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55화 (55/218)

금고 속의 아이들(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제단이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다. 추모일 수도 있고 종교적 의례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누군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못 봤어?”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얻어 보려고 물었으나 백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방의 조명이 너무 약하고 제가 사용한 반사체가 작아서 많은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제단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습니다만, 거기에서 신(神)이나 귀(鬼)나 영(靈)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보다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백은호가 문득 말했다.

“사념(思念)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고를 중심으로 강한 사념이 고여 있었습니다.”

사념이란 말하자면 그냥 생각일 뿐이다. 생각이 고인다는 건 무슨 뜻이지? 물도 아니고 잡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면 존재할 리도 없는 걸.

그러나 내 말을 들은 백은호는 지진아를 가르치는데 질려버린 선생님의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강하면 집념이 됩니다. 생각이 간절하면 기원이 되며, 생각이 지나치면 병이 됩니다. 원귀를 만드는 원한은 원통한 생각이며, 하늘이 감동하는 기원은 간절한 생각인데 혼을 붙잡고 하늘을 움직이는 것을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길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 같기는 하다만.

“그러니까 거기에 네게 느껴질 만큼 강한 생각이 고여 있더란 말이지? 어떤 생각인지도 알 수 있어?”

내 질문에 백은호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멀리서 느끼는 정도로 그 이상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건 당연하잖아. 행복하고 즐거운 생각이 썩은 물처럼 고여 있겠냐.

결국 방법은 이 낡은 서류철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뭔가 찾아내야 했다. 하지만 서류를 죄다 펼쳐놓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읽어보고 몇 번을 확인해도 공통점이나 힌트가 될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서류의 아이는 지금 살아있다면 35세. 가장 최근 서류의 아이는 15세다. 보육원에 맡겨진 해도 다르고 보육원에서 나간 연도나 이유가 모두 달랐다.

“어…얘들은 남매 같은데.”

서류의 낡은 정도가 비슷한 두 아이를 비교하다 문득 깨닫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살 차이가 나지만 얼굴도 비슷하고 성은 물론 이름의 앞자가 같다. 그런데도 보호자는 각자 달랐으며 한 명은 입양, 한 명은 나이가 차서 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이 때문에 나간 아이는 남매 중 누나로, 서류 아래에 주소가 두 개, 전화번호가 세 개 메모되었는데 마지막 전화번호 외에는 줄로 그은 자국이 있었다. 새로운 주소나 전화번호가 생길 때마다 예전 것을 지운 것 같다. 보육원을 나간 후에도 한동안 연락이 계속되었다는 뜻일까.

서류철을 붙잡고 씨름했지만 알아낸 것은 고작 그 정도…. 그동안 백은호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체하며 나를 재촉했다. 미혹이 풀리기 전에 가져다 줘야 하는 거 알아. 안다고.

“복사하면 되지 않습니까?”

마침내 백은호가 답답한 얼굴로 한숨처럼 말했다. 아… 컴퓨터에 연결된 프린터가 있었구나. 좀처럼 쓸 일이 없다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건 빨리 말해 줘!”

허둥지둥 방으로 달려가 서류들을 복사하는데 수호 녀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좀 있다 거기로 갈 거예요.”

“아, 애들은 데려다 줬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고 물은 말이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뭐야. 뭐가 잘못 된 거야? 짧은 침묵 뒤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과 같이 갈 거예요. 원장선생님도.”

재빨리 말한 다음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뭐? 뭐? 경찰이 왜? 이 시점에서 왜 공권력이 개입하는 건데?

아동 유괴? 서류 도난? 백은호가 멋대로 저지른 일들을 헤아려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냐. 잠깐. 일단 아이들은 돌려보냈고 서류는…서류는 원장 본인이 가져왔다며.

작업장으로 내려가 백은호에게 물어보자 “원장의 미혹이 풀렸나 봅니다.” 같은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미혹이 풀리면 어떻게 되는 건데?”

“저에 대한 호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같은 일을 도령도 겪어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구미호 여화의 경우라면 확실히 그녀의 외모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 여자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두근거리지도 곱다고 여기지도 않고 추악한 본래의 성질을 느꼈던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되면 녀석이 원장의 서류를 가져온 게 문제가 아니었다.

“백은호, 너. 아이들을 데려올 때 근처에 보호자가 없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원장과 만났다면…”

원장의 코앞에서 보육원의 원아 두 명을 유괴한 셈이다.

“제가 아이들을 데려올 때 확실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원장은 서류를 가지러 갔던 참이니까요. 어쨌든 미혹이 풀린 원장은 제가 아이들을 데려갔다고 생각하고 신고를 했을 수도 있겠지요. 서류도 서류지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문제야? 경찰한테 뭐라고 설명할 거야, 응? 게다가 서류는 또 어쩌지. 감춰야 하나.

