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39화 (39/218)

세 번째 부적(7)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서너 명? 슈트의 사내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소수의 정예만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그 사람들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싸우는 것도 꽤 힘들었다. 오늘 온 사람들이 어제의 호랑이 인간과 같은 부류라면 안심하고 마음껏 힘을 쓸 수 있었다.

노크나 일부러 기척을 내는 일도 없이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네 명이 들어온다. 하나는 어제 본 흰옷의 도사였다. 나머지 셋은 당연히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가장 앞에서 들어온 여자가 어쩐지 낯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흔한 얼굴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청바지에 티, 얇은 점퍼 차림의 30대 중반인 여성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신경도 안 쓰고 지나갈 것 같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녀 뒤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바짝 붙어 있었다. 모녀지간인가 싶었지만 여자 뒤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아이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아이의 얼굴은 도자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자의 바지를 붙잡고 있는 손도 반질반질하니 광택이 났다. 사람과 흡사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인형이라니 왠지 오싹하다.

나머지 한 명은 유행 지난 후줄근한 정장을 입은 남자로, 이쪽도 평범하기로 치면 여자와 비등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형에다, 피어싱과 문신과 요상한 옷차림인 도사와 함께 있으니 그 평범함이 오히려 으스스하다.

“해명 도령.”

여자가 나를 부르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웃는 낯이었다. 잘 아는 사람을 대하는 표정이다.

“오랜만입니다. 상강(霜降)에 뵈고 처음이니 거진 반년만인가요.”

나는 기억도 못하는 일을 아는 체 하며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태령 윤문에 이미 만나본 사람이 몇 있다더니 그 중 하나인 모양이다. 누군지 모르는 채로 만났다면 꽤 친한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살가운 태도였다.

하지만 태령 윤문의 사람이다. 겉모습으로 안심할 수 없을뿐더러, 그녀가 언급한 상강 때의 만남이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도 나는 기억을 못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윤문과 충돌했던 거라면 저 여자의 연기는 그야말로 수준급일 터였다.

기억이 없으니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용건이나 이야기 하지.”

부러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잘랐다. 사적인 대화를 최대한 차단한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면 그녀가 알던 이전의 내 모습과 달라졌더라도 상황이 상황이려니 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제 우리 아이들이 도령께 실례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기완도 그렇고 도영도 그렇고, 경험이 짧고 성미가 급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아이들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과연 여자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소곳이 사과하지만 그녀가 말한 생각 없는 행동이란 어제 여기에서, 다수가 한 명을 뒤쫓아 와 인간의 법을 무시하고 자비 없는 폭력을 휘둘렀던 그 일이다. 그런 일을 생각 없이 하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용건이 사과뿐이라면 받아주겠지만.”

그러나 사과가 전부일 리 없다. 말끝을 올려 대답도 질문도 아니게 대꾸한 나를, 여자가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무던한 성격의 옆집 아줌마 같은 얼굴이 한순간 뒤바뀌었다. 마치 웃는 표정인 채로 박제된 인형 같았다. 도자기 인형의 반질반질하고 차가운 표면처럼 그녀의 얼굴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제 용건은 사과뿐입니다.”

여자가 말하지만 그 안에 진심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인형의 얼굴 위에 그려졌던 미소가 천천히 걷혔다.

“다른 이들에게는, 다른 용건이 있을 테지요.”

미소가 사라지자 본모습이라고 할, 그녀 자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면처럼 단단한 표정 안에서 뱀 같은 눈이 번득이는 태령 윤문의 여도사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의 말이 신호가 된 것 같았다. 도영이라고 불렸던 흰옷의 도사가 어느새 부적을 들고 있다가 손끝을 떨쳤다. 어제 당한 것이 있어 바짝 긴장한 몸 위로 오랏줄이 감기는 듯한 힘의 포박이 느껴졌다.

