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51화 (51/218)

따님을 주십시오!(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대상이라면, 나도 그 이상의 해결책은 생각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쪽은 반지다. 신통한 능력이 있는 가락지이긴 하지만 어쨌든 무생물. 같은 방식이 도움이 될까? 게다가 도움이 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다 라는 건 필요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서넙도 총각의 결혼은 물 건너갔다는 소리지.

그렇다고 시간을 빨리 흐르게 만들어 버릴 수도 없고.

뭐 정반대의 경우이긴 한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라면 하나 알고 있다. 위장천에서 만난 선비들의 거처는 여기보다 훨씬 시간이 천천히 흘렀었지. 거기에서 고작 몇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는 몇 달이 지났으니까.

잠깐, 그렇다면 반대인 곳도 어딘가 있지 않을까? 이곳에서의 몇 시간이 다른 곳에서는 몇 달인, 그런 곳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중2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수업중’이란 대답 후로 핸드폰 전원이 꺼졌다. 너 학교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냐? 응?

이렇게 되면, 내키지는 않지만 백은호에게 연락해야겠다.

환의 집을 다녀온 후로 백은호와는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 녀석이야 원래 필요할 때 직접 찾아오거나 유하를 통해서 연락하는 게 보통이지만 나는 가끔 모르는 게 생기면 전화를 걸곤 했었다.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해도 결국에는 성실하게 설명해주곤 해서 나름 편리한 요괴 검색기랄까.

그러나 최근에는, 전화를 걸려고 생각하면 환의 집에서 봤던 그 요사한 모습의 여우가 떠올랐다. 무섭다거나 싫다는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쩐지 꺼려진다. 그 정도의 이유였다.

그 정도면 전화 못 할 이유도 아니지 뭐. 지금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백은호에게 전화하자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건을 이야기하니 말대꾸도 없이 듣고 있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도 잠시 대답이 없다. 요약하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곳이 있느냐는 것뿐이다. 생각할 필요가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있습니다.”

신경 쓰일 정도로 오래 생각한 주제에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 어디인데?”

옥황상제나 염라대왕 사는 곳은 아니겠지 설마?

“굳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위장천이라고 해야겠지요.”

뭐? 거기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었잖아. 이쪽에 비해서. 내 의문에 백은호는 수학공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찬찬히 설명했다.

“위장천은 이를 테면 바다와 같은 곳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이 흘러서 모이는 것처럼 세상의 기운이 흘러와 모이며, 여기로부터 다시 흘러나갑니다. 세상의 기운이 순환하도록 돕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정작 이곳에는 흐름이 없지요. 그래서 이곳은 사용하기에 따라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도, 빨리 흐르기도, 아예 멈춰 있기도 합니다.”

사기 같네.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건가.

“신선이 아니면서도 수백 년씩 젊음을 유지하거나 오래 산 사람들 중에는 위장천의 이런 점을 이용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예로 들 필요도 없습니다. 보통 사람도 얼마든지 위장천에 들락거리고 있으니까요. 정확히는 사람이라기보다 혼이라고 표현해야 하겠습니다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혼이란 몸과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담겨 있는 것이지요. 멍하니 있는 모습을 넋이 빠졌다든가 혼이 나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잠들었을 때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만, 몸을 떠나 헤매던 혼이 위장천에 접촉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거기에서 이쪽과 다른 시간의 흐름을 겪게 되는 겁니다. 아주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든가, 꿈속에서 많은 일을 겪었는데 깨어보니 한순간이었다든가. 그런 일이 한 번쯤은 있지 않았습니까?”

굳이 꿈이 아니라도 최근에 겪기는 했는데.

아무튼 꿈 이야기를 하니 말이지만 확실히 그런 일이 있기는 했다. 만일 그런 게 저도 모르게 위장천에 들어갔던 거라면, 밤만 되면 위장천은 잠결에 날아온 혼들로 득실득실 하겠는걸.

“그러니까 갈 방법은 있는 거지? 물론 꿈이 아니라 직접. 가락지도 가져가야 하거든.”

