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36화 (36/218)

세 번째 부적(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내 말이 그의 뭔가를 확실히 건드린 것 같다.

입맛을 다시는 듯한 눈으로 소년을 보고 있던 남자가 멈칫 서더니 내 쪽을 향해 돌아선 것이다. 느리고 조용한 움직임일 뿐인데도 노리는 대상이 나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문지기 주제에 주인의 위세를 빌려 보겠다?”

나직이 말한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서 있건만 송곳니가 번득이는 아가리를 쩍 벌린 야수가 코앞에서 입 냄새를 풍기는 기분이 들었다.

“호가호위란 여우가 하는 짓이지. 허나…”

어두컴컴한 작업실 안에서 검은색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데굴 굴러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주인은 호랑이조차 아니지 않으냐.”

나, 방금 두 배로 무시당한 것 같다.

알고 있다. 그가 절대로 내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 남자는 위험하다. 백은호와도 호각, 어쩌면 그 이상일지 모른다. 몇 백번이나 여우와 부딪쳐 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만일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 남자는 피하거나 막을 수도 없는 일격으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내가 해명 도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까. 이자는 해명 도령이 훨씬 대단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혹은…호가호위라. 정말로 그것이 이유가 되지도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것을 말해보았다.

“호랑이가 아니어서 여우와는 친구거든. 다른 짐승들도 그렇고.”

백은호, 그리고 다른 짐승이라야 용신인 뱀이 있을 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렇다는 거고. 저 남자는 어떨까.

“섭…”

볼을 조금 실룩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백은호의 본래 이름이다. 그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우라고 말했을 뿐인데 해명 도령과 연계하여 백은호를 떠올린 것이다. 같은 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래서 인맥이 중요하다는 거야. 내게 쏠렸던 주의가 떠나가는 것을 느끼고 쾌재를 부르는데 목안으로 큿 웃는 소리가 남자로부터 들려왔다.

“호랑이가 아니라 여우의 위세를 빌린다?”

남자의 눈이 번득이며 내게 향했다. 꿰뚫어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어라, 이건 아닌데.

“그래. 네가 내 발밑에서 우는 소리를 내면 그 여우가 듣고 달려와 줄지, 한 번 볼까.”

이 남자는 말뿐이 아니다. 자신이 한 말을 직접 증명할 마음도 있었다.

긴장감 없이 늘어져 있던 남자의 팔이 움직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내 오른손 쪽이 아니라 목이다. 피할 테면 피해보라는 듯이 다가오는 손을 보며 내가 망설이는 동안 엉뚱한 사람이 반응을 보였다.

화륵 -

부적에 불이 붙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손이 움직였다. 남자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다. 소년으로서는 있는 힘껏 했겠지만 내 눈에도 뻔히 보일 정도로 느린 움직임을 남자는 즐거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시선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지만 남자가 기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불붙은 부적을 든 소년의 손이 남자의 가슴을 향했다.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기다려주고 있는 것을 모르고 부적을 붙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부적이 가슴과 한 뼘 거리에 들어온 순간 내 목으로 향하던 남자의 손이 소년에게 휘어졌다. 휘어지는 그 손끝이 내 팔과 부딪쳤다.

남자의 오른손을 왼팔로 막는 순간 소년의 부적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불꽃이 확 피어오르면서 고급 원단의 재킷이 한 순간 까맣게 타버렸다. 부적으로부터 반경 30cm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불이어도 일순간 모든 것을 재로 날려버리는 위력이다.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남자의 가슴에 닿은 소년의 손이 파르르 떨었다. 부적이 태워버린 것은 오직 옷뿐이었다. 손 밑에 닿은, 재가 된 천 너머의 몸에 조금도 변화가 없음을 느낀 것이다. 남자는 부적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고의로 피하지 않았다는 것을, 소년은 그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소년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막고 있던 손을 밀어젖히며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때 이미 남자의 왼손이 움직였으나 오른손으로 막을 수 있었다. 소년을 향하던 남자의 왼손이 방해를 받자 방향을 돌려 내 어깨를 후려쳤다.

뱀처럼 날렵하고도 교묘했다. 잡거나 막을 틈이 없었다. 막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다리와 허리에 힘을 줘서 버텼지만 한 발짝 정도는 뒤로 밀려나버렸다. 내 몸에 부딪친 소년이 바닥을 뒹구는 것 같았으나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눈앞의 남자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호오?”

나를 보고 남자가 입술을 모았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표정이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그렇게 말하는 쪽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겠지. 맞은 어깨가 얼얼했다. 오른쪽 팔의 감각이 약간 둔해진 느낌도 든다.

가로막는 내 손을 피해 어깨를 공격할 때의 빠르기라든가, 직격도 아니고 휘어 들어온 주먹에 이 정도 타격을 입은 걸 보면 가까운 거리는 절대로 위험했다. 하지만 발밑에는 소년이 쓰러져 있고 오른 쪽과 등 뒤 벽까지는 고작 서너 걸음. 거리를 벌리고 말고 할 상황도 아니다.

소년이 눈치껏 멀찍이 피해준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도 잠시일 터다.

이길 수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시간을 번들 형편이 바뀌지도 않는다.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길 수 없는 적을 눈앞에 두고 마음속에서 들끓는 감정은 두려움이나 낙망이 아니었다. 화가 난다.

내 뒤, 발치에 쓰러져서 공포로 흔들리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애쓰는 꼬마가 있는데 나는 눈길도 줄 수 없다. 바로 이 자리에 몇 주 전, 저런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남자의 혼령이 며칠이고 말없이 서 있었지만 위로해줄 방법조차 없었다. 화가 난다. 에메랄드 하우스에서 구미호를 만났을 때 이미 세 사람은 죽어 있었다. 슬프고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그 누구에게도 나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할 힘이 없다. 화가 난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앞에 있는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무력한가.