비주얼은 제일 특이한 주제에 쓰는 술법은 비슷한 것들뿐이다. 어제 겪어보고도 아직 못 배운 걸까? 술법으로 몸을 묶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제 나도 모르게 했던 것을 이번에는 집중하여 스스로 해냈다. 우득 하고, 묶였던 것이 풀려나가는 느낌과 함께 한 팔이 자유로워지자 그곳에 모든 힘을 집중해 몸을 틀었다. 허공에서 힘과 힘이 부딪쳐 폭발했다. 몸이 주르륵 밀려나면서 자유를 되찾는다.

도사가 다시 술법을 쓸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몸을 날렸다. 흰옷의 도사가 손가락 사이에 낀 부적을 막 흔들려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은 부적과 함께 내게 잡혀 있었다. 요괴와 겨룰 수 있는 속도다. 인간이라면 방심하지 않는 한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흰옷의 도사 도영이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웃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뭘 잘못했지? 도영은 내 손안에 있고 후줄근한 양복의 남자는 이쪽의 싸움 따위에 관심 없는 듯이 계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내 뒤편으로 네 걸음 거리. 그리고 인형은…

등 뒤로 뭔가 뛰어오르는 기척이 있다. 피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도영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 안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손에 잡힌 부적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도영의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피하지 못한 내 등에 자그마한 것이 달라붙었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떼어내자 따끔한 느낌과 함께 머리카락이 몇 가닥 뽑혔다.

“던지지 말아요.”

인형을 집어던지려는 내게 여자가 말했다.

“도자기로 만들어서 잘 깨지거든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보란 듯이 여자의 앞으로 인형을 내동댕이치자 그녀의 발밑에서 인형의 다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수십 개의 송곳이 찔러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내 다리에서 작렬했다.

잠시 숨을 못 쉴 정도의 고통이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자 말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네요.”

몸을 숙여 인형을 집어 들며 그녀가 말했다. 다리가 부서진 인형이 까만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인형의 작고 붉은 입술에 검은 실 같은 것이 몇 가닥 물려있었다. 머리카락이다. 그것도 내 머리카락이었다.

여도사가 인형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것은 인형의 머리였지만, 뱀의 가죽 같은 차갑고 미끈한 손길이 내 머리와 볼에 느껴졌다.

“부서진 인형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손길이 인형의 어깨로 미끄러지자 나는 곧 일어날 일을 알아차렸다. 안된다거나 하지 말라는 말은 의미가 없을 테니 이를 꽉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찌익 -

인형의 팔이 옷자락과 함께 뜯겨졌다. 팔을 잡아 찢는 듯한 격통이 어깨에서 폭발했다.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깝게도.”

정말로 아쉬운 목소리를 내며 그녀가 인형의 다른 편 팔을 잡아 뜯었다.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도 참지 못한 신음을 목쉰 소리로 토해내고 말았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부서진 인형처럼 내 몸도 부서진 것 같았다.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는 내 눈에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유하와 소년이 양복 차림의 도사와 함께 있었다. 소년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유하는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안해요.”

여도사가 내게 속삭였다.

“거짓말을 했어요. 내 용건은 저 아이와 당신을 함께 처리하는 거예요. 당신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오랫동안 가둘 수는 있겠지요. 해명 도령을 봉인하는 위업이 내 것이 될 줄이야.”

차가운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쉽게….

‘말도 안 돼.’

현실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가슴을 쳤다. 말도 안 돼. 이렇게 터무니없이 당해버릴 리가 없어. 이렇게 간단하게…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도영이 유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도사의 시선이 유하의 위아래를 훑었다. 이 상황에서도 유하의 얼굴은 무심하니 표정이 없었다. 아니,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정말로 악취미군요. 언제까지 지켜볼 셈이죠?”

유하의 목소리가 뾰족하니 튀어나왔다.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묻고 싶어도 힘이 없었다.

“모처럼 태령 윤문의 고명한 봉인술법을 볼 수 있는 기회였건만.”

한숨에 이어 귀에 익은 목소리로 불평이 들려왔다. 이 목소리…백은호다.

세 명의 도사들이 놀란 얼굴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계단 뒤편 벽이 물그림자처럼 흔들렸다. 흔들리는 벽 위에서 왜곡되어 나타난 백은호의 모습이 점차 제 모습을 되찾는다. 라이트 그레이 색상의 더블 수트를 말끔하게 빼입은 여우가 모델처럼 걸어 나왔다.

