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48화 (48/218)

이름 없는 나무(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어제 이곳에서 도령도 느꼈을 겁니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두두을의 흔적이 남아있던 것을 말입니다. 누가 봐도 여기는 그 두 힘이 서로 맞부딪친 장소입니다. 그 정도는 도령도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금줄 안에 술잔을 놓고 부적과 나뭇가지를 가지런히 준비하며 백은호가 말했다.

“그 차가운 기운, 생각해 보셨다면 깨달으셨을 것입니다만 인적이 드문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령한 기운입니다. 어둡고 습한 곳, 차갑고 고요한 곳에 저절로 모이는 음기가 무엇을 이루게 되는지 아시겠지요.”

물론 안다. 그런 것들이 내 집안에 우글거리고 있다.

“그것이 산에서 나면 이매, 물에서 나면 망량이라 부르는즉. 도령에게 익숙한 도깨비는 사람의 손에 익은 물건에 깃드는 것들이라 사람을 닮았으려니와 산과 물에서 나는 것은 제 깃든 자연을 닮았을 터입니다. 그런 이매망량이 스스로 두두을과 싸울 리가 없지요. 그래서 분명 조종하는 자가 있으리라 여겨 주변을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설명하면서도 백은호의 손은 재빠르게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곳과 같이 두 힘이 부딪쳐 다툰 장소가 몇 군데 더 있었던 것입니다. 두두을과 이매망량이 어째서 싸웠는가는 둘째 치고, 그런 장소를 세 곳 더 발견했는데 모두 여기로부터 북동쪽으로 일직선 위에 있었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두두을과 이매망량의 싸움이 여기로부터 북동쪽으로 직선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온 길을 기억할 테니 짐작하시겠지만 이 자리에서 환의 집은 남서쪽입니다.”

즉 두두을과 이매망량의 싸움이 환의 집에서 북동쪽 어딘가로 직선을 그리며 이어졌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환이 이매망량을 부려서 두두을을 막고 있었던…아니, 그건 아닌데. 백은호는 분명 두두을이 밖에서 침입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환의 집 안에서 현신한 거라고 했잖아. 밖에서 막고 어쩌고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생각에 잠긴 내 얼굴을 힐끗 보고 백은호가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다.

“그래. 두두을은 환이 불러낸 거였구나.”

내 대답에 백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환을 봤을 때부터 제가 경솔했던 점을 인정합니다. 그때 저는 환이 두두을을 불러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었다고 할까요. 짐승에게는 신이 씔 수 없습니다. 짐승 자신이 신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말입니다. 환을 여우로 기억하고 있는 저로서는 두두을에게 침식당한 거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주제에 당당해.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 역시 환의 그 모습을 보고 뭔가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사람의 몸에 나무가 돋아나고 있는데 당연하잖아.

“물론, 침식당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백은호가 덧붙였다.

“짐작컨대 북동쪽으로부터 온 이매망량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는 두두을의 힘을 빌렸을 겁니다. 수년 전부터 문제가 있었다니 어쩌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간은 별 문제없이 막을 수 있었지만 최근 도…”

백은호는 말하다 말고 멈칫 입을 다물었다. 잠깐이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도를 넘어서게 힘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떻게든 끝을 보려고 무리하게 노력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본래는 씌어있다고 할 정도인 두두을이 결국에는 환의 몸을 잠식하게 되었겠습니다만. 공격이 계속되는 한 쉬지 않고 힘을 빌려야 할 테니 이대로 간다면 결국에는 그의 몸이 나무로 변하고 두두을의 신체가 되겠지요.”

사람이 나무로 변하다니 오싹한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신력이 깃든 몸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이 공격을 막아낼 방법은 있는 거야?”

내 질문에 백은호는 귀찮은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저에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지금 하는 것은 환을 대신할 허수아비를 만들어 눈을 속이는 일입니다. 환이 자신의 몸을 되찾을 때까지 시간을 버는 정도는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얕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 있는 거야, 저거. 겸손한 척 연기하다가 나중에 잘난체하려는 거야.

