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낼 수 없는(6)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망했다.
여의주가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이무기와의 일도 기억 못하는 나였다. 어쩌지?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구름을 일으켜 외출할 수 있게 한 것도 이무기인 모양인데 그렇게까지 불러놓았더니 기억 안 난다며 여의주를 안 주면….
약속을 지키며 수십 년을 기다려온 이무기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니 화내는 게 당연하겠지. 난감했다.
곤란해 하고 있는데 이무기의 긴 몸이 다시 스르르 줄어들었다. 줄어드는 것과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상처는 거의 나아서 아물고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면 곧이다.
“저, 박선생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저는 가봐야 해요. 이 아이도 다쳐서 푹 쉬어야 할 것 같고…. 깨어나면 내일 다시 오겠다고 전해주세요.”
남자에게 말하자 용아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무기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루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행여 깨어날세라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는 내 뒤로 여우 모습인 백은호가 거리를 두고 쫓아왔다.
녀석은 아직 삐친 상태인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달리는 내 뒤쪽에서 길 옆의 수풀을 벗어나지 않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가끔 돌아보면 풀과 관목 사이로 흰 꼬리가 숨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박선생의 집이 가까워지자 더는 따라오지 않고 집근처 나무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고개를 홱 돌리고 딴청을 피운다. 커다란 구미호 모습일 때는 위압적이지만 지금은 개 정도의 크기인 여우라서 위압은커녕 귀엽…다고. 제길. 백은호를 귀엽다고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인간형일 때는 재수 없는 기생오라비였지만 지금은 어디로 보나 여우라서, 눈처럼 하얀 털이 복슬복슬 한 것이나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리는 모습이라든가 여우눈이라고 부르는 초승달 모양의 눈을 하고서 찌푸리고 있는 것이 투정부리는 여우정도로 밖에 안 보였다.
내가 걸음을 돌이켜 다가가자 피하지는 않았지만 저러면 목 아프지 않나 싶을 정도로 고개를 삐딱하니 돌리고서 외면했다. 녀석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여우의 얼굴인데도 어쩐지 사람일 때보다 표정이 잘 보였다.
“백은호, 아까는 양보해줘서 고마워.”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람의 모습일 때는 좀처럼 하기 힘든 말이 쉽게 나왔다. 백은호는 여우눈을 한번 움찔했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무슨 일인지는 말 안 해줄 거야?”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없다.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 풀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모양이었다. 그냥 두고 박선생의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혼자 두기가 싫었다. 화난 얼굴이 아니어서 더 그랬다.
할 수 없지.
웅크리고 있는 녀석의 허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서 번쩍 들어버렸다. 덜 자란 개 정도의 크기라 무게는 10kg도 안 되었다. 백은호가 여우답게 “컁!”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발버둥치지만 그 힘이란 보통의 여우 정도인 것 같다. 호오, 여우 모습일 때는 다른 조건도 여우랑 같은가본데. 낄낄거리려는 순간에
크릉!
거친 효후와 함께 그의 몸이 확 커지며 나를 짓눌렀다. 단번에 나를 쓰러뜨리고 어깨를 발로 누른 백은호의 뒤에서 아홉 개의 하얀 꼬리가 넘실거렸다.
“야, 야. 너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내가 당황해서 말하자 구미호로 변한 백은호가 코웃음 치며 뒤로 물러났다. 세 걸음 만에 구미호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은 언제나 보던 그대로였다. 단정한 얼굴로 고상한 체하는 여우 요괴의 얕보는 듯한 눈길이 이번만은 반가웠다.
박선생의 집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가 내 팔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 거 아냐. 가시에 찔린 정도.”
소독약을 가져온다 붕대를 가져온다 수선을 피우는 박선생에게 내가 말했다. 말하며 백은호를 힐끗 보자 집안에 놓인 화분을 구경하는 척하고 있었다.
가시치고는 좀 굵은 거지만 상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여우의 송곳니 모양 그대로 선명하게 뚫린 자국이 험상궂기는 했으나 출혈도 적고 움직일 때가 아니면 심하게 아프지도 않다. 처음에 비해 상처 안쪽의 살이 올라온 것 같기도 했다.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물렸담. 이 마을에 그런 큰 개는 없는데.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요? 보건소에 가서 광견병 예방주사라도 맞고 와요.”
