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26화 (26/218)

어이딸(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밤이 되자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이슬비로 바뀌고 새벽녘에는 그것도 멈추었다. 아직 하늘이 시커멓게 구름으로 덮인 걸 보면 오전 내내 맑아질 걱정은 없어 보인다. 덕분에 나는 깨어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실로 느긋이 내 집 주변을 거닐 수 있었다.

가장 놀란 것은 밖에서 보니 수리점 건물이 의외로 작았다는 점. 아니…이건 작다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분명 창고가 있어야 할 곳이 밖에서 보니 벽이었다는 건 넓이나 부피의 문제가 아니잖아.

줄자를 들고 다니며 작업장을 도면으로 그린 다음 밖에서 다시 확인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창고 문이 있는 벽 너머는 분명 50cm의 공간 다음에 옆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창고라고 생각했던 곳은 음…아무래도 이 건물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에메랄드 하우스가 있던 그런 곳과 같은.

그 외에는 어느 모로나 놀랄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도시의 주택가였다.

수리점 왼편에는 식당과 주점이 도로를 따라 50m쯤 이어졌다. 그 뒤쪽으로도 한 블록은 주점과 카페와 식당이 밀집해 있었다. 이래서 밤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던 거로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난 또 창고의 도깨비들이 노는 소리인 줄 알았지.

오른편으로는 식당이 하나, 자동차 수리점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서 모퉁이를 돌면 다시 카페와 옷집과 치킨 가게 같은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상점가 맞은편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초등학교가 있어 등하교 시간만 되면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했고 학교 뒤편으로는 아파트 단지가 병풍처럼 서 있었다.

여기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오전이고 흐린데도 개울 옆 산책로에는 조깅을 나온 사람과 개를 운동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계속 보였다. 시에서 조경해 놓은 꽃이며 나무도 구경할 만했다. 과연 봄이니까. 날씨만 좋으면 더 바랄나위 없겠는걸.

하지만 날씨가 좋으면 나는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는 것이다.

살짝 우울해지려는데 개울의 느린 물살을 가로지르는 잔물결이 보였다. 저 S자 모양의 움직임이나 슬쩍 슬쩍 보이는 갈색 비늘은…

‘점잖은 뱀이다.’

심심풀이 족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던 그 뱀이다. 지켜보고 있으려니 물가로 헤엄쳐 와서는 풀숲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아마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들키기 싫은 모양이었다.

“또 만났구려. 일전에는 바빠 보여서 통성명도 제대로 못하고 갔소이다. 오늘은 여유가 있으시오?”

숨어서 머리만 내놓고 있어도 예의바르고 점잖은 것은 여전하다. 또 야단맞을 수는 없으니까 나도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일도 잘 해결되었어요.”

사례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뱀의 까만 눈이 반짝거렸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구려. 늦었지만 내 소개하리다. 이름은 은규(誾規)라 하며 이 개울을 터로 삼은 뱀이올시다.”

점잖은 뱀이 머리까지 나부시 숙이며 인사를 한다.

“저, 제 이름은 김해명이고 저 길가의 수리점에서 사는 인간입니다.”

얼떨결에 나도 고개를 숙이고 대답해놓고 나서 아차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던 아주머니 한 분이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가버렸다.

아…쫓아가서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지.

낙망하고 있는 내 발치로 은규라는 뱀이 스르르 다가왔다.

“도령에 대해서는 며칠 전 영감에게 들었다오. 그 태평한 양반이 기별도 없이 갑자기 부탁을 해서 나도 깜짝 놀랐지 뭐요.”

영감이라고? 그 말에 떠오르는 거라면 창고의 영감 도깨비뿐이다. 게다가 영감 도깨비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다면 그건 심심풀이 족자 때문에 신목에게 가야 했던 그때의 일이었다.

- 너 요 앞의 개울에 가서 용신께 인사드리고 내가 하룻밤만 개울물을 빌려줍소사 청하더라고 여쭈어라.

영감 도깨비가 불 도깨비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그렇다면 그때 말한 용신이 이 뱀이란 말이다. 용신이었어?

용신(龍神)이라 하면 본래는 수신(水神)으로서 용왕을 가리키지만 바다 외에도 강이나 호수, 저수지는 물론 개울이나 작은 샘, 우물에도 깃들어 산을 관장하는 산신과 마찬가지로 물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의 권속이었다.

