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32화 (32/218)

주머니 속 안심국(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얼핏 보아 사람 같았다.

이쪽을 등지고 있는 바지저고리 차림의 사내나,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소복 입은 여자나, 그 맞은편에 회색 머리를 쪽찐 할머니도 그렇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홉 명이나 되는 이들이 모두 감쪽같은 사람 모양이다.

그러나 사람일 리가 없다.

소복 입은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허공에 떠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으며 쪽찐 할머니는 반대로 툇마루에 반쯤 잠겨 무릎 아래 치마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옆에 도사리고 앉은 소년은 비단옷을 빼입은 상반신과 달리 하반신은 구렁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 앉은 부인은 평범하게 생겼지만 손톱 대신 주황색 불꽃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도 그랬다. 사람과 섞여 있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이질적인 느낌. 혼령처럼 습하고 차가운 것도 아니며 식물이나 짐승처럼 생기 넘치지도 않으나 분명 살아있는 것을 웃도는 존재 특유의 범할 수 없는 기운.

용신이나 신목을 만났을 때 느낀 것과 같은 신의 권속이 가진 그런 기운이었다.

할머니의 호통으로 조용해진 가운데 지금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 명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오늘이 며칠이던고?”

나이 지긋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처럼 도포에 갓을 쓰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는데 가지런히 기른 수염이 허연 것이나 긴 눈썹을 따라 약간 처진 눈꼬리의 순한 모양이 첫눈에도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사월 열하루지요.”

“그런가.”

불꽃같은 손톱을 가진 부인이 다소곳이 대답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5월일 텐데 하고는 다시 생각해 보니 음력으로는 아마 4월일 터였다.

“아흔아홉일까지는 기다려 보세.”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유도 뭣도 없이 짧게 말한 것뿐이지만 지금껏 불같이 화를 내고 있던 남자도 간드러진 목소리의 여자도 더 이상 뭐라 대꾸하지 않는다.

“그러지요. 그럼 저는 이만…”

불꽃 손톱의 부인이 나부시 허리를 숙여 절하고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갔다.

“나도 갈래요.”

소복 입은 여자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고 허공에 뜬 채 스르르 주방 옆으로 사라졌다. 그들에 이어 구렁이 하체를 한 소년도, 허연 머리를 쪽찐 할머니도, 체격이 좋은 남자나 다른 이들도 모두 각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떤 이는 벽을 지나서, 어떤 이는 닫혀 있는 출입문으로 흩어져 가는 동안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파티션 뒤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싶자 다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으나,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가 머리를 내민 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며 씩 웃어보이자 상대가 말없이 손짓했다. 남들의 대화를 숨어서 엿들었던 꼴이라 야단이라도 맞을지 모른다 싶은데 오라니 안 갈 수는 없고.

파티션 앞으로 나와 멀찍이 무릎을 꿇고 앉자 한 번 더 손짓으로 다가오라고 한다.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나는 안심국이라 허네. 도령은 뉘신고?”

통성명부터 하는 건 어쩐지 용신을 닮았다. 내가 이름을 밝히자 안심국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런데 도령은 어찌 들보 위에 있지 않고 벽 뒤에 숨었는고?”

인자한 얼굴을 하고서 그가 문득 물었다. 들보 위에 있어야 했다는 거니까 나더러 밤말 엿듣는 쥐라는 뜻이다. 잘못했으면서도 쥐새끼 취급을 받자 어쩐지 울컥해서 내가 대꾸했다.

“대들보보다 벽 뒤가 덜 시끄러워서요.”

내 말에 그가 허옇게 샌 눈썹을 꿈적꿈적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조용히 웃었다.

“손님의 잠을 방해했으니 우리가 잘못한 일일세. 미안하구먼.”

그리고는 갓 쓴 머리를 조금 숙여 사과했다. 백발의 노인에게 사과를 받자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마주 절했다.

절하느라 숙인 허리를 펴는데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할아버지?”

물어볼 게 있었는데!

“저기요, 잠깐만요! 할아버지!”

주위를 둘러보며 불렀지만 대답은 없다. 아…늦어버렸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성격 좋아보였는데. 별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날이 밝기 무섭게 최사장이 부인과 함께 식당으로 와서 나를 찾았다. 밤사이 시체라도 되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지 긴장한 표정이 남아있었다. 그는 멀쩡한 나를 보자 한시름 놓은 얼굴이 되었다.

