흐린 날과 다름없었다.
문을 나서는 내 머리 위로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뭔가 날아갔다. 얼핏 보니 부채 도깨비다. 발치에서는 비단공이 통통 뛰어 나를 따라 나왔다.
비단공은 밖으로 나오더니 숨소리와 함께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본래도 팽팽하던 몸체가 점점 커지며 직경이 내 키를 넘어섰다. 건드리면 팡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잔뜩 부풀리더니 이윽고 피유우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줄어들기 시작한다. 공에서 빠져나온 바람에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무얼 하오? 아이들이 안개로 길을 만들고 있으니 속히 다녀오오. 날이 밝으면 안개도 사라질 터요. 서두르오.”
문가로 배웅 나온 영감 도깨비가 손짓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안개는 구렁이같이 뭉쳐 흐르며 산이 있는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신목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응. 고마워!”
도깨비들에게 손을 흔들고 나는 안개의 터널 속을 달렸다. 한 손에는 둘둘 말린 족자를 단단히 쥐고, 발끝에 힘을 줘 박차자 내 몸이 안개를 가르며 화살처럼 튀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미터나 뛰어버린 거지? 어둡고 앞이 흐려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떠올랐던 몸이 도로 내려오며 발바닥이 뭔가에 닿은 다음에야 내가 어느 집 담벼락 위에 서 있거나 전깃줄에 내려섰다는 것을 겨우 알 수 있었다. 몇 걸음을 뗄 떼마다 풍경이 변한다.
양편에서 안개를 몰기 위해 부채와 비단공이 번갈아 파닥파닥 피유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로 안개의 범위를 가늠하며 뿌옇게 어두운 길을 달렸다. 이따금 발밑으로 찻소리나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좌우에서 희끄무레한 불빛이 휙휙 지나갔지만 거기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출발한 시각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날이 밝기 전까지 다녀올 수 있을까? 그 전에 지쳐버리는 건 아닐까? 자잘한 걱정들이 마음 한편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점점 이동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차와 사람 소리가 멀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발이 건물보다 나무나 바위를 딛게 되었다. 냄새가 바뀌고 안개조차 서늘해진다. 도시 외곽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빨리. 게다가 지치기는커녕 아직 숨도 차지 않았다. 몸은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 없이 가벼웠다. 이것은 도깨비의 조화일까? 아니면…
신기해하는 동안 안개의 터널이 가파르게 꺾였다. 산이다. 발에 닿는 것마다 나무뿐이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개로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한 걸음 뛸 때마다 좌우로 휙휙 지나치는 나뭇가지가 갈수록 강한 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무의 생기…? 나는 어떻게 그런 것을 구분하는 걸까. 며칠 동안을 목신이 갇힌 족자와 함께 보내서 그런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나무들이 하나하나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깨비나 혼령을 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사방으로부터 식물 특유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은은하면서도 파릇파릇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갑자기 부채와 비단공의 바람 움직이는 소리가 멀어졌다. 정확히는 내가 앞으로 달려가는 동안 둘이 멈춰서있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멀리서 비단공이 빙그르르 돌며 까닥거리고 부채 도깨비가 살을 활짝 펼친 채로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우리는 더 못 가오. 신목 할아범은 산도깨비만 만날 수 있소.”
부채 도깨비가 말했다. 도깨비들 세계도 뭔가 이것저것 규칙이 많은 모양이었다.
“안개는 할아범 거처까지 이어놓았으니 다녀오구려. 지체하지는 마오. 안개길이 길어 유지하기가 힘드오.”
부채가 팔락팔락 손짓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도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골짜기 깊숙이 이어진 안개 속을 달렸다.
터널처럼 좁고 길게 이어지던 안개는 어느 순간부터 넓게 펼쳐져 골짜기 안에 자욱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주변에 나무가 없어지고 발에 낙엽이 밟혔다. 신목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다고 해도 안개 때문에 볼 수 없을 것 같기는 했다. 두리번거리며 무작정 걸음을 옮기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버렸다.
[해명 도령. 해명 도령.]
귀에 들린다기보다, 땅속에서부터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도령이 찾는 것은 여기 없다오. 도령이 찾는 것은 여기 없다오.]
그 목소리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뭐?”
