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47화 (47/218)

이름 없는 나무(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규희가 식사를 준비했다며 올라왔지만 백은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휙 빠져나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 시간도 아깝다는 투였다.

“내일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멀어지는 그로부터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그가 갑자기 떠나자 남은 우리는 어색하게 서로와 창문 쪽을 번갈아보았다.

“먼저 먹을까요? 섭은 금방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니.”

규희가 내게 권했다.

이렇게 되면, 원래는 안면이 있던 사이 같지만 현재의 기억으로는 ‘아는 사람 스승의 부인’인 그녀와 단둘이 식사였다. 길상과인 것을 차치하더라도 난처하다. 깨어난 후로 지금까지 딱 두 번 빼고는 늘 혼자 먹는데 익숙해서 더 그랬다. 백은호 이 자식….

설명도 없이 내뺀 녀석이 괘씸한 건 규희도 마찬가지였는지, 식탁에 마주앉은 우리는 서먹함을 백은호의 뒷담화로 달랬다. “멋대로인 건 그대로네요.”하고 규희가 말하면 나는 “차라리 잘 됐지요, 뭐. 잘난 체하면서 설명하는 꼴은 안 봐도 되니까.”라고 대꾸하는 식이었다. 내가 기억과 함께 잃어버린 그녀와의 접점을 백은호가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몇 번이나 그녀에게 과거의 나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흐린 날만 외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정도니 더 많은 것을 알지도 모른다. 중2 녀석이 해명도령을 알고 있던 것도 그녀나 환에게 들어서겠지. 물어볼까?

작은 조각일 뿐이지만 기억 속의 그녀는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상냥했다. 마주보고 있는 지금의 느낌도 그렇다. 괜찮지 않을까? 느슨해진 마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작업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내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나를 만나본 적이 있다는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섭, 많이 변했어요. 도령의 거처에서 재회하고 깜짝 놀랐어요.”

백은호를 흉보며 웃다말고 그녀가 문득 말했다.

“목소리는 맞는데 다른 이 같았거든요. 못 본지…14년 쯤 되었나? 사람에게는 긴 세월이지만 수백 년을 산 여우에게는 그렇지도 않을 텐데 굉장히 달라졌어요.”

이것은 또 뜻밖이다. 많이 변했다는 백은호의 예전 모습은 대체 어땠기에….

“그렇게 많이 변했어요? 전 잘 모르겠는데….”

물론 예전의 백은호라면, 수련이랍시고 죽도록 괴롭히던 기억이 있기는 하다. 함께 있던 내내 나는 고양이의 앞발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는 생쥐의 기분이었으니까. 확실히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사람인체하는 기술이 늘긴 했지. 요새는 잡아먹고 싶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일도 없고….

“도령은 자주 보니 익숙해졌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예전의 그는 정말로 두려운 짐승,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여우 요괴였으니까요. 날 때부터의 여우인 채로 수백 년을 살아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환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설마? 사람들에게 하는 거 보면 얼마나 여우같은 녀석인데. 아니, 사실 여우지만.

“그래서 저는 그가 도령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걱정되었어요. 하지만 환이 그러더군요.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는 여우이니까, 오히려 그는 도령에게 안전할지도 모르겠다고요. 짐승인 그라면 적어도 인간의 약한 부분이 없을 테고 그러니 도령과 한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않을 거라고요.”

정확한 내용을 몰라도 어쩐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확실히 백은호는 나와 한 약속을 고지식할 정도로 지키고 있으니까. 나로서는 약속 따위는 좀 어겨도 좋으니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왜 내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듣고 싶은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다행이잖아요. 도령과 한 약속을 지키고 있는 덕분에 그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를 많은 사람들이 무사한 거니까요.”

예…? 무슨 소리야.

“그…사람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한 약속…?”

그거 나하고 한 약속이었어?

“예. 섭이 기특하게도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고, 환이 그랬어요.”

나였어?

- 어떤 한가한 인간에게 쓸데없이 은혜를 입는 바람에, 그 대가로 잠시 인간을 먹는 것은 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인간을 먹지 않는 이유라며 그가 내게 말했던 것이다. 그 한가한 인간이 나였다고?

“약속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미소를 지우고 진지해진 얼굴로 규희가 말했다.

“도령도 한 가지 약속을 해주겠어요? 이번 일을, 그리고 도령과 우리 사이의 일들도 수호에게는 비밀로 해줘요.”

중2 녀석에게 말하지 말라고?

“영리하고 생각도 깊다지만 역시 아직 어리니까요. 환이 가르치는 재미로 너무 빨리 눈을 틔워줬어요. 사람보다 사람 아닌 것을 많이 보게 되는 건 좀 더 나이가 든 후라야 좋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사람들에게 더 가까워야 할 때죠. 도령에게 찾아갔을 때도 수호에게는 지난번에 신세 진 일로 인사드리는 거라고 말해뒀어요. 그 아이는 이 일에 대해 전혀 몰라요.”

그렇구나. 작업장에서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인사를 건넨 까닭은 중2 녀석과 함께 있었기 때문인가.

“그런데 내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이쪽은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라.”

농을 섞어 대꾸하자 규희가 풋 하고 웃었다.

“확실히 몸은 사람이지만 그 몸 안에 해명 도령이 있으니 그쪽을 믿어볼게요.”

묘한 대답이다. 농 섞인 내 말에 그녀 역시 농담으로 대꾸한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식사는 그렇게 끝났지만, 점심 무렵에 떠난 백은호는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내일 올 생각인가.

