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용은 머리를 뒤로 물리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괜찮으시오? 내 처음 보는 묘한 의복이라 실례를 하였소이다. 다친 곳은 없소?”
용의 모습이지만 태도는 예의바르고 친절하다.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려 내 모습을 살피는 것이 정말 다친 데 없는지 확인하는 건지 입은 옷을 관찰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없어요. 저도 처음 보는…용이라.”
멍하니 대답하자 용이 눈을 휘어 웃었다.
“놀라지 마시오. 잠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맞다오. 내 거처에서 예까지 오가려면 이 모습이 편하여 그렇소.”
사람인데 용으로 변신해서 돌아다닌다고요? 아아, 그건 또 그것대로…처음인데.
용으로 변신한 한산 이가의 ‘개’가 긴 몸을 흔들며 내 주위로 둥글게 똬리를 틀었다.
“타시오. 내 거처로 모시리다.”
그가 내 앞으로 내려놓은 곳은 긴 몸 중에서도 뿔과 갈기 같은 털이 난 머리 부분이었다.
“타라고요?”
머리에 타라는 말인가.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간다니 어쩐지 어색한 한편 처음 보는 동물과 접촉하는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도 큰 동물, 게다가 현실에 없는 환상 속의 동물이다.
가볍게 발을 굴러 머리에 오르자 용이 스르륵 움직였다. 뱀처럼 좌우로 몸을 굴리는가 싶더니
“꽉 잡으시오.”
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휙 튀어 오른다. 놀라서 머리에 돋아난 뿔을 꽉 잡았다. 그런 말은 빨리 해줘야죠! 그런데 한 번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용은 몸을 꽈배기처럼 비틀었다 반대편으로 뺐다 하는 요상한 춤을 추며 공중을 날았다.
이른바 용틀임이라고 하는 것인데, 보기에 별로 아름답지 않고 함께 있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놀이기구 탄 기분? 그 중에서도 토네이도 같은 거…. 뭐랄까 신수답게 우아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유유히 하늘을 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방식으로 구름 위까지 날아오르더니 이윽고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것도 아주 중력의 권위에 전혀 저항하지 않는 공손한 방식으로. 덕분에 뿔을 잡고 매달려 있던 나는 평생 타볼 놀이기구를 한 번에 모두 체험했다.
“다 왔소이다.”
용이 말하며 나를 바닥에 내려줄 때는 내가 땅을 딛고 있는지 구름을 딛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사실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니 80년대 전설의 고향 찍는 것 같은 정경이기도 했다. 으스스하다든가 괴기스럽다는 건 아니고. 어딘지 전설 속의 도사나 신선들이 한적한 산 속에 집을 지어놓았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계곡 위 산중턱에 지어진 집은, 좁은 마당 좌우로 기암괴석이 담처럼 서 있고 산비탈 아래로 맑은 물이 흘렀다.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며 바위틈에 계절 없이 핀 갖가지 꽃이며 그 아래를 자욱이 흐르는 안개가 신비했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게, 정자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의 크기에 한 간의 방이 전부였다. 부엌 같은 것도 따로 없고 방조차도 두 평 남짓으로 좁았다. 그 방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대청마루가 방보다도 넓게 만들어졌다. 방의 남쪽에 벽 한 면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들어열개가 접혀서 열려있었다.
덕분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흰 중치막을 걸치고 상투를 튼 남자가 책상 앞에 양반다리로 앉아 있다가 우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화중, 누가 왔나 보게.”
용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떠밀었다. 그런데 미는 것이 손이다. 돌아보니 나를 태우고 온 커다란 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학창의를 입은 선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선비였다. 얼굴빛이 희고 해맑은데 눈은 매처럼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나와 친구를 번갈아 보는 그 눈이 즐거운 듯 반짝거렸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화중이라고 불린 남자가 일어나더니 놀란 얼굴을 태연히 바꾸고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 점잖은 걸음걸이는 꾸민 듯해 우스우면서도 고상한 데가 있었다. 무용수의 사뿐한 발걸음을 보는 것과 흡사했다.
“바깥세상의 사람이라네. 내 잠시 청했더니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와주지 않았겠나.”