그들에게 ‘안심국’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부부는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장은 최가, 부인은 이가라니 친척은 아닌 것 같고. 직원들 중에 안가가 한 명 있다며 부인이 전화를 걸고 오더니 그 직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단서가 될만한 건 할아버지의 이름뿐인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밖을 힐끗 보니 흐릴 뿐 아니라 비도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뭐, 집에 갈 수는 있겠다.

사장 부부가 굳이 권한 아침을 먹고 나자 출근과 통학이 가까워진 시각이라 버스는 한 시간 넘게 걸려 나를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려놓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차가운 아침이었지만 길을 걷는 사람들도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들도 모두 바빴다. 이 세상에 한가한 건 창고의 도깨비들뿐인지도 모른다.

내가 작업장에 들어서자 녀석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팔짝팔짝 뛰어왔다. 우리집은 분명히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얘들이 더 강아지 같은 거지.

어쨌든 나도 도깨비들에게 볼일이 있던 참이다. 모처럼 녀석들을 위해 술자리를 만들어놓자 창고의 도깨비들이 죄다 몰려나왔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자 나는 그들에게 식당에서 본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깨비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듣고 있더니 한마디씩 했다.

“소복 입은 여자는 예쁘던가?”

“그 체격 좋은 남자는 어디 산다던가요?”

“그 식당 음식이 그렇게 유명해?”

“밤에 먹었다는 술 좀 남겨 오지.”

이 도깨비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다 말해줬지만 녀석들의 사심 섞인 의견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다. 실망이다. 도깨비들이라면 아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고 할아버지와 잠깐 마주쳤던 이야기도 마저 해주자 도깨비들이 눈을 깜박깜박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안심국이면 성조씨잖아?”

“그러네. 상량신의 옛 이름인데.”

성조씨? 상량신?

어딘가에 남겨져 있던 기억이 간질간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이름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물그림자처럼 흔들리는 아슬아슬한 기억이었다.

“성주신 말이오.”

도깨비들 너머로 나를 넘겨다보고 있던 영감 도깨비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뱉어내며 말했다.

성주신. 그거라면 조금은 알고 있다. 집을 보호하고 지키는 신이다. 성주뿐아니라 부엌에도 광에도 장독대에도 화장실까지도 집의 모든 곳에는 거기를 지키고 집안의 여러 일들을 담당하는 신들이 있다고 했지. 그들의 우두머리가 성주신이었다.

그 성주신의 본래 이름이 안심국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새벽에 내가 본 그들은 성주를 비롯한 집안의 신들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내가 대문 옆에서 봤던 체격 좋은 그 남자는 분명 문을 지키는 수문신이겠지. 하체가 구렁이 모양인 소년은 흔히 업이라고도 하는 업왕신일 것이다. 손톱이 불꽃같던 부인은 불을 다루는 걸 보니 부엌에 있는 조왕신, 처녀귀신처럼 소복을 입은 여자는 측간을 지키는 측신, 쪽찐 머리의 할머니는 장독대를 지키는 철륭신일 테고…

그 외에도 마굿간을 지키는 우마신, 우물을 지키는 정신, 화복을 다루는 제석신, 그들 모두가 집안에 깃들어 집과 가족을 지키는 가신(家神)들이었다.

지금은 식당이 되었지만 그곳은 원래 사람이 살던 집이었으니까 가신들이 그곳까지 지키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어차피 안채와도 하나의 담 안에 가둬진 모양새라 한집이라 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나눈 이야기도 의미가 짐작이 되었다. 최사장은 그들에게 뭔가를 안 한 채로 삼년, 혹은 석 달이 지난 것이다.

“수문신인가 싶은 그 남자 말인데, 석 달이 넘었다면서 화를 내더라고. 석 달 전에 뭘 해야 했던 거지?”

영감 도깨비에게 묻자 담배 연기를 뻐끔 뻐끔 뱉어내고 있던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보통은 해가 바뀌면 안택(安宅)을 하여 성주께 제물을 올리고 부귀와 평안을 기원하는데 지금이 음력으로 사월 열아흐레 되었으니 석 달을 넘겼다는 말은 그것인가 보오.”

