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을 주십시오!(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알고 있었을까? 이 가락지가 용궁의 물건이라는 걸.
어쩌면 알면서 준 건지도 몰라. 고치지 못하면 결혼 안 시키겠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명화씨의 어머니라는 분은 어떻게 이런 물건을 지니고 있었을까. 게다가 반지가 깨졌다는 것은 부부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뜻인데.
“명화씨의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신가요?”
혹시 이혼했거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느냐고 물을 수는 없으니 돌려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오십에 가까운 연세인데 처녀처럼 보이실 정도지요. 건강한 것은 말할 것 없고 선녀처럼 고우시고. 우리 명화씨가 어머니를 닮아서 어찌나 미인인지, 저 같은 놈이 무슨 복으로…”
이봐, 이봐. 여친 자랑 말고. 부모님 건강. 응?
잠시 여자 친구의 미모와 성격과 음식솜씨와 기타 등등을 찬양하던 남자는 나중에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도 우리 명화씨가 참 밝고 어디 하나 삐뚤어지지도 않고 얼마나 잘 자랐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반지는 그래서 깨진 모양이네. 깨진 가락지를 보관하고 있는 정도야 죽은 남편을 그리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굳이 이것을 고쳐 오라고 내밀었다는 건 역시 어머니도 반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거겠지.
총각…희망상 미래의 장모님이 싫어하는 거 맞는가 보다. 딸 주기 아까웠나 보다. 하지만 딸도 함께 어머니를 설득했다잖아. 그렇다면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인 모양인데. 이 경우 보통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부모님이 포기하거나, 그보다 더 옛날 옛적의 예를 보면 여자 쪽에서 남자를 도우려고 신통력을 발휘한다거나…
설마. 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물어보았다.
“그런데 저를 소개해 주셨다는 그분, 누구시죠? 혹시 제가 아는 분인가 하고요.”
내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모를 겁니다. 명화씨도 어디서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명화씨도? 나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명화씨였다는 거다. 남자는 여자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찬양 모드로 돌입했다.
“평생 보길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그렇지 않았으면 저를 만나기 전에 누가 채가도 채갔겠지요. 진짜 바닷가에서 명화씨를 처음 봤을 때는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습니다. 파도가 잔잔한 날이었는데 해질 무렵에 바위 위에 앉아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고요. 목소리나 어찌나 곱고 황홀하던지…”
이봐요, 로미오씨. 댁이 사랑에 빠진 순간의 이야기 같은 건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러나 그런 말하기에는 참 행복한 얼굴이어서 에라 모르겠다 오글거리는 거 좀 참고 들어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어디 가서 저런 이야기 할 수 있겠어. 팔불출 소리나 들을 걸.
“…는데 얼마나 오래 안 나오는지, 저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놈인데 진짜 한 10분은 있었나. 설마 그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잠수도 오래 하고 헤엄도 저보다 빠르다니까요. 아주 물고기 같아요. 그리고…”
이쁘고 성격 좋고 음식도 잘하는데 수영도 끝내주게 한다는 거네. 근처에 비슷한 여자가 있어서 그런지 놀랍지는 않은데 부럽기는 하다. 이쪽은 그 여자가 곧 아내 될 사람이라는 거잖아.
“…은데 한 가지 몸이 좀 약해 보여서 걱정입니다. 수영할 때 보면 아주 물 찬 제비 같은데 다른 때는 영 시들하니 기운도 없어 보이고 오래 걷는 것도 힘들어 하고, 그런데 바닷가로 가면 다시 생생해지거든요. 섬에서 태어나 그런가 물이 아주 적성에 맞나 봐요.
그런…가? 한숨을 쉬며 듣고 있자니 이 남자 질리지도 않고 계속한다.