그렇게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거라면 별 것도 아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물었으나

“글쎄요.”

백은호의 대답이 시원찮았다.

“혼이 쉽게 접촉할 수 있다고 해도 평생에 몇 번 없는 일이고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것은 그만큼 번거롭습니다. 방법이야 있다지만 왜 제가 굳이 그 일을 도와야 합니까?”

보통 사람이 몇 개월 동안 이런 저런 일을 함께 겪어왔으면 말이지,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는 거거든. 그런데 백은호는 사람이 아니지. 이 여우요괴를 어떻게 설득한다?

“이거 일인데…”

“제 일은 아니잖습니까.”

“지난번에 위장천에 있을 때는 일이 아니어도 데리러 와줬으면서.”

“그것은 도령이 너무 오래 심…”

어쩐지 울컥한 목소리로 말하던 백은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하려 했던 거지? 내 과거와 관련 있는 말이었을까? 수화기 너머로 짜증을 삭히는 백은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내버려 뒀다가 그때 같은 일을 또 벌이면 고생은 제 몫이니까요. 기다리십시오.”

백은호는 쏘아붙이듯이 말하고 통화를 끊었다.

아니, 나도 반성했었다니까. 그때처럼 멋대로 뛰어들지는 않을 생각인데. 어쩐지 백은호에게 나는 단순무식민폐도령으로 찍힌 것 같다.

백은호는 20분 만에 도착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작업장 앞에 정차했다. 건물 앞 길바닥에 스키드 마크 생겼을지 모르겠다. 급브레이크로 차에게 화풀이를 한 백은호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겁니까?”

가락지 조각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그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 마술사가 카드를 꺼내듯이 어디선가 부적을 꺼내가지고 주머니에 착 붙였다.

“이대로 주머니를 지닌 채 잠들면 혼이 떠날 때 주머니도 함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위장천에 도착하면 주머니를 거기 두고 나오시면 됩니다. 꺼내는 것은 이쪽에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다음 팔짱을 끼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뭐. 어쩌라고.

“이대로…잠들란 말이야?”

“저와 관계도 없는 수리 때문에 위장천에 일부러 시간이 빨리 흐르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니 잠드는 건, 물론 그것도 그거지만 잠든 다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일생에 몇 번 없는 일이라며? 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위장천과 접촉하는 것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이거야말로 무대포잖아.

“어려울 것 없습니다. 도령 자신의 꿈을 꾸면 될 뿐입니다.”

백은호가 말했다.

“위장천 어디에도, 그보다 길고 오래된 시간의 공간은 없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야.

묻고 싶었지만 백은호가 그보다 먼저 말했다.

“잠드는 것을 도와드리지요.”

그가 손을 흔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모습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어어…몸이 무거워져.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끌려드는 것처럼 잠에 빠졌다.

깨어났을 때는 꿈속이었다. 음, 말이 좀 이상한가.

아무튼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딘지 밝은 길 위에 서 있었다. 꿈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사방 천지에 뭔지 모를 조각들이 빽빽하게 붙어서 반짝거리는 이상한 곳이 있을 리 없잖아. 그 이상한 조각들을 들여다보자 하나하나마다 내 모습이 반사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요지경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조각들은 내가 딛고 선 길에도 수없이 깔려 있었다.

자신의 꿈을 꾸면 된다고 백은호가 말했지만 이게 내 꿈이라는 거야? 음…내가 꿈을 꾼 적이 있던가? 문득 생각했다. 잠들었다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일어날 때까지, 꿈을 꿔본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는데….

그나마 한 가지, 가락지가 들어있는 주머니만큼은 제대로 가지고 온 것 같다. 빳빳한 주머니가 내 손에 꽉 들려있었다. 그것을 보자 내가 할 일이 생각났다. 그렇지 참. 이 가락지가 긴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그런데 여기가 시간이 빨리 흐르는 곳이 맞는지 모르겠다. 백은호는 내 꿈으로 들어가면 된다는데 여기가 내 꿈속인지도 확실치 않고. 확인할 방법도 모르겠고.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보려고 길을 따라 쭉 걸어갔지만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았다. 온 길과 똑같았다. 하나의 길이 쭉 갈림길도 없이 뻗어있고, 그 주변에는 온통 반짝거리는 작은 조각들 뿐. 뭐 이리 단순한 거지. 이런 곳이 내 꿈이라니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지만, 끝없는 외길에 뭔지 모를 조각들뿐이라니 이건 너무하잖아.