영감 도깨비의 말에 다른 도깨비들이 소곤소곤 웅성거렸다.

“성주가 안택도 못 받고 석 달이나?”

“그 양반들은 성격 안 좋아서 집안에 우환만 생겨도 휭 하니 나가버리지 않아?”

“그래도 부르면 또 와.”

“그래. 그래. 떠나면 또 다른 성주를 부르면 되지, 뭐.”

대빗자루 도깨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제사로 청하면 성주는 오게 되어 있다. 그 성주가 이전의 성주가 아닌 전혀 새로운 성주일지라도.

하지만 가신들은 바라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홀대를 참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그래서 화를 내며 문을 꽉 닫아 버리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거겠지.

가신이라.

집안에 깃들어 사람들을 돕고 보호하지만 정작 누구도 보이지 않아 그 존재는 그림자만큼도 못하다. 잊히면 떠나고, 떠나면 사라진다.

그렇게 잊혀버리는 것은 가신들도 싫을 테고, 나도 싫었다.

달력을 들여다보며 음력 날짜를 헤아려보던 나는 99일째 되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사란 보통 자정에 드리는 법이니 가신들에게 제물을 바칠 기회도 오늘 밤 하루뿐이라는 말이다. 자정에 제사를 받지 못하면 신들은 모두 떠나버릴 터이다.

────────────────────────────────────

────────────────────────────────────

주머니 속 안심국(4)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안택.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여 가택신에게 제사하는 것. 주로 정초나 10월에 행하는 것으로 사흘 전부터 집 앞에 황토 무더기를 쌓아놓고 금줄을 쳐서 안택중임을 알려야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대체로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흘 전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라면 이미 늦은 게 아닐까. 하지만 방법이나 날짜는 지방마다 다르다니 식당의 가택신들은 하루 만에 준비한 제사라도 받아줄지 모른다.

다시 식당으로 가자 점심이 가까운 시각인데도 한가했다. 최사장을 만나 가택신들과 안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반신반의하면서 듣는다.

“그것 말이군요. 정초마다 집안 이곳저곳에 밥상이며 떡이며 차려놓던 거….”

이마를 찌푸려 생각에 잠겼던 그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하시던 것을 보기는 했습니다만, 요새는 통 안 하셨어요. 3년이 아니라 30년은 되었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이 사단이 난 거라면 30년 전에나 났을 일입니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것 같다. 성주신을 데려와서 대면시킬 수도 없고. 안 보이니 못 믿겠다는데 설득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사실 대문이 열리지 않아서 고민인 최사장에게 굳이 안택을 권할 필요도 없었다. 가택신들이 떠나면 문은 다시 멀쩡해질 터였다.

그냥 가버리라고 놔둘까?

집을 떠난 가택신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성주신이란 워낙 부정한 것을 싫어해서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우환이 들거나 하면 쉽게 떠나가 버린다니 쉽게 가는 만큼 어딘가에 쉽게 안착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별로 믿지도 않고 공경할 마음도 없는 사람의 집에 머무는 것보다는 다른 집을 찾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충 문을 고치는 체한 다음 내일이면 멀쩡해질 거라고 거짓말 할까? 이거 돈 벌기 쉬운 걸.

“뭐 그러시다면…”

어떻게든 알아서 고쳐 보겠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목덜미로 뭔가 후두둑 떨어졌다. 놀라서 만져보니 흙가루가 손바닥에 묻었다.

고개를 젖히자 한옥의 느낌을 살리려고 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나도록 틔어놓은 부분이 있었다. 흙은 거기에서 떨어진 것 같다. 서까래 사이로 황토를 이겨 넣은 것이 보였다. 황토를 뚫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흰 옷자락도.

“이거 참, 웬 흙이 천장에서….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최사장이 내 옷을 털어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여간 참견쟁이 영감 같으니라고. 새벽에 가택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시끄럽게 떠들도록 만든 것도 분명 저 할아버지일 거야.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한 번 더 최사장을 설득하기로 했다.

“믿기 힘들더라도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무당을 부를 필요도 없어요. 집주인이 간소하게 하는 것도 효험은 비슷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요.”