“도령, 오고 있습니다.”

백은호가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가 말했던 방향을 돌아보자 멀리서부터 나무들이 움츠리며 떠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뭔가 오고 있다.

“저는 도와드리지 못합니다. 모쪼록 여기까지 오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한 시간 정도는 기대해도 괜찮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한 시간 동안 싸워도 못 이길 정도로 강한 놈이라는 거야? 아니면 한 시간 넘게 싸워야 할 정도로 몰려온다는 거야?

이 의문은 금세 풀렸다. 멀리 산등성이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요사한 것들이, 펄쩍펄쩍 뛰거나 데구르르 구르거나 성큼성큼 걸어서 이리로 오고 있었다.

처음 춘야연을 연주했을 때 저만큼의 도깨비들이 모였던 것 같은데 같은 숫자라도 이쪽의 이매망량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마치 산이 흔들흔들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느낌.

조금 질린 눈으로 보고 있는데 등 뒤로 뭔가 차가운 것이 철썩 부딪쳤다. 물이었다. 아니, 술이다. 돌아보니 백은호가 빈 술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매망량이 도령만을 노리도록 했습니다. 저에게로 오면 곤란하니까요.”

야…. 그렇게 대놓고 미끼 취급해도 되는 거냐, 너.

서운한 얼굴로 보고 있으려니 백은호가 한 번 더 말했다.

“되도록이면 멀리 가서 싸워주십시오.”

인정머리 없는 여우요괴 같으니라고.

불평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매망량들이 몰려오는 쪽을 향해 달렸다.

백은호가 뿌린 술이 정말로 효험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이매망량들의 이동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아직 멀리 있어 조그맣게 보여도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기괴하고도 장관인 모습이 펼쳐졌다. 산을 타고 계곡으로 뛰어들어 달려오는 이매망량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각양각색. 게다가 물건이 아니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창고의 도깨비들과 완전히 달랐다.

거대한 바위처럼 굴러오는 놈, 사슴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한 모습으로 달려오는 놈, 말라붙은 나무 모양을 하고 성큼성큼 걷는 놈, 불투명하니 형체가 잘 보이지도 않는데 흐느적흐느적 기어오는 놈.

크기도 다양했다. 어떤 것은 쥐새끼처럼 작아서 뽀르르 달려오는가 하면 한 걸음에 산자락을 넘는 것도 있었다. 똑같은 모습이 단 하나도 없지 싶게 다양한 것들의 무리였으나 단 하나 같은 점이 있다.

‘저것들 어딘가 이상해.’

분명히 이상했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며 달려오는 그들에게서 인간이나 가질 법한 감정이 느껴졌다. 분노, 적의, 혐오. 그런 것들이 배어 있었다.

이매망량이란 어쨌든 자연에서 순리에 따라 생겨난 정령의 일종이다. 인적 없이 고적한 곳에 거하며 어둡고 습한 곳을 즐긴다. 간혹 사람이 지나가면 괴롭히거나 놀라게 하지만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족특성이랄까.

그러니까 저렇게 선명한 적의를 가지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의 모습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거였다. 기분이 나빴다. 나를 노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나를 노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의 의지가 아니어서였다.

누군가 이매망량을 다룬다고 해도 정상적인 방식으로 해야 했다. 힘으로 제압해서 부하로 부린다든가, 원하는 것을 주고 대가로 일을 시킨다든가, 속임수를 쓴다든가. 겁을 주든 사기를 치든 상관없지만 아예 의사를 제한하고 감정을 멋대로 다루는 것은, 그래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마음속으로부터 간질거리는 듯한 노기가 이매망량의 너머 그들을 움직이는 자를 향해 피어올랐다. 계곡을 따라 야생의 도깨비 무리가 달려오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묘할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백은호가 뿌린 술의 효과는 확실했다. 이매망량의 무리는 도착한 순서대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를 지나쳐 백은호에게 가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커다란 바위 같은 몸이 쿵 하고 땅을 찍었다. 짐승과 같은 머리가 이빨을 세우며 달려들고 덩굴 같은 손이 사지를 옭아매려고 날아든다.