어리둥절한 나를 아랑곳 않고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자귀나무야. 자귀나무야.]
목소리를 듣고 손 안에 있던 족자가 혼자서 촤르륵 풀렸다. 펄럭 펼쳐진 족자에게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찾는 것은 산뽕나무 아래 상수리나무 아래 벚나무 오른쪽 소나무 아래 있지. 네가 찾는 것은 산뽕나무 아래 상수리나무 아래 벚나무 오른쪽 소나무 아래 있지.]
무슨 이상한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족자의 목신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펼쳐진 족자 위에 그림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말한 나무들이었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방금 들은 말로 만족해버렸는지 족자가 다시 도르르 말려 내 손안으로 돌아왔다.
족자는 원한 것을 얻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직 아니었다.
“어디지? 당신이 신목인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것도 없고 목소리는 바닥에서부터 진동하듯 울려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해명 도령. 해명 도령.]
그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섯째가 오고 있소. 다섯째가 오고 있소.]
뭐?
[멀리서 오고 있소. 멀리서 오고 있소.]
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말이 되게 설명을 해보라고.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몸이 굳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내가 들은 짧은 말 속의 어떤 것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얼어붙은 채로 멍하니 서있는 내 손 안에서 족자가 움직였다. 용건이 끝난 녀석은 이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내 손을 끌고 산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고 보니 안개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지체하지 말라고 부채 도깨비가 말했었지.
가기 전에 신목에게 확실히 물어보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막는 마음이 조용히 다투었다. 다투고 있어도 결과는 이미 알았다.
나는 족자를 꽉 쥐고, 안개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산등성이에서 부채 도깨비와 비단공은 소란한 소리를 내며 안개를 불어 날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비단공이 콩콩 뛰며 재촉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바빴다. 안개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며 내 뒤를 쫓았고 하늘 한편에서부터 어둠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신목에게 들은 말 때문에 발이 어디를 딛는지도 몰랐고 몇 번이나 산에서 나뒹굴었다.
돌아왔을 때는 집 앞의 안개가 거의 흩어져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도깨비들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도깨비들은 엉망진창인 내 꼴을 보고 깔깔 웃어댔다. 상처는 없었지만 옷도 머리카락도 신발도 안개와 흙과 마른 잎 따위로 지저분한데다 찢기고 더럽혀져 있었다.
“도령은 쉬어야 하겠소.”
“김서방은 잠을 자야 하지.”
“내일은 꼭 피리를 불어줄 거지?”
도깨비들이 와글와글 말을 걸면서 하나둘 작업장을 떠나갔다. 영감 도깨비가 곰방대로 화로를 땅땅 두드리자 문밖에서 불덩이 하나가 훌쩍 날아 들어왔다. 어제 본 불 도깨비라고 생각하지만 크기는 어제에 비해 훨씬 작다. 호두알 크기로 변해 있었다.
“밤새 고생했다. 돌아가 쉬어라.”
영감 도깨비가 말하자 불 도깨비는 기쁜 기색을 띠며 화로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렇구나.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밤새 나를 가려줬던 안개는 불 도깨비가 개울물을 끓여서 올린 훈김이었다는 걸.
영감 도깨비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창고로 걸어가자 화로가 짧은 다리를 기우뚱기우뚱 움직이며 뒤를 따랐다. 그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작업장은 휑하니 고요한 가운데 나와 족자만 남게 되었다.
어쩐지 한바탕 힘든 꿈을 꾼 것 같다.
족자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는데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하가 내려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밤새 뭘 하신 거죠?”
별 거 안 했어. 도깨비들이 만들어준 안개 터널을 달려서 신목에게 다녀왔지 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내 꼴이 엉망이긴 한 것 같다. 저 무심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 걸 보니.
“무슨 일은…. 그냥 좀 어딜 다녀왔어. 그리고…”
그리고…무슨 말을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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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족자(5)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신목에게 다녀온 후로 족자의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좋아졌다고 해서 당장 깨끗이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림 위의 얼룩이 옅어지고 보호천이 조금씩 윤기를 되찾아갔다. 당장 바스라질 것처럼 말라가던 것에 비하면 회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림으로 대화를 하는 부분에서는 완전히 활발해져, 나와 눈만 마주치면 번쩍번쩍 그림이 변하는 통에 족자가 있는 곳에서는 한눈을 팔 새가 없었다. 물품출납서에 적힌 수다스럽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던 거다.
