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딸(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바늘이라는 건 보통 쇠로 만든다.
그야 시간을 거슬러 기원전 수만년 전까지 가보면 뼈바늘 같은 것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휴대용 반짇고리를 판촉용 선물로 나눠주고 바늘 따위 천 원 한 장이면 몇 개나 살 수 있는 기원후 21세기다.
나무 바늘 같은 걸 쓸 리가 없잖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뜨개질바늘, 나무로 만든 낚시 바늘, 그리고 도깨비바늘…
‘도깨비바늘?’
도깨비바늘이란 산속이나 잡초가 무성한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해살이 풀이다. 들이나 산을 돌아다니다 한 번쯤은 겪어 본 적 있을 것이다. 바지나 옷소매에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씨앗이 다닥다닥 붙어 일일이 뜯어내야 했던 경험이.
그것이 도깨비바늘인데 2cm가량의 길쭉한 씨앗 끝에 갈고리가 달려 있어 옷이나 동물의 털에 붙기 쉬웠다. 하지만 도깨비바늘은 풀이지 나무가 아니다. 또 씨앗은 늦여름이나 되어야 볼 수 있었다.
설마 이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무인 걸로 부족해서 싹이 난 상태여야 한다니 도깨비바늘 같은 풀이 아니라면 뭔지 모르겠다. 그냥 싹이 난 나뭇가지를 깎아 바늘 모양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뭔지 모른다면 뭐라도 해보는 편이 나았다. 유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싹 난 나뭇가지 하나를 구해 달라고 하자 수리점 앞 가로수에서 잔가지 끝을 조금 꺾어 왔다. 나뭇가지에는 싹과 이파리에 하얀 꽃송이까지 달려 있었다. 쌀알처럼 긴 꽃잎을 가진 이팝나무 꽃이다.
이게 될지 모르겠다 싶었지만 칼로 잎과 꽃을 다듬고 싹만 남긴 다음 한쪽 끝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깎았다. 다음으로 꽤나 고생해 가며 바늘귀도 뚫었다. 어딘지 어설프지만 일단 바늘 모양이 되었다. 이걸로 세 번째 재료도 완성이다.
세 가지 재료를 가지고 영감 도깨비에게 찾아가 내놓자, 감투를 쓴 희끗한 머리가 기우듬히 휘었다.
“도령, 하나가 부족하지 않소? 바늘이 없구려.”
역시 이건 안 되나?
“싹 난 나무 바늘을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 거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영감 도깨비에게 물었다.
“그야 바늘 나무에서 나지 않겠소. 가서 하나 따 오시구려.”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묻는 게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저기요, 영감님. 바늘이 열리는 나무가 어디 있는데요.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에나 있는 걸 동천로 11번지에 사는 저더러 가져오라고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응?
따지고 싶지만 이쪽은 공손히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럼 바늘 나무는 어디에서 자라지?”
한 번 더 묻자
“그야 바늘을 심으면 자라는 법 아니겠소. 어디 있는지 모르면 한 그루 잘 키워보시구려.”
친절한 대답과 함께 격려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들었다. 뭔가 울컥 올라오는데 방치하면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 재빨리 창고에서 나왔다.
릴렉스. 릴렉스.
영감님과 다툴 수는 없지. 그래. 도깨비보다는 똑똑한 내가 참아야지.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휘갈겨 쓰며 유하에게 가서 이번에는 바늘과 화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번이나 이상한 부탁을 하면 뭔가 물을 만도 하건만, 유하는 말없이 바늘 하나와 흙이 담긴 화분을 가져와 내밀었다.
바늘은 어느 모로나 평범한 크기와 모양의 쇠바늘. 화분은 5천원이면 살 것 같은 옹기 화분. 갓 담아 부슬부슬한 흙에서 특유의 냄새가 난다.
자, 바늘을 심으면 자란다고 했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인 것 같지만 나는 흙에 바늘을 쿡 꽂아 넣었다. 바늘귀가 조금 보일 정도까지 꽂은 다음 물을 뿌려주자 갈색 흙이 어둡게 젖어들었다.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어디 바늘에 싹이 나는지 두고 보자며 노려본다.
물론 싹은 안 난다.
당연하잖아! 쇠붙이인 바늘에서 싹이 날 리가 없지. 나도 안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다른 방법을 모르잖아!
