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30화 (30/218)

주머니 속 안심국(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유리 깨지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창문 쪽을 힐끗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부터다.

뭐가 오늘부터냐면 이번 주에 나흘 동안 연속으로 흐린 날씨가 계속되는 구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부터인 것이다. 나흘 동안. 연속으로.

일주일의 일기예보를 확인한 뒤 구름 그림이, 심지어는 구름에 가린 해님도 없고 우산도 없이 오로지 구름 아이콘만 네 개 연속으로 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마치 휴가라도 잡아놓은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사흘 동안 시간이 평소보다 배는 느리게 지나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는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레서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도깨비들과 놀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좀 더 멀리까지 돌아다니고 싶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도 싶고, 사람 아닌 존재들과 더 오래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신목이 그중 하나였다.

3주 전쯤 그로부터 ‘다섯째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내 가슴 속에는 작은 불안이 멍울진 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처음 말을 들었을 때 느낀 두려움은 이제 거의 가셨지만 그때가 생각날 때마다 여전히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알아내야 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래야만 매년 기억을 잃어버리고, 그런데도 그것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는 나 자신의 비밀을 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한 나흘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롤스크린 위로 스며 나오는 바깥의 빛이 평소보다 약한 걸 보니 날씨가 흐릴 것이란 예보는 이번에도 잘 맞는 것 같다. 줄을 조금 당겨 스크린을 걷어 올리자 흐릿하니 뭉개진 빛이 방안에 퍼졌다.

롤스크린을 완전히 말아 올려놓은 다음 나는 유리에 손을 짚고 서서 통창 너머로 환히 드러난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보니 도로와 울타리 너머의 개울 풍경이 한눈에 드러났다. 개울 건너 비탈위에 줄줄이 선 가로수와 그 뒤편의 아파트가 멀리 보였고 아파트 위로 구름 낀 회색 하늘이 펼쳐졌다. 몇 번 본 풍경이지만 위치가 달라 그런지 새삼스러웠다.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멀리 구름에 뿌옇게 가려진 산이 아스라이 보였다. 신목이 저기에 있다. 한밤중에 안개의 터널을 달려서 갔던 기억뿐이라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략의 위치는 점칠 수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가면…

‘찾을 수 있어.’

어떻게 가능한지는 스스로도 모르면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무튼 아침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식사 시간에 유하로부터 “오늘은 출장 약속이 있다”는 말을 듣자 “안 돼.”소리가 먼저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왜 하필 오늘이야? 나중에 가면 안 돼?”

“출장 수리는 흐린 날에만 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내일이나 아니, 모레나, 글피에 가도 괜찮은 거잖아.”

떼쓰듯 말하는 내게 유하가 달래기는커녕 차갑게 말했다.

“두 달 전부터 기다리던 손님이라 곤란해요. 원래는 이미 한 달 전에 갔어야 했어요. 그 후로도 한 번 더 기회가 있었지만 다른 일이 있어서 미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핑계도 없으니까요.”

한 달 전이면 은쟁반 때문에 백은호와 함께 공주에 갔을 때다. 그 뒤의 한 번이란 족자 때문에 외출했을 때일 테고.

“나흘 동안 계속 흐릴 테니 빨리 수리를 끝내버리고 남은 시간을 마음대로 쓰세요. 그렇게 하는 쪽이 마음도 편하지 않아요?”

음…그건 그렇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유하가 처음 보는 크로스백과 메모지 한 장을 식탁 한쪽에 턱하니 올려놓았다.

“주소와 전화번호는 거기 있어요. 혼자 갈 수 있겠죠? 전 마트에 다녀올게요.”

그녀는 못 박듯이 말하고는 장바구니를 챙기더니 휭 하니 나가버렸다. 내 휴일 계획이 함께 도망 가버린 것 같다.

어째서 자영업자가 쉬고 싶을 때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는 거야. 궁시렁대며 메모지를 보자 손님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에다 택시와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과 손님 집의 간단한 약도와 함께 ‘대문. 열리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번에 고쳐야 할 물건은 대문일까?

그렇다면 장도리나 망치 같은 거라도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지금까지 내가 맡은 일 중에서 그런 식으로 고친 물건 따위는 없다는 걸 기억하고 그만두었다.

그런데 메모지는 그렇다 치고, 같이 준 크로스백은 뭐지?

보아하니 아직 약품 냄새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새 가방이다. 지퍼를 열고 가방을 뒤집어 보자 다소 무거운 소리를 내며 네모난 기계 하나가 떨어졌다.

“어…!”

의외의 물건에 놀랐다. 200g이 조금 못되는 얇고 네모난 전자제품. 이 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은 물론 홈리스조차도 갖고 있다는데 내게는 없던 것이었다. 핸드폰 말이다. 그야 나는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도무지 외출할 일조차 없으니 집전화로도 충분했지만.

그런데 필요 없던 것 치고는 막상 손에 잡아보자 다시 떼놓기 싫은 기분이 든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꽤 잘 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더라도 이 핸드폰 역시 가방과 같이 새 것이었으며 주소록에는 단 두 개, 집 전화와 유하의 번호만 기록되어 있었다.

가방 안에는 그 외에도 남자용의 반지갑과 손수건이 하나 들어있다. 지갑 안에 지폐 몇 장과 명함, 카드 외에도 내 사진이 선명한 신분증이 있는 것을 보자 낯선 기분이 들었다. 신분증이란 내가 분명히 인간 쪽의 세상에 속해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지금 사람들과 멀어진 건지도 모른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아니, 그건 그렇고.

