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44화 (44/218)

이름 없는 나무(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여기까지 혼자 왔다는 것은, 문제가 생긴 당사자가 네 남편이라는 의미겠지?”

자신의 몫으로 놓인 찻잔을 한 입에 비워버린 다음 백은호가 물었다. 전혀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어느 때라도 뻐기는 듯 고상한 태도를 잃지 않던 그가 지금은 어딘지 초조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이라면 중2 녀석의 스승이다. 한 때 뭐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인간이 되었다는 도사.

백은호의 말에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의 밝은 얼굴은 부러 애쓴 거였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드릴 수는 없어요. 와서 보셨으면 해요.”

백은호는 그녀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고 코웃음 쳤다.

“천하의 환이 요괴의 도움을 받아야 할 지경에 처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 아닌가. 그 꼴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거절할 수가 없군.”

결국 도와주겠다는 말이잖아. 그의 대답에 여자의 표정이 도로 밝아졌다.

“고마워요, 섭. 해명 도령도 함께 와주시는 거지요?”

말끄러미 바라보며 묻는 그녀에게 냉큼 승낙하고 싶은 나였지만, 이 와중에도 맑은 날에 외출할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릴 개미 뇌만큼의 분별력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날씨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말했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 외출하시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조처할 수 있어요.”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흐린 날이 아니면 나갈 수 없는 내 상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째서 내 소중한 정보가 이렇게 아무에게나 막 돌아다니는 건지 개탄할 틈도 없이 여자는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쏟아놓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에 배웅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며 총총 떠나갔다.

그녀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자, 나는 작열하는 태양이나 열기로 왜곡될 정도로 더운 바깥의 공기나 흐린 날씨가 아니면 나갈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도 잠시 잊고 뒤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백은호가 다소 난폭한 손길로 문을 쾅 닫지 않았다면 정말로 따라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문 닫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 아연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것을 넘어 무서울 정도다. 그러고 보니 백은호도 말했었지.

- 너는 본래 우리 같은 존재에게 마약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도대체 저 여자는 뭐야?”

무엇보다 먼저 그녀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백은호의 훼방으로 그럭저럭 위기를 넘긴 것 같지만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뭔가 대책이 없으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중2 녀석 스승의 부인이었다. 그 녀석 앞에서 부끄러울 일은 절대로 벌이기 싫었다.

백은호는 작업 선반 앞으로 돌아와서 이미 미지근해진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그것을 술 마시듯 들이킨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길상과(吉祥果)입니다.”

그리고는 이상한 단어로 대답했다.

“그게 뭔데?”

멍청한 얼굴로 묻는 수밖에 없었다. 백은호는 한심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를 물으시는 거라면 길상천녀의 어머니인 귀자모신이 들고 있는 과일로, 석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석류라는 건가. 음…어쩐지 그 붉고 윤기 흐르는 달콤새콤한 열매를 생각하니 그녀와 에로틱하게 어울리…왁! 정신 차려라, 김해명! 유부녀라고! 중2 꼬마의 사모라고!

머릿속의 헛생각을 쫓아내기 위해 고개를 홱홱 돌리는 나를, 백은호는 이번에야말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길상과라면 조금 다른 의미가 되겠지요. 요컨대 길상천녀와 같이, 가까이 두면 복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로부터 인간이 길상과를 얻으면 무병장수하며 재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고, 저와 같은 요괴는 요력을 키워 비할 데 없는 강한 힘을 얻게 됩니다.”

뭐야. 인간 로또? 그것도 1등짜리?

“행운의 여신 같은 건가. 그런데 그런 여자가 왜…그…뭐랄까…좀…”

“어째서 사내에게 욕정을 불러일으키느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야! 야! 백은호! 단어 선택 좀…

“사내에게만이 아닙니다. 여자든 남자든 요괴든 짐승이든, 길상과로서의 그녀는 상대를 유혹하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길상과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서로 그녀를 얻기 위해 싸우고 요괴들은 그녀를 탐내어 몰려듭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권력자나 강한 요괴만이 길상과를 차지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말은 현재의 남편인 중2 녀석의 스승도 권력자 내지는 강한 요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환…이라는 사람은, 요괴였어?”

내가 묻자 백은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백 년 동안 요괴였으나 이제는 인간이 된 여우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놀랐다. 여우가 인간이 되는 경우가 있기는 있는 거로구나. 보통 전설에서는 실패해서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거나 도사나 사냥꾼에게 죽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라 정말로 사람이 될 거라고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길상과를 가졌으니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된 덕분에 이런 위기에 처했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예전의 환이었다면 결코…”

냉소적으로 말하던 백은호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표정이 조금 굳었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얼굴이었다. 백은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기도 했다. 어쩐지 어색해서 아무거나 물었다.

“인간이 되는 게 왜? 요괴일 때보다 인간일 때가 더 약해?”

“당연하지 않습니까? 짐승의 신체적인 능력은 인간을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거기에 요력도 없어지고, 인간이 된 이상 수명이 짧아질 뿐 아니라 질병과 노화에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이 된 여우에게 남는 것이라야 머릿속의 지식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약해지는데 어째서 여우들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백은호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고상한 체하는 여우 요괴로 돌아온 그가 담담히 대답했다.

