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38화 (38/218)

세 번째 부적(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무슨 짓이라니…. 저 여우는 내가 평소에 뭘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질문을 무시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자 백은호는 단정한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도령께서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유하씨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아아, 백은호의 귀신같은 등장은 유하의 연락 덕분이었구나.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치가 있는 여자다.

“그리고 태령 윤문이라는 건? 그건 또 뭔데?”

“쉽게 말하면 도사들의 집단입니다만, 태백을 근거로 하며 대대로 태령 윤가의 가주가 수장을 맡고 있어 그렇게 부릅니다. 옛날에는 요괴를 퇴치하거나 돈을 받고 산길을 지키거나 했다지만 요새는 하는 일들이 더 다양해졌지요. 그 개성 없는 옷차림의 인간들은 겉으로 경호회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태령 윤문이 부리는 하수인들입니다. 오늘 온 자들은 아니지만 그 집안의 사람을 두세 명, 예전에 만나신 적 있을 겁니다.”

잇따른 질문에 귀찮아하면서도 백은호는 찬찬히 설명해줬다. 예전에 만난 적 있다지만 그래봐야 기억 따위 안 난다.

어쨌든 백은호의 말대로라면 그 집안은 흉폭하고 도덕성 결여된 도사들이 우글거리며 아마도 돈 되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는 종류의 막되먹은 콩가루 집안인 것 같다.

궁금할 테지만 아닌 체하면서 나와 소년을 힐끗거리는 백은호에게 대략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노골적으로 짜증내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이라면 이미 한 번, 양보해 드렸습니다만. 화풀이는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죽은 비서가 가지고 있던 동영상을 유출한 일을 말한다. 그걸로 그 때의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시 저애를 노리고 있잖아. 화풀이가 문제가 아니야.”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백은호가 태연히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도와주지 않으면 위험해지는 아이가 있다는데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이해를 못하고 계시는군요.”

백은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오히려 너야말로 그런 거 아니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백은호가 입을 열었다.

“도령께서 저자의 나이가 어린 점을 고려해 보호하려 하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우리의 법례는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습니다. 저자는 여우의 소굴에 인간을 들이려는 목적으로 부적을 썼습니다. 인간식으로 말하면 불법침입을 도운 셈입니다만, 남의 굴에 허락 없이 들어갈 때는 주인에게 물릴 각오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어리다고 죄 없다 하지는 않습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경찰이 여우의 굴에 들어간 건 납치된 아이가 있어서잖아. 저 녀석은 그 아이를 도우려고 한 거고.”

내 항변에 백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우의 먹이를 가로채기 위해서라는 게 어째서 정당한 이유가 됩니까.”

“뭐?”

말문이 막혔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째서 정당하냐고? 그렇게 묻는 여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하잖아.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여우인 그에게 사람이란 먹이중 하나일 뿐이다. 토끼나 쥐와 다름없었다. 그것은 그가 여우인 이상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다.

“내가 여우에게 잘못했다면, 그건 여우에게 갚아야 할 일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아니라.”

말문이 막힌 내 옆에서 소년이 말했다. 당돌한 눈으로 백은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백은호는 힐끗 소년을 내려다보고 코웃음 쳤다.

“누구에게 갚든 끝은 같다. 여화의 굴은 너를 쫓는 인간들과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너는 결국 여우에게 먹힐 것이고, 제자를 잘못 가르친 네 스승 역시 대가를 치르겠지.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스승이 누구인지 자복한 다음 잡아먹히는 것이 좋다.”

“말도 안 돼! 그게 그렇게 큰 죄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큰 죄입니다, 도령. 하여 저조차도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던 것이고, 도령 역시 두 번째로 들어갔을 때 여화를 인질로 삼지 않았다면 살아나오지 못했을 터입니다.”

“굴에 들어간 죄니 뭐니 그런 건 여우인 너희들의 규칙이잖아!”

“그래서 여우들의 규칙을 무시하겠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령의 자유입니다. 감당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하시지요.”

야멸치게 말한 다음 백은호는 홱 돌아서 작업장을 나가버렸다.

솔직히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말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었다.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며, 어쩔 수 없는 듯이 나서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게 이정도로까지 반응할 일이었어?

소년을 힐끗 보자 태연한 체하고 있지만 파리한 안색이었다.

“야, 걱정할 거 없어. 아까 내가 호랑이 같은 녀석 이기는 거 봤지? 누가 와도 쫓아내버리면 돼.”

위로할 생각에 부러 가볍게 말을 걸었지만 역효과였다. 애써 참고 있던 것을 건드려버렸는지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망할 여우 같으니라고! 사실이 그렇더라도 애 앞에서 그따위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

백은호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사실은 그보다, 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막막해진 지금의 상황이 더 화가 났다.

“이렇게 큰 일이 될 줄은 몰랐어요.”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적술을 배울 때 스승님이 말씀하셨어요.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종이 한 장 너머에 있다고, 그러니 이 종이를 다룰 때는 그 한 장의 차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신경 안 썼어요.”

고개를 푹 숙였지만 계단 위쪽에 서 있어서, 울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이 잘 보였다.

“어른들 말은 항상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이건 위험하다 저건 나쁘다. 그러면서 다 막아놓고 한 길로만 가라고 하니까. 그 길을 좀 벗어나도 사실 별 문제없는데…그렇게 생각해서…”

위로할 말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내 옆에서, 소년은 팔로 얼굴을 쓱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시울 안에서 까만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단호한 얼굴이다.

