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49화 (49/218)

따님을 주십시오!(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환의 집을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났지만 좀처럼 날씨가 흐려질 기미가 없다. 다시 환과 규희를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래서는 외출을 할 수도 없고, 중2 녀석에게 물어봤지만 그 집은 전화도 안 쓴다는 거다.

현재는 서기 2015년 9월입니다. 대한민국에 집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전화 없는 사람은 없다고. 아아…그래. 환이라면 전화 대신 부적이라도 날려서 아무하고나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난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내가 위장천에 있는 동안 장마 태풍 다 지나가고 이 후로는 찌는 듯한 무더위만 예약된 상태였다.

뭐 이렇게 재수가 없어!

행운이나 그런 걸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불러다 놓고 따지고 싶었다. 흐린 날이 되었다 싶으면 문제가 팡팡 터지질 않나 흐린 날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시기에 엉뚱한 곳에 있질 않나. 이건 좀 이상해. 수상해. 퀴퀴한 음모의 냄새가 난다고.

검색이라도 해서 행운의 여신 그런 거 있나 찾아보려는데 손님이 왔다는 유하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봐! 또 방해야! 이거 분명 뭔가 있어. 저주라든가 저주라든가 저주일지도 몰라.

피해망상적인 생각을 머릿속으로 굴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작업 선반 앞에 앉아 차를 마시던 남자 하나가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30대 초반이나 되었음직한 젊은 남자였다. 짧게 자른 머리나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며 널찍한 어깨가 단단하게 보였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체격에 비해 내 쪽을 향하고 눈을 깜박이는 얼굴이 순박하다.

황량한 작업장 분위기 때문인지 가져온 물건 때문인지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자 사교적인 대화 같은 것은 싹 잘라버리고 대뜸 주머니 하나를 내놨다.

“이것을 고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는 분이 여기에 오면 될 거라고…”

나 은근히 유명하다니까. 아는 분이 누구시냐고 물었다가 기억에 없는 사람이면 곤란하니 나는 말없이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빳빳한 녹색의 천으로 만든 복주머니였다. 안에서 작은 뭔가가 서로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주머니를 뒤집자 플라스틱 조각 같은 것이 여러 개 나왔다.

플라스틱 조각이라고 생각한 것은 부딪치는 소리가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느낌이어서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보석에 가까웠다. 마치 능소화처럼 빛바랜 듯한 주황색이다. 표면은 반질반질 한 것이 돌처럼 보였고 인공의 흔적이 있었다. 본래는 둥근 모양의…반지 같은 거였을까.

“그것이 원래는 쌍가락지였답니다. 적산호 쌍가락지요.”

남자가 주황색 조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가락지로 뭘 했기에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진 거지. 트럭에 깔렸나.

“그것을 원래대로 고쳐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중요하니까 왔겠지. 그런데 고쳐달라는 건 조각을 맞춰서 본드로 붙여주면 된다는 것…일리가 없겠지, 물론.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래도 물어보자. 의외로 아닐지도 몰라. 쉬운 의뢰일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냥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감쪽같이! 아무 흔적도 없이 말입니다. 원래의 모습 그대로 고쳐야 합니다.”

그렇죠. 그런 거죠.

음…나무 바늘의 열매가 하나 남았는데 그걸로 이 반지를 고칠 수 있을까? 아니겠지. 산호가 천도 아닌데 바느질을 할 순 없을 테고. 깨진 반지를 감쪽같이 붙이는 방법이라. 도깨비들에게 물어보면 알지도 모르겠다.

일단 알았다며 반지를 맡자 남자는 물에 빠졌다가 구명 튜브를 잡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말에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얼마나…걸릴지 모른다니, 몇…달 정도입니까? 설마 몇 년…?”

오오, 여유 있는 분이네. 몇 달에서 시작하다니.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음…글쎄요. 정확한 대답은 내일이나 모레쯤에 들려드릴 수 있겠습니다.”

일단 도깨비들에게 물어봐야 하니까.

남자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번호를 남기고 갔다. 명함이 아니고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걸 보면 직장에 다니거나 자영업자인 건 아닌 모양이다.

남자가 떠나자 산호 조각들을 들고 창고의 도깨비들에게 갔다. 오늘도 변함없이 한량처럼 노는 도깨비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자 눈을 깜박깜박, 고개를 갸웃거린다.

“비린내가 나잖아?”

“비린내가 나네.”

“짠내가 나잖아?”

“짠내도 나네.”

“분내도 나는걸.”

“분내도 나네.”

산호 조각 둘레에 동그랗게 모여앉아서 도깨비들이 속삭였다. 비린내에 짠내에 분내가 나면 그건 뭐지? 물고기를 소금에 절이던 여자가 화장한 거야?

“이것은 용궁 물건이오.”

대빗자루 도깨비가 흔들흔들 다가와서는 말했다. 용궁? 바닷속 용왕님이 산다는 그 용궁? 허…. 나 드디어 용궁에서 나온 물건까지 맡아봤어.

그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기에 용궁에서 쓰는 반지를 가져다가 고쳐달라는 건지 모르겠네. 음, 설마 잉어가 눈물을 흘려서 구해줬더니 용왕의 딸이라 어쩌고 해서 아내가 되었다든가…. 망상이 가지를 친다.

“그런데 이걸 감쪽같이 고쳐야 하거든. 어떻게 하는지 알아?”

내 물음에 도깨비들이 다시 눈을 껌벅껌벅 고개를 기울이다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선녀들은 손재간이 좋으니 고쳐줄 텐데.”