용이 변한 남자, 개가 손짓으로 내게 대청마루에 오르라는 시늉을 했다. 화중도 밖으로 나오더니 셋이 함께 널찍한 마루에 앉자
“손님이 왔으면 술이 있어야겠지. 박주산채라도 괜찮다면 이 몸이 한 상 차리겠소.”
라며 나를 쳐다본다. 얼핏 봐도 부엌 따위는 없고, 방 안에 가구라고는 병풍과 책상, 횃대와 책장 하나가 전부라 음식 나올 구석도 없어 보이는데 어디에서 가져오겠다는 건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화중은 책상으로 돌아가더니, 지필묵을 꺼내 금세 먹을 갈아서 종이 위에 휘리릭 붓을 날렸다.
붓끝을 따라 검은 선이 소반 위에 술병 하나와 술잔 세 개, 안주가 담긴 그릇을 세 개 그렸다. 그 대강 그린 그림도 우스운데 종이를 들고 오더니 우리 앞에 척 내려놓는다. 놀부가 제상에 음식 올리기 싫어서 글자로 대신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림 술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자아, 그럼 손님에게 먼저.”
화중이 말하며 그림으로 손을 뻗어 굵은 선 하나로 그려놓은 투박한 술병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술잔 그림 위에 따른다. 졸졸 흐르는 소리를 내며, 그림 술병에서 그림 잔으로 맑은 술이 담겼다. 마술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화중은 술병을 내려놓고 술이 가득 담긴 술잔을 내 앞에 내놓았다. 먹으로 그린 단순한 선이었던 것이, 어느새 희고 윤기 흐르는 도기 찻잔이 되어 있었다. 화중이 자신과 친구의 술잔도 마저 채우는 동안 개가 붓을 들고 와 각자의 앞에 두 줄을 좍좍 그어서 젓가락을 한 벌씩 만들어놓았다.
이거야 말로 신선의 조화인가. 술은 향기롭고 뒷맛 은은한 것이, 유하의 백화주에 비길만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서 그들은 내게 바깥세상은 어떤 곳이냐며 묻기 시작했다.
내가 이쪽 세상이 궁금한 만큼 그들도 내가 사는 곳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게다가 그들이 기억하는 바깥세상은 아무래도 수백 년 전이었다.
누구의 치세냐고 묻는데 왕이 없다고 하자 비통한 얼굴로 왕조가 바뀌었느냐 오랑캐가 침범했느냐 아니면 왜구냐고 묻는 통에 간단하게나마 조선 후기와 근대사 수업을 해줘야 했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두 남자의 표정이 잠시도 밝아지는 순간이 없었다.
현대로 넘어와서도 그 얼굴이 펴질만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기에 역사는 대충 넘기고 아까부터 개가 신경 쓰고 있던 옷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것도 실패였던 게, 내 옷이 어디 먼 나라의 천민들이나 입는 건줄 알았던 두 사람은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이 모양으로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몰풍정이로다.”라며 개탄하는 것이었다.
해골 그림 반팔티셔츠에 청바지가 뭐 꼭 그렇게까지 몰풍정인 건 아닌데요. 반항정신이 있어요….
그야 조선시대에서 쏙 빠져나온 것 같은 선비님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아니 실은, 내 눈에도 전통 복식을 한 두 사람의 꼿꼿이 앉은 자세며 술잔을 기울일 때의 우아한 모습이며 목소리나 말투가 모두 단아하고 풍치 있어 보이기는 했다.
나와 비교하면 학과 까마귀 정도인가. 우울해진다.
둘은 그 후로도 마시거니 권하거니 하며 주제를 바꿔 이것저것 묻고 또 내 질문에도 대답해주었다. 나 역시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조선 초기의 문화 역사를 리얼하게 듣고 야화 몇 가지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외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특히 이곳에 관해서는 허무할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질문할 때마다 대답은 성실하게 해주지만 그 대답이라는 것이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선문답을 하는 기분이었다. 더 쉽게 말해달라고 하면 “태산을 넘어야 평지를 보지 않겠나.”라며 웃었다.
이 양반들이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씀하시네.