“폐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저 때문에 다친 거랑, 싸우게 된 거 전부 다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또박또박 사과와 감사를 한 다음 허리를 숙여 꾸벅 절했다. 이 자식이 지금 뭐래? 씩씩하게 인사하고는 계단을 내려가려는 녀석의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아야! 놔요.”

바로 성질머리가 나온다.

“너 지금 내 작업장과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그냥 가겠다는 거냐?”

“내가 여기 있으면 그 사람들이 다시 올 거잖아요. 그래서 가겠다는데…”

“어디로 갈 건데?”

“남이사!”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며 소년이 쏘아붙였다.

집으로는 못 가겠지. 스승에게 가지도 않을 것 같고. 몇 장 남은 부적뭉치를 들고 헤매다가 결국에는 태령 윤문의 도사라는 작자들에게 잡힐 테고. 갑자기 백은호가 한숨을 쉴 때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버렸다.

나는 똑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어른들 일은 어른이 알아서 할 테니 안어른은 이 길로 쭉 가시지.”

계단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2층 내 방 안 잠겨 있으니까 가서 우선 좀 씻고. 너 꼴이 아주 가관이거든.”

“지금 씻는 게 뭐가 중요해요? 아저씨 혹시…”

소년이 징그러운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저걸 그냥 확. 아냐. 참을 인(忍).

“그리고 3층으로 가면 유하라고, 성격은 좀 아니지만 음식 솜씨 좋고 이쁜 누나가 한 명 살거든. 배고프면 거기 가서 밥 달라고 해라.”

‘밥’이라는 말에 녀석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틀 동안 쫓겨 다녔다니 제대로 뭘 먹지 못했던 모양이다. 금세 아닌 체하며 “말귀 못 알아듣는 아저씨네. 내가 여기 있으면 다들 위험하다고요.”라며 버둥거렸지만 반항이 현저하게 약해졌다.

“네가 다른 데 있으면 뭐 다들 안전할 것 같냐?”

피식 웃으며 말하자 소년의 표정이 굳었다. 겁주기는 싫지만 사실이다.

교복과 얼굴이 알려진 시점에서 이미 게임 끝. 학교로 찾아가면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게 되고, 가족이 잡히면 녀석도 손 들 수밖에 없고, 스승이 누구인지 불어야 할 테고 그 다음 백은호가 말한 수순을 그대로 밟을 것이다.

그러니까 숨고 도망치고 할 때는 이미 아니었다. 그리고 싸워서 해결될 문제도 아마 아니었다.

소년은 내 말에 풀이 죽어서 얌전히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녀석을 보내놓고 나서 나는 한참동안 복잡한 머리를 굴렸다.

큰소리는 쳐 놨지만 사실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일 다시 마주칠 사람들에 대한 정보도 턱없이 부족했다. 단순히 구미호 여화가 문제라면 자존심 숙이고 백은호에게 사정해 볼 수도 있고, 인간 쪽에서만 쫓는 거라면 도깨비들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태령 윤문이었다.

인간에게도 요괴에게도 두려울 것이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그 안에는 요괴인지 구분이 안 가는 호랑이 인간도 섞여 있고. 무엇보다 도사라는 작자들이 요괴와 인간의 돈에 팔려 아무렇지 않게 어린 아이를 사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 넘겼다지만 내일은 오늘 같지 않을 터였다. 백은호라면 뭔가 방법을 낼 텐데….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사실 백은호가 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흰옷의 도사에 호랑이 인간까지 합세해서 슈트 무리가 덤벼들었으면 감당할 길이 없었다. 백은호가 호랑이 인간을 도발하고, 싸움에 진 그가 그냥 돌아가서 조용히 해결된 것이다.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그 여우는.

소년과 백은호, 여화와 태령 윤문, 그리고 죽은 세 명과 에메랄드 하우스에서 잠시 보았던 배후의 그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인 채로 고민하며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도 유하가 내려와 말을 걸었을 때야 알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드실래요? 점심.”

그녀의 말에 문득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 나는 산에 가려던 참이었다.

“지금 몇 시야?”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어요.”

아침부터 정신없이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벌써 오후 3시가 된 것이다. 기분만으로는 며칠쯤 지난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밥 먹고, 피곤한 것 같아서 해명씨 방에 재웠어요. 정신없이 자요.”

그럴 만했다.

오후 3시.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지금이라도 산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시간이 있을 때 신목이라도 만나두고 싶었다. 나에 대한 정보도 그렇지만 이 상황의 해결책이 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곳을 비우고 산에 가는 게 현명한 행동일까. 오늘은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런 놈들의 말을….

결국 고민만 하던 끝에, 그날 하루가 끝나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낮은 비명소리가 울렸다. 녀석이 침대를 차지하는 통에 소파에서 자던 나는 하마터면 굴러 떨어질 뻔하며 잠에서 깼다. 소년은 침대 옆의 벽에 등을 붙이고 잔뜩 긴장해서는 달려온 나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왔어요?”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놀란 모양이었다. 그게 내 알람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상한 아저씨 취급 받을 게 분명했다. 발밑의 유리를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밖으로 나오자 어제 있었던 일이 사실이라는 증명으로 부서진 벽과 바닥이 보였다.

이거 수리비 받아야 해. 무단침입에 기물파손. 살인미수에 폭행에 또 뭐 있지? 여러 명이 무기 들고 공격하면 가중처벌 되지 않나? 여우의 법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인간의 법은 이렇게 막 어겨도 되는 거야? 생각해 보니 괘씸하네.

밤새 고민으로 어수선했던 머리가 잠이 깨는 것과 함께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해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작업장 앞으로 차가 와서 서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에,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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