백은호는 허둥대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뭘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돌려보냈고 경찰도 신고를 받은 이상 서류 작업이나 하러 온 걸 텐데요.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닙니까. 원장과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냉정한 말은 생각해보면 맞기는 했다. 게다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내게 원장이 직접 찾아 온 결과가 되어버리기는 했다. 노앵설 외에 이 일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원장일 터다.

설마 백은호는 그런 것까지 노리고 일을 이렇게 벌인 건 아니겠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우 요괴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내심을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건물 앞으로 차 한 대가 서더니 정복 경찰 두 명과 50대 후반의 여성 한 명이 작업장으로 들어섰다. 수호 녀석과 여동생은 보이지 않는다.

경찰은 백은호가 말한 대로 진술 받은 내용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원장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마침 수호 남매가 아이들을 데려다 준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왔지만 일단 신고를 받은 상태라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다. 수호 남매에 대해 묻자 경찰서에서 보호자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녀석, 또 혼나겠네.

아이들과 내가 아는 사이이며 ‘귀신 이야기’를 좋아해서 전에도 놀러온 적이 있다는, 거짓말은 아니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닌 설명이 그럭저럭 통한 것 같았다. 백은호의 현란한 말솜씨라서 통한 건지도 모르겠다. 경찰은 “보호자에게 연락만 해뒀어도 이렇게 일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앞으로는 조심해 주세요.” 정도로 마무리하고 돌아갔다.

경찰은 돌아갔지만 원장 선생님은 남았다. 경찰과 함께 있는 내내 서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참 인자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살집이 있는 얼굴은 이목구비가 모난데 없이 둥글었다. 굵은 웨이브가 있는 단정한 단발에는 흰머리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 수수하지만 깨끗한 차림새며, 옅은 화장기에 좋은 향기를 풍겼다.

그녀는 경찰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백은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뭐하는 분인지, 어째서 저한테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가져간 것을 돌려주세요. 그것은 여기 있을 물건이 아닙니다.”

“금고 안에 있을 물건도 아니겠지요.”

냉소를 띠며 백은호가 대꾸했다. 원장 선생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이 뭘 안다고…”

“백은호, 그만 해.”

원장 선생님과 내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호기심을 갖는데까지는 괜찮았다. 금고 안 아이들 이야기로 꼬맹이도 무서워하는 것 같고. 그러니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것이 맞겠지만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지나치게 나선 건지도 모른다. 원장 선생님이 하려던 말은 방금 내게 들었던 생각과 같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막상 원장 선생님을 만나 보자 마음이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의 마음속을 어떻게 알까마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제단과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사념이 짙게 고이도록 끈질기게 생각해 온 사람에게 덮어놓고 추궁을 하는 것도 잔인했다.

“서류 갖다 드릴게요. 잠깐 기다리세요.”

백은호에게 나서지 말라고 눈짓을 보내놓고 나는 이층에서 복사하다 만 서류들을 챙겨 왔다. 그것들을 내밀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서 가슴 앞으로 가져갔다. 가슴 앞 한 치 정도까지였다. 중요한, 그래서 멀리 둘 수 없으나 끌어안기 두려운 감정이 한 치의 거리로 드러났다.

서류를 받으면 곧 가버릴 줄 알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들고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떨어뜨린 시선이 바닥을 뚫어버릴 것 같았다. 핏발 선 눈이었다.

“앉으세요.”

무릎이 조금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권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했지만 의자를 가져다 놓고 어깨를 조금 누르자 털썩, 쓰러지듯이 앉았다.

백은호는 구경이나 하겠다는 듯이 멀찍이 갔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원장이었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약간 쉰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다. 요상한 미혹술로 서류를 빼낸 백은호나, 보육원에서 먼 수리점 사장 주제에 원아와 아는 사이라는 나나 수상하기는 수상한 놈들이었다.

“그냥…뭐…무당…이랄까요.”

가장 편한 쪽으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안 믿습니다. 세희에게 이상한 말을 시킨 게 당신들입니까? 무슨 속셈이지요?”

쌍꺼풀 진 눈을 찡그리며 그녀가 말했다. 젊었을 때는 퍽 고왔을 눈매가 잔주름에 반쯤 파묻혔다. 그녀는 세희 아니, 노앵설을 여전히 보통의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만.

“이상한 말은 아니잖아요. 세희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죠?”

뭐라고 말했는지는 몰라도 노앵설이 틀린 말을 했을 리 없으니 넘겨짚었다. 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푸근한 인상의 도톰한 볼이 바들바들 떨렸다.

“당신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신고를 하려면 하고 소문을 내려면 내고 마음대로 해요! 이제 와서…내가 뭘 어떻게…”

감정이 격앙되어 나직이 외치는 그녀에게서 나는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어두운 것을 느꼈다. 몸을 무겁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걸까? 백은호가 말한 사념이라는 것은.