그것 말고는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좀 어려운 말을 쓰지만 기품 있는 어조로 나누는 이야기도 듣기 좋았고 수백 년의 시간에서 오는 개념 차이도 재미있었다. 둘 다 유유자적하니 서두르지도 매이지도 않으며 수백 년의 차이를 느긋이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나도 어쩐지 그들과 함께 연구(聯句)를 짓는다든가 사군자를 친다거나 거문고를 뜯는 옆에서 피리를 분다든가 하면서 어울리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한자를 이렇게 잘 알았나 하는 생각이 가물거리며 들었다가 사라졌다. 피리로 연주하는 곡은 또 뭐였지? 춘야연이 아닌데. 말투는 또 뭐야? 선비들과 비슷해졌어. 그런 생각들이 바람처럼 닿았다가 떠나갔다.
바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중에 지은 집에서 뒤창과 앞문을 열어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데 바람 부는 게 뭐가 이상할까만, 그것이 산자락을 타고 나무사이로 흘러와 마루 위로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조그만 부채로 살살 부치는 것 같은 작고 가는 바람인 것이다.
목덜미에서 한 번, 소매 끝에서 한 번, 혹은 머리카락을 조금 흔들리게 하는 정도였다. 그런 바람이 불 때마다 앞에 앉은 화중이 들고 있던 합죽선을 촥 펴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러면 어딘지 간질거리는 것 같던 바람이 합죽선의 바람에 쓸려가 버렸다. 그때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나도 조금 신경이 예민해졌다. 대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데 귓가로 살랑, 예의 간질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와 함께 화중이 접어놓았던 합죽선을 촥 폈다. 이번에는 부채를 부치기 전에 막을 생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손님을 보내드려도 되지 않겠나. 바깥에서 찾는 이도 있는 듯하고.”
화중에게 하는 말이었다. 합죽선이 움직이려다 멈칫하더니 도로 탁 접혔다. 화중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그렇군.”
바깥에서 찾는 이라고?
무슨 말인지 몰라 개를 쳐다보자 그가 집 앞의 계곡 쪽을 향해 손짓했다. 하얗게 끼어있던 구름이 손짓에 물러나더니 햇살 맑은 산중 풍경을 드러냈다. 계곡 너머의 나무가 울창한 산자락에 둥치가 굵은 참나무 가지를 가볍게 밟고 선 사람이 있었다.
흰옷의 선비들이 둔거하는 고적한 산속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체크 패턴의 아쿠아블루 수트를 빼입은 백은호였다. 그런 모습인데도 마치 가지에 앉은 작은 새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참나무와 함께 흔들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여우 요괴다.
“자네를 찾아온 이가 맞나?”
개가 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하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즐거운 마음에 너무 오래 붙잡아둬서 폐를 끼쳤나 보네. 미안하네.”
그가 한 번 더 손짓을 하자 물러났던 구름이 이번에는 계곡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졌다. 집 앞에서부터 백은호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다리였다. 말 그대로 구름다리다. 다리를 보자 백은호가 먼저 그 위로 발을 내딛었다. 원래라면 그대로 추락해 버리겠지만 그는 푹신한 솜 위를 밟은 것처럼 발목까지 묻힌 채로 구름 위에 서 있었다.
내가 일어서자 두 선비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둘은 아쉬운 얼굴로 나를 구름다리까지 배웅했다. 어쩐지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구름다리에 발을 디뎠지만 푹신한 바닥이 느껴질 뿐이었다. 다리를 건너다 말고 돌아보자 선비들의 작은 집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하얀 것에 가려져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전해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쉬운 표정이 남아 있었는지 나를 보고 백은호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까칠한 여우 요괴 같으니. 잠깐 놀았을 뿐인데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야.
하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게다가 백은호가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밖에 무슨 일이 있나 싶기도 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백은호를 따라가며 묻자 앞서 가던 그의 등이 조금 부풀었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대답은 없었다. 평소보다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백은호는 나무 사이로 난 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갈 뿐인데 주변 풍경이 어쩐지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잠시 후에는 처음 용을 만났던 그 자리로 돌아왔고 1m 위의 허공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린 것이 보였다. 허공에 구멍이라는 건 묘한 일이었지만 그 구멍 너머로 익숙한 내 작업장의 풍경이 보이자 그것이 요지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은호가 약간 거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목을 잡고 싶은데 참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에게 잡힌 순간 몸이 휙 쏠리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부서졌던 것이 모이며 나선으로 휘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나는 어두컴컴한 작업장의 작업 선반 앞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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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4)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를 작업장에 되돌려 놓은 백은호는 말없이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밖은 환한 대낮이라 쫓아갈 수도 없었고 그보다 3층으로부터 달려 내려오는 유하의 발소리가 들렸다. 백은호 역시 그것을 들었는지 문을 나서다 말고 기다렸다가 계단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도령은 멀쩡합니다. 신선놀음을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계단에서 나타난 유하를 보고 나는 잠시 움찔, 떨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서 걱정했던 것도 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묘한 두려움이 가슴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곧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깨달았다.