그러나 속도가 느렸다. 백은호에 비하면 어린아이 같았다. 부적 사건 때 난전을 겪어봐서인지 어렵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한꺼번에 달려들어 귀찮을 뿐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며 에워싸이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별 문제없이 한 시간쯤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의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종하는 자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걸로 부족해 나를 향해 보이는 공격성에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이매망량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자연은 누구도 증오하지 않는다. 자연을 닮은 이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 녀석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북동쪽에 있는 그 작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매망량을 조종하여 환을 괴롭히고 있는 그 자로부터 이 녀석들을 풀어줄 수 있을까.

혹시 충격을 받으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고 몇 대 때려봤지만 ‘매가 약’이라는 말은 여기에 해당사항 없는 것 같다. 제압하면 다를까? 시험 삼아 맷집 좋아 보이는 녀석 하나를 쓰러뜨리자 그냥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정신을 차렸다기보다는 도깨비가 본체로 돌아간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백은호에게 물어볼까 생각했으나 먼빛으로 슬쩍 본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는 자세로 상당히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도와줄 수 없다고 그도 말했었지. 역시 혼자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을까? 도술이니 술법이니 그런 건 전혀 모른다.

아니, 할 수 있다.

태령 윤문의 도사와 싸웠을 때도 그랬다. 백은호도 말했듯이 힘과 힘이 부딪치는 것뿐이다. 힘과 힘의 충돌에서 복잡한 기술이나 조건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은 어떨까. 북동쪽의 그자로부터 이매망량을 뺏는 것도 힘의 충돌일 뿐일까? 하지만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가만…그러고 보면 환은, 어째서 두두을을 불렀을까.’

이매망량의 공격을 막기 위해 어째서 그는 두두을의 힘을 빌렸을까. 과거에 숭배 받은 적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잊혀져 버린 신이다. 아무도 두두을을 모시지 않는다. 그런 신의 힘이 강할 리가 없다. 그렇게 몰락해 버린 신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힘을 빌릴 곳은 많았을 텐데….

‘아냐. 어쩌면, 두두을이어야만 했을지도 몰라.’

왜 두두을이어야 하지? 어째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나무신의 힘이 필요하지?

‘나무신…’

나무가 무엇의 상극이었지? 어디에서 봤는지 모를 지식이 머릿속을 번뜩 스쳤다. 목극토(木剋土). 나무는 흙의 상극이다.

흙. 땅. 만일 북동쪽의 그 자가 흙과 땅을 이용하고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깨달았다. 이 이매망량의 무리에는 온갖 모습의 도깨비들이 있지만 단 한 가지,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만은 없었다. 모두 땅위를 기어 다니거나 걷거나 달렸다.

그게 아닐까. 북동쪽의 그 자가 이매망량을 부리는 방법은. 그것을 확인하려면 역시 길은 하나뿐이다.

나는 공격을 피해 도망쳐 다니던 것을 그만두고 가까운 녀석을 하나 번쩍 들어 나무 위로 던져 버렸다. 개의 머리에 사슴 같은 몸을 하고 있는 도깨비였다. 나뭇가지에 걸쳐진 녀석이 버둥거리다 말고 문득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잠에서 깬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거리더니 훌쩍 뛰어서 달아나버린다.

역시 그랬어. 땅에서 떨어지면 제어도 풀리는 거였어.

그 다음은 쉬웠다.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며 가벼운 녀석들부터 하나씩 나무 위로 던져 놓았다. 땅에서 멀어지자 녀석들은 정신을 차리고 훌쩍 떠났다. 아마도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겠지.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나자 마지막에는 바윗덩어리 같이 생긴 큰 놈 하나만 남았는데 굴러다니는 것 말고는 재주가 없는 녀석이라 번쩍 들고 있으니 꼼짝 못했다.