백은호가 집안에서 뭘 깨달았는지 조금이라도 알아보려고 부적이나 그가 만졌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별로 성과는 없었다. 부적이야 도무지 아는 게 없고 물건들은 대체로 좋은 기운이 흘러나온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백은호의 말대로 바깥의 침입을 막기 위한 부적과 신물(神物)이라는 걸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 집에서 먼 야산에 크게 싸운 흔적이 있는 것과 집안의 부적들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날을 보내고 말았다.

백은호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이슬이 맺히지도 않은 시각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잘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도령, 일어나십시오.”

“백은호…규희씨가 식탁에 네 밥 남겨뒀대….”

잠이 덜 깬 채로 대답하자 한 번 더 몸이 흔들렸다.

“일어나십시오.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5분만…”

그러나 5초도 기다려주지 않고 이불이 확 날려갔다. 하마터면 나도 같이 날아갈 뻔했다. 다행히 이불과 함께 잠만 날아간 것 같다.

“야! 백은호!”

버럭 소리를 지르다 문득 그의 품에 처음 보는 기다란 물건이 안겨있는 것을 봤다. 흰 천으로 곱게 싸여있는데 처음 보지만 뭔지 알 것 같은 실루엣이었다.

“뭐야, 그거 칼이야?”

“잠은 깨셨습니까?”

안 깼다고 하면 베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나도 모르게 침대 위에 공손히 앉게 된다.

“깼어. 완전히.”

“그럼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훌쩍 가는 백은호의 손에 칼 말고도 보퉁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뭔지 묵직하게 보였다.

그는 환의 집을 떠나 어제 갔던 방향으로 말없이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직 안개 자욱한 시각에 길도 아닌 산을 타고 달리자니 잠에서 덜 깬 몸이 욱신거리기도 하고 축축해진 몸이 춥기도 하다. 백은호에게 물었지만 대답 대신 더욱 속도를 높였다. 12시간 넘게 뭘 하다 왔는지 몰라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잠시 후 우리는 싸운 자리처럼 아수라장이 된 그 야산에 도착했다. 어제도 엉망이었지만 오늘 보니 새롭게 파이고 부서진 흔적이 보였다. 쓰러진 나무도 늘어나 있었다.

백은호는 팔을 들어 어두컴컴한 계곡 안쪽을 가리켰다.

“저 방향에서 올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말한다. 진짜 이렇게 나올래. 너 그 신비주의 그거 하나도 재미없거든? 그렇게 말하면 나는 또 이렇게 물어야 하잖아.

“저 방향에서 뭐가 오는데?”

그러자 백은호는 귀찮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가 오든 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십시오.”

야, 그 성의 없는 대답은 뭐냐?

백은호는 들고 온 보퉁이에서 잡다한 것들을 꺼내 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술잔과 접시도 보이고 부적과 칼, 아직 이파리가 생생한 나뭇가지에 새끼줄도 한 묶음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 한바탕 할 생각으로 준비를 제대로 해온 모양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안 해줄 거야?”

백은호가 가리킨 방향을 주시하며 내가 물었다.

“뭐가 궁금한 겁니까.”

잘난체 해보라고 권하는데 거절하면 백은호가 아니지. 귀찮다는 투로 대답하지만 물으면 분명 성실하게 알려줄 것이다.

“환의 집에 가서 부적들을 확인했잖아. 이유가 뭐야?”

그게 제일 궁금했었다. 나도 집안을 돌아다니며 몇 시간이나 들여다봤지만 그런 거 백날 봐도 알 리가 없다. 백은호는 땅에 박아놓은 막대에다 새끼줄을 둘러치면서 대답했다.

“부적도 신물도 말씀드렸던 대로 삿된 존재나 부정한 공격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확인하려고 한 것은 그 반대의 효과를 가진 부적이 있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반대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과 반대로,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부적 말입니다. 집안에 길상과가 있으니 그 향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단속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확인해 본 결과 없더군요. 아니, 본래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적을 떼어낸 자국이나 신물이 있던 흔적을 봤으니까요.”

도무지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길상과가 집에 있는 것을 감추려고 부적을 붙여뒀지만 그것을 누군가 뗐다는 거야?”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환이 한 일입니다.”

백은호는 딱 잘라 말했다. 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환이 한다는 거지?

“이미 불필요한데다, 두두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방해만 되었을 테니까요.”

내가 멍청한 건지 상황이 너무 복잡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포기해 버렸다.

“부탁이니까, 쉽게 설명해 줘. 처음부터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은 머리를 써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미 말씀드렸듯이 보고 느끼는 바에 있어서 도령과 저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백은호가 나무라듯 대꾸했지만 별로 공감할 수 없다. 그런 건 이미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의 여유 있는 생각이겠지. 게다가 질문하면 잘 설명해줄 잘난 체 여우요괴가 옆에 있는데 뭣 때문에 머리 굴리느라 당을 낭비하겠어. 가뜩이나 아침도 못 먹어서 배고프다고.

“겸손한 자세로 경청할 테니 유명한 탐정 누구처럼 설명해줘 봐. 박수 쳐줄까?”

물개 박수 자세로 힐끗 돌아보니 백은호가 날카롭게 뻗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음, 너무 놀렸나.

찔끔해서 눈치를 보자 ‘하찮은 것을 보는 백은호의 표정’으로 짧은 한숨을 내쉰다. 조금 기분이 상하지만 이걸로 더는 머리 쓸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부터 그가 모든 것을 알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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