그렇다고 뭐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화로 도깨비가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영감 도깨비의 옷에 구멍이 났다든가, 홍두깨 도깨비가 물레 도깨비에게 차였다든가 하는 집안일에서부터, 개울가 도마뱀이 근처 초등학교에 갔다가 아이들에게 잡힐 뻔했다든가 옆 건물의 카페 주인이 혼자서 커피를 다섯 잔이나 마셨다든가 하는 들으나마나 한 이야기들이었다.
햇볕 쬐라고 출입문 바깥에 낮 동안만 걸어두는 게 전부인데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초등학교나 카페 주인의 사정을 잘 아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늘 창문 앞 길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도 그렇다. 문내과 의사 선생님이 점심에 뭘 먹었는지나 간호사의 아이가 어느 유치원에 다니는지 같은 건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 정도라도 되지 않으면 알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둘은 그런 식의 세세한 정보들을 꽤 많이 알고 있거든.
환한 대낮에 돌아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 그런 정보들이 들어오나 싶어서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그렇더라도 요 며칠 사이 창고의 도깨비들과는 꽤 친해져 밖으로 나가지는 않아도 이웃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도깨비들의 마음에 드는 건 쉽다. 놀이에 끼어 있다가 가끔 대금을 연주해주면 될 뿐이었다.
곡은 춘야연 하나뿐인데도 질리지 않고 좋아해준다. 몇 번 대금을 다루어 보자 내 흥을 누르고 도깨비들에게 맞추는 것도 익숙해져서 완급을 조절하거나 가락을 더하고 빼는 정도의 변주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도깨비의 연회란 정말이지 놀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게 전부라,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나 심심할 때라면 몰라도 매일 출석할 일은 아니었다. 그 놀이에 슬슬 지쳐갈 즈음, 족자의 수다가 대화로 바뀌었다. 신목에게 들었던 네 가지 나무 그림이 나타난 것이다.
“이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내 물음에 그렇다는 뜻인지 족자의 그림이 한층 확대되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내일부터 모래 오전까지는 비가 오거나 흐릴 거라는 예보를 확인해둔 터였다. 모처럼 흐리니 집 근처를 돌아다니며 지리라도 익혀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목 때와 반대로, 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르는 상황이다.
산뽕나무 아래 상수리나무 아래 벚나무 오른쪽 소나무 아래. 이것이 신목이 한 말이었다. 산 속에 나무가 한두 그루도 아니고, 생긴 것만 보고 산뽕나무인지 상수리나무인지 벚나무인지 구분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구분이 가능한 건 소나무뿐이다.
2주쯤 전이라면 벚꽃이 한창이었으니 꽃이라도 보고 찾아갈 수 있겠지만…
“너 혹시 짚더미에서 바늘 찾기란 말 아냐?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는?”
내 불평에 족자가 파닥거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성깔머리 하고는.
족자의 그림이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집안의 풍경이었다. 서재처럼 보이는데 큰 유리창이 반쯤 열렸고 벽에는 긴 두루마리 족자가 걸려 있었다. 족자 아래에 소반이 하나, 그 위에는 물이 가득 담긴 대접이 놓였다.
가만, 빛과 바람이 잘 드는 위치에 족자가 있고 거기에 물대접이면…
“여긴 혹시 박선생이라는 할아버지 집이야?”
긍정의 의미로 그림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이 바뀐다.
이번에는 작은 옹달샘에서 물을 뜨는 할아버지의 그림이었다. 옆모습만 슬쩍 보이지만 주변머리가 하얀 저 대머리는 박선생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바뀐 그림은 나무와 바위 틈새로 졸졸 흐르는 물. 거기에서 또 한 번 그림이 바뀌자 아까의 나무 네그루 그림이었다.
“그러니까 박선생이 물을 뜨는 옹달샘에서 물줄기를 거슬러 가면 이 나무들이 나온다는 말이지?”
제대로 맞추었는지 나무 그림이 커졌다. 그 정도 힌트라면 괜찮겠는걸.