“여우, 네가 태령 윤문을 훼방할 생각이냐?”

여도사가 차갑게 물었다.

“제가 아닙니다.”

느긋한 대답에 여도사가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벽에서 나온 여우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도영이 그를 가로막았다.

“비켜주시지요.”

여우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사람의 모습이되, 그 울림은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짐승의 것이었다. 비린내를 풍기는 생생한 야성에 도영이 움칫 떨었다가 한순간이나마 압도된 자신에게 화가 나는지 눈썹을 곤두세웠다.

“누님. 이 여우를 그냥 두실 겁니까?”

“그냥 뒀으면 하네.”

생경한 목소리가 여도사 대신 답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가 나온 곳은 확실히 백은호였다. 도영이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여도사가 으득 어금니를 물었다.

“그대들이 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말일세.”

목소리와 말투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백은호의 단정한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의 조소 어린 표정이나 얕보는 듯한 눈길은 흔적도 없었다.

“강신? 설마. 짐승의 몸에 신이 내릴 수는 없을 텐데.”

도영이 중얼거렸다. 여도사가 고개를 저었다.

“술법이다. 내가 인형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여우의 몸을 다루고 있는 거야.”

“누가 말입니까.”

도영의 질문에 여도사는 꽉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백은호의 앞으로 가서 표독스럽게 외쳤다.

“당신은 이 도시를 굽어보는 영산의 산군이 아니십니까. 어찌 인간의 사사로운 사정에 개입하십니까. 이는 온당치 못합니다.”

산군? 호랑이…아니. 말 그대로 산군(山君), 산신을 말하는 건가? 그 이야기 속의 산신령? 수염 기르고 머리 하얀 할아버지?

백은호가 아니 산군이 고개를 돌려 여도사를 쳐다보았다. 얼굴은 백은호였지만 다정한 눈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분명했다.

“격식을 갖춘 제상을 받아 왔다네. 예를 갖추어 소원하면 그에 응하는 것 또한 산신의 소임이 아닌가.”

산군의 대답에 여도사가 입을 꽉 다물었다. 도영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속임수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서석의 산군을 청하는 제를 올릴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아니면 어디 작은 야산의 보잘 것 없는 산신일 겁니다. 제가 직접 확인…”

우르르릉 -

거대한 구슬이 철판 위를 구르는 듯한 소리가, 하늘로부터 울려왔다. 소리치던 도영이 멈칫했다.

우우우우 -

바람 같기도 하고 곡성 같기도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번져온다.

우우우우 -

하늘에서 퍼지는 것도 같고 땅 아래에서 진동하는 것도 같은 소리였다.

우우우우 -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신목의 거처였다.

“어린 도사라도 신목과 나무가 응하여 우는 소리는 알아들으렷다.”

산군이 물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도영도 다른 도사들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영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태령의 주인에게 고하여라.”

비척비척 물러나는 도사들에게 산군이 말했다.

“여우의 빚은 여우가 스스로 받을 것이다. 도사의 죄는 그 스승이 물을 것이다. 그리고 내 땅에서 내게 진 빚은…”

우르릉 -

하늘이 한차례 진저리쳤다.

“내가 받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키는 땅에 다시 올 때는 예의를 갖추라.”

도사들은 말없이 작업장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산군이 씩 웃었다.

“참으로 귀찮은 여우로고.”

그리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백은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백은호가 아니다. 서글서글한 미소가 습관처럼 감도는 뺨 위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니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흰 옷, 긴 머리카락, 언제나 웃는 얼굴. 누군가 생각이 날 것 같았지만 떠오르다 말고 흐릿하니 뭉개져버렸다.

“언제까지 누워계실 겁니까.”

평소보다 맥없는 목소리로 백은호가 말했다. 산신이 사라졌다.

“나 다리가 부서지고 양팔이 빠진 것 같은데.”