뱀에게 용신이라니까 안 어울리는 감투를 쓴 것 같은 느낌이지만 성격이나 분위기만은 용에 못지않잖아. 어쩐지 더 대단해 보인다.

“그때는 밤새 물을 꽤 써버렸을 텐데 괜찮았어요?”

그 긴 거리를 안개로 뒤덮어야 했으니 말이다. 뱀이 머리를 흔들흔들 기울였다.

“물이란 흐르는 거 아니겠소. 가는 만큼 또 오는 게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괜찮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뱀은 느긋이 말을 이었다.

“통성명도 할 겸, 내 오늘은 도령에게 청촉이 있기도 하여 걸음을 붙잡았소.”

청촉? 부탁?

이 뱀에게라면 이미 두 번이나 신세를 졌으니까 거절할 입장은 아니다. 무슨 일인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뱀은 여전히 점잖고 느긋하게 상체를 흔들며 말했다.

“오늘 밤 도령의 거처로 누가 찾아갈 터인즉, 아직 인세에 적응치 못한 미물이라 문지방 넘기가 힘이 드니 부디 자정에 즈음하여 문을 열어두시면 감사히 여기리다.”

말하자면 자정에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내 집으로 찾아올 테니 들어오기 쉽게 문을 열어두라는 말이다. 뭔가 위험하잖아. 이 용신은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나.

“그, 미물이 뭔데요?”

내 질문에 뱀은 까만 눈을 말끄러미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개울가에 사는 도마뱀이라오.”

아아, 예…. 그렇군요.

이렇게 해서 도마뱀 손님이 예약되었다. 그것도 한밤중에.

자정이 가까워지자 유하는 출입문을 열어놓고, 나는 작업장 구석에서 도마뱀이 들어오는 것을 보려고 대기했다. 이런 곳에 사는 도마뱀이라면 조그마니까 눈을 크게 뜨고 있지 않으면 오는지도 모를 터였다.

보통 이 시간이면 씻고 잘 준비를 하는 때라 무거워진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으려고 한다. 잠을 쫓으라고 유하가 준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반쯤 잠에 빠져 몽롱하니 있는데 차가운 것이 팔에 철썩 닿았다.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단순히 차가워서가 아니다. 피부에 닿는 느낌 때문이었다. 물기에 젖은, 미끈거리면서 찰싹 붙는 듯한 그 감촉에 본능적인 혐오를 느낀 것이다. 이건 마치…유리창에 달라붙은 개구리?

아니면 달팽이? 아니면…

“저…”

진저리를 치며 팔에 닿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내 눈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30대 후반쯤이나 되어보이는 여자였다. 가슴 앞으로 양손을 당기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차가우셨나요? 잠드신 것 같아서 깨우려고 했는데…”

사람의 모습이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랄까. 이목구비도 사지도 멀쩡하게 사람 같기는 한데 그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외모라고 해야 할까. 척 봐도 도마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 사이에서 흔히 보게 되는, 갈색의 긴 줄무늬 있는 작은 도마뱀 말이다.

사람에 비해 지나치게 길쭉한 쌀알 모양의 머리를 봐도 그렇고, 피부색은 어딘지 갈색과 황토색이 섞여 반질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목도 길고 흘러내리는 듯한 어깨에 길쭉한 몸이며, 서 있는 모양도 왠지 어색하다. 심지어 자세히 보니 긴 치마 밑에서는 갈색의 뱀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둔갑을 제대로 못한 도마뱀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 오면 고장 난 것을 무엇이든 수리해 준다고 해서요. 그렇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데 말할 때마다 살짝 벌어지는 입 안에서 인간의 것 치고는 가늘고 길쭉한 혀가 꿈틀거렸다.

“그럴…걸요. 만물수리점이니까. 뭘 고치려고요?”

내 대답에 여자는 안심한 얼굴을 하더니 품안에서 길쭉한 막대 같은 것을 꺼내놓았다. 그런데 막대의 모습이 참…화려했다.

분홍색 막대에 붉은 보석이 점점이 박혔고 끝에는 황금색 왕관 장식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왕관에 붙은 하트 모양의 자주색 보석이며 황금색 리본이며 어디를 봐도 이건 변신소녀의 마법도구다.