내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며 박선생의 부인이 걱정했다. 음…여우는 개과니까 그래야할지도 모르겠다.
한바탕 요란을 떨며 상처를 치료한 다음 나는 박선생에게 새로 알게 된 것들을 이야기해줬다. 박선생은 입을 벌리고 이야기를 듣다가 이무기가 용아가 되었다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놀랐다.
“그 일이 56년 전일세. 그래…길기도 긴 시간이군.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이무기가 용연신(龍淵神)이 될 정도로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구먼.”
박선생의 말에 의하면 용아란 용의 연못에 사는 사람 모양의 용이라는데, 음…이무기도 용으로 봐야 하나. 어쨌든 그의 말에는 놀라움과 함께 반신반의하는 마음, 그리고 나로서는 생각해본 적 없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무기와 마주쳤던 기억은 그에게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가 괴이한 물건을 수집하고 있는 것 역시 그 상처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네는 이무기…아니 이제는 용아라고 해야 하나. 그 용연신에게 여의주를 돌려줄 생각인가?”
그러고 싶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돌려주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기억이 안 나.”
말해버렸다. 박선생이 눈을 껌벅거리고 있다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크게 떴다.
“무슨 소린가?”
“이무기의 여의주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런 걸 어떻게 잊어버리나?”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는다. 예. 저도 어떻게 잊어버리는지 몰라서 환장하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그 일에 관해 뭔가 말한 건 없어? 이무기를 만났을 때라든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라든가.”
뭐라도 힌트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묻자 박선생은 눈썹을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이무기를 봤을 때는 자네의 자라는 말에 다시 잠들었다가 깬 기억밖에 없네. 무슨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자네를 다시 만났을 때는…내가 부러 묻지 않았지. 뭐 좋은 기억이라고 이야기하겠나. 그래도 자네가 몇 가지는 알려줬지.”
박선생은 눈을 깜박이며 기억을 돌이켰다.
“내게 말하기를 이제 이무기가 괴롭히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었네. 그때까지도 나는 언제 다시 이무기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열일곱 살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고,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자 이무기에게 아이들이 먹히는 악몽을 꾸기도 했지. 그래서 자네 말에 정말로 기뻤다네.”
어…그랬었어? 몰랐다. 볼 때마다 활기 있고 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라 이 사람은 살면서 나쁜 일이나 슬픈 일 같은 건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무기를 죽였느냐고 물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지. 그 말에 내가 다시 무서워하자 그러면 해님이를 줄 테니 데리고 있으라고 했어. 큰형님에게 받은 소중한 아이니까 잘 보살펴 주라고. 그때만 해도 나는 해님이가 이렇게 오래 살줄은 몰랐다네.”
말하며 그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나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 이야기는 내게 없던 정보들을 쏟아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와 재회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으며 형제가 있었다…
형제가 있다.
굳이 큰형님이라 불렀다면 다른 형도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두 명 이상의 형이 있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러면 여의주는 개에게나 물어봐야 할까요.”
백은호의 목소리가 상념을 가르며 들어왔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내내 거실 전면의 유리창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강아지들을 경계하던 그였다. 여전히 유리창을 보고 있어 표정은 모르겠지만 가볍게 던지는 체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런 체 한다는 건 사실 가벼운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고.
잠깐…정말 그럴지도 몰라.
“박선생, 내가 그때 데리고 있던 개는 해님이 뿐이었어?”
이름이라는 게 그렇잖아. 해님이가 있으면 달님이도 있어야 하는 법.
박선생은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그랬던 것 같군? 왜?”
아닌가…
생각이 틀려서 조금 풀이 죽었는데 박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달님이는 좀처럼 말을 안 들어 데리고 다니기 힘들다고 집에 두고 다니잖나. 요새는 어떤가? 내가 갈 때마다 통 보이지 않더구먼.”
뭐?