그 모양이 된 건 인형이지만 좀 엄살을 부려보고 싶었다. 내 대꾸에 백은호가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혔다. 일어나게 잡아주려나 했더니 그냥 주저앉아 버린다. 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져 있었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하는 날이다.

“인형 가지고 노는 여자에게 순식간에 당해버렸어. 스승으로써 할 말 없어?”

내가 묻자 백은호는 힘없이 코웃음 쳤다.

“태령 윤문의 차기 가주를 노리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래? 조금은 위안이 되네.

“아까 그 산신은 뭐야? 정말 서석의 산신이야?”

“산신은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백은호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너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데.”

“제게 빚을 지신 겁니다.”

“그럼 이걸로 두 번째네.”

죽은 비서의 일로 한 번, 이번에 또 한 번.

백은호는 대꾸하는 대신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머리맡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비틀어보니 소년이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스럽게 묻는 소년의 뒤에서 유하가 우리들에게 손짓했다.

“청소해야 하니까 둘 다 저리 가요. 아니, 셋 다. 그리고 오후에는 미장과 타일 작업해야 하니 아래층에 내려오지 말아요. 뭐해요? 일어나요.”

신경질적으로 빗자루를 휘두르는 유하에게 쫓겨 세 남자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태령 윤문의 도사들보다 저 여자가 더 무섭지 않냐?”

내 불평에

“유하 누나 착해요.”

“앞으로도 백화주를 맛봐야 하니.”

소년과 백은호는 여우스럽게 대꾸했다. 배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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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부적(8)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유하는 그날 오후 내내 작업장을 수리한다며 우리를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바닥과 벽의 미장을 새로 하고 타일을 교체하고 부서진 선반을 고쳤다.

유하의 일층 수리로 덩달아 함께 이층에 감금된 백은호는 감옥이 마음에 드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내 방을 차지하고 소년과 함께 카드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둘의 하는 짓은 삼촌과 조카, 큰 형과 막내 동생 정도로 비슷했다. 나는 의외로 마음이 맞는 두 사람에게 소외된 채 천장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몇 시간 후 유하는 정말로 감쪽같이 일층을 고쳐버려서 새로 칠한 벽의 페인트 냄새만 아니었으면 어제 오늘 사이의 일 같은 건 꿈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수리가 다 끝났을 때 바깥은 구름 걷힌 파란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내 나흘간의 휴가는 그렇게 끝났다.

소년을 집으로 보내고 나서 백은호도 떠나기 전에 나는 그에게 확실히 말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라고.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전에도 그러셨으니까요.”

그것이 백은호의 대답이었다.

전에도 나는 분명 태령 윤문과 부딪친 적이 있었다. 결과는 지금과 비슷한 양상이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도 나는 다시 잊어버릴지 모른다. 마음에 안 든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어째서 그들을 잊는 것조차 방치해 버린 걸까.

백은호에게 그에 관해 물었지만 약속이 어쩌고 하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 약속이라는 거, 내가 허락할 테니까 어기면 안 돼?”

백은호에게 이렇게까지 물어봤지만 “도령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어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라는 말로 거절당했다. 과거의 나를 불러다 놓고 좀 두들겨주고 싶다. 지금이라면 제대로 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대책이 필요했다.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을 나중에라도 다시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누구도 모르고, 혹시 나 자신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방법을.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 년 전의 나는 지금과 같은 마음이 없었을까? 이 년 전의 나는? 그렇다면 그때의 나도 뭔가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을지 모른다. 과거의 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과거에 찾아낸 그 방법을, 지금의 내가 찾아내지 못한 걸까. 만일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뭘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뇌가 흙탕물이 될 정도로 머리를 굴리다 못해 결국 나는 백은호를 원망했다.

“네가 약속을 잘 지키는 게 잘못된 거라고.”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거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만.”같은 대꾸를 들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여우는 나를 힐끗 보더니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다시 시선을 돌리고 “예.”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뭐냐. …설마 삐쳤냐?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고.

화난 것 같지는 않지만 단단히 정색을 하고 있어서 묻기가 무서웠다. 괜히 건드렸어. 그냥 고맙다고나 말할 걸.