오기와 분노와 체념을 담아 바늘을 노려보며 한 시간쯤 보냈다. 밖은 이제 어두워지고 있을 터다. 자정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을까. 설령 남은 시간 안에 나무 바늘을 구한다고 해도 영감 도깨비가 요술봉을 고칠 시간은 있을까? 도둑질까지 해가며 재료를 모았건만.
속에서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이따금 도마뱀 여자의 처량해 뵈는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제대로 둔갑도 못하는 도마뱀이 무엇 때문에 도깨비 조화가 깃든 물건이 필요한지도 아직 모른다.
한편으로 속을 끓이고 한편으로는 머리를 굴리며 앉아있는데 좌우에서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힐끗 보니 도깨비들이다. 내가 팔짱 끼고 앉아서 화분만 노려보고 있자 뭐하나 궁금했나 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깨비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뭐야, 뭐야? 김서방 뭐해? 쉿, 화난 것 같아. 뭐해? 뭐해? 몰라. 몰라. 물어볼까? 살짝 물어볼까? 옆구리 찔러 봐. 머리카락을 당겨 봐. 소곤거리는데 다 들린다.
모른 체하며 화분을 노려보고 있자 결국 부채 도깨비가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키며 물었다.
“김도령, 무얼 하오?”
너네 두목이 시켜서 바늘 키우고 있다. 왜?
쏘아붙이고 싶지만 죄 없는 얘들에게 화낼 수는 없지. 짜증을 꾸욱 눌러 참으며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어.”
“무엇을 기다리오?”
“바늘이 바늘 나무가 되는 걸.”
“그럼 9년 동안은 도령의 연주를 못 듣는 거요?”
무슨 소리냐? 부채 도깨비를 쳐다보자 살랑살랑, 선면을 팔락이며 말한다.
“바늘을 심어 놓고 3년 동안 거름 주고 3년 동안 물을 주고 3년 동안 햇볕 쬐면 나무가 된다오. 정성 들여 잘 키우면 좋은 바늘이 쑥쑥 열리오.”
농담이죠? 아니 아니. 옛날이야기죠? 응?
나는 부채 도깨비의 진지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깨비는 거짓말을 못한다. 그럼 정말로 바늘이 나무가 된다는 거야? 그것도 9년에 걸쳐서….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내게 남은 시간은 9시간조차 안 된다.
“저, 혹시 싹 난 나무 바늘을 구해올 수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채 도깨비에게 묻자 녀석이 부챗살을 탁 접었다.
“북망산에 가면 바늘 나무가 많다오.”
그 북망산이 설마 사람 죽으면 묻힌다는 그 북망산이냐?
“얼마나 먼 곳인데?”
“사흘 밤 사흘 낮을 달려가면 닿소.”
왕복 6일이네. 9년 보다는 빠르다만.
낙담해서 한숨을 내쉬자 도깨비들이 고개를 기울이고 쳐다보다가 나를 따라 휘유우 한숨을 쉬었다. 깨진 사발 도깨비가 달그락 달그락 다가와 내게 물었다.
“도령, 옷이 늙어버렸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싹 난 나무 바늘은 늙은 옷을 새로 키울 때 쓰잖소. 도령 옷은 음…나이를 모르겠네.”
깨진 사발 도깨비의 말에 다른 도깨비들이 일제히 내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긴 옷이 좀…”
“그렇지? 광택도 없고 무늬도 시원찮고. 늙은 것 같기도 하네.”
“그래도 해진 것은 아니잖아?”
“김서방들 옷은 색깔도 별로고.”
이봐요들. 댁들 눈에 좋은 옷은 영감 도깨비가 입은 것 같은 비단 바지저고리잖아.
어쨌든 도깨비와 현대 복식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므로, 나는 인내심을 갖고 침묵했다. 내가 말없이 화분을 노려보고 있자 도깨비들은 속닥거리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김서방, 나무가 빨리 자라게 해 줄까?”
귀가 쫑긋 서는 말이었다.
“빨리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응. 김서방 옷이 낡아 보이니 조금 도와줄까?”
비단공 도깨비가 동정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는 도깨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진 사발이나 대빗자루에게 동정 받고 있다니 어쩐지 슬프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고맙다며 부탁하자 도깨비들 사이에서 여성의 모습을 한 도깨비들만 사뿐사뿐 앞으로 나왔다.
여자 도깨비들이 배시시 웃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뭘 할 생각인지 몰라도 묘한 분위기였다.
“그럼 어디?”
“거름을 줄까?”
