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56화 (56/218)

보낼 수 없는(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무료한 날이었다.

모처럼 일도 없고 도깨비들은 자는지 조용하고 날씨마저 좋아서 갈 곳이 없다. 도깨비야 대금 연주 한 번이면 불러 모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어두워지면 나와서 “김서방, 한 곡 불러봐.”하는 애들이고.

오늘따라 목신들의 수다도 잠깐 사이 끝나버려서, 수영이 엄마가 자전거를 마트 앞에 두고 갔다가 세 시간 만에 돌아와서 찾아간 일과 호프집 총각 사장이 청소하다 뿌린 물에 지나가던 아가씨가 벼락을 맞았다는 게 전부였다. 수영이 엄마는 어디 사는 누구인지, 언제는 은행에 도장을 놓고 가서 한 달 만에 물어보러 왔다던데….

날도 더워서 반바지에 헐렁한 티 하나 입고 한 손에는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캔 다른 손에는 부채, 이런 꼴로 작업장에 늘어져 있는데 기척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백은호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반찬 그릇에 들어간 파리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도 알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거. 그래도 파리는 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려는 찰나에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박선생이었다. 인어의 가락지 일로 통화한 이후 처음이었다.

“자네 바쁘지 않으면 여기로 와줄 수 있겠나?”

간단한 안부 인사 후에 그가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목소리에 여느 때와 같은 활기가 없었다. 바쁘지는 않은데 날씨가…까지 말한 순간 출입문이 열렸다. 백은호였다. 소리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문밖의 하늘이 침침하니 하얀 것에 놀랐다. 오늘 날씨는 맑음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백은호도 난데없이 나타나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내가 박선생에게 물었다.

“혹시 거기 날씨는 어때?”

“날씨야 늘 덥지. 그래도 어제부터 구름이 끼어서 좀 낫네만.”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양쪽의 날씨가 모두 흐리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박선생의 목소리가 더 어두워졌다.

“자네 기억하나, 그 이무기…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것 말일세. 아무래도 그것이 돌아온 것 같네.”

물론 기억할 리가 없다. 이무기는 고사하고 박선생을 처음 만난 게 언제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지. 사실대로 말하고 물어봐야 하나. 지금까지 아무 내색도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기억 못한다고 하면 기분 상할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무기가 나타났다는데 안 간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무기란 말이다. 용이 되기 직전의 영물. 그 능력은 거의 용에 비등하고, 수많은 전설에서 처녀를 제물로 바치게 하거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바다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해치는 막강한 요괴인 것이다.

내가 그것을 상대할 수 있는가는 나중 문제고.

박선생에게 가겠다고 말해 놓고 통화를 종료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은호가 자동차 키를 짤그락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박선생이 너도 불렀어?”

그를 따라 나가며 묻자 백은호가 차문을 열며 힐끗 나를 보았다.

“그 박가 아이라면 저와는 거래한 적 없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지요. 기이한 물건만을 모으는 수집가는 흔치 않으니까요.”

박선생도 이 바닥에서는 나름 유명한가 보다.

“그럼 여기는 왜 왔는데?”

내 질문에 그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뭐?

“아침부터 도령의 거처 위로만 구름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바람을 부리고 구름을 모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누군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이무기일 줄은 몰랐군요. 알게 된 이상 같이 가보도록 하지요.”

통화내용을 들었는지 백은호가 말했다. 내 집 위에만 구름이 있어?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서는 뭐 하늘이 온통 가려진 걸로밖에 안 보인다. 그런데 그렇다는 건, 백은호, 내가 걱정되어서 와 준 거냐?

“잘 하면 이무기의 여의주를 구경할 수도…”

백은호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차 안에서 들려왔다.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박선생 집은 알아?”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묻자 백은호는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고 대답했다.

“영광의 박선생은 유명합니다. 자산가에 기이한 물건을 수집하며, 소문으로는 집안 어딘가에 영물을 키우고 있다는데 그 때문에 그의 집에는 아무나 범접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대답하는 백은호의 표정이 어딘지 사악해보였다. 이 여우요괴가…. 너 설마 박선생의 집에 찾아갔다가 못 들어간 적 있냐? 그래서 나랑 같이 가려고 하는 거야?

“진기한 물건들이 많다니 구경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말도 안 했는데 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그가 덧붙였다. 음…유하의 술병을 탐내더니 결국 가져간 걸 생각하면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그건 그렇고 그 집에서 뭘 키우고 있었던가? 족자 때문에 찾아갔던 때를 돌이켜 보아도 그 집에 노부부 두 명의 기척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마당 넓은 집에 살면 한 마리쯤 키울법한 개도 없었고.

그런데 영물이 뭔지 몰라도 그런 걸 키우고 있다면 이무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물론 이무기가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 능력도 능력이지만 애초에 파충류인 뱀이라는 건 포유류인 인간과 어딘가 상성이 안 맞는 것 같다.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오싹해지는 데가 있었다. 그래도 용 정도면 몸은 비늘이 덮인 뱀과 같더라도 머리는 포유류의 것이고 털도 있고 발도 있고 한데. 게다가 이무기는 뱀인 주제에 크기는 엄청 크겠지. 요괴들은 보통 약점이 있던데 이무기도 그런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문득 어이가 없어졌다.