“저기…”
입을 뗐지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유하는 입술에 힘을 줘서 일그러뜨리고는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붓기가 남은 눈시울위로 눈물이 넘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방금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이 정말로 싫다. 두려울 정도로 싫다. 바라지 않는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미안해.”
왜 우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사과했다. 어떻게든 저 표정을 안 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하는 치맛자락을 꽉 틀어쥐고 나를 보다가 휙 돌아섰다. 그녀의 우는 얼굴과 함께 뭉클뭉클 일어나려던 기억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것에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이 원하지 않는 기억의 끈을 당겨야 할지 모르는 채로 나는 혼란해 있었다.
“위장천으로 떠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요?”
바르르 떠는 숨을 들이쉰 다음 조금 쉰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
“요지경을 보고 있었어. 그 안에 눈…누가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쪽으로 와보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잠깐 다녀온 거야. 그 동안 여기에서…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유하의 뒷모습이 약간 들썩였다.
“그것이 세 달 전의 일이에요.”
숨을 눌러 참으며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가 그녀의 옷이 5월에 입기에는 너무 얇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작업장 공기도 왠지 평소보다 훈훈하고.
“해명씨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 요지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밖으로 나간 흔적은 없고 건물 안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분명 위장천으로 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잠깐, 세 달 전이라는 게 설마 그 말이야? 정말로 거기 있는 동안 세 달이 지난 거야? 기껏해야 두 시간쯤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날 은호씨가 당신을 따라갔고 그로부터 세 달 만에 돌아온 거예요. 은호씨는 요지경이 어디로 이어졌을지,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몰라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어요.”
유하의 말에 선비들의 거처에서 본 백은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구름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는 언제나처럼 말끔하고 빈틈없는 여우 요괴였다. 석 달 동안이나 나를 찾아서 위장천을 헤매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백은호잖아. 그라면 무슨 일이든 아주 쉽게, 간단히 해결해버릴 거라고……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백은호 뿐 아니라 유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차가운 얼굴로 쏘아보고는 3층으로 가버리는 정도가 아닐까 라고. 기억하는 동안 그녀는 항상 그랬으니까.
그러나 내 기억이라는 것은, 불과 몇 달 전 깨어난 이후 석 달 정도의 시간이 고작이었다.
“미안…잘못했어.”
석 달. 백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들이 나를 찾고 있을 때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 없이 마시고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두 배로 미안했다. 그런 곳일 수 있지 않을까 의심했으면서 막상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바깥의 일 따위 전혀 걱정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해버렸으니까.
“잘못한 일은 아니에요. 고의도 아니니까요.”
유하의 목소리는 점점 되돌아가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한 그녀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였다.
“은호씨에게는 감사인사라도 해 둬요. 당신 때문에 바깥의 일을 모두 취소해서 손해가 생겼을 거예요. 도깨비들에게는 잠시 여행을 갔다고 설명했어요. 그리고…”
그녀의 고개가 조금 돌아갔다. 이쪽을 돌아봤지만 내가 아니라 작업 선반 위의 요지경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것을 맡긴 녀석도 내가 위장천에 갔다는 걸 알고 있겠지.
“석 달 동안 하루에 세 번씩 찾아왔어요. 등하교 때랑 학원 끝나고요. 곧 하교 시간이니 또 올 거예요.”
유하는 말하고 나서 또박또박 걸어 계단을 올라갔다. 어쩐지 힘없는 뒷모습이었다.
그녀가 가고 나자 텅 빈 작업장을, 나는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기억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그대로의 풍경이다. 석 달이나 지나버렸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벽에 걸린 달력이 8월을 가리키고 있으며 언제나 선반위에서 뒹굴거리던 대금 도깨비도 보이지 않았다. 공기는 덥고 습했다.