잠시 후에 내려놓자 녀석은 흔들흔들하다가 데굴데굴 굴러서 계곡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

“하…”

웃음인지 한숨인지 구분 안 가는 것이 나왔다. 기분은 확실히 좋아졌으니까 웃음이라고 해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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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무(7)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백은호에게 돌아갔더니 이미 자리를 모두 정리해 놓은 다음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끝났으면 도와주러 왔어야지!

“그것들을 모두 풀어주신 겁니까?”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었으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백은호가 물었다.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더 빨라졌군요.”

그럼 대체 어디까지 기대한 건데? 이매망량 사이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때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줄 생각이었냐? 뭐라 대꾸하려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빨라졌다’는 건 무슨 뜻이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백은호가 무명천에 감겨있던 칼을 빼내는 것이 보였다. 알고 있는 칼이다. 그와 수련할 때 몇 번이나 본 적 있었다. 봤을 뿐 아니라 직접 맞아본 적도 많았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한 손에 칼을 든 그가 북동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뭔가 안 끝난 건가?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겁니다.”

조금 걷다 멈춰서 그가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미있는 구경’이 시작되었다.

숲이 꿈틀거렸다. 아니, 들썩였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는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아래의 땅이 꿀렁거리고 있다는 편이 맞겠다. 땅거죽이 파도치듯 출렁이자 그 위의 나무들이 함께 위아래로 요동하며 기울어졌다. 큰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며 옆으로 무너지고 바위가 굴렀다.

들썩이던 땅거죽이 불쑥 치솟았다. 땅속에서 흙무덤이 돋아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올라온 흙더미가 꿈틀꿈틀, 혼자서 이리저리 이겨지며 형체를 갖추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진흙을 주물러 형상을 빚는 것 같았다. 칼 든 손을 편안히 늘어뜨리고 백은호는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기다려줄 테니 하고 싶은 걸 얼마든지 해보라는 태도였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흙무덤은 차츰 선명한 모습을 이루었다. 완성된 모습은 정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흙으로 만들어졌는데도 갈기나 털을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살아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흙으로 이루어진 짐승이 움직였다. 말처럼 힘차게 뻗은 다리를 또각 또각 땅에 디디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다리는 말과 같지만 몸체의 유려한 선은 사슴처럼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꼬리는 말도 사슴도 아닌, 마치 소나 사자의 것과 같다.

아름다우면서도 위엄 있고,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짐승. 그리고 이마에 돋아나 있는 단 하나의 뿔.

“저거 설마…기린이야?”

반신반의하며 백은호에게 물었다. 뒷모습을 보인 그에게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 하치않은 것을 어찌 기린이라 부르겠습니까. 그 모양을 흉내 낸 흙더미일 뿐. 기린은 오방신수 가운데 중앙이며 대지를 관장하니, 흙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속임수 인형일 뿐입니다.”

어쨌든 기린 모양은 맞는 것 같다.

“도령이 이매망량들을 모두 풀어줘 버려서 별 수 없이 저것을 끌어낸 모양입니다만…”

슬쩍, 백은호의 팔이 들렸다. 팔의 연장인 것처럼 쭉 뻗은 칼날이 흙기린을 가리켰다가 번득, 백은호와 함께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흙기린의 코앞이었다. 기린보다 조금 위 허공에서 번쩍 나타난 그의 칼이 춤췄다. 흰 반사광이 폭죽처럼 번득였다.

백은호를 발견한 흙기린이 앞발을 들어 그를 겨냥했으나 다음 순간 후드득, 그 몸은 흙더미로 변해 쌓이고 말았다.

“소용없는 짓이지요.”

기린의 몸이 채 다 무너지기도 전에 착지해 옷소매로 칼날을 닦으며 백은호가 중얼거렸다.