박선생에게 연락을 하자 수화기 너머로 활기 띈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웬 일인가. 자네가 오겠다면야 내가 모시러 가야지. 아암. 우리 선녀님도 같이 오시나?”
도대체 누가 ‘우리 선녀님’인데요. 이 할아버지의 낯간지러운 호칭을 유하는 잘도 참아주는 것 같다.
“그건 유하에게 물어볼게. 어쨌든 가능하면 내일 일찍 와줘. 하루 안에 해결해야 하니까.”
내 대꾸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말하고 나서야 내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상대로 친구 대하듯 반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그럼. 일찍 감세.”
그러나 박선생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어딘지 개운치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유하나 백은호에게도 처음부터 하대했었고 도깨비나 혼령에게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대했던 것 같다. 박선생도 비슷한 케이스라는 걸까. 전부터 그렇게 대해왔다면 이유가 뭘까.
박선생이 가고 나서, 그가 ‘선녀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유하에게 물어본 적은 있었다.
“언젠가 족자에서 나를 닮은 선녀 그림을 본 적이 있대요.”
대답은 담담하게 해줬지만 역시 본인 입으로 자신이 선녀 같다는 말을 하기는 낯 뜨거웠는지 대답하는 유하의 얼굴은 처음 보는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하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서 여러 종류의 요괴나 우렁 각시 정도까지는 상상해본 적 있지만 설마 선녀…
‘그건 좀.’
고개를 홱홱 저어 부정하고 나서 나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하가 선녀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부정한 이유 때문이다. 말도 안 된다든가 너무 동화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니면 좋겠다.’라고, 내가 바라고 있어서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존재가 아니면 좋겠다. 그렇잖아도 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이라곤 도깨비나 요괴뿐이니까 하나쯤은 사람이면 좋겠다. 마치 내가 사람인 것처럼…
그것이 소망이든 욕심이든 내 생활의 상당 부분을 그녀가 차지하고 있고, 그 이상으로 그녀가 내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뭐…저쪽에서는 별로 그렇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닌지는 몰라도 말이다.
다음날 새벽, 박선생은 내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찾아왔다. 오자마자 기세 좋게 내 방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나와 함께 유하도 잠에서 깼다. 아무래도 출입문에 도어락을 설치해야 할 것 같다.
박선생은 우리를 재촉해 차에 밀어 넣더니 안개 자욱한 도로를 평균시속 90km로 달려 4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언제 이 할아버지의 정확한 연세를 확인해야겠다.
유하는 박선생의 집에 남고, 나와 족자만 그를 따라 집 뒤편의 산을 올랐다. 짐승이 만든 길처럼 좁은 산길을 따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자 바위와 나무 틈새에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선생은 족자에게 줄 물을 언제나 여기에서 떠온다고 했다. 바위틈으로 흐른 물은 자갈과 모래가 섞인 작은 샘 바닥에 고였다가 고랑을 따라 다시 계곡으로 흘러내려갔다.
“이 물을 거슬러 가야 나온다는 말이지?”
이끼 낀 바위와 거친 각도로 꺾인 산등성이를 보며 박선생이 혀를 찼다.
“물길이 겉에 드러나 있으면야 찾기 쉽겠지만 바위 밑으로 흐르거나 아예 땅속에 감춰졌을 지도 몰라. 우선 저 바위 위로 올라가 보지. 물이 거기에서 흐르는 것은 확실해 보이니. 좀 돌아서 올라가야겠네.”
바위 위까지는 6m 정도. 지그재그로 밟고 올라가면 두세 걸음에 가능할 것 같지만 박선생 앞에서 그래도 될까?
박선생 쪽은 내게 그런 면으로 전혀 기대하지 않는지 뒷짐을 진채 느긋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허리춤에서 가는 쇠막대 두 개가 흔들리며 짤랑짤랑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ㄱ자로 꺾인 모양을 보니 엘로드인가 싶은데 물길을 찾는다는 말에 저걸 들고 나왔으면 박선생은 요괴가 아닌 걸까?
의심과 관심이 섞인 눈길로 박선생의 뒷모습을 보며 뒤따라 걷다 보니 바위 위에 도착했다. 물은 널찍한 바위의 갈라진 틈을 따라 산 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거슬러가 보자 물길이 흙 속으로 감춰져 더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박선생이 기회다 싶었는지 엘로드를 꺼내 놓고 진지하게 수맥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뭔가 단서를 발견하기도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날씨,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비 옴.