양산이 변한 도깨비가 펄럭, 치마를 펼쳤다. 펼친 치마가 한바탕 나부낀 다음 화분을 덮는다. 화분을 치마 속에 숨긴 양산 도깨비가 엉거주춤 주저앉더니, 아침에 화장실에서나 날 통쾌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남자 도깨비들이 깔깔거리고 여자 도깨비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놀란 내가 돌아서 있는 가운데, 여자 도깨비들은 번갈아 가며 3년 동안 줘야 할 거름을 아낌없이 바늘에게 주었고 그때마다 도깨비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뿌리가 났다. 뿌리가 났다.”
도깨비들이 들썩거렸다. 내 눈에 뿌리가 났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바늘의 크기가 확실히 커지기는 했다.
“그럼 어디?”
“물을 줘 볼까?”
이번에는 남자 도깨비들이 나섰다. 비온 뒤 계곡의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3년 동안 줘야 할 물을 뱃속에서부터 쏟아놓는 것이다.
“가지가 났다. 가지가 났다.”
도깨비들이 한 번 더 들썩였다. 정말이다. 은색의 바늘에서 가느다란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그럼 어디?”
“볕을 쬐어 줄까?”
말과 함께 불 도깨비가 훌쩍 날아 화분 위에서 맴을 돌기 시작했다. 도깨비들이 노래를 하며 함께 맴을 돌았다.
“자라라. 자라라. 훌쩍 자라라.”
“한 바퀴 돌고 한 달이 가네. 자라라. 자라라. 훌쩍 자라라.”
“두 바퀴 돌고 두 달이 가네. 자라라. 자라라. 훌쩍 자라라.”
“세 바퀴 돌고 석 달이 가네. 자라라. 자라라. 훌쩍 자라라.”
도깨비들의 노래가 점점 한 목소리로 흥겨워졌다. 도깨비들이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바늘 나무의 크기도 점점 커졌다.
가지가 넓게 펼쳐지고 이파리가 돋아나더니 하얀 꽃이 피었다가 금세 뚝 떨어졌다. 이윽고 꽃이 진 곳에서 열매가 맺히는가 싶더니 그것이 길쭉하게 자라난다. 그 가늘고 길고 끝이 뾰족한 모양은 분명 바늘이었다. 그것도 나무 바늘이다.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본 도깨비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도대체 무슨 조화로 쇠붙이인 바늘에서 나무 바늘이 열매로 맺히는지 모르겠지만 세 번째 재료는 확실히 구한 것 같다. 열매인 바늘들은 쑥쑥 자라더니 바늘귀에 조그만 싹이 돋자 완전히 여문 것처럼 나무에서 툭툭 떨어졌다.
그것을 하나 주워 두 개의 재료와 함께 영감 도깨비에게 가져가자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지 재료를 모아 오셨구려.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리고는 곰방대에서 빨아 올린 연기를 느긋이 뿜어냈다. 뿌연 연기가 눈앞을 가렸다.
────────────────────────────────────
────────────────────────────────────
어이딸(5)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잠시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짙은 연기였다. 눈앞이 하얗게 가려졌다가, 이윽고 연기가 옅어지며 천천히 사방이 드러났다.
영감 도깨비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내놓았던 물건들은 달라졌다. 세 가지 재료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요술봉은 처음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변한 것이다.
반질반질 광택이 흐르는 핑크색 몸체며, 진짜처럼 반짝이는 플라스틱 보석들, 도금된 왕관장식의 황금빛이 눈부셨다. 과연 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모양이다.
“깨끗하게 수리되었네. 고마워.”
내 치하에 영감 도깨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곰방대를 빨았다.
고쳐진 요술봉을 집어 들자 어딘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무게라기보다는 아, 그래. 서늘한 어둠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두운 기운이 손을 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무게라고 느낀 것이다.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뭐지?”
내 질문에 영감 도깨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밤기운이오. 우리들이 인간의 눈을 속일 때 쓰는 거라오. 밤기운을 빌려 한낱 부지깽이가 미녀의 모습으로 사람을 홀리고, 빗자루가 건장한 사내의 모습으로 보이는 게요.”
그렇다는 건 이 요술봉 역시 사람의 눈을 속이는데 쓴다는 거다.
이런 것을 줘도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도마뱀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어젯밤 찾아왔을 때 가련하게 보였던 것은 작은 생명체에 대한 동정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도마뱀 여자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려는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나쁜 쪽으로 보면 그 도마뱀은 이것을 가지고 인간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더욱이 나는 그녀가 며칠 전 근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붙잡힐 뻔했다던 그 도마뱀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육통을 고치러 온 아이들 말로도 도마뱀은 잠시 통에 갇혔다가 도망쳤다니 말이다.