그러고 보니 이 조각들은 대체 뭘까. 손톱만하고 반짝거리고 여러 종류의 색으로 반들거리는 것이 마치 색종이 잘라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조각 하나를 집어서 눈을 바짝 들이대고 보았다.

어라….

반질거리는 표면에 내 모습이 비친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내 모습의 반사가 아닌 것 같다. 나를 반사한 거라면 옆모습이 보일 리 없으니까.

좀 더 들여다보자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보였다. 집중하여 보자 손톱만한 크기인데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물레 도깨비다. 그러니까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장소는 어두컴컴한 작업실. 작업 선반 위에 차려놓은 술상을 마주하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건 그때 같은데. 깨어난 뒤 처음으로 수리를 했을 때. 물레 도깨비를 처음 본 그날이었다. 설마 하면서 근처의 다른 조각을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도 내가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온갖 도깨비들도 같이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작업장에 내려온 내가 잡동사니라고 착각했던 그 도깨비들 말이다.

나는 아연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수많은 반짝이는 조각들 안에 담겨있을 것들이 짐작되었다. 어디로 들어와 버린 거지? 나는. 여기가 정말로 내 꿈속인가?

몇 발을 더 움직여 앞으로 간 다음 아무 조각이나 집어서 보자 역시 내가, 이번에는 창고 안에서 물품출납서를 적고 있었다. 얼핏 본 날짜가 작년이었다. 일 년 전의 나? 그렇다면….

길을 따라 달렸다. 20m쯤은 달려간 다음 아무 조각이나 집어서 확인하자 이번에도 내가 있었지만 모습이 지금과 달랐다. 더 어리다. 10대 후반 정도로 밖에 안 보였다. 장소는 여전히 건물 안, 2층의 내방이었다.

다시 달렸다. 이번에는 50m 정도. 조각을 들여다보니 나는 더욱 어려져 있었다. 10대 초반 정도. 장소는 역시 건물 안. 다시 달린다. 눈앞으로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100m,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한참을 달린 끝에 조각 하나를 집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했으나…

“어어…”

몸이 다시 무거워졌다. 백은호의 손짓에 잠들었을 때와 같이, 그래서 꿈속으로 끌려 들어왔던 그때와 같이 다시 꿈으로부터 끌려 나가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거워지는 몸과 혼미한 정신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조각을 든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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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을 주십시오!(4)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개울 한가운데 징검다리에 앉아서 그녀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붉은 치마와 하얀 속곳을 걷어 올려 허벅지까지 드러낸 다리가 참방참방 물을 때린다. 그때마다 물보라가 일어 사방으로 퍼졌다.

길게 땋아 늘어뜨린 까만 머리채와 그 끝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도투락댕기, 솜털이 오른 하얗고 가는 목, 상체를 숙여서 둥글게 휜 어깨와 부풀어 오른 치마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다리를 나는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이쪽을 봐줬으면 했지만, 그녀는 막 시작한 물장난에 마음을 빼앗겨서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좋으냐?”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짓궂게 묻는다. 누구인지는 목소리를 듣고서 곧 알았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자 이미 짐작한 반가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상체를 숙여 내려다보는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형님.”

“그리 쳐다보다 뚫어지면 어쩌려고.”

“그만 놀리세요.”

“화공이라도 하나 데려올 걸. 네 모습을 그려뒀다 누이들에게 보여주면 질투로 하늘을 가를 수도 있을 거야.”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놀려대는 것을 막을 겸해 재빨리 물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놓더니 옆으로 와서 나란히 앉았다.