“짐승으로 태어난 우리는 영혼이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여우가 인간이 되어 영혼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고 싶어 하는, 여우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있는 본능일 뿐이지요. 뭐가 이상합니까?”

인간이 영원하다고?

“삶과 죽음을 거듭하고 끝없이 과거를 잊으면서도 인간은 영원합니다.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요괴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없으니, 그래서 죽음 뒤에도 또 다시 기회가 오는 인간이 부러우면서도 그들을 경멸하게 되는 건지 모릅니다. 인간은 업을 알지만, 삶에는 어리석지요.”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한 백은호가 힐끗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2층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던 중2 녀석이 백은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칫 멈춰 섰다.

백은호는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다시….”

백은호가 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소년은 고개를 까닥여 우리 쪽으로 인사를 보내고 빠른 걸음으로 작업장을 나갔다. 달리다시피 떠나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아까 여자에게 백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를 차지하기 위해 네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아직 남아있으니 조심하라’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그 말은 과거에 길상과를 두고 백은호와 녀석의 스승이 다투었다는 뜻이겠지. 녀석의 태도가 근래에 바뀐 것은 그것 때문일까?

여우 요괴들의 싸움…. 상상하자 머릿속에서 참혹한 장면이 번득였다. 아름다운 은색 털이 붉게 물들어 뾰족하니 뭉친 모습을.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비린 냄새를 문득 맡은 것 같았다. 어둡고 깊은 곳에서 홀로 죽어가는 여우를 본 적이 있었다.

- 다가가지 말아요. 잔악한 자예요.

내 팔을 붙잡으며 말한 사람은 누구였지?

희미한 기억이 두근두근 떠오른다. 떠오르다가 걸린 것처럼 멈춰서 필름을 몇 장이나 겹쳐 현상한 듯이 어지럽게 번득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어째서 매번 그런 선택을 합니까.”

백은호의 목소리가, 아픈 머리 한쪽에서 들려왔다.

“어리석게도…”

아니다. 이건 머릿속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픈 머리를 꽉 누르며 돌아봤지만 백은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길상과 여자는 약속한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그것에 맞추어 하늘이 흐려졌다. 일기예보는 오늘 종일 맑을 뿐 아니라 34도에 육박하는 무더위라고 했으니 이 구름은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닐 터다.

여자보다 먼저 와 있던 백은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하늘을 힐끗 보고 눈이 가늘어졌다.

“환은 아닐 테고, 아직도 그를 도와주는 요괴가 있나?”

뭔가 독설이라도 날리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자신 역시 그를 도우려고 하는 요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 정도에서 그쳤다.

우리는 백은호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여자가 조수석에 앉아 네비게이션을 대신했고 나는 뒷자리에서 창밖을 구경했다. 좀처럼 나올 일이 없으니 바깥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차는 도시 외곽으로 빠져 야트막한 언덕과 논밭이 있는 곳으로 갔다. 20분 정도 달렸을 뿐인데 시골이나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국도를 벗어나자 인가가 드문드문한 작은 마을이 나왔고 좁고 구불거리는 마을길을 좀 더 들어가자 언덕 중턱에 그려놓은 것 같은 집 한 채가 있었다.

나무 사이로 회색 지붕과 인조석으로 마감한 붉은 벽이 드러났다. 가까이 가자 잘 가꿔진 정원과 잔디를 심은 너른 마당이 보인다. 주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작고 아기자기한 꽃들이 바위와 나무 사이에 알록달록 피어 있었다.

“그이는 서재에 있어요.”

차에서 내린 여자가 우리들에게 말했다. 침착하려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적이 굳은 입매에 어색한 미소만 떠올랐다.

그녀가 우리를 안내해 집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 거실을 가로지를 때,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을 때, 나는 두근거리며 느꼈다.

여기에 온 적이 있었다.

여자가 서재 앞에서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환. 손님들이 오셨어요.”

대답은 없었다.

“들어갈게요.”

여자가 말한 다음 문을 밀었다. 문은 조금 열리다가 뭔가에 걸린 것처럼 덜컥 소리를 내며 멈췄다. 여자가 우리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으니, 죄송하지만 이대로 들어와 주세요.”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조금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갔다. 안은 컴컴했다. 일부러 그런 듯 빛이 들어올 만한 곳을 모두 막아두고 있었다. 백은호가 그 안으로 소리 없이 들어가고 내가 뒤를 따랐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뭔가 딱딱한 것에 발목이 걸린 때문이다. 그것이 바닥에 놓인 어떤 물건이 아니라 어딘가에 고정된 긴 물체라는 것과,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청량한 향기가 서재 안에 감돈다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어둠에 적응하고 시력이 천천히 되돌아오자 나는 서재 안이 온통 나무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로 숲속인 것 같았다. 이 많은 나무를, 그것도 천장에 닿을 만큼 큰 나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둘러보다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임을 깨달았다.

서재를 가득 메운 나무의 둥치가 문 왼편의 책상 쪽에 있었다. 정확히는 책상 앞의 의자에 아니, 의자에 앉은 사람의 다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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