심심풀이 족자에게 도마뱀 이야기를 듣고, 용신의 부탁으로 내게 도마뱀이 오고, 도마뱀을 잡았던 아이들이 내 수리점에 찾아오고, 그런 일이 우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혹은 우연이란 결국 인연의 결과다. 어떤 식으로 이어졌는지 모를 뿐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다.
그러니까 요 며칠 사이에 내가 보거나 들은 도마뱀들이 모두 연관이 있거나 한 마리의 도마뱀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잡힐 뻔했던 그녀가 이 요술봉을 이용해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일의 대가를 받으려고 할 수도 있다.
도깨비 정도라면 조금 짓궂은 장난이나 치고 말겠지만 도마뱀이니까 말이다. 무슨 일을 할지 짐작이 안 간다.
괜찮을까?
망설이고 있는 동안 자정이 다가왔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유하를 내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문을 열어보더니 내게 손짓했다.
“직접 나가도 될 것 같아요.”
바깥은 안개가 자욱했다. 건물 앞에서부터 개울까지 뿌옇게 가려졌다.
도마뱀 여인은 개울의 한가운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물위에 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징검다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안개가 짙어 주변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발밑이 흐리니 발을 잘못 디딜까 조심조심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 다 고치신 겁니까?”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도마뱀 여인이 나를 보자 반색하며 말했다. 어젯밤과 같이 어설프게 둔갑한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에서 가늘고 긴 꼬리가 살랑거렸다.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인간 아닌 것이 인간 흉내를 내고 있는 낯설음과 함께 종족에 상관없는 익숙한 느낌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 익숙한 느낌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도마뱀 여인의 어디에서도 악하거나 비틀린 구석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내 눈이 정확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져온 요술봉을 내밀었다.
“아아…이토록 훌륭하게…”
갈색으로 오돌오돌 비늘 오른 손이 핑크색 요술봉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안개 속에서 도마뱀 여인의 모습이 변했다.
쌀알처럼 길쭉하던 머리는 정상적인 둥근 모양으로, 목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것 같던 어깨가 옆으로 퍼지고 흔들흔들 위태롭게 선 자세가 똑바로 펴진다. 손은 부드럽고 통통한 모습에 잘 다듬어진 분홍색 손톱이 반질거렸고 치마 밑에서 흔들리던 뱀꼬리도 사라져버렸다.
누가 봐도 사람이 아니라고는 생각 못할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 것이다. 완전히 변해버린,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아무 걱정 없이 딸을 보러 갈 수 있겠어요.”
요술봉을 품안에 꼭 안고 여자가 기뻐했다.
“딸을?”
“예. 가끔 딸을 보러 학교에 갔지만 도마뱀의 몸이라, 가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발견되거나 길을 잃고 제대로 찾아가지 못했거든요. 이제 편히 보러 갈 수 있겠어요. 이것은 밤 동안 기운을 모아두는 그릇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낮에도 사람 모습을 할 수 있지요.”
그런 용도였구나. 어? 그런데 왜 낮에 학교에 가야 하는 거지? 딸이 보고 싶으면 밤에 찾아가면 되지 않아? 낮에는 사람도 많고 날도 뜨겁고…아니, 잠깐. 딸이란 도마뱀이 아닌 거야?
도마뱀 여인에게 물어보려는데 그녀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하얗게 흐려지고 있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정말…”
그냥 가는 거야? 궁금한 건 그렇다 치고 수리비는?
“고마워요…”
안개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져갔다. 고마우면 수리비를 내란 말이다!
그러나 여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안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쫓기듯이 건물 안으로 돌아왔다.
뭔가 허망하다. 하루 동안 정말 내가 얼마나 고심하고 애쓰고 안달복달 하면서 고친 건데. 한 푼도 못 받았잖아.
작업장에서는 도깨비들이 바늘나무 주변에 모여 앉아 노래하거나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자 팔짝팔짝 뛰면서 내 손을 잡아당겼다.
“김서방, 김서방. 피리를 불어줘.”
“한 곡조 뽑아 보오. 도령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오.”
정말이지 천하에 태평한 한량들이라니까. 나는 그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그럴까?”
손을 내밀자 대금 도깨비가 훌쩍 날아와 잡혔다.
뭐 수리도 잘 했고, 도마뱀 여자도 좋아하는 것 같고, 도깨비들도 즐거워 보이니 이걸로 된 걸지도 모른다.