“그것도 그렇고 한 번은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고생한 적이 있어요. 그때 눈에서 하얀 물 같은 게 나와 저는 정말 식겁을 했거든요. 병원에 가보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사실 눈도 정말 좋아요. 그 후로는 별일 없어서 내버려 뒀지만 아무래도 몸은 좀 허약한 것 같으니 잘 돌봐야 하겠어요. 어머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바다에서는 물고기 같은데 어쩐지 허약해 보이는 여자라는 건 대체 뭡니까. 일관성이 없잖아. 이야기에 슬슬 짜증을 내는 내 심정 같은 것은 모르고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사람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술주정이 이야기하는 거 아닐까? 물론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러고 보면 물 좋아하는 건 집안내력 같아요. 명화씨 집에 갔을 때 어머님도 거의 30분마다 왔다갔다 하시면서 몸에 물을 끼얹고 오시더라고요. 그 날 날이 좀 더웠나?”
예…? 뭐요?
“심지어 집안에 수족관도 있는데 그게 크기가 진짜 침대만 했어요. 물고기는 하나도 없었지만요. 예전에 키우다가 지금은 안 키운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물도 가득 채워놓고 그 안에 수초도 기르고, 바닥에 하얀 돌멩이도 깔아놓고. 재미난 취미를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어머님이 참.”
정말 재미…있는 걸까.
“사실 처음에는 정말 저를 잘 봐주셨거든요. 그래서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직업 이야기가 나오고 나중에 아이를 가지면 교육 문제도 있으니까 대처로 나갈까 생각중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무튼 그때부터 기분이 상하신 것 같았습니다.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사과라도 드릴 텐데…”
아아 뭐랄까, 난 알 것 같은데.
“정말이지 이 가락지를 못 고치면 저는…”
남자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먹인 것 같다. 집이 서넙도라니 지금 가도 뱃시간은 못 댈 것 같고, 남자를 2층으로 데려다 놓은 다음 나는 다시 작업장에 내려왔다.
붉은 가락지의 조각들이 작업 선반 위에서 꽃잎 모양 흩어져 반짝거렸다. 사람의 마음 같지 않으냐고 묻던 물레 도깨비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슬픔으로 깨진 마음의 조각을 어떻게 도로 붙인단 말인가. 사람이 아니라 인어라 한들.
저 서넙도 총각이 만난 여자가 인어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예쁘고 물고기 같고 물을 벗어나면 힘이 없어지고 무엇보다 하얀 눈물을 흘린다. 거문도 쪽에서는 신지께라고 부르는 반인반어의 전설 그대로였다.
인어가 사람을 홀린다든가 하는 전설은 서양에나 있는 것이고, 내가 아는 한 이쪽의 인어는 악하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간에게 사냥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나쁜 마음으로 접근한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어머니 인어가 인간 사위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뿐이지. 딸을 데리고 뭍으로 가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 어떻게 결혼을 허락하겠어. 그렇다고 내 딸은 인어라서 바다를 떠날 수 없네 그런 소리 할 수도 없겠고.
참 신부를 골라도 어려운 신부를 골랐구나, 서넙도 총각.
게다가 이런 경우라면 가락지를 고쳐서 결혼을 허락받게 해도 문제가 아닐까. 남자는 여자 친구가 인어라고 상상도 못하는 것 같던데. 정말로 나중에 뭍으로 가겠다든가 하면 어쩌지.
아니, 지금 내가 오지랖 넓게 거기까지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 이 가락지를 고칠 방법도 모르고 있는 주제에. 일단 그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사람의 조언이 필요했다.
사람의 마음이 부서지면,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돌아갈까.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역시 사람뿐이잖아. 도깨비에게 물어봐야 도움이 될 말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내게 당장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란…유하뿐이네. 안 돼. 못 해. 그런 질문을 어떻게 해. 완전 엄청 쑥스러워. 이상하게 쳐다볼 거 같아.
생각만 해봤을 뿐인데도 어색해서 머리를 벅벅 긁고 있다가 문득 떠올랐다. 굳이 옆에 없어도 내게는 전화라는 게 있다는 말이지. 21세기에 유무선 통신 시스템을 거부하고 있는 누구랑 달리!
그리고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라면…음…음…한 명 뿐인가.
…깨어난 이후 6개월 인생에 전화 걸 사람이 한 명 정도면 괜찮은 거야. 선방한 거라고! 거기다 3개월은 위장천에서 날렸잖아!