“그것 참….”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도 최사장은 동의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결국 최사장이 내게 물었다.

방법이라면 검색해서 알아보고 왔다. 나는 자신 있게 필요한 것들을 말했다. 곡물을 넣을 병이며 단지들, 짚, 한지, 헝겊과 지필묵, 바가지 등. 제사를 받을 신들의 신체(神體)를 이룰 재료였다.

주방에서는 제사에 쓰일 음식을 따로 마련하고 오늘 식당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기로 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왼새끼로 금줄을 치고 한지를 끼워 늘어뜨린 다음 집안의 곳곳에는 미리 준비해 둔 가택신들의 신체를 안치했다.

대들보 기둥에 백지를 오려 붙이고, 쌀 넣은 병을 짚으로 덮어 장독대 귀퉁이에 놓고, 단지에 쌀을 넣어 부엌 뒷벽 아래 두고, 부엌 시렁에 삼베 조각 위로 바가지를 엎어놓고, 광에는 팥 넣은 옹기를 넣고….

이렇게 차례대로 신체를 모신 다음 소반마다 떡이며 술이며 과일이며 차려서 가져다 놓으려는 참이었다. 주방에서 준비해 놓은 소반을 옮기는데 부인의 놀란 목소리와 함께 뭔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쪽이었다.

최사장이 먼저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뒤따라 가보니 부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왜 그래? 응?”

최사장이 물었지만 부인은 말할 기력도 없어 보였다. 와들와들 떨면서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화장실을 한 바퀴 둘러본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측신의 신체인 천장에 붙인 백지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조금 전 최사장이 의자를 갖다 놓고 힘들여 붙인 백지였다. 풀을 발라 꼼꼼히 붙여놓은 그것이 마치 손톱으로 할퀴어놓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의자도 없이. 게다가 지금 이 식당 안에 사람이라고는 우리 셋뿐이다. 부인이 놀라서 소반을 떨어뜨리는 것이 당연했다.

힐끗 살펴보자 화장실 두 번째 칸에서 산발한 머리카락이 슬며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도깨비들에게 충고해줘야겠다. 측신이 예쁘기는 한데 한 성격 하더라고.

그나저나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신체를 저 지경으로 찢어발겨 놓은 건지 모르겠다. 그냥 심술부리는 건가? 난처해하는데 주방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 모두 소리를 듣고 움칫 얼어붙었다가 내가 먼저 움직이자 부부도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주방으로 간 나는 시렁에 얹어놓았던 바가지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놀란 우리들 뒤로 대들보 기둥에 붙여 놓았던 백지가 나폴나폴 떨어져 내렸다.

신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신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이 양반들이 진짜. 바라는 게 있으면 미리 말을 해주든가. 자정이 다가오는데 이제 와서 퇴짜를 놓으면 어쩌라고. 불러다놓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심술만 부리고는 쏙 들어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부부를 잠시 나가라고 해놓고 가택신들을 하나하나 불러보았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인자해 보이던 성주신마저도 대답이 없었다. 난감하다. 정말 어쩌라는 거지?

시계를 보자 자정까지는 한 시간도 안 남았다.

뭘 잘못한 거지? 방법이 틀렸나? 역시 사흘 전부터 준비해야 했던 건가? 아니 그럴 거면 왜 99일째에 나간다고 알려준 건데?

부족하거나 잘못된 게 뭔지 알아보려고 핸드폰으로 열심히 검색해 봤지만 검색하는 곳마다 조금씩 내용이 달랐다. 시간은 점점 흐른다. 초조해졌다. 핸드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블로그들을 뒤지는데 나가 있던 부인이 슬며시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저기…”

뒤에서 최사장이 공연히 방해하지 말라며 끌어당기지만 부인은 꿋꿋이 문설주에 매달렸다.

“저 실은…”

아직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지만 할 말이 있어보였다. 들어오라고 하자 남편과 함께 와서 잠시 우리들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실은 어머니께서, 작년까지 정초가 되면 상을 차리셨어요. 새벽에 식구들 자고 있을 때 차려놓으셨다가 일어나기 전에 치우셨거든요. 그래서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뭐어?”