“어떻게든 될 것 같다. 다섯째와 일곱째에게 확답을 받아두었으니 언제든 일은 벌일 수 있다만, 문제는 큰형님이지.”

그렇겠지.

“큰형님은 절대로 허락 안 하시겠지요?”

“허락은커녕 말이라도 잘못 꺼냈다가는 우선 저 아이부터…”

그가 개울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길해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르게 할 수 있어요.”

그래야 했다. 해야 한다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다.

“큰형님의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그러면 되는 거니까. 아무리 삼계 십이천을 두루 감찰하는 큰형님의 눈이라도 어떻게든 피할 수만 있으면 될 테니까.”

“쉽지 않을 걸. 게다가…”

그의 시선이 한 번 더, 개울로 아니 개울 한가운데 징검다리에 앉아서 찰박찰박 물놀이에 정신없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그녀를 믿어도 될까?”

그가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돌아보자 그녀를 보고 있던 그의 옆모습이 난처하니 흐려졌다.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저 아이는 결국, 인간이니 말이다.”

그런 건 알고 있었어. 사람이니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그런데 왜 형님은 이제 와서 그렇게 묻는 걸까. 사람이라는 건 우리 모두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 결국 인간이니 말이다.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그가 속삭였다.

- 정말로 그녀를 믿어도 돼?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어…”

들었을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 앞으로 백은호의 얼굴이 휙 나타났다. 복사기에 종이가 걸린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돌아온 것은 확실합니다만 정신을 차릴 때까지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약간 얼이 빠져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원래 보통 때도 그런 상태 아닌가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어이…. 나 멀쩡하거든요. 다 들리거든. 정정당당하게 뒷담화 하지 말란 말이다.

백은호의 말대로 돌아온 것 같기는 했다.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 꿈…. 그러고 보니 꿈에서, 어려진 나를 봤는데.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열심히 달렸던 것이 생각났다. 어디로 가려던 거였지?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유하가 싸늘하게 말하고 휙 돌아섰다. 이봐, 나 방금 정신 차렸는데. 그리고 어차피 걱정하는 척도 안 했으면서!

서운한 눈으로 보자 이미 계단을 향해 가고 있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익었다. 그야, 매일 보는 거니까 당연한가.

“가락지가 원래대로 돌아왔는지 보고 싶군요. 정신을 잃은 동안에 손을 꽉 쥐고 있어서 주머니를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꿈을 꾸셨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징조 같지는 않군요.”

백은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까지도 양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손에서 힘을 풀자 손가락마디가 저려온다. 정말 무슨 꿈을 꾼 거지. 주먹질이라도 했던 건가. 아, 아까 달리는 꿈을 꿨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주먹 불끈 쥐고 어디로 달려간 거야, 도대체.

주머니를 열어서 뒤집자 댕그랑 소리를 내며 두 개의 반지가 작업 선반에 떨어졌다. 능소화 꽃 같은 빛바랜 주황색의 가락지 한 쌍이, 실금 하나 없이 반질반질 매끄러운 둥근 모양이 되어 있었다.

“고쳐졌어?”

나는 신기해서 놀랐다 치고

“고쳐진 겁니까?”

백은호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가락지를 매만지며 말하는 품이, 전혀 기대 안 했을 뿐 아니라 고쳐질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락지는 정말로 완전히 깨끗하게 고쳐져 있었다. 갓 만들어내서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한참 이리저리 가락지를 만져보던 백은호도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고쳐졌군요.”

그러면서 어딘지 묘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운데. 애초에 내 꿈에 들어가면 될 거라고 한 건 너잖아.

“긴 시간이라는 부분에서는 확실히 도령의 꿈이 즉효라고 생각했지만…”

가락지를 갈무리해 넣으면서 백은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시간만으로 해결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오래 된 원한이나 슬픔 같은 것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아니지 않습니까.”

요괴 주제에 어쩐지 사람 마음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뭐 어때, 일단 고쳐졌으니 잘 된 거 아니야?”