박선생은 사방이 물이라 이래서는 못 하겠다며 엘로드를 접어 넣었다.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이 할아버지 의외로 허당이다.
그 후로는 별 수가 없었다. 산에 있는 모든 소나무마다 찾아다니며 그 옆에 상수리나무가 있는지, 있다면 벚나무도 있는지 이런 식으로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박선생이 상수리나무와 벚나무를 구분할 수 있었고, 나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노인이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전부였다.
산뽕나무는 열매라도 달리기 전에 알아볼 길이 없으니 족자의 그림을 보고 확인해야 했다. 족자가 섬세한 그림으로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림은 그림. 눈앞의 나무들은 같은 종류라도 백이면 백가지로 달랐고 빗속에서는 더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식으로 한 시간쯤 산속을 헤매고 나자, 나는 괜찮았지만 박선생이 지쳐서 힘든 기색이 완연했다. 노인이 빗속에서 한 시간 동안 산속을 쏘다녔으니 멀쩡할 리가 없겠지. 마다하는 것을 무시하고 박선생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살이라도 걸리면 내 쪽에서 미안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쨌든 고객이란 말이지.
집에서는 깐깐해 뵈는 얼굴의 노부인이 유하와 함께 나물을 다듬고 있다가 돌아오는 우리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친 거 아니야. 괜찮다는데 이 친구가 기어이 업고 오겠다잖아.”
박선생이 손을 흔들며 말하자 그제야 노부인의 표정이 펴졌다.
“두 사람 다 아침도 못 먹고 왔다면서요? 준비해 놨으니까 지금이라도 들어요. 당신도요.”
일찍 출발한다고 박선생도 아침을 굶었던 모양이다. 노인을 굶긴 채로 부려먹었다고 생각하니 양심이 콕콕 쑤셨다.
늦다면 늦고 적당하다면 적당한 시각에, 우리는 널찍한 툇마루에 상을 놓고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옆 사람의 수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식사하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유하는 내 몫의 밥상을 차려놓고 내가 먹는 동안에는 후식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했다. 그래서 식사는 늘 혼자였다. 둘이 마주 앉아서 먹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어색한 일이겠지만 혼자서 먹는 밥은 가끔 식은 밥처럼 목이 메었다.
단지 함께 먹는 사람이 있을 뿐인데 밥이 달았다.
마당에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대화라야 깍두기가 잘 익었다든가 나물의 간이 딱 맞다든가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어딘지 따뜻한 것을 느끼면서 식사를 끝냈다.
내가 다시 나갈 준비를 하자 박선생이 따라나섰다.
“아서라.”
내가 손짓을 하며 말리자 나이답지 않게 맑은 눈이 처지면서 풀죽은 표정이 된다. 주인을 따라 나가지 못한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저래서야, 노인인데도 귀여워 보이니 곤란하다.
하지만 비도 오고, 속도를 높이려면 박선생 없이 혼자서 다니는 편이 나았다. 밖으로 나오는데 비옷을 뒤집어 쓴 박선생이 샘에 가는 길까지는 알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길을 잊지는 않았지만 거절하기도 미안했다.
골짜기는 벌써 큰 물길로 변해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비에 젖은 바위는 미끄러웠고 비는 더욱 거세졌다.
나무와 바위로 보호되고 있던 샘도 위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흙탕물 때문에 벌써 흐려져 있었다.
“이제 돌아가 봐. 조심하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보내려는데
“비옷도 입었는데 뭐 어떤가. 천천히 산책 삼아 근처를 걸어볼까 하는데.”
이런 말을 한다. 은근히 고집이 있네.
“내가 20년 넘게 산 곳이야. 찾아도 내가 먼저 찾을 걸? 자네는 상수리나무도 못 알아보고 꽃이 없으면 벚나무도 모르지 않나. 봐, 저기도 있네. 벚나무.”
박선생이 샘 위쪽의 바위에서 가지를 펼치고 있는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에서는 가지 끄트머리만 겨우 보이는데 잘도 알아본다.
그런데 벚나무를 가리킨 박선생이 손가락질을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 저기야. 저기!”