최사장이 놀란 목소리를 내는 걸 보니 정말 몰랐나보다.

“아니,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이마를 찡그려 인상을 쓰며 최사장이 물었다.

“그야 당신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그런 거 싫어하잖아요. 미신이라고. 그래서 모르게 조용히 했죠. 저도 별로 믿어서 그런 건 아니고. 어머니가 하고 싶어 하시니까 그래야 마음이 편하실 것 같아서 도와드렸어요. 그런데 작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시고 요양원에 가시는 바람에….”

그래서 올해는 제사를 빠트렸던 거구나.

“그런데 그게…”

부인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 신체라고 하는 거 말이에요. 실은 전부터 쓰던 게 있거든요. 오늘 만든 거랑 비슷한데 새로 만드신다기에 창고에 치워놨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우리를 안내해 전부터 써왔다는 신체들을 보여주었다. 과연 창고 안에 있었다. 짚으로 덮인 병이며 곡물이 든 항아리며 백지며 헝겊에 바가지며. 그 뿐이 아니다. 신들도 그 자리에 모두 있었다. 신체 위에 어른거리듯 흔들리는 그들의 모습은 나밖에 볼 수 없었지만.

신체는 내가 만든 것과 대부분 비슷했다. 다만 성주신만이 전혀 달랐다. 성주의 신체는 한지를 접은 것도 항아리에 쌀을 넣은 것도 아닌 주머니 안에 한지를 접어 넣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한지 안에는 약간의 곡물이 담겨서 접힌 곳을 불룩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거…할머니가 만드신 복주머니잖아.”

최사장이 주머니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는 주머니를 손에 들고 불빛 아래에서 빤히 들여다보았다. 부인이 옆에서 내려다보자 그가 주머니를 가리켰다.

“봐, 여기 복 복자를 수놓을 때 할머니는 밭 전자를 가장 크게 만들어 놓으셨거든. 그래서 글자가 항상 이렇게 안 이쁜 모양이 되었는데도 매년 그러셨지. 정초면 이런 복주머니를 몇 개나 만들어서 손자 손녀들에게 나눠주시면서 복도 받고 밭도 받아라 그러시곤 했지.”

옛날 생각이 나는지 최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가장 먼저 성주신의 신체인 주머니를 대들보 가운데 기둥에 걸어놓았다. 그제야 어째서 성주신의 신체만 주머니에 담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들보 기둥이 너무 높아서 의자를 딛는 것만으로는 닿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이 어디선가 긴 작대기를 하나 가져와서 능숙하게 그 끝에 주머니 끈을 걸더니 기둥에 박힌 못에다가 주머니를 걸었다. 성주신은 주머니에 담긴 채로 대들보 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다른 신체들도 모두 안치하고 나서 우리는 서둘러 제상을 날랐다.

야심에 이르러 밤기운이 깊어지자, 가택신들이 하나 둘 나타나 제상 위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하나같이 기분 좋은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측신마저도 나긋하니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부디 마음을 푸시고 우리 식구들, 우리 집안을 돌봐 줍소서.”

그들이 보일 리 없겠지만, 부인은 허리를 숙이고 손바닥을 비비며 나직이 소원했다. 아마도 시어머니의 하던 양을 보고 배웠을 테고, 그녀의 시어머니 역시 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똑같은 것을 배웠을 터다.

최사장이 그녀의 옆에서 어색하나마 고개를 숙이며 함께 기원했다.

식당을 나서려는데 대문 앞에서 체격 건장한 사내가 나를 가로막았다. 수문신이다. 기분 탓인가. 제상을 받더니 어쩐지 체격이 더 커진 것 같았다.

“가시기 전에 팔씨름 한 번 해보지 않으시려오? 어제 보니 힘이 좋으시더구먼.”

수문신이 싱글거리며 묻는다. 어제 대문을 열어보려고 힘껏 밀었던 이야기였다. 어제도 못 이겼는데 오늘은 더 어려울 것이다.

“씨름하자는 건 도깨비나 하는 짓 아닌가?”

내가 묻자 수문신이 껄껄 웃었다.

“도깨비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지. 편히 가시오, 도령.”

그가 비켜서는 것과 함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양쪽 모두 온전한 한 쌍의 대문이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