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28화 (28/218)

어이딸(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대빗자루 도깨비는 말하고 나서도 비밀을 잘 지킨 자신이 대견한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큰일 난 표정을 지었다.

녀석에게는 미안한 일이다만 힌트가 생겼으니 나는 잘 사용할 뿐이다.

“이게 도깨비가 만든 물건이란 말이야?”

내 질문에 주변의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서로 수군거렸다.

“말 안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김서방들은 똑똑해.”

대빗자루 도깨비가 안절부절 하다가 다른 도깨비들의 속삭임에 휩쓸려 “정말 어떻게 알았지?”하고 진심으로 물었다. 나 갑자기 얘들에게 돈 빌려주고 싶은 생각이 막 든다.

도깨비들이 소곤거리느라 소란한데 창고 안쪽에서 땅땅 하고 화로에 담뱃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이던 도깨비들이 우르르 창고로 돌아갔다. 영감 도깨비가 부르는 소리인 것이다.

어차피 두목인 영감 도깨비에게 물어야 할 일 같으니 나도 술 한 병을 챙겨서 녀석들을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도깨비들은 물건으로 돌아가 선반 위에서 눈만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영감 도깨비는 창고 가장 안쪽 구석진 곳에 있었다.

바닥에는 멍석 도깨비가 깔려있고 계절에 따라 그림이 바뀌는 병풍이 등 뒤에 펼쳐져 얼핏 보면 옛날 어느 집의 방안 같기도 했다. 멍석 가운데에서 화로 도깨비가 꾸벅꾸벅 졸다가 영감 도깨비의 담뱃대가 소리를 내면 화들짝 깨고는 했다. 그때마다 화로 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영감 도깨비는 늘 그렇듯이 화로 앞에 앉아서 곰방대 안에 연초를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화로에다 곰방대 대가리를 대고 숨을 빨아들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를 보자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네는 게 정말 영감님 같다. 나는 가끔 이 도깨비의 본체가 뭔지 궁금했다.

가져온 술을 내밀자 영감 도깨비가 지그시 눈웃음을 지었다. 그럴 때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마냥 사람 좋은 영감님 같기도 했다.

“이것 말인데…”

화로를 사이에 두고 털썩 앉아서 뜸들이지 않고 말을 꺼냈다.

“혹시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알겠어? 도깨비들의 물건 같은데 뭐에 쓰는 건지도 도무지 모르겠고.”

영감 도깨비는 내게서 요술봉을 건네받더니 흥미로운 눈으로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뭔가 알았다는 건지 생각났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말은 안 하고 천천히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이 도깨비도 그렇고 요 앞 개울의 용신도 그렇고 어째서 이렇게들 느긋하신지. 자정이 얼마 안 남은 나는 안달이 났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마침내 영감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본래 내 물건이었던 것 같소만.”

아…도깨비들의 말이 정말이었어. 영감님 이런 물건이 취향이었다니 정말 안 어울리네요. 그런데요? 내 물건 같은데요? 그래서 그 다음엔?

“저 윗산 도깨비가 탐내기에 도토리 한 줌하고 바꿨다오.”

영감 도깨비가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이었다. 만족스러운 거래였나 보다.

“듣기로는 쓰다가 잘못 해서 어디 금이 갔다고 했지. 산도깨비는 좀 거칠어서 말이오. 아무튼 금이 가면 기운이 새어나가서 모이질 않으니 쓸모가 없지. 그래서 버렸던가 보오.”

산도깨비가 버린 물건을 도마뱀이 주운 걸까? 어쨌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는 알게 된 것 같다.

“기운이 새어나가면 다시 모을 수 없는 거야?”

“기운이야 밤이면 도로 모이지 않겠소. 다만 물건에 금이 가서 채워도 채워도 도로 빠져나가는 게지.”

말하자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그래서 이 요술봉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럼 어떻게 고쳐야 하지?”

영감 도깨비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옥색의 마고자를 밀어내며 배가 부풀어 올랐다가 입과 코에서 연기가 빠져나가자 도로 가라앉는다. 눈앞을 뿌옇게 가린 연기가 꿈틀꿈틀 움직여 뭉치더니 펄럭이는 옷자락으로 변했다. 정확히는 옛날 여자들이 입었던 속곳처럼 보인다.

“그것을 도로 붙이려면 여자의 속옷과 싹 난 나무바늘과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실이 필요하다오. 그것만 구해 오면 내 고쳐주리다.”

