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나무(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덥네….
잠에서 깨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덥다.
9월 초니까 슬슬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올 때가 아닌가 싶은데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가 건물 안까지 파고들었다. 밤에는 그래도 도깨비들이 나돌아 다녀 자연스럽게 음산한 한기가 돌았지만 해가 뜨면 녀석들은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부터 열대야니 복사열이니 여름에만 나오는 듣기만 해도 더운 현상들이 건물 안 온도를 후끈후끈 높여놓았다.
에어컨을 가동해도 넓은 작업장을 다 식히는 건 무리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방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다고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석 달간 잘 놀았으니 이제 일을 해야겠죠? 라면서 유하가 그동안 받아놓은 일거리를 듬뿍 안겨주는 바람에 요 며칠 동안 쉴 틈이 없었다.
없어졌다고 걱정하고 있던 주제에 일거리는 다 맡아놨단 말이지. 저 여자는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아닌 건지 구분할 수가 없다니까.
아무튼 나도 지은 죄가 있어서 아무 말 못하고 열심히 일만 해야 했다.
백은호는 며칠 후에 다시 들렀지만 위장천에서의 일 같은 것은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것과 함께 자정에 잠시 통화했던 것 역시 대화로 삼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해서 사과도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위장천에 대해서는 백은호보다 중2 녀석에게 들은 것이 더 많았다. 녀석은 부러운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내가 선비들과 지냈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듣고 나서는 아닌 체 시치미를 떼고 백은호스럽게 한숨을 쉬며 충고했다.
“신선들은 본래 인간이었지만 인간의 본성을 버린 사람들이에요. 그래야 신선이 될 수 있으니까요. 뭐 전혀 인간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과 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죠. 그런 점에서는 요괴와 같아요. 요괴도 본래는 짐승이었지만 짐승의 본성을 비우고 인간의 성질을 받아들인 경우가 많잖아요. 반은 짐승, 반은 인간인 셈이죠. 신선도 그래요. 반은 인간, 반은 천인(天人)인 거죠. 사람과는 여러 면에서 개념이 달라요.”
아니던데. 꼭 사람 같던데…. 항변해 봤자 소년은 코웃음 쳤다.
“반은 확실히 사람이니까요. 은호 아저씨도 사람 같기는 매한가지잖아요.”
냉정하게 말한다.
처음에 꽤나 백은호와 죽이 잘 맞던 녀석은 내가 위장천에서 돌아온 그 즈음부터 어딘지 태도가 바뀌었다. 사이가 멀어졌다든가 한 것은 아니지만 백은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뭔가 꺼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애의 변덕 따위 알 게 뭐야 싶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아침부터 더위에 짜증을 느끼며 일어난 그 날, 손님이 왔다는 말에 반가움보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며 작업장으로 내려갔더니 뜻밖에 녀석이 와 있었다.
“뭐야, 너 학교 안 갔냐?”
어른의 대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토요일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교복을 안 입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30대 후반이나 되어 보이는 여성이 황량한 작업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야아… 어머니가 미인이시구나. 그런데 넌 하나도 안 닮았네. 어머님이 물려주신 유전형질은 어디다 다 갖다 버리고 이렇게 까칠하고 백은호스러운 중2가 된 거냐.
여성을 본 내 감상은 대충 그랬다. 내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소년은 재빨리 여성에게 가서 손목을 잡았다.
“이쪽이에요.”
소년이 여자의 팔을 올려 내 쪽을 가리켰다.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나를 향해 똑바로 섰다. 이쪽을 향한 얼굴을 제대로 보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작업장을 두리번거리던 것이 아니다. 대화하는 목소리를 통해 이곳의 넓이나 구조를 가늠하고 있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흐릿하니 어두워 광채도 반짝임도 없었던 것이다.
“사모님이세요.”
소년이 그녀를 소개했다. 사모님? 그렇다면 스승의 부인이라는 말이다. 녀석의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부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규희라고 합니다.”
내가 보일 리 없겠지만 흐린 눈을 들어 똑바로 이쪽을 쳐다보며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표정이 해맑았다. 가까이서 확실히 보니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순박한 얼굴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시선을 끄는 여자였다.
마주 인사를 하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인가 하고 손을 맞잡았지만 오히려 두 손으로 감싸 쥐더니 환하게 웃었다. 한 순간 어두컴컴한 작업장이 밝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아…위험해. 이 여자 어딘지 좀 위험해.
“이분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너는 잠시 자리를 비켜줄래?”