그 후 며칠간은 이따금 도마뱀 여인이 생각났지만 그것도 일주일쯤 지나자 잊어버렸다. 바늘나무는 잘 익은 바늘을 다 떨어뜨리고 나자 가지만 앙상하니 남아서 유하가 옥상에 올려두었다. 내년 봄이 되면 또 바늘이 열린다고 한다.
수확한 바늘은 도깨비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는데 그러고도 두 개가 남아서 시험 삼아 내 옷에 써보았다. 붉은 실을 떼어내느라 가위질을 한 옷에 싹 난 나무 바늘을 콕 꽂아 놓자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것처럼 바늘은 부지런히 옷 사이를 꿰매고 다니더니 이윽고 새 옷처럼 말끔하게 바꿔놓았다.
도깨비 조화라는 건 신기하기도 하지만 쓸모도 많은 것 같다.
도마뱀 여인을 만나고 열흘쯤 후에, 나는 다시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날도 화창하니 맑아 작업장 안에서 무료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하교 시간이 되자 언젠가 들었던 발소리가 우르르 몰려왔다. 사육통을 든 꼬맹이들이다.
그런데 꼬맹이들 뒤에 처음 보는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아니, 처음 봤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도마뱀 아줌…”
나도 모르게 그녀를 가리키며 말할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입을 다물었는데 잘한 일이었다. 그녀는 도마뱀이 아니었던 것이다. 완전히 변신한 후에도 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던 비릿한 물 냄새와 밤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이도 그녀보다 젊어 보였다. 20대 후반쯤? 그러나 그 얼굴은 틀로 찍어서 만든 것처럼 도마뱀 여인과 똑같다.
“아저씨, 이거 고쳐주세요.”
전과 똑같이 사육통을 내밀며 꼬맹이가 말했다. 사육통의 거는 부분이 이번에는 전에 고친 것과 반대편인, 온전하게 남아있던 한 쪽이 뜯어져 있었다.
“뭐냐? 또 도마뱀이 부순 거야? 너희들 내 친구 안 잡는다며?”
아이들에게 묻자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친구 안 잡았어요!”
“도마뱀이 아니라 이상한 아줌마가 그랬어요!”
“우리가 도마뱀 찾고 있는데요, 어떤 아줌마가 와서 갑자기 이거 확 부숴버리고 도망갔어요.”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일러바쳤다. 도마뱀 아줌마, 복수를 하기는 한 것 같다.
“그래서 또 고쳐달라고?”
“예. 아저씨 친구는 안 잡을게요. 공짜로 고쳐주세요.”
사뭇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이들이었다. 얘들이 벌써 협상의 기술을 배웠어.
그걸 가르쳐놓은 사람이 바로 나니까 어쩌겠어. 유하를 불러내자 그녀는 말없이 공구상자를 들고 왔다. 유하가 수리하는 동안 나는 도마뱀 여인을 닮은 아이들의 동행자를 힐끗거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얘들이 귀찮게 하는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얘들 담임이에요. 아이들에게 말을 듣고 감사인사도 드릴 겸…”
동시에 어디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닌지 확인도 할 겸 따라왔다는 말은 안 했지만 어쩐지 들은 것 같다.
그나저나 담임선생님이라면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예상하고 있던 사육통 뚜껑 파손의 범인일 터다.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거 고쳐놓으면 또 아이들이 도마뱀 잡겠다고 돌아다닐 텐데. 선생님이 놔준 보람이 없게 되면…”
아이들에게 안 들리도록 조용히 말하자 담임선생님이 “어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헛기침 하는 시늉을 했다. 반응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았나 보다. 뚜껑을 사용하지 못하게 아예 부숴버리는 것은 아이들이 할 짓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할 행동은 아니었지요. 알지만 키우고 싶어 하는 심정은 저도 잘 알아서 마냥 안 된다고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렇다고 불쌍한 도마뱀을 가둬놓을 수도 없었고요.”
볼을 붉히면서 그녀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외로움을 많이 탔거든요.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하셨어요. 그래서 가끔 몰래 나비나 풍뎅이 같은 곤충들을 방에서 키우곤 했어요.”
말하고 나서 멋쩍었는지 별 소리를 다했다며 웃는 얼굴에서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평생 모를 테지.
며칠 전 자신이 살려 보낸 도마뱀이, 어릴 때 죽은 엄마의 환생이라는 것을.
도마뱀이 된 엄마가 자신을 보기 위해 요술봉을 품에 안고 학교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