박선생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집에 개라면 하나뿐이다. 그녀석이야? 그녀석이 달님이야? 맨날 싸돌아다니는, 소년으로 변하는 말하는 삽살개가?
그렇다면 정말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서 강아지들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해님이에게 달려갔다. 나를 보고 강아지들이 상자에 앞발을 걸치고 꼬리를 흔들었다. 귀여운 모습이지만 지금 거기에 눈길을 줄 틈이 없었다.
해님이는 나를 보고는 갈색의 눈을 조금 휘어 웃었다. 개가 웃는 표정이라는 건 합성된 사진에서나 봤지만 실제로 보니 어쩐지 묘했다.
“도령, 맡긴 것을 찾으러 오셨소?”
여자의 목소리로 해님이가 물었다.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해님이가 일어서서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본다. 손을 내밀자 거기에 입을 대더니 작은 구슬 하나를 뱉어냈다. 수정처럼 맑고, 그 안에서 오색의 구름 같은 것이 휘도는 아름다운 구슬이었다.
“도령, 약속을 지켰으니 나는 돌아가겠소.”
해님이 말했다. 말하고 있을 때 개의 몸이었던 해님은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아지에서 어린 아기의 모습이 되어버린 두 아이를 끌어안더니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박선생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도령, 다섯째가 오고 있소. 가까이 왔소.]
뭐?
뜻밖의 말에 놀랐지만 이미 그녀는 사라져버린 후였다.
“이게 무슨 일이람. 내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네…”
박선생이 내 뒤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혼란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신목에 이어 또 한 번 경고를 받았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경고를.
손안의 여의주가 없었다면 환청이라고 생각했을 여자의 목소리가 끝없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에필로그 1>
박선생의 집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다시 찾아갔을 때 용아는 완전히 기력을 되찾고 있었다. 밤새 간병을 했는지 남자도 물가에 함께 있었다. 여의주를 돌려주자 둘이서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저런 고생을 했어도 보람은 있는 것 같다.
“여우는, 오지 않았습니까?”
어제 그렇게나 상처를 입을 정도로 혼났으면서도 묻는 목소리에 두려운 기색은 없었다.
“아아, 그 일은 정말 미안해. 백은호가…”
“그가 말하지 않았군요.”
용아가 웃으며 내 말을 잘랐다. 그는 내게 목덜미의 왼편이 보이도록 돌아섰다. 어제 백은호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비늘이 있는 자리였다.
“이것은 기억의 비늘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기억이 바깥으로 돋아난 것입니다. 도령을 만나기 전 제가 사람들을 잡아먹고 살 때에, 제 왼편 목덜미에는 이런 비늘이 돋아나서 저를 끝없이 괴롭혔습니다. 한 사람마다 하나의 비늘입니다.”
용아는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오른쪽 목덜미가 보였다.
“그리고 도령을 만난 후에 한 사람을 구할 때마다 다시 새로운 기억의 비늘이 돋아났습니다. 왼편의 비늘이 아직 저를 괴롭게 하지만 오른편의 비늘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그는 목덜미 왼편에서 작은 비늘 하나를 떼어 내게 내밀었다. 손톱 크기의 작은 비늘 속에서 어제 본 그 모습이 흔들렸다.
백은호다. 아니. 그림이다. 백은호라고 생각했는데 섬세하게 그려놓은 수채화였다. 그 앞에서 붓을 들고 그림을 물끄러미 보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 색이 덜 칠해진 머리카락 쪽을 손보려 하다 마음을 바꿨는지 붓을 내려놓는다. 피곤했는지 어깨를 주무르며 돌아서는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머리 모양이나 옷 입은 것을 봐서는 수 십년 전이었다. 흑백영화밖에 없을 무렵쯤?
“그 비늘은 제가 일흔 세 번째 잡아먹은 사람의 기억입니다.”
용아가 말했다.
‘그랬구나.’
백은호의 태도가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는 용아의 비늘 안에서 잘 아는, 어떤 식의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죽임당한 것에 화를 낼 정도로 아끼는 사람을 본 것이다.
용아의 말에 비늘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여자. 그 여자잖아? 응?”