소년에게 말하자 녀석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으로 갔다. 유하에게 놀러갈 모양이다. 저 녀석은 나도 식사할 때밖에 못 들어가는 유하의 방을 아무 때나 막 들어간다니까. 기분 나빠.
작업 선반에는 이미 유하가 준비해 놓은 다과상이 있었다. 이런 걸 재빨리 차려놓고 그녀는 3층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잘못을 하기는 했는데….
선반 앞에 마주앉자 여자는 능숙하게 앞을 더듬어 잔과 그릇 위치를 기억해 놓았다. 앞이 안 보이는 것에 익숙한 모양이다.
“우리 수호가 폐를 많이 끼치고 있다고 들었어요.”
차가운 음료를 조금 마신 다음 그녀가 입을 뗐다. 중2 녀석의 이름이 수호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나는 녀석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어이, 아니면 야, 혹은 임마 정도로 부르고 있었다.
“아뇨, 폐랄 것까지야. 매일 상대해주는 것도 유하니까 저는 별로…”
두 사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저번의…태령 윤문의 일도 그렇고 그 후에도 이상한 물건을 가져와서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환…남편이 그랬어요. 그이가 단단히 꾸중을 했지만 어리고 마음가는대로 행동하고 있어 걱정이 많아요.”
남편의 제자이지만 아들처럼 걱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알건 다 알고 있는 모양이고.
“뭘요. 영리하고 나이에 비해 속도 깊으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던데요. 보고 있으면 좋은 스승 밑에서 잘 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반쯤은 안심하라고 한 말이고 반은 진심이었다. 녀석이 있는 앞에서야 이런 입 발린 소리 못하겠지만….
내 말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한 번 더 작업장이 밝아진다. 기혼녀이며 중2 녀석 스승의 부인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보고 있으니 반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이거 진짜 위험한 거 아냐? 아니면 내가 좀 이상한 건가. 역시 건물 안에 틀어박혀 사람을 특히 여자를 못 만나고 있으니 드디어 한계에 달해 버린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들 앞에서 웃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다만.”
건조한 목소리가 떨어지지 않던 내 시선을 잘라냈다. 여자가 소리가 난 곳으로 귀를 향했고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면서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백은호가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목소리, 섭인가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백은호의 본명을 알고 있다. 그가 한 말을 보면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불렀으니 왔을 뿐이야.”
대꾸한 백은호가 의자를 하나 가져와 그녀와 직각이 되는 곳에 앉았다. 그리고 내게 충고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바라보면 약도 없는 병에 걸리게 됩니다. 조심하시죠.”
약도 없는 병이란 말할 것도 없이 상사(相思)다. 방금 경험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뭐지, 이 여자는. 요괴인가? 어딘지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은 했어도 인간이 분명했는데. 인간의 기운은 이제 확실히 읽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또 실수한 건가?
“오랜만에 와서는 만나자마자 독설이네요.”
여자가 약간 뾰로통해서 말했지만 그 목소리마저도 사랑스럽게 들렸다. 백은호의 말을 들은 뒤로 시선을 비껴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데 자꾸만 눈동자가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너는 본래 우리 같은 존재에게 마약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너를 차지하기 위해 네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아직 남아있으니 조심하도록 해.”
백은호의 차가운 대답이었다. 진심이다. 목소리를 듣자 오싹할 정도로 그것을 느꼈다. 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용건이 뭐지?”
무서운 말을 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그가 물었다. 잠깐 이 상황에서 밀려나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백은호 너는 어떻게 여기 온 거야? 연락 받았어? 그리고 이 분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내가 연달아 묻자 백은호는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연락을 받고 온 겁니다. 도령과 함께 저까지 끌어들여야 할 정도로 귀찮은 일이라도 가지고 온 모양입니다만.”
그렇게 귀찮은데 왜 왔대니?
백은호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 실은 두 분께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싫다.”
단박에 거절하는 백은호를 쳐다보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에게 욕정을 가진 남성이라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네 태도가 전혀 마음에 안 든다.”
뭐…?
태연히 그녀에게 욕심을 품고 있다고 말하는 여우 요괴 앞에서 나는 당황해 버렸다. 저기, 백은호야. 이분은 중2 녀석의 스승의 부인 되시거든. 그러나 여자는 배시시 웃고서 백은호를 쳐다보았다.
“정말 거절할 거예요?”
“거절할 리 없다고 믿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백은호…
“하지만 도와줄 거죠?”
여자가 한 번 더 물었다.
백은호는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다가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길고, 무거운 한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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