이불 도깨비가 팔락거리며 말한다. 선녀라 함은, 저어기 옥황상제 살고 계신다는 거기의 그 아리따운 여성분들인가요? 좀 현실적인 솔루션을 달라고.

“십이신장 중에 원숭이신이 손재주가 좋았지?”

“좋았지. 좋았지.”

그쪽은 완전히 신이잖아. 너네들 만담 짜증날라 그런다. 응?

“그것은 눈물로 깨진 가락지라오.”

멀찍이서 구경하던 물레 도깨비가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참견했다. 예? 망치로 두들겨 깨버린 거 아니고요?

물레 도깨비가 한들한들 걸어와서 주황색 산호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가락지는 용궁 뜰에 난 산호로 만들었는데, 금슬 좋은 부부가 하나씩 끼고 있으면 금강석처럼 단단하다가 둘 중 하나의 마음이 변하거나 죽게 되면 모래로 만든 것처럼 약해진다오. 그렇게 약해진 가락지에 눈물이 떨어져 깨지고 만 게요.”

눈물 한 방울 떨어졌다고 깨지다니 너무하네. 마치…

“사람의 마음 같지 않소?”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하고서, 물레 도깨비는 눈을 휘어 웃었다.

“그럼 이 사람 마음 같은 가락지는,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지?”

사람의 마음이 깨지면 어떻게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사람 마음이야 사람이 알지 않겠소?”

물레 도깨비가 대꾸하더니 올 때처럼 한들한들 걸어서 도로 가버렸다.

도깨비라고 뭐든 다 아는 건 아닌 모양이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고. 어떻게 아냐?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불평했으나.

이것이 일이다보니 사람 마음을 알건 모르건 해결은 해야 했다. 그냥 평범한 산호 반지인줄 알고 방심했다. 이 가락지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남자에게 전화를 하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라며 30분이면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말한 대로 30분 후에 다시 돌아왔다. 작업장으로 들어오는 그의 얼굴은 불안과 기대가 섞여 적이 굳어있었다.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하니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그것도 대화를 시작하자 금세 사라졌다.

반지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묻자 남자의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뭐냐. 설마 훔친 건 아니겠지. 아냐. 확실히 물어봐야 해.

“설마 훔…”

“실은 장ㅁ…”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동시에 말을 멈췄다. 장ㅁ? 장물?

내가 입을 꽉 다물고 기다리자 남자는 눈을 껌벅거리며 쳐다보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 장모님…·되실 분께서 맡기신 겁니다.”

장모님 되실 분이라 함은, 여자 친구 어머니라는 말이네. 뭐야…. 어쩐지 서럽다. 이런 시골스러운 총각도 여자 친구가 있는데!

“그럼 이 가락지는 미래의 장모님이 쓰시던 거군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장모님이 미래의 사위에게 반지를 고쳐달라고 맡긴 걸까요. 그것도 용궁에서 나온 물건, 도깨비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는 물건을.

“그게, 실은…”

잘 말해줄 것 같던 남자가 막상 입을 떼어놓고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뭐냐, 궁금하게. 난처해하며 망설이고 있으니 채근하기도 그렇고. 잠자코 기다리자 결국 말을 했다.

“이 반지에 제 결혼이 달려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냉장고에서 술과 안주를 꺼내와, 오랜만에 요괴가 아닌 사람과 술을 나누었다. 남자들이 대화를 트려면 술보다 좋은 게 없어요.

이 남자 술 좀 마시는지, 따르는 족족 홀짝 홀짝 넘겨버린다. 한 잔 두 잔 쌓이기 시작하니 갈색의 얼굴이 한층 붉어지고 태도도 부드러워졌다. 소소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살짝 취기가 돌 무렵에 본격적으로 묻자 이번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어머님이 저를 싫어하시는 것 같단 말입니다. 제가 비록 배운 것도 부족하고 섬에서 양식이나 하는 촌놈이지만 말입니다. 내 마누라 하나 정도는 험한 일 안 시키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갔더니…”

처음에는 참으로 다정하게 환대해 주더란다. 귀한 손님 모시듯이 상석에 앉혀놓고 온갖 음식 향기로운 술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았다고 했다. 분위기도 좋았고 술을 좀 마셨지만 딱히 실수도 없었다. 그런데 한순간 태도가 바뀌어 버렸다.

직업을 들었을 때부터가 아닌가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그는 서넙도라는 작은 섬에서 양식을 했다. 전복 양식이었는데 고된 일이기는 해도 돈은 꽤 잘 벌리고 있었다. 딸이 섬에서 고생할까 그러나 싶어, 절대로 배타고 일하게 하지는 않겠다며 몇 번이나 약속했지만 한 번 바뀐 태도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 몇 번이나 약속하고 애원하고, 그리고 우리 명화씨도 같이 사정을 했단 말입니다.”

우리 명화씨…. 뭔가 짜증나!

“한참을 그렇게 한 다음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 주머니를 내놓으시면서 그러시는 겁니다. 이 가락지를 원래대로, 실금하나 없이 감쪽같이 고쳐 오면 딸을 주겠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이것을 가지고 보석방 안 가본 데가 없는데 말입니다. 감쪽같이 고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차라리 그냥 새로 하나 사라고요.”

그냥 새로 사지 그랬어요? 물었으나

“그럴 수야 없지요! 제가 어머님께 약속을 했는데! 이것을 반드시 깨끗하게 고쳐서 가져오겠다고 말입니다.”

호통 같은 답변을 들었다. 아아, 이 총각 술 마시니 용감해지네.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

미래의 장모님이라…. 그 분이 갖고 계시던 물건이라 이 말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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