도대체 플라스틱 요술봉을 고치는데 왜 속옷과 바늘과 실이 필요해요? 응? 도깨비 센스는 진짜 이해가 안 가. 그리고 싹이 난 나무바늘은 또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불평하고 싶었지만 부탁하러 온 주제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오는 수밖에.

그러나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이 재료들을 시간 안에 구하기는 힘들것 같다. 속옷은…음, 유하에게 부탁을 해볼까. 아냐. 이상한 녀석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훔칠까.

고민하는데 귀신 같이 유하가 장보러 간다며 작업장에 내려왔다.

“저 있잖아.”

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놓았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하가 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안돼. 못해. 여기서 속옷 하나만 달라고 하면 오늘 저녁 반찬으로 간장 하나만 나올지도 몰라.

“아냐. 조심히 다녀오라고.”

손을 저으며 말하자 얼굴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던 유하가 눈을 깜박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3층으로 달려갔다. 장보러 다녀오는 시간은 대략 15분 정도. 그 안에 해치워야 한다.

3층의 그녀 집 앞에 선 나는 심호흡으로 빨라진 숨을 가다듬었다. 내가 설마 속옷도둑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이다. 직업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식사하러 매일 세 번씩 드나들던 문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남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지금부터 범법행위를 할 계획이라 그런가.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돌렸으나, 열리지 않았다.

뭐어?!

문이 잠겨있었다. 대체 왜 문을 잠근 거지? 아니, 외출할 때 문단속 하는 건 당연한가. 하지만 날마다 왔어도 문이 잠겼던 적은 한 번도 없잖아. 그야 식사시간에만 왔으니까 다른 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망했다.

도둑질도 뭘 알아야 하지. 출입문이 잠겨 있으니 범법행위를 하고 싶어도 못할 상황이었다. 본의 아니게 착한 시민이 되려던 참에 문득 생각이 났다. 그녀가 세탁물을 옥상에서 말린다는 걸.

아…옥상.

계단을 재빨리 올라 옥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섰다. 3층 이상은 유하의 공간이라 옥상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뭐 널찍한 콘크리트 공간에 건조대가 한두 개, 화분이 몇 개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다만.

손잡이를 돌리자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다행히 여기는 잠그지 않았다. 손잡이를 밀자 두꺼운 철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열고나서야 생각이 났다. 옥상은 바깥이잖아.

순간 움찔하며 손이 떨었다. 문은 내 손을 떠나 활짝 열려버렸지만 두려워했던 것처럼 햇빛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출입문 쪽의 벽 반대편으로 해가 기울고 있는 중이라 그림자가 옥상을 절반쯤 덮고 있었다. 문이 동향이라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깔려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햇빛을 싫어하는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며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몇 걸음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옥상에는 건조대가 하나, 큰 빨래를 말리기 위한 빨랫줄이 하나 있었다. 건조대가 반쯤 그림자에 가려진 것이 보인다. 가려진 그쪽에 내 것은 아닌 자그마한 옷과 양말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도둑질을 하려는데 양심보다 몸이 무거워서 힘들다는 경우는 아마 나뿐이겠지.

자정까지 일곱 시간 정도밖에 없다.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에서 시간을 뺏길 수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움직여 건조대에 걸린 속옷 하나를 집은 다음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심장이 방망이질 하고 손이 떨리는 건 밖에 나갔다 와서인지 기억하는 한 최초의 도둑질을 해서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첫 번째 재료를 손에 넣은 나는 두 번째 재료를 가지러 내 방으로 갔다.

사실 이건 영감 도깨비에게 들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였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실. 나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드레스룸에 들어가 옷장을 열자 한 구석에 여러 벌의 옷이 뭉치듯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볼 때마다 짜증이 나는 이것은 한 달쯤 전, 은쟁반에 붙어있던 꼬맹이 혼령이 해놓은 짓이다.

녀석은 ‘묶은 사람만 풀 수 있는 붉은 실’을 내 옷의 단춧구멍마다 꿰어 놓고 가버린 것이다. 덕분에 풀 수도 없고, 엄청난 강도를 자랑하며 절대 끊어지지 않는 실이라 자를 수도 없는 채로 옷들은 한데 뭉쳐 있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입을 수도 없이 옷장에 방치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가위를 가져와 실이 걸려있는 단춧구멍마다 하나씩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실을 자를 수는 없으니 옷을 잘라야지.

그런 식으로 옷들에서 실을 떼어내자 꽤나 긴 실이 매듭이 지어진 채로 나왔다. 뭐, 영감 도깨비가 묶여 있는 실은 안 된다고 한 적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재료는 두 개. 이제 남은 것은 싹이 난 나무 바늘뿐이다. 그런 게 정말로 있는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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