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저, 이걸…”
이라며, 떨리는 두 손이 내민 것은 길이 17cm, 폭 10cm의 핑크색 편지봉투였다.
편지를 담고 주소를 적을 수만 있으면 편지봉투의 역할은 다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핑크에 하트무늬에 입구를 봉한 것도 반짝반짝 하트 스티커라니 주제넘은 봉투다. 게다가 그걸 들고 있는 인간도 전혀 마음에 안 든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지?
머릿속으로 과격한 액션을 동반한 적절한 예시가 몇 가지 떠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어쨌든 상대는 아직 어리다.
“그…네 마음은 고맙지만 말이다, 일단 내가 성인인 이상 받아주는 건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이란다. 게다가 너는 지금 학업에 열중해야 할 아아주 중요한 시기거든. 연애는 대학 가서 해.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남자에게 관심 없…”
“누가 아저씨 준대요?!”
봉투를 내민 채로 수호 녀석이 버럭 외쳤다. 나는 사이좋게 핑크빛이 된 녀석의 얼굴과 봉투를 번갈아 보았다. 새벽 같은 아침부터 남의 작업장에 뛰어 들어와서 나를 찾더니 대뜸 핑크색 편지봉투를 내놓고 주는 건 아니라네.
“지금 나한테 주고 있잖아. 나 주는 거 아냐?”
“주, 주긴 줄 거지만 읽으라고 주는 게 아니고요! 고쳐달라고 주는 거예요.”
뭘 고쳐요? 편지를 고쳐요? 봉투를 고쳐요? 아니 그 전에 이 편지의 어디가 고장난 건데? 내가 보기에 고장난 건 네 개념 쪽인 것 같다만.
“얌마, 여기가 만물수리점이긴 하다만 편지수리 소원수리 그런 건 딴 데 가서 물어보고요. 글자를 잘못 썼으면 화이트로 지우고 다시 쓰든지 편지지를 새로 사서 쓰든지 하면 될 거 아냐.”
“그렇게 못하니까 해달라는 거죠.”
녀석이 억울한 얼굴로 토로했다. 왜 못 고치는데? 철판에 쇠필로 긁어 쓴 편지라도 되냐?
“이건 내가 쓴 게 아니라고요. 게다가…”
한숨을 쉬며 녀석이 편지봉투를 열어보였다. 겉은 화사한 핑크인데 속지가 어쩐지 샛노랗다. 심지어 편지지도 노랗고 거기에 붉은 글씨로 뭔가 쓰인 것 같았다. 꺼내 보니 한 면에는 “나와 사귀어줘!”라는 간단명료한 메시지가 사내다운 필체로 적혀 있고, 반대편에는 한자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가는 무늬가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부적 뒷면에 러브레터를 쓰는 놈은 처음 보네.”
“그건 애정필원부예요.”
수호 녀석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관심 없는 사람의 마음을 돌릴 때 쓰는 거예요. 그리고 봉투 안쪽에 붙은 건 득심부라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 쓰는 거고요.”
누군지 어지간히도 좋았나 보다. 부적을 세트로 쓸 정도면.
“그런데 이게 왜?”
메시지도 단순하고, 여자애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뭐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은데.
“봉투 겉면을 봐요.”
녀석의 말대로 봉투 겉면을 보자 보내는 사람 옆에 강재호란 이름이, 그리고 받는 사람 옆에는 ‘4세기 말 광개토 대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광개토 대왕에게 고백하는 거냐? 취향은 존중하겠다만.”
“당연히 아니죠!”
그럼 자식 이름을 4세기 말 광개토 대왕이라고 짓는 부모가 있다는 거야?
“실수라고요, 실수!”
수호 녀석의 말에 의하면 강재호란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애는 같은 반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혼자 있는 일이 없었단다. 러브레터를 전해줄 기회만 노리면서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중에, 역사 수업시간에 무심코 낙서를 했던 것이 하필이면 봉투였다나 뭐라나.
“수업시간에 공부나 할 일이지 연애편지를 꺼내놓고 있다니 학생으로서 할 짓이냐 그게. 천벌이다.”