왜 있잖은가. 평소에는 평범한 여학생이다가 요술봉을 꺼내서 휘두르면 옷이 바뀌고 초능력이 생기는 소녀들. 바로 그녀들이 변신할 때 쓰는 요술봉인 것이다. 물론 진짜는 아니고. 플라스틱 막대에 플라스틱 보석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 샀을 때는 꽤 예쁘고 화려했겠지만 지금의 요술봉은 온통 긁힌 자국투성이인데다 보석도 듬성듬성 빠져서 보기 흉했다.

“이것을 고치려고 합니다.”

도마뱀 여인이 말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못하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용신이 부탁해서 받은 손님이니까 뭔가 특별한 물건을 맡길 줄 알고 있었는데 장난감이라니. 겉보기만으로는 여기에 뭐가 씌었는지 특별한 점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순히 고쳐달라는 거면 나보다는 유하의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저어, 곤란합니까?”

여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작업장의 불빛 아래에서 검은깨를 박아놓은 것처럼 작은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아니, 별로…. 다 고치면 어디로 연락할까요?”

어차피 용신의 부탁이라 거절할 일도 아니고.

여자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고치시면 개울로 가져와 주세요. 반드시 내일 자정이어야 합니다.”

예?

“하루 만에…?”

“곤란한가요?”

여자가 다시 작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불안한 듯 마주잡은 손등 위로 오돌오돌 비늘이 올라왔다. 긴장하니 변신이 풀려버리려는가 싶어 내가 다 불안했다.

“내일 자정에 개울로. 알았어요.”

재빨리 대답하자 여자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지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마주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허리를 숙인 여자가 점점 더 아래로 수그러들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마침내는 작은 도마뱀이 되어버렸다. 도마뱀은 잠시 주변을 휘둘러보다가 이내 네 개의 다리를 재빠르게 놀려 출입문을 향해 조르르 달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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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빵 외전 - 골동품점 은호당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골동품점 은호당(骨董品店 銀狐堂)>

평일 오전의 충장로는 한산하다. 근래에 들어서는 특히 그랬다.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일어난 은호는 창밖으로 인적이 드문 거리를 둘러보고 천천히 가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다고 해도 셔터조차 없이 유리창 붙은 나무문의 걸쇠만 푼 것에 불과했다. 이 오래된 건물은 쇼 윈도우조차 없었다. 60년대에 지었지만 일제근대건축 양식을 따른 외양은 그야말로 건물부터 골동품인 셈이다.

그러나 외양에 비해 내부는 훨씬 현대적이었다. 여러 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쳐 골동품 보관에 최적화 된 덕분이다. 공사 때마다 성주를 달래느라 비용이 추가된 걸 제외하면 그럭저럭 가격대 성능비는 만족스럽다고 은호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기술은 신의 능력을 위협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차와 과일 정도로 늦은 아침을 때운 은호는 어제 읽다 만 잡지를 들고 느긋이 판매용 소파에 기대앉았다. 단골이면 모를까 평일 오전에 지나가다 들어오는 손님 따위는 없다.

도청이 자리를 옮기고, 도시의 중심지가 상무지구로 이동하기 시작한 이래 이 근방의 경제사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숨짓지만 은호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덮인 이곳이 논밭과 초가집으로 이루어졌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건물들이 자라났다가 순식간에 폐허가 된 순간도, 잿더미 속에서 싹을 틔우는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남는 모습도 기억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명멸을 거듭했다. 이곳도 그럴 것이다.

딸랑 -

문에 걸린 초인종이 잠시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 시간에 올 단골손님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는 그의 눈에 낯선 얼굴이 잡혔다. 처음 보는 인간이고 소녀다. 열네 살쯤 되었나. 그럼 학생인데. 아, 방학이지.

가게 안으로 들어선 소녀는 생각과 달리 넓고 환한 내부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은호와 눈이 마주치자 움칫 긴장한다. 새처럼 예민했다. 은호는 잡지를 읽는 체하며 소녀가 다가올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첫눈에도 손님은 아니었다. 손안에 감추고 있는 건 뭘까. 다가올수록 좋은 향내가 난다. 향기를 품고 손아귀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물건을 그는 머릿속으로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향낭이나 분첩, 아니면 향수병이겠거니.