‘빨라.’

다섯, 아니 여섯 번째까지는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것도 눈으로 봤다기보다는 기억 속의 공격 패턴으로 얼추 짐작했다는 편이 맞다. 그 뒤로는 아예 포기였다. 나를 상대할 때도 매섭기는 했지만 방금의 공격은 더욱 냉정했다. 추호의 인정도 없었다.

같은 편이어서 다행이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옛날 한가한 나머지 도움을 줘서 정말 다행이야.

“이걸로 시간을 얼마나 번 거지?”

천천히 돌아오는 백은호에게 묻자 그가 조금 생각하는 체하다가 대답했다.

“빠르면 석 달입니다. 제가 보낸 미끼를 물었다면 반년 이상일 것입니다만,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장담하지는 못하겠군요.”

그 말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는 소리다. 누구냐고 묻자 백은호는 피식 웃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북동쪽으로 선을 그어 보십시오.”

나는 도사가 아니라서요. 선 하나 긋는 걸로 뭐가 어떻게 되지는 않거든.

우리는 올 때와 달리 느긋이 돌아갔다. 환의 집에 도착하자 2층 창문가에서 바깥을 보고 있던 규희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어디를 다녀온 거예요?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찾았어요.”

아…맞다. 규희에게는 말 안 하고 백은호랑 같이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가버렸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저 멋대로인 여우가 그런 거예요. 자고 있던 저를 칼을 들고 위협해서…

“환은 깨어났나?”

내가 마음속으로 규희에게 할 변명을 열심히 연습하는 동안 백은호는 그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백은호의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그녀는 “아침부터 쭉 깨어 있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 처음이에요.”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환이 깨어났다니, 나무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겠는걸.

그러나 서재로 들어가자 기대한 것과 달리 나무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다리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은 그대로였지만 거기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어제보다 하늘하늘 힘이 없었다. 반면 환은 메마른 피부 위로 다소나마 윤기가 흐르고 이쪽을 보는 눈에 생기가 있었다.

“도령….”

나를 본 환이 조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만 내 쪽에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자 백은호가 성큼 사이로 끼어들었다.

“피차 껄끄러울 테니 시간 끌지 말도록 하지. 내 물건을 내놓으면 즉시 떠나겠다.”

백은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환이 그를 올려다보더니 조금 웃었다.

“무슨 말인가. 나는 전혀 껄끄러운 데가 없다네. 오랜만이지 않나, 섭.”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그 말을 들은 백은호의 얼굴은 더욱 냉랭해졌다.

“인간이 되고 보니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모양인데 고작 14년만이다. 네 입으로 한 약속을 기억하겠지. 언젠가 도움을 받을 날이 오면, 그때 돌려주겠다고 했었다.”

싫은 기억을 떠올린 듯이 찌푸린 낯으로 백은호가 말하자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 둘은. 환이 백은호의 어떤 물건을 하나 맡아 놓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백은호 녀석, 환이나 규희에게 싫은 내색 하면서도 어쩐지 열심히 한다 했더니 그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였던 거야?

“내놔라.”

백은호가 말했다. 왠지 초조한 표정이었다. 저 여우같은 여우가 내가 알아볼 정도로 표정이 변해서 원하는 그 ‘물건’은 대체 뭐지. 궁금해 하는데 환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의자의 손잡이에서 떨어진 손이 그 자신의 얼굴, 그중에서도 눈을 향해 움직였다. 뭘 하려나 지켜보는 내 앞에서 그가 자신의 손으로 제 오른쪽 눈을 크게 벌리더니 마치 눈알을 뽑아내려는 듯 눈두덩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게 갑자기 웬 호러야!

하지만 손가락은 눈시울을 조금 압박하는 데서 멈추었고 눈 안에서는 눈알 대신 다른 것이 튀어나왔다. 그 모양이 구슬처럼 동그래서 사실 한 순간 눈이 튀어나왔나 생각했다.