“분한 거냐? 인간인 주제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내심이 드러났는지 모른다. 남자는 나를 들여다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려 웃었다. 먹이사슬의 윗줄에서 내려다보는 포식자의 표정이었다. 똑같이 깔보고 있어도 백은호와는 다른 흉포함이 번들거렸다.

백은호. 그 여우요괴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쳤었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를 만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응?

마음 속 질문에 대답하듯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기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가 한숨의 뒤를 따라왔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떠오른 것이 아니라 이 귀로 지금 듣고 있는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저 예의바른 체하는 여우 요괴가.

“기완님.”

군청색 슈트를 결혼식장에라도 가는 것처럼 차려입고 와서는 기생오라비같이 빤질빤질한 얼굴을 살짝 숙여 남자에게 인사한다. 백은호에게 ‘기완’이라고 불린 남자가 여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움직였을 뿐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여유 있게 나를 노리던 그가 지금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백은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나 소년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더 이상 남자가 노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안도와 함께 자존심에 긁힌 상처가 따끔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여우의 말을 따라하여 그가 되물었다. 백은호는 출입문 쪽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새로 온 슈트들이 재빠르게 정리해서 이제는 텅 빈 작업장에 백은호의 발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밖에는 분명 슈트들이나 흰옷의 도사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그러나 남자는 그런 것을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다. 백은호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남자로부터 대여섯 발짝 거리에 오자 멈추어 서더니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어딘지 사악한 미소였다.

“예, 기완님. 그 사람은 말입니다…”

야, 백은호. 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설마 그 사람이 바로 해명 도령입니다 뭐 그런 거냐? 가뜩이나 이중으로 무시당하고 있는데? 겨우 경계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는 중인데.

“바로 제가 수년간 공들여 가르친 인간이니까요. 태령 윤문의 화령(火令)중 한 분인 기완님이라도 상대하기가 수월치 않을 겁니다.”

이봐….

이봐요? 백은호씨? 너 지금 도발하는 거냐? 그냥 둬도 시원치 않을 판에 기름 붓고 부채질 해?

남자, 기완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안중에 없을 때가 좋았는데….

“그래? 네가 직접 가르쳤다?”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당신이 집니다.”

백은호!

빼도 박도 못할 말을 툭 던져버린 백은호가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 차분히 걸어서 방금 들은 말에 정색을 하고 노려보는 기완을 지나더니, 같은 말에 멍하니 쳐다보는 나 역시 지나쳐서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소년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보릿자루라도 끌듯이 소년을 질질 끌고 계단 쪽으로 갔다.

소년을 계단 위로 훌쩍 던진 그가 난간에 한 손을 짚고 섰다. 신사복 시즌 화보라도 찍을 것 같은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백은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무슨 장난을 쳤는지는 모르겠다. 여우의 술법인지, 눈속임인지. 그러나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주변 전경에 파문이 일었다. 수면의 그림자 위로 물결이 한차례 밀려간 것처럼 흔들렸다가 이윽고 고요해지자, 변한 것은 없는데 묘하게 낯선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조용했다. 귀에 들리는 소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척조차 조용해졌다. 바로 앞에 서있는 기완과 백은호 외에 누구의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소년도…없다.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백은호가 계단 위쪽에 던지듯이 내려놓는 것을 봤는데.

“네 결계 안에 넣어두고, 사냥이라도 할 셈이냐?”

기완이 백은호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그것을 겁내는 분은 아니실 겁니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셔도 무방합니다.”

백은호가 태연히 대꾸했다. 기완이 코웃음 쳤다.

“요망한 여우 같으니라고.”

백은호는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두 발, 세 발에 이르자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그의 몸이 차츰 옅어진다.

정말로 싸우라는 거야? 백은호? 진짜? 저 남자와 단 둘이? 뒷걸음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를 쳐다보자 백은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한 발 더 뒷걸음치는 순간 희미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와주러 온 줄 알았더니 불구덩이에 밀어 넣고 가버린다.

그가 사라져가는 것과 함께 기완으로부터 살갗이 간질거리는 투기가 퍼져 나왔다.

“사과하마.”

기완이 나를 향해 말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어째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섭의 칭찬을 받다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모양이다.”

칭찬이요? 언제? 누가? 저 여우는 한 번도 칭찬 따위 한 적 없거든!

“지금부터는 제대로 상대하도록 하지.”

그 말을 하는 동안 기완의 목소리는 점점 변해, 마지막 한 마디에서는 거의 짐승의 효후와 같아졌다. 변한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피부가, 아니 그 안의 근육도 골격도, 파문이 이는 것처럼 천천히 변모하고 있었다.

햇볕에 잘 그을린 것 같은 피부 위로 얼룩진 황색의 털이 돋아나고 머리카락도 같은 색으로 변했다. 우뚝한 코가 더욱 굵어지고 인중을 중심으로 윗입술 쪽이 부스스한 털 속에서 볼처럼 부푼다. 먹을 듬뿍 적신 붓을 거칠게 휘두른 것 같은 검은 색이 입술과 털 위로 번졌다.

어째서 옷의 재단이 유행과 다르게 넉넉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가 입은 옷은 평상시의 모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한 것이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모양의, 반인반수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기묘한 변신상태인 지금에 적합했다.

그 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짐승이 무엇인가는 황색 털 위에 얼룩진 검은 줄무늬만 봐도 알 수 있다.

산군(山君), 산중왕(山中王)으로 불리는 백수의 우두머리. 지금에 와서는 이쪽 땅에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다고 알려진 산짐승의 왕.

호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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