짓누르는 것 같고 어둡고 답답하다. 옆에 있는 내가 이 정도라면 실제로 저것을 가지고 있는 원장에게는 어떻게 느껴지는 걸까. 캄캄한 곳에서 무거운 바위를 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일까?

무엇보다 스스로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휘저어 내 앞을 해쳤다. 연기라도 쫓는 기분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연기일 리가 없는 사념의 덩어리가 정말로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어라, 된다는 거잖아.

좀 더 의지를 갖고, 쫓아내듯이 손을 뿌리치자 그녀의 주변에서 뭉클거리던 어두운 기운이 확 밀려나 흩어졌다. 사념이 흩어지자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같은 기분을 원장도 느낀 것 같았다. 그녀가 일그러졌던 얼굴을 천천히 풀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호흡을 해본 사람 같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좀 나아지셨어요?”

그녀가 대답 대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얌전한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트이네요. 어떻게 하신 거죠?”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안 믿는다는 사람에게 설명해줄 수는 없고, 나는 그냥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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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속의 아이들(5)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원장은 몇 번을 더 크게 숨을 쉬었다가 뱉었다. 신기해하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편하게 숨을 쉬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후련한 목소리다. 사념이 흩어져서 숨이 편해진 거라면 그녀는 오랫동안 아까와 같은 사념에 짓눌려 있었던 모양이다. 무엇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끈질기고 무거운 걸까. 아마도…

생각을 따라간 내 눈길이 서류철에 닿았다. 그것을 그녀도 봤는지 역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것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믿지는 않았지만 무당이라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거…보이나요? 죽은 사람이나…”

뭔가를 더 말할 듯 싶었으나 입술을 깨물어버리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죠 뭐. 그렇다고 여기에 귀신이나 그런 건 없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웃으며 짐짓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안심하는 것 같지 않다.

“차라리 귀신이 되어서 나타나줬으면 좋겠어요.”

어두운 사념이, 말과 함께 울컥 치올랐다.

“차라리 내 앞에 와서 원망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내 눈으로 보면서 용서해달라고 빌 수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손에 잡혀있던 서류가 주름을 지으며 구겨졌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도록 꽉 쥔 손 위로 굵은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후회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꽉 닫은 목안으로 울음이 넘어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면서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온몸이 우들우들 떨도록 복받치는 것을, 필사적으로 목안에 밀어 넣는 울음이었다. 감히 소리 낼 수도 없다는 듯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울음 대신 어두운 사념이 뭉클뭉클 새어나왔다.

그것을 손짓으로 밀어내 흩어지게 하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진정하고 몸을 떨었다. 아직 불안정한 숨을 힘들게 쉬며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우리 보육원은 원래 아버지가 운영하고 계셨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니까 40년 가깝게…. 그렇다고 40년 동안 쭉 같은 것은 아니었고, 문제가 생기면 이름과 장소를 바꾸고, 그런 식으로 다섯 번째가 지금의 보육원인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이어받았어요. 그때가 11년 전이에요.”

고개를 숙인채로, 그녀는 마음속에 담고 있던 무거운 것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어릴 때는 몰랐어요. 우리 집은 보육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아버지는 저를 직장으로 데려간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오빠가 가족들과 의절하다시피 하고 멀리 이사를 가버린 후로 제가 보육원 일을 도와야 했어요. 믿을 사람은 가족뿐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어째서 믿을 사람이 가족뿐인지, 저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야 알았지요.”

무겁고 단단한 과거의 것들이 달그락 달그락 그녀 앞에 쌓였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어요. 보육원 안의 일들은 모두 내 손을 거쳤지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해서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결혼도 안 하고 보육원 일에 매달렸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많은 면에서 제도가 부실했어요. 허점도 많았고 모든 일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지요. 나는 10년 넘게 일하면서도 법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 그런 것도 몰랐어요. 복잡한 일은 모두 아버지가 하셨지요.”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셔서, 하나씩 제가 아버지 일을 대신하게 되었어요. 그리고부터 알게 되었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었던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과 환경들을 위한 돈들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그것을 위해 아이들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떨렸다.

“처음에는 반항도 했어요. 설득해 보고, 애원도 해봤지요. 아버지는 그때마다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멍청한 것이라고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살 수 있다. 이것이 모두 너를 위해서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가족 말고 있을 줄 아느냐.”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가 서류를 든 두 손을 꽉 쥐었다.

“정말로 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어요. 보육원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아버지가 하는 일을 경멸하면서도 저는 그 그늘을 벗어날 용기가 없었어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이니까, 나는 모르는 체하며 눈과 귀를 닫아버리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무릎 위에서 가장 낡은 서류철을 펼쳤다.