“저, 주인이에요?”

두어 걸음 거리에 멈춰 서서 소녀가 물었다.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은호의 나이가 골동품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로는 섬세하여 중성적인 외모도 한몫 했으리라.

은호는 힐끗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설지는 않다. 평범하고 흔한 얼굴이라 그런가? 아니 그렇다기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며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선은 꽤 상급이었다. 3년만 지나면 환골탈태 하여 나비 모양 날아오를 아이로세.

“난 주인이다만, 넌 손님이냐?”

게다가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은호는 쓸데없이 농 섞인 대꾸를 했다. 소녀가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이거 얼마나 해요?”

값을 묻는다. 은호는 시선을 떨어뜨려 소녀의 손안에서 나타난 노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황색 비단으로 만든 향낭이었다. 금사로 오얏꽃문을 수놓았다.

자수나 바느질이나 주름 잡은 모양새나 썩 잘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천이나 동다회에 꿰어진 옥은 상품이었지만 바느질한 이의 손재주는 재료를 따라가지 못했다. 꽤 많이 사용했는지 자주 닿는 부분이 닳아 있었으며 보관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누가 만들었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오래된 거래요. 조선시대에…사장님이니까 더 잘 알 거 아녜요.”

조선시대라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오얏꽃문은 대한제국 이후에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모양으로 보아 전문가 솜씨는 아니고 황실 여인 중 누군가가 사사로이 만들었을지 모른다. 주머니는 비어있지만 여우인 그는 오래 전에 남겨진 향료의 잔향을 맡았다. 안식향과 용연향, 그리고 두서너 개의 화향이 약하게 남아있었다. 좋은 재료에 고급 향료라. 망해가는 나라였다고 해도 여염집 아낙이 황실 문양을 썼을 리는 없다.

“너, 이가냐?”

“예?”

은호의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소녀가 입을 조금 벌리고 되물었다.

“성 말이다.”

“아닌데요? 성은 왜 물어요?”

“아냐.”

피식 웃으며 그는 향낭을 소녀에게 돌려줬다. 사라진 왕실의 물건이라고 새삼스러울 거 있나. 세월의 물결에 휩쓸리다 보면 천리 밖 남쪽 땅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 손에 들려 팔려 나갈 수도 있는 거지.

“옥과 매듭은 상품이니까 돈이 된다면 그 정도겠다. 주머니는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 곤란하고 상태도 안 좋고…만든 사람을 알 수 있으면 가격을 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왕실 여인의 작품이라면 가치가 좀 더 있겠지. 그의 머릿속으로 조선 왕실의 물건을 수집하고 있는 단골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얼마냐구요.”

귀찮은 듯이 소녀가 다시 물었다.

“내게 팔 거라면 백이십, 그쯤은 줄 수 있어.”

생각보다 큰돈이었던 모양이다. 소녀의 눈이 커졌다.

“지금 팔 수 있어요?”

꽤나 급했는지 당장에 묻는다. 은호는 말없이 지갑을 꺼내 수표와 만원권을 섞어 소녀에게 내밀었다. 돈을 확인한 소녀가 향낭을 주고 재빨리 나갔다

딸랑 -

초인종의 날카로운 소음이 가게 안을 갈랐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고요해진 공간에 소녀가 왔다 간 흔적은 낡은 향낭 하나뿐이었다. 은호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낡았다는 것은 시간이 쌓였다는 뜻. 골동품의 가치는 시간의 가치지.

어느 귀부인의 손이 바느질하였을꼬. 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문가의 수준에서 비교한 말이고, 일반인의 재간으로는 썩 빼어나다 해도 좋을 것이거든.

어릴 때부터 침선을 가까이 하였으리라. 날씨가 화창하면 정원을 산책하는 대신 반쯤 열린 방문에 주렴을 드리우고 꽃향기를 맡으며 수를 놓았으리. 가는 바늘대를 잡은 손가락과 실을 당기는 손목과 집중하여 조금 벌어졌을 입술을 상상한다.

몽상과 추억에 잠겨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가 정오가 가까워오나 하고 시계를 힐끗 본 순간에

쾅 - !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문을 박차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뒤에 하나가 더 있다. 남자에 비하면 새처럼 작은 여자애 하나가.