이무기라면 전설 속의 최종보스 같은 요괴였다. 그걸 상대로 지금 진지하게 싸울 궁리를 하고 있다니. 아무리 요새 별 걸 다 만나보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현실감각이 떨어져도 되는 건가.

아니면 백은호가 있으니까 안심해버린 걸까.

매번 저건 역시 요괴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백은호지만 나는 저 여우요괴를 정말로 깊이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일이다. 잃어버린 기억 중에서 돌아온 것은 백은호에 관한 것뿐이었다. 하긴 그것도 처음부터 죄다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유가 뭘까.

이무기에서 백은호로, 백은호에서 내 기억과 과거로 상념이 옮겨 다니다가 차가 멈추기에 밖을 보니 어느새 박선생의 집 앞이었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널찍한 한옥의 전경이 낯익었다.

찻소리를 들었는지 우리가 차에서 내릴 즈음 대문이 벌컥 열리며 박선생이 마중을 나왔다.

“빨리 와줬구먼.”

달려 나오며 반가워하는 걸 보니 꽤나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선생은 내 손을 덥석 잡아 흔들고서야 안심한 얼굴로 백은호를 돌아보았다.

“골동품점 사장인데, 도움이 될 거야. 아는 것도 많고 여러 가지로 실력도 좋으니까.”

“백은호입니다.”

어느새 꺼낸 명함을 건네며 백은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까는 박가 아이가 어쩌고 하더니 여우 같으니라고.

“은호당이면…충장로에 있는 그 집이구먼. 지인들에게 여러 번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사장님이 젊은데 수완도 좋고 질 좋은 물건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부끄럽습니다.”

야, 안 어울려. 겸손한 체 하지 마!

백은호의 여우짓에 손발이 오그라지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선생은 우리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막 넘어서는데

“왈! 왈!”

귀엽게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루 밑에서 나온 강아지 두 마리와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큰 개는 털이 길고 몸체가 날렵한 게 아프간 하운드를 닮았고 그에 비해 강아지들은 동글동글 통통한 게 흔한 잡종 강아지처럼 보였다.

“박선생, 개 키우고 있었어?”

지난번에는 없었는데.

“아아, 이 녀석이 어찌나 집에 붙어있지를 않는지. 나갔다 하면 사나흘씩 돌아다니다 온단 말일세. 새끼를 가지면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강아지 둘을 데리고 며칠씩 나갔다 오니 말 다했지. 그래도 웬일인지 요즘은 안 나가고 잘 붙어있네. 요놈들도 이무기가 나와서 무서운가. 어…그런데…”

박선생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백사장은 그새 어디 가셨나?”

응? 둘러보니 정말로 백은호가 사라졌다. 발밑을 돌아다니던 강아지들이 허공을 노려보며 왈왈 짖어댔다. 녀석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대문 위 창살 모양의 장식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백은호가 보였다.

야…너 뭐해?

깎아놓은 연필 끝 같은 그 날카로운 철장식 위에 어떻게 발을 딛고 있는지는 일단 둘째 치고, 대체 멀쩡히 사람인체 잘 하고 있다가 갑자기 무슨 요괴스러운 짓이냐 이건.

“백사장? 거기는 어떻게…”

박선생이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는데 강아지들이 대문 밑으로 몰려가서 팔짝팔짝 뛰며 왈왈거렸다. 그리고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강아지들이 짖을 때마다 백은호는 식은땀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움찔거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뿐이면 좋겠는데, 강아지들을 노려보며 웅크려 앉은 백은호로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어쩐지 머리카락 색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다 빼도 박도 못하고 요괴인증을 할 판이었다.

“저, 백은호…”

“이놈들아, 손님이 놀라시잖냐. 아이구, 죄송합니다. 어린 것들이라 버릇이 없어요.”

박선생이 재빨리 강아지 두 마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더니 마루 밑에서 상자 같은 걸 꺼내 놓고 그 안에 강아지들을 넣었다. 강아지들이 왈왈거리며 나오고 싶어 했지만 아직 어린 것들이라 앞발을 걸치고 머리만 내미는 게 고작이었다.

박선생은 상자를 출입문에서 멀찍이 갖다 놓고 큰 개에게 말했다.

“해님아, 애들이랑 같이 있어라.”

개는 주인에게 꼬리를 치더니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강아지들에게 갔다. 강아지에 이어 큰 개까지 멀어지자 그제야 백은호는 대문에서 내려왔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10m거리의 세 마리 개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서 참았다. 참아야 했다. 여기에서 웃었다가 나중에 백은호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강아지 두 마리가 왈왈거리는 걸 보고 놀라서 도망쳐 으르렁대다니. 저 백은호가. 수백 년을 산 여우 요괴가. 이걸 동영상으로 찍어놨어야 하는 건데. 아 진짜 아깝다. 여우가 사냥개를 무서워한다는 말은 들은 것 같지만 설마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실례가 있나.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실례는 뭘. 하룻강아지 보고 놀란 백은호가 잘못이지.

박선생이 우리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한 번 본 적 있는 그의 부인이 서두르며 다과상을 준비하다 말고 우리에게 인사를 보냈다. 이때쯤에는 백은호도 다시 평소의 기생오라비로 돌아와서 박선생의 부인이 볼을 붉히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만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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