박선생이 외치듯이 말하며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이봐! 왜 그래?”
뒤따라 달리며 묻자 “저기라고! 저기였어!”하는 대답만 숨 가쁘게 돌아왔다. 박선생은 날듯이 달려서는 아까의 바위 위쪽, 물길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거기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밑에서 가지 끝만 살짝 보였던 벚나무가 파란 잎을 펼치고 있었다.
박선생의 시선이 벚나무에서 조금 위쪽 비탈을 거슬러 가서, 아직 어린 자그마한 나무로 옮겨갔다. 작지만 이파리의 모양이 눈에 익었다. 상수리나무다. 나도 함께 그 위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이파리가 넓은 활엽수가 있는데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족자를 펼치고 가장 위쪽에 그려진 나무를 확인했다.
“맞는 거 같은데.”
이파리 모양이 대략 비슷했다. 하지만 세 종류로는 부족하다. 마지막 하나인 소나무가 없는 것이다. 벚나무 오른쪽에 소나무가 있어야 하지만 오른쪽도 왼쪽도 잡초 외에는 없었다.
“박선생, 여기는 아니…”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노인이 벚나무 오른쪽, 아무 것도 없이 잡초만 무성한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야. 여기가 맞아.”
나무도 그 비슷한 것도 없는데? 흙더미에 풀만 자라고 있는데 박선생이 우기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젖은 풀잎을 헤쳤다. 잡초 밑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무 조각 하나가 드러났다. 무어라 글자가 적혔던 자국이 거뭇하게 남아있었는데 비에 씻겨 잘 보이지 않았다.
박선생이 내게 나무 조각을 건네주었다. 받아보고 알았다. 송판이다. 분명 소나무였다.
“여기에다 묻었어. 볕 좋고 풍경 좋은 곳이라.”
박선생은 비로 젖어 부드러워진 땅을 손으로 파냈다. 오래지 않아 진흙 속에서 거무죽죽한 뭔가가 드러났다. 두툼한 것이 삼베에 싸여 있다. 그것은 흉하게 썩어가는 털가죽이었다. 고양이 크기에 좀 더 둥근 몸체, 뭉툭한 꼬리. 무엇보다 긴 귀만 보아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물을 뜨러 오는데 나무 사이에서 퍼덕거리는 소리가 나잖아. 산새라도 있다가 나를 보고 도망갔나 생각했지. 그런데 다음 날도 소리가 나고, 또 나고, 그러다 나흘째에 궁금해서 가봤지. 그랬더니 이 녀석이 올가미에 걸려 있더라고. 이 근처가 살만한지 동물이 많아서 가끔 덫을 놓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거든. 거기 걸렸던 게지.”
박선생이 찡그린 얼굴로 이야기했다. 안 좋은 기억을 되살리는 표정이었다.
“가봤더니 영락없이 죽게 생겼더라고. 숨도 쉬는지 마는지 하고. 가망이 없지 싶어서 그냥 내려갔다가, 다음 날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시체라도 묻어주자고 다시 가봤더니 글쎄, 그 사이 새끼를 낳았는데 털도 안 난 어린 것들이 어미 시신 옆에서 다 같이 죽어 있더라고. 아뿔싸, 내가 실수를 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늦은 걸 어쩌겠어. 그래서 여기다 묻어 놓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빌었는데 이 자리가 물 지나가는 자리였구먼. 늙은 것이 한심하기도 참…”
그렇구나. 어미 토끼와 새끼들을 묻은 자리 밑이 하필이면 물 지나가는 통로였으니, 그 물을 몇 달째 마신 목신은 어쩌면 매일매일 누운 자리가 불편한 토끼와 새끼들에게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달림을 견디다 못해 신목을 찾아가게 된 걸까?
우리는 토끼들의 시신을 거두어 자리를 옮겨 묻었다. 근처에 나무도 없고 볕도 잘 들고, 분명히 물길도 없을 것 같은 높은 곳에.
박선생은 묵으로 쓴 비문이 거의 지워진 송판을 토끼의 작은 무덤 앞에 도로 세워놓았다. 묵이 씻겼다고 해서 추모하는 마음이 씻기는 것은 아닐 터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야.”
박선생이 중얼거렸다.
후회하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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