나는 핸드폰을 가져와 유일한 한 사람인 박선생에게 전화했다. 족자를 수리해준 후로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가 걸려오고는 했지만 내 쪽에서 먼저 한 적은 없었다. 신호음이 꽤 오래 계속되다 달칵 소리가 나고 박선생이 전화를 받았다.
반가워하는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다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박선생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수수께끼인가? 묘한 질문을 하는구만.”
“수수께끼 아냐. 수리하다 생긴 문제라고.”
“요새는 마음도 수리하나? 물건이 아니면 안 받는 줄 알았는데.”
“딴소리만 많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줘.”
“글쎄…마음이라…”
박선생은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역시 시간이 약이지 않을까. 다친 마음을 어떻게 싸매도 시간 가면서 천천히 낫는 것만은 못하더라고. 사람 마음 간사한 거라, 막상 그 때는 죽을 것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고 무뎌지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뻔하다면 뻔하고, 옳다면 옳은 대답이었다.
“역시 그런가.”
전화를 끊고 생각해 봐도 그 이상의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주소록 아랫줄에 새로 생긴 전화번호를 봤다. 중2 녀석의 번호다. 뭐, 사람은 사람이다만 꼬맹이에게 물어볼 건 아니지.
그리고 내 손가락은 아무 생각 없이 녀석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뇌가 없으니까요.
뭘 묻겠다는 건 아니고, 머리가 복잡하니 잠깐 쓸모없는 짓이라도 해보려는 거지. 그런데 신호음이 두 번 울리는 순간 전화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는 금세 핸드폰이 방정맞은 목소리로 “까똑”이라고 한다.
[수업중.]
화면에 떠오른 글이 짧았다. 수업중일 리가 없는데? 오늘은 일요일이잖아. 으르렁거리는 얼굴 이모티콘을 첨부해서 묻자 다시 대답이 왔다.
[스승님댁이요.]
환의 집에 있어? 아…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갑자기 스스로의 두뇌에 회의를 느꼈다. 그 집에 전화가 없으면 핸드폰 가지고 있는 중2 녀석을 보내면 되는 거였는데!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아무튼 기회다.
[야, 급한 용건이 있으니까 환이나 규희씨 있으면 좀 바꿔줘 봐.]
[스승님 저랑 수업중이라니까요.]
[그럼 규희씨 바꿔주면 되잖아.]
어차피 요괴였다가 몇 년 전에 인간이 된 환보다는 규희가 더 좋은 대상이라고.
[남의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냐고 스승님이 물으셔요.]
그새 일러바친 거냐.
[데이트 신청.]
[핸드폰 전원 끄래요.]
[끄지 마! 질문 있어서 그래. 질문!]
[제 쪽에서 전화할게요.]
낄낄 웃는 얼굴과 함께 녀석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이 녀석 맘에 안 든다.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규희였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음…”하는 소리를 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기보다 말할까말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령. 예전에 환을 알기 전에, 저는 몇 번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다정하고 착하고 저를 위해주는 사람들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길상과를 노리고 저를 속인 사람들이었어요. 몇 번이나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나중에는 아예 사람 자체가 싫어져서 깊은 산속의 절에 숨어 지냈어요.”
즐거울 리 없는 과거의 일을 그녀는 담담히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다.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낫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상처가 더해졌어요. 마지막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나 요괴나 똑같다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살 바에는 아무 요괴에게나 잡아먹혀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헤매다가 환을 만났어요.”
아, 오늘은 남의 러브 스토리만 듣게 되는 날인가.
“처음 만났을 때 환은 다정하지도 착하지도 않았지만 공정했어요. 우리는 서로 필요한 것을 주기로 했지요. 저는 이생의 괴로움을 끝내고 싶었고, 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환이 사람이 될 때까지 함께 하기로 했던 거예요. 그 후에는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해주기로, 그렇게 약속했거든요.”
전혀 러브스토리가 아닌걸.
규희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살아있는 걸 봤으니 알겠지만 환은 약속을 어겼어요. 우리가 언제부터 사랑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도 환도 조금씩 바뀐 것 같아요.”
“역시 시간이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뇨, 도령.”
규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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