핸드폰에 약간의 돈, 교통 카드, 손수건. 이런 걸 챙겨주다니 어쩐지 처음으로 혼자 멀리 심부름 가는 초등학생 아들에게 엄마가 줄법한 물건 아니야? 물론 혼자서 처음으로 멀리 가는 건 사실이지만. 기억하는 한.

어쨌든 가방을 비스듬히 메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깨어난 후 첫 번째 출장수리를 떠났다.

하늘이 흐렸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고, 바람이 제법 서늘한데 습도도 높지 않고. 외출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버스정류장까지는 10분 정도 걸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걸으며 시원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길가의 꽃향기를 맡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충분히 외출을 즐길 수 있었다.

버스는 시내를 구불구불 돌아서 40분 만에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 놓았다.

손님의 집은 옛 번화가인 충장로 안쪽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집이 아니라 식당이었다. 그렇게 사용되고 있으나 사실 과거에는 집이었고 지금도 외양은 조선시대의 어느 대갓집 같은 분위기를 물신 풍기는 예스러운 한옥인 것이다.

예전에 집이었다는 것은 오는 도중 검색으로 알게 된 내용이다. 식당 상호가 귀에 익어 확인해 보니 이것저것 정보들이 제법 모였다. 금세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식당은 유명한 곳이었다.

식당 앞으로 간 나는 솟을대문 문짝 하나가 없어진 채로 반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문 한 짝이 통째로 사라져 문설주에 돌쩌귀 암짝만 달랑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나 남은 문짝은 쓸모없이 굳게 닫혀 어딘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는데 뒤통수를 쪼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체격이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하인 같은 차림을 하고서 문 옆에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식당의 종업원이나 이벤트 행사를 담당하는 직원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러나 종업원이나 행사 직원이 손님을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볼 리는 없다.

그렇다고 겁먹을 나는 아니고. 수컷의 치기로 마주 노려봐주자 이내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깜짝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각이 진 네모난 턱이라 인상이 세 보일뿐 순진해 보이기도 한 얼굴이다.

“어서 오세요. 몇 시로 예약하셨어요?”

등 뒤에서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40대 여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식당의 직원 같다.

“아뇨, 전 수리 때문에…”

대답하며 다시 돌아보자 대문 옆에 있던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발소리도 없이 훌쩍 숨어버린 게 아니라면 그 남자는 분명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일 터였다.

“아, 맞다. 대문 수리! 이쪽으로 오세요.”

여자는 반색하며 나를 안내해 식당 안쪽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낮은 식탁과 좌식의자로 채워진 다른 방과 달리 거기는 서재나 응접실로 사용되는지 소파와 테이블이 놓였고 한쪽 구석에 책상과 책장도 있었다.

책상 앞에서 서류 같은 것을 뒤적이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나와 직원을 번갈아보았다.

“지영 아빠. 그분이에요. 대문 고치려고 예약했던 그 수리점 사장님…”

“아아! 아이고, 이제야 오셨습니까.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사람 목을 늘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다음 명함 주고받기로 인사를 나누었다. 중년의 남성은 이 식당의 주인이자 대문 수리를 의뢰한 손님인 최사장이었다. 조금 전의 여성이 금세 따뜻한 대추차를 내왔다. 삶은 대추를 껍질만 걸러내 섞은 걸쭉한 차다. 일 같은 건 잠깐 잊어버리고 차가 마음에 쏙 들어 유하에게 만들어 달래야겠다는 헛생각을 했다.

여자는 차를 놓고 최사장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직원인줄 알았지만 아까의 호칭으로 보아하니 부인인 모양이다.

“들어오면서 대문을 보셨습니까?”

찻잔에 입만 슬쩍 댔다 떼며 최사장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책상 오른편 벽을 가리켰다. 들어올 때는 못 본 커다란 나무문이 거기에 세워져 있었다. 생긴 모양이 밖에서 본 대문과 똑같았다.

“이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해야 할지, 도깨비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두 달 전부터 갑자기 말입니다, 대문이 열리지를 않는 겁니다. 어디에 걸린 것도 아니고 붙은 것도 아니고. 멀쩡한 문이 갑자기 닫혀서 안 열리니 식당을 어떻게 운영하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아예 문 한 짝을 뜯어내 버렸지요. 그리고 기술자들을 불러 고쳐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안 되는 겁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한탄하며 설명하던 최사장의 얼굴에 어딘지 두려운 빛이 살짝 떠올랐다.

“이 문 말입니다. 원래는 식당 바깥의 벽에 세워뒀었습니다. 손님들 안 보이게 담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것이 제 방에 들어와 있었어요. 그런데 한 번 이 방 문을 보세요.”

최사장의 말에 나는 방의 출입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이 방의 문은 한옥의 여닫이문을 흉내 내어 만들어져 있었다. 격자형 문살에 한지를 붙인 것도 그렇고 둥그런 문고리도 그렇고 흔히 볼 수 있는 문보다 훨씬 키가 낮은 것도 그랬다. 거기에 문밖의 복도는 좁았으며 짧게 꺾어져 있었다.

눕히든 세우든 비스듬히 돌리든 어떻게 하든 도무지 저 크고 넓고 두꺼운 대문이 이 방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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