“주인 누구야!”

들어서자마자 멱따는 소리로 외치는 품이 상스럽다. 달라붙는 티셔츠에 후줄근한 반바지. 행색도 행색이지만 바깥 공기와 함께 훅 풍기는 남자의 냄새에 은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열기가 많은 몸에 잘 씻지도 않으면 이렇게 강한 체취를 풍기는 법이지.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는 위인이로고. 인간이면서 짐승 같은 자다.

“접니다만.”

소파에서 일어서며 은호가 대답했다. 주인을 일별한 남자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큰 키에 날렵한 몸이라 한결 여위어 보이기도 하고, 곱상한 외모는 약하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만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한층 크고 거칠어졌다.

“댁이 이 가게 주인이야? 사기꾼이 아니고? 쟤한테서 사간 주머니 어디 있어? 엉? 그게 어떤 물건인데 이십만 원에 꿀꺽 삼켜?”

글쎄요. 어떤 물건인지 자신은 알고 계시나? 심하게 구겨진 보관 상태로 보아하니 버리지 않은 게 용타 싶은데 말이다.

은호는 그보다 남자 뒤에서 달달 떨고 있는 소녀 쪽에 더 관심이 갔다. 벌써 머리채 잡히고 몇 대 맞았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너머로 발갛게 부은 볼이 언뜻 보였다. 남자의 억센 손이 소녀의 팔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렇게 꽉 잡으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가는 손목이다.

“어떤 내력이 있는지 저도 궁금했지요. 좀 들어도 될까요?”

소파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 하자는 뜻이지만 이 남자는 소리 지르는 것 외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당신 말이야. 어린애나 속여서 남의 집 귀한 가보를 단돈 이십만 원에 홀랑 빼먹어! 그따위로 장사해도 되는 줄 알아? 내가 이 바닥에 소문내고 다녀 볼까? 이집 주인이 순 사기꾼이더라고!”

가보였습니까? 여우는 피식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분명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다가 돈 받고 팔았다는 말에 어이쿠 그거 사실 값비싼 골동품이었나 싶어 달려온 거 아니냐고. 그나저나 이십만 원이라니 나머지 백만 원은 어디로 갔을꼬? 소녀를 힐끗 보니 사색이 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은호는 소녀에게 샀던 낡은 향낭을 내밀었다. 남자가 거칠게 그것을 낚아채고는 주머니에서 만원권 뭉치를 꺼내 휙 던졌다. 그가 소녀를 끌고 나가자 종소리가 사라지고 조용해진 가게 안에는 세종대왕의 얼굴 스무 장만 조금 전의 소동을 증명했다.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사내로다.”

구겨진 지폐를 반듯이 펴 지갑에 넣고서 은호는 중얼거렸다. 버린 것과 같은 백만 원 보다 향낭의 내력을 알 수 없게 된 것이 아무래도 아쉽다. 그야 찾아보자면 나오겠지. 그걸 들고 어디로 갔을지는 뻔하니까.

하지만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며칠 뒤 단골손님과 함께 온 귀원당 홍사장이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성질 사나운 손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참 싸가지 없는’ 사람이더라고 그는 평소에 안 하는 험한 소리를 섞어 남자를 묘사했다.

“자네 이야기를 하던데? 그걸 이십만 원이라고 사기 쳤다던가 하고. 나야 자넬 아니 안 믿었지만.”

은호는 쓴웃음만 지었다.

“참 입도 험한 사람이더라고. 비위 맞추느라 조금 맞장구를 쳐주니 이놈 저놈 욕하다 죽은 마누라 욕까지 하더구만. 그러니 딸애가 가출을 하지.”

“딸이요?”

“아, 딸 이야기도 했지. 딸년 키워봐야 소용없다던가 하면서. 가보를 훔쳐서 팔려다 들키니까 도망쳐 버렸다나.”

그래 결국 새는 날아갔구나. 이로써 백만 원은 버린 것이 아니게 되었다. 골동품의 가치는 시간의 가치. 그는 소녀의 시간을 산 것이다.

‘날아가라. 어린 새야. 내가 네 시간을 샀으니, 언젠가 내 몫의 시간을 돌려주러 너는 돌아와야 할 것이야.’

여우 은호는,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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