그러나 환의 손 안에 떨어진 것은 호두 크기의 동그란 구슬이었다. 투명하고, 안에서 오색의 연기 같은 것이 천천히 휘도는 모양이 신비로운 한편 요사하기도 했다. 그것을 본 백은호의 표정이 변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였다. 뭐라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이며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기운이 그에게 가득했다.

지금의 그는 조금의 가식도 없는 태어날 때부터의 여우 요괴. 바로 그랬다.

그가 손을 뻗어 환의 손에서 구슬을 가져갔다. 구슬을 집는 손끝에서 평소보다 긴 손톱이 날카롭게 돋아나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조금 굵어진 것도 같다. 그러고 보면 얼굴도 어딘지 여우처럼 보였다.

참을 수 없이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제 손 안의 구슬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꿀꺽 삼켜버렸다. 호두알 크기의 구슬을 삼켜버리다니…목에 걸리지는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저것은 여우구슬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여우 입 속의 보배 구슬, 구미호의 여의주라는 바로 그것이다.

구슬을 삼킨 백은호가 요사한 얼굴로 웃었다. 만족한 것도 같고 피로한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한편으로는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요기에 취한 것처럼도 보였다.

“겁도 없이, 내게 구슬을 돌려준 거냐? 환.”

백은호가 아니…섭이라고 불러야 할 여우 요괴가 환에게 말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환의 여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 모습을 보면서 태연히 웃고 있다니 베짱이 좋은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약속이었으니 말일세.”

그의 대답에 백은호의 볼이 꿈틀거렸다.

“인간 주제에 요괴와 한 약속에 목숨을 걸었겠다.”

비웃음 가득한 도발에

“요괴도 지키는 약속을 인간이 어겨서야.”

담담한 대꾸가 돌아왔다. 거기에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한 채로 백은호가 환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굶주린 얼굴이었다. 여우 그대로의 섭이 먹이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그런 표정이다.

그러나 그 짐승의 눈을 마주보면서, 지금으로써는 보통 사람보다도 약한 상태인 환에게 겁먹은 기색 따위 없었다.

저 남자는 정말로 백은호를 믿고 있구나. 그가 절대로 나와 한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거라고,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믿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흥!”

먼저 눈을 돌려버린 쪽은 백은호였다.

“말한 대로 물건을 받았으니 즉시 떠나주지.”

선언하자마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뭐하려는지 물으려는데 갑자기 주변 정경이 번쩍 변해버렸다. 뭐야? 뭐야? 그리고 한 번 더 번쩍.

두 번 만에 나와 백은호는 환의 집이 장난감집처럼 보일만큼 멀찍이 떠나와 있었다. 이거 그거잖아. 산에서 백은호가 번쩍 번쩍 사라져 이동하던 그 수법.

“야! 그냥 나와 버리면 어쩌자고? 난 좀 더 이야기를…”

불평했지만 말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번쩍. 또 번쩍. 그리고 번쩍. 연달아 번쩍. 이런 식으로 정신없이 이동한 끝에 나는 잠시 후 내 작업장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곧 2층 내 집으로 가서 화장실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 이상한 이동 수법은 멀미를 동반하는 것 같다. 흔들리는 뱃속을 간신히 진정시킨 다음 나왔을 때 백은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제멋대로인 여우요괴 같으니라고.

그러나 그 요사한 짐승과 같던 모습을 떠올리자 어쩐지 꺼려져서, 그에게 연락하는 것은 며칠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할 일도 하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지도를 불러냈다. 환의 집은 대략 여기에서 북쪽으로 10km쯤. 그리고 거기에서 북동쪽으로 쭉 가면…

전국이 보이게 축소해 놓은 지도 위에서 북동쪽으로 선을 그리며 가자 바다를 앞두고 도시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는 동쪽 지대에 외따로 떨어진 도시 하나가 있었다.

‘태백….’

언젠가 그럴 작정이기는 했지만, 저곳에 꼭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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