이곳에 있으니 선비들과 보냈던 시간이 아주 먼 옛날이거나 꿈속의 일 같다. 어쩐지 나도 힘이 없어 의자에 털썩 앉는데 뒤에서 뭔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등을 더듬어 보니 딱딱한 나무살과 접힌 종이가 손에 잡혔다. 그것을 따라 내려가자 허리띠로 이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기 전에 정체가 짐작이 되었다.
뽑아서 보자 과연 그것은 합죽선이었다. 화중이 들고 있던 것을, 아마도 작별할 때 슬그머니 허리춤에 끼워놓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모르는 채로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이다. 그가 왜 부채를 준 걸까. 오래 붙잡아 둬서 미안했던 걸까.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소년이 들어왔다. 들어오다 나를 봤는지 멈칫 서서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뭐냐, 넌 사람을 귀신 보듯 하고.”
픽 웃고 말을 던지자 소년이 단숨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석 달 만에 녀석은 그렇잖아도 갸름한 얼굴이 좀 더 여윈 것 같았다.
“돌아왔어요? 은호 아저씨는요? 같이 온 거 아니에요?”
백은호도 같이 아저씨 취급을 받으니 좋네.
“같이 와서 먼저 가버렸어. 나 없는 동안 걱정했냐?”
싱글거리며 묻자 녀석의 얼굴이 단박에 버릇없는 중2로 돌아갔다.
“걱정을 내가 왜 해요! 분명히 아무데나 나돌아 다니다 도원경 같은 데서 바둑 구경하고 있었을 텐데.”
그게 사실이긴 한데 임마, 나 없는 동안 하루에 세 번씩 왔다갔다며.
아마도 여기 있던 사람들 중 내가 없어진 일로 가장 크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녀석의 머리를 벅벅 헤집어 놓았다. 싫은 얼굴을 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피해도 떠나지는 않았다.
“수리 오래 걸린다고 친구가 뭐라 하지 않던?”
결국 선반 반대편으로 도망간 녀석에게 내가 물었다.
“뭐라 하기는요. 이거 맡긴 뒤로 며칠 동안은 매일 물어보더니 이젠 뭐 아예 잊어버린 거 같아요. 받아도 어디 창고 같은데 넣어두거나 누구 줘버리거나 할 걸요. 다시 보기도 싫대요.”
친구 녀석은 꽤나 혼이 났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좀 그렇고.
돌이켜 보면 그동안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맡으면서 모든 일을 전적으로 나 혼자서 해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깨비든 용신이든 백은호와 유하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그런 도움을 당연한 것처럼 주었다.
그런 것이 당연한 관계였다는 것을 나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기억이 없으니까. 핑계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생각해 봤다면 알았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그런 도움을 줄 리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내가 ‘아무’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들을 그만큼은 생각해주고 있어야 했다. 마치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뛰어들면 안 되는 거였다.
지금은 석 달 전이 되어버린 그 부적 사건으로 소년이 배웠을 교훈을 나는 지금에야 배운 것 같다.
망설이다가 밤이 되어서야 백은호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잠시 후에 한 번 더 전화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 한 번 더 전화하자 꽤 오래 신호음이 가고 나서야 겨우 통화할 수 있었다.
“중요한 용건이 아니면 며칠 후에 듣고 싶군요. 쉬고 있었습니다.”
자다 깼는지 약간 잠긴 목소리였다. 더 미안해지잖아. 백은호에게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을 사과했지만 그의 반응은 유하와 비슷했다.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도령이 저를 배려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잘못은 제가…”
말하다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당황하여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후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다시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며칠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쉬어.”
내가 말하자 그제야 “예”라고 짧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가 저도 모르게 하려던 말을 생각해 봤으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내가 기억을 잃기 이전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탁으로 그가 말하지 못하는 과거의, 유하의 우는 얼굴을 보고 뭉클뭉클 떠오르려고 했던 그때의.
나는 다시 혼란해졌다. 아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정말로 알아도 되는 걸까?
통화하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부채를 내려다보았다. 화중이 슬쩍 건네준 부채.
보고 있자니 선비들의 거처와 나무 냄새를 품고 시원하게 불던 바람이 떠올랐다. 손목을 흔들어 부채를 쫙 폈다.
반원형의 하얀 선면에 검은 묵으로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西來 (서쪽에서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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