내 대꾸에 그는 복사기에 새로 넣은 종이가 다시 걸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리고 그의 얼굴은 이제 체념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런 도령이니까 당연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내가 뭐 어때서? 기분 나쁜 말을 하면서 무시하는 표정이 아니어서 더 얄미워! 하지만 짜증을 내며 쏘아 본 백은호는 의외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어…어…? 웃었어! 저 여우가! 썩소도 실소도 조소도 아니고 진짜로 웃고 있어.

“그렇게 긴 시간의 기억들이 모두 정답고 행복했다면, 아마도 이런 도령이기 때문이겠지요. 부러운 일입니다.”

전혀 백은호스럽지 않은 말을 태연히 하고서, 그는 볼일은 끝났으니 가겠다며 작업장을 떠났다.

정답고 행복한 기억들이라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좋은 기억들 중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는 나로서는 공감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기억이 제대로 나는 백은호와의 시간 쪽에서는 확실히 전혀 조금도 정답거나 행복하지 않았다고! 도대체 그 죽도록 구른 기억이 어디가…

…뭐, 딱히 싫은 기억이라고도 할 수는 없겠지만. 흥!

백은호 녀석의 이상한 말은 됐고. 이걸로 수리는 완벽하게 한 셈이니 취해서 잠든 서넙도 총각에게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잠시 미뤄뒀던 걱정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결혼하려는 아가씨는 인어다.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정말로 괜찮을까? 옛날이야기 속의 예일 뿐인지 모르지만 여우와 결혼한 남자도, 우렁 각시와 결혼한 남자도, 심지어 선녀와 결혼한 남자도 별로 순탄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사실 이상한 결말도 아니다. 인간끼리 결혼해도 마음이 안 맞거나 문제가 생기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종족이 다른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게다가 종족이 다르다는 것을 모른 채로 결혼한다면, 그건 뭐 고장난 시한폭탄 같은 거랄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지.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결혼을 지지해 줘도 되는 건가? 남자는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싸다 싶을 만큼 여자에게 반해 있지만 인어라는 것을 알아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녀의 비밀이 언제까지나 감춰질 수 있을까?

본래대로 돌아온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괜찮을까?

- 결국 인간이니 말이다.

불길한 목소리가, 기억 안 깊은 곳에서 울렸다. 누구야. 그딴 소리 하는 건…

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다. 정말 믿어도 될까? 그 남자를.

“다 고친 거예요?”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하다.

“식사시간이 지나도록 안 올라와서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변명처럼 말하고 다시 돌아선다.

“고치긴 했지만 망설이고 있었어. 이거 돌려줘도 되나 하고.”

마음속의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유하가 가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그냥 궁금한 표정이다.

그녀에게 남자의 사정과 인어인 여자 친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유하는 계단의 철제 난간을 짚고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내 말이 끝나자 속눈썹이 긴 눈을 내리뜨며 어쩐지 웃는 것도 아닌 것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해명씨라면, 결혼한 여자가 알고 보니 인어였다면 어떻게 할 거죠?”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질문 자체는 특별할 것 없었지만 ‘결혼을 앞둔 남성’에 나를 대입하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글쎄. 도깨비라도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차피 나라면 인간 쪽이 더 만나기 어려운 상대 아냐?”

말하고 보니 눈앞에 인간 여성이 있기는 했다. 인간 여성은 내 대답에 피식 웃었다.

“종족보다는 거짓말로 속이고 결혼했다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용서할 수 있어요? 사랑한다면서 자신을 속인 사람.”

어쩐지 집요하게 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어색하지 않은 대답이, 마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있었다.

“뭘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는 거 아냐? 그 마음이 변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겠지. 나한테 묻는 거라면, 안 변해.”

“바보네요.”

유하의 대꾸는 매몰찼다. 그래도 비웃는 얼굴은 아닌걸.

“아마 그녀도 안 변할 거예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그녀가 말했다. 누구? 인어 아가씨?

음…그럴지도.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는 서넙도 총각에게 가락지를 돌려줬다. 하룻밤 사이에 고친 걸 보고 감격한 그가 나를 포옹하려고 하는 통에 도망가야 했던 것 외에는 좋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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