따지고 보면 결국 이번 일을 해결한 장본인은 백은호다. 태령 윤문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구하고, 호랑이 인간을 돌려보내서 시간을 벌고, 하루 동안 강력한 산신을 끌어들여 그들을 돌아가게 만든 것이다.

감사를 받을 만했다.

뭐…빚을 진거라고 말했으니 나중에 몇 배로 갚게 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러니까. 일단은.

“…마워. 어쨌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박하다가 난데없이 고맙다고 말하기 쑥스럽단 말이다.

말하고 나서 백은호를 힐끗 봤더니 못 들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문득 “예.”라고 대답했다. 뭐냐.

정말…

아무래도 난 저 여우에게 적응하기 힘들 것 같다.

<에필로그>

내 금쪽같은 휴가 이틀을 날려버린 문제아 소년 도사는 다시 볼일 없겠지 생각했던 예상을 좍좍 찢어발기고 며칠 후 다시 수리점에 나타났다.

헐떡이며 달려 들어와 숨겨달라기에 이번에는 또 누구에게 쫓기느냐고 물었다.

“어, 엄마요.”

숨이 턱까지 차서 헐떡이며 녀석이 대답했다. 너네 엄마가 왜?

“며칠 전에 학원 땡땡이 친 거 걸려서…잡히면 안돼요.”

설마 엄마가 아들을 죽이시겠냐고 물었더니 녀석이 대답했다.

“지난번에 허락도 없이 외박했다고 용돈 핸드폰 티비 컴퓨터 다 금지당하고, 사정사정해서 핸드폰만 다시 찾았는데 또 사고 치면 반톡에 내 누드 사진 올려버리겠다고 하셨다고요! 우리 엄마 한다면 진짜로 한다고요.”

너 누드 사진 찍었었냐고 묻자 녀석이 울컥하는 얼굴로 “백일 사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핸드폰만 잠깐 맡아주시면 안 돼요? 내일 학교 가는 길에 찾아갈게요.”란다.

물론 거절했다.

“땡땡이 친 네가 잘못이지 뭐.”

“아씨, 어른들은 다 똑같아!”

애들도 다 똑같네 뭐.

“네 술법으로 둔갑술 같은 거 못 하냐? 핸드폰을 꽃으로 바꾼다든가.”

웃으며 말하자 녀석은 입을 내밀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술법은 못 써요.”

“왜?”

“삼 년 동안 금지 당했어요. 진짜 스승님도 똑같아!”

스승님이 내린 벌은 그건가 보다. 술법 금지라. 음, 정말 어른들은 대충 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녀석이 불쌍해서 “뭐 어때? 창고에서 한 번 써볼래? 거기는 도깨비 소굴이라 스승님도 모르시지 않을까?”라고, 순진한 청소년을 유혹하는 불량한 어른의 대사를 던졌으나

“됐어요.”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삼 년 동안 술법은 절대로 안 쓰겠다고 스승님과 약속했어요.”

“너 언제부터 그렇게 어른 말씀 잘 들었냐?”

“약속했다고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녀석이 대꾸했다.

약속이라. 좋지. 흥!

“그럼 약속 잘 지켜라.”

손을 까닥거려 나가라는 시늉을 하자 녀석은 인상을 확 쓰며 돌아섰다.

나가는 녀석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저 녀석은 핸드폰 때문에 여기 온 것이 아니다. 확인하려고 온 거야. 종이 한 장 안의 세상에서, 종이 한 장 바깥의 세상을.

자신과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었던 그 세상을 제 눈으로 보려고 온 거야. 상처를 들쑤시고 잊지 않으려고 온 거야.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단순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어쨌든, 네가 한 일은 잘 한 거야. 용감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같은 상황이 닥치면 다시 똑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 분명히 똑같은 행동을 할 테니까. 그런 녀석이라는 걸 하루 만에 알았으니까 말이다.

막 문을 나서려던 녀석이 내 말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예.”라고 대답한 떠났다.

아아, 저 백은호스러운 놈.

왜 난 만나는 놈들마다 다 저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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