용아를 돌아보며 그가 비늘을 손가락질했다.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누군데?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나에게 용아는 오른편 목덜미에서 비늘을 하나 떼어 내밀었다.
“이것을 여우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일흔세 번째로 구한 사람의 기억입니다.”
약속에 따라 구한 마지막 한 명이다. 들여다보자 오색의 비늘 안에는 조금 전 본 그 여자와 똑같은 사람이 있었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도 나이도 달라 보이지만 바로 그녀였다.
<에필로그2>
박선생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백은호는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기분이 안 좋다는 표정을 확실히 지어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가 내미는 비늘 두 개를 보고 여우로 변할 것 같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금세 본 것 같았다. 용아가 오른쪽 목덜미에서 떼어낸 비늘을.
야아…백은호가 저렇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구나. 이걸 찍어놔야 하는데 그랬다간 핸드폰 액정과 함께 나도 박살나겠지?
하지만 저 백은호조차도 박선생의 집을 떠날 때까지 한 가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만큼 얼이 빠져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왔을 때 들여다보고 있던 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로 찾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그 종이는 내게도 낯익은 것이었다. 나도 비슷한 것을 받은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당신이 잃은 것은 용아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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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수 없는(7)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에필로그3>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박선생과 함께 한 번 더 산에 들렀다. 백은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움막 근처까지만 따라와서 멀찍이 있었다. 어제 받은 비늘 때문에 화는 풀린 것 같지만 산에 가자는 말에 인상을 쓸 정도로 아직 유감이 남아있었다.
움막의 남자는 그때까지도 용아와 함께 있다가 우리를 보자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용아의 요청에 나와 남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박선생은 오래 전 두려운 기억의 근원과 홀로 마주했다. 둘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다. 한참 후에 박선생이 우리에게 왔을 때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움막으로 돌아가는 도중 원래의 쾌활한 그로 돌아갔다.
남자의 움막에서 우리는 박선생 부인이 만들어 준 안주를 놓고 셋이서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비웠다. 박선생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움막 생활을 언제까지 할 셈이냐고 남자에게 물었다.
“용아는 여의주를 되찾았으니 이제 걱정 없고. 곧 가을이에요. 가을이다 싶으면 금방 겨울이고….”
겨울에도 이런 생활은 힘들 터였다.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아이가, 내가 돌봐줘야 할 아이가 아닌 줄은 알고 있수. 오히려 반대였겠지. 그래도 핑계 삼아 생각하기로, 저도 혼자고 나도 혼자니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선생은 가족이 있잖습니까.”
박선생이 일깨웠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 꼴로 돌아간들 좋아할 리가…”
“싫어한들 어쩔 거요. 좋을 때만 보고 싫을 때는 안 보는 게 어디 가족이랍니까. 가장이라고 항상 태산 같이 서있나. 흔들릴 때 서로 붙잡아주고 도와주는 게 가족이지. 선생도 보고 싶잖습니까.”
“보고 싶은 거야 어디 말로 다 하겠수.”
한숨을 쉰 그가 상의 주머니에서 꾸깃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에서 지금과 달리 살집이 좀 있고 얼굴이 밝은 남자가 가족과 함께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사모님이 미인이시네요.”
내 말에 남자가 히죽 웃었다. 웃다가 괴로운 얼굴로 돌아갔다.
“나 때문에 친정까지 난리가 났었지. 장모님 앓아누우셨다는 말 듣고 내가 고개를 못 들고 있수.”
“아들이 똑똑해 보이네.”
박선생이 눈치 있게 끼어들었다. 음…, 안경 쓰면 공부 잘 하게 보이기는 해. 그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금세 도로 밝아졌다.
“공부를 아주 잘 해요. 착하고. 내가 아들 때문에 속 썩여 본 적이 없수. 이놈이 심성이 여려서 그게 좀 걱정이지.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같이 산도 오르고 캠핑도 하고…”
말하던 그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었다.
가야지…. 부끄러운 아비라고 싫어해도 내가 자식 옆에 있어야지…그래야지…
그가 말했는지 내가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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