“아 좀 진지하게 할 수 없어요?”
“진지하게 충고하자면…광개토 대왕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 거야?”
“아저씨!”
수호 녀석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아 자식, 좀 놀렸다고 눈 부릅뜨는 거 봐라.
“그런데 이 이름, 연필로 쓴 것 같은데? 지우개로 지우면 되지 않을까?”
“직접 해보시죠.”
수호 녀석이 심통 난 얼굴로 대꾸했다. 해보라면 못 할 줄 알아? 방에서 지우개를 가져와 봉투에 대고 쓱쓱 문지르자 깨끗이 지워진다.
“이거 보라고. 잘만 지워지…인 것 같았는데…”
이름이 도로 나타났다.
뭐지. 편지에 뭐가 씌었다거나 이상한 기운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은데. 이런 게 부적의 힘인가?
“그냥 편지를 태워버리고 다시 쓰면 되겠지.”
내가 묻자 수호 녀석이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나는 편지를 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영감. 화로 좀 쓸게.”
그냥 화로도 아니고, 화로 도깨비 안에 불 도깨비가 살고 있으니까 어지간하며 태워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편지를 넣었으나
“이건 뭐…대왕님의 가호인가.”
편지는 그을리지도 않은 채 화사한 핑크색 그대로였다. 내가 멀쩡한 편지를 들고 터덜터덜 돌아오자 수호 녀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백은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야, 네 친구는 광개토 대왕에게 고백을 한 셈이라 이거냐?”
“편지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이렇게까지 효험을 보이는 걸 보면 이미 전해졌거나 아니면 곧 전해지거나 하겠죠.”
야아…. 위인과 사귈 수 있다니 부적이란 놀라운데. 나도 하나 구해서 황진이라든가…
“지금 멍청한 표정 짓고 있는 건 이 편지를 어떻게 고칠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수호 녀석이 물었다. 이 녀석 독심술에 비꼬기 스킬까지 생겼어.
“하지만 광개토 대왕 정도의 인물이잖아. 부적 한두 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쉬우면 너도 나도 부적 안 쓰는 사람이 없겠다. 특히 역사학자들. 본인 불러다 놓고 물으면 아주 그냥…”
“단순히 부적의 효력만은 아니에요.”
어쩐지 백은호가 설명할 때 자주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수호 녀석이 말했다.
“애정필원부나 득심부나, 부적보다는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에 따라 효력이 달리 나타나니까요. 애초에 이 부적은 대충 만든…”
말하다 말고 녀석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호오라? 시선을 피하는 녀석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자 우물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쏘아보며 외쳤다.
“장난이었어요. 이건 그냥! 예전에 장난삼아서!”
“알바 안 했다면서?”
“알바 아니거든요! 처음 부적술 배우기 시작할 때 날과 시도 안 가리고 준비도 없이 대충 만든 거라고요. 이런 게 효력이 있을 리가 없…”
그런데 있잖아.
말하던 녀석도 그건 아닌 것 같았는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뭐래도 애는 애랄까, 아니면 남자는 남자랄까. 부적술 배우자마자 애정필원부와 득심부라니. 웃고 싶었지만 녀석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어서 참았다.
“아저씨도 말했잖아요. 광개토 대왕 정도의 인물이에요. 이런 부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런데 한낱 어린애가 부적으로 자신을 마음대로 다루려고 시도했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흐음.
그건 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네.
뭐래도 상대는 광개토 대왕이다. 5천년 역사 중에서 대부분 이의 없이 대왕으로 부르는 두 사람 중 하나란 말이지. 생전의 정복사업만 해도 굉장하잖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왕이자 군대의 지휘관. 그것만 생각해도 어쩐지 무시무시하다.
죽은 사람이니 찾아온다고 해도 혼령이겠지만, 옛날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혼령이라도 특별한 사람의 혼령은 보통 사람의 혼령과는 다르고. 무엇보다 보통 혼령이라도 평범한 사람에게는 위험한 일이고.
“그럼, 어떻게 해줄까?”
내가 물었다. 수호 녀석이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편지의 이름, 바꿀 수 없다면 아예 없애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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