“이 애가 우리 보육원에 들어왔을 때 아홉 살이었어요. 예쁘고 성격도 순해서 금방 입양이 되었지요. 입양 절차가 끝나고 이틀인가 뒤에, 전 시내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이 아이의 사진이 들어있는 전단지를 봤어요. 친부모가 아이를 찾고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지만 입을 다물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 아이는 정식 절차를 밟아 입양된 게 아니었거든요. 양부모에게 받은 돈을 돌려줄 수 없다며,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알려지면 우리는 감옥에 간다는 말에 저는…”

울음이 사념과 함께 울컥 올라오는 것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삼켰다.

“사람이 한 번 죄를 지으면 말이에요. 두 번째 죄는 더 쉽게 지어요. 두 번째 죄를 짓고 나면 세 번째 죄는 더 빨리 짓지요. 세 번째 죄를 짓고 나면 네 번째는 죄책감이 흐려지고, 네 번째 죄를 짓고 나면 다섯 번째는 쉬워요. 다섯 번째 죄를 짓고 나면 여섯 번째부터는 죄를 헤아리지 않게 되지요.”

그녀는 무릎 위의 서류들을 바닥에 쏟았다.

“이것들은 내 다섯 번째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조차 못해요.”

오래 되고 깊은 그녀의 죄들은 차가운 작업장 바닥에 흩어져 퍼졌다. 거기에 붙은 작은 사진 속에서 흑백의 여자아이와 까치머리의 사내아이, 메마른 아이, 머리를 땋아 내린 소녀, 돌을 갓 지난 갓난애와 입을 비틀고 있는 소년이 까만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야…수십 년 동안 헤아리지도 않았던 죄를 이제야 내가…”

자신의 가슴을 텅 텅 두드리며 그녀가 원망처럼 말했다. 수없이 반복해서 죄에 무뎌진 마음이 어째서 이제야 후회로 괴로운지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노앵설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해줘야 했다.

“노앵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거든요. 당신이 괴롭고 후회스러운 것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서일 거예요. 아마도 첫 번째 죄를 짓기 전의 당신을.”

나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반백의 노부인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 아래에서 그녀는 잠시, 첫 번째 죄를 짓기 전 아이들을 돌보는 것밖에 모르는 처녀였던 그때처럼 보였다.

<에필로그>

결국 나는 귀신을 쫓아달라는 것도 아이들을 꺼내달라는 것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노앵설은 여전히 책장이나 옷장 위로 올라가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아이들이 놀리면 수민이 녀석이 못하게 하고 교사들도 주의를 주고 해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교사들 말에 의하면 수민이가 전보다 남자다워졌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에도 충분히 용감했거든.

서류 안의 아이들은 내가 아니라 노앵설이 꺼내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민이가 부탁한 결과 노앵설이 부모에게 잃어버린 아이들을 돌려준 것이다. 노앵설은 내가 말을 걸면 여전히 들은 체도 안 하는데 수민이의 말에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거나 했다. 이제는 초딩까지 커플이라니 짜증난다.

수호의 여동생은 여전히 마니마니란 아이디로 사이트에 잡다한 괴담과 함께 내 근황을 올리고 있다. 최근의 글을 보니 “소문에 비해 실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음. 집 밖으로 안 나가려고 하는 걸 보니 성격도 게으른 것 같고. 근데 여친이 넘 이뻐서 이해불가.” 같은 평가를 내려놓고 있었다. 너 앞으로 우리 집에 오지 마.

수민이는 수호와 자주 만나더니 가끔 작업장에 놀러오기도 하는데 이름도 비슷한 두 녀석이 하는 짓도 형제처럼 닮아가는 걸 보면 백은호가 증식하는 느낌이 든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원장의 소식은 나중에 백은호에게 들었다. 그녀는 경찰에 자진 출두해서 그동안 해온 잘못들을 자백하고 지금은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보육원 운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 것 같았다. 한 번쯤 면회를 가보고 싶었지만 날씨가 내내 좋았다.

백은호와의 거래는 보육원에 산더미 같은 선물을 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이 내게 감사의 편지를 잔뜩 보내줬는데 그 중에는 백은호에게 보내는 노앵설의 편지도 있었다.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백은호의 표정으로 봐서 그가 찾고 싶어 했던 것을 찾은 것 같기는 했다. 누구인지 슬쩍 물어봤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편지들 안에는, 노앵설이 내게 보내는 것도 있었다. 단 한 줄 뿐인, 편지라기보다는 메모에 가까운 것이었다.

거기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당신이 잃은 것은 머리맡에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잃은 거라면 기억일 테지만 어째서 내 기억이 머리맡에 있다는 거지.

방으로 돌아가서 머리맡을 확인했으나 머리카락 두 올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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