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없애버리라는 건 너 설마 광개토대왕을…”
야, 나라도 그건 좀 무리다.
“누가 광개토대왕을 없애래요! 편지요. 편지를 없애든 편지의 글자만 없애든 좌우간 어떻게든 해달라고요.”
그건 뭐 쉬운 것처럼 말하네. 어쨌든 고구려 정복왕과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편지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지만.
“최대한 빨리 해야 해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초조한 목소리로 녀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수리비는 네가 내는 거냐? 아님 네 친구가 내는 거냐?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엔 아아주 비싸게 받을 거야. 너 저번에 요지경 가져왔을 때도 얼렁뚱땅 돈 안 내고 넘어갔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걸 보고 조금 놀려줄 겸 말했더니 녀석이 중2 주제에 고고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턱을 치켜들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세속의 부는 먼지와 같은 것이라 깨닫지 못하는 사이 몸에 묻는 것이지 수고로이 뒤쫓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환 그 인간은 어린애에게 무슨 교육을 시키고 있는 거야. 경제관념이 엉망이 되잖아.
“내 스승은 기회가 곧 돈이라고 믿는 작자여서 말이다. 이번에도 대충 뭉갤 생각이면 꿈 깨라. 저번 것까지 합해서 제대로 받을 테니까. 싫으면 딴 데 알아보시든가.”
짐짓 을러대자 녀석의 얼굴이 대번에 중2답게 돌아왔다.
“치사하게! 그러고도 어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어른 되는데 뭐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나이 갖고 물고 늘어지지 마라. 그러니까…”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에게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편지를 해결하는 동안 너는 해명도령에 대해 최대한 조사해 오는 거야. 교환조건이다. 어때?”
내 말에 녀석이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그걸 왜 조사해요?”
“왜? 싫어? 어른스럽게 네가 해결 가능한 방법을 제시한 건데. 게다가 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볼 훌륭한 스승님도 계시잖아.”
“…조사만 하는 거예요?”
“조사를 했으면 보고서를 작성해야지, 임마. 성실하게 해라. 대충 하면 안 받아줘.”
녀석은 눈썹을 모으며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래 마음에 드는데. 안 그래도 환에게 한 번 찾아가서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이편이 나은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소리 할 필요도 없고, 길상과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일도 없고. 뭐…녀석이라면 꽤 꼼꼼하게 알아볼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보고서를 받으려면 일단 이 편지를 해결해야 하는 거지.
본인은 특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뭐든 대충은 알고 있는 백은호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간지 한참 만에 귀찮다는 목소리로 받았다.
“지금은 아침 식사 후 멍하니 막장 드라마 보고 있을 시간 아닙니까?”
아니거든요!
“백은호, 부적 붙은 연애편지 고치는 법 알아?”
“장난전화 할 상대가 필요하시면 유료 번호를 몇 개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필요 없어!
“반응이 틀렸어, 반응이. 보통은 방금 같은 말을 들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인데? 자세히 설명해 봐.’라고 한다고.”
수화기 너머로 짜증 섞인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데. 자세히 설명해봐.”
라는 로봇이 책 읽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오늘 참 까칠하네. 하지만 부탁하는 입장이니 참아주마.
내가 수호 녀석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자 백은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별 걸 다 걱정해 주시는군요. 기껏해야 불구가 되거나 집안에 우환이 닥치거나 대왕이 거느리는 혼령들에게 몇 년 시달린다거나 하는 벌을 받을 뿐입니다.”
야, 야…. 그렇게 태연하게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 마. 충분히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부적의 효험을 취소할 방법은 있는 거야? 아니면 광개토 대왕을 피할 방법이라든가.”
“봉투 겉면에 쓰인 이름을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니까. 아까 지우개로 지워봤는데 도로 생기더라고.”
“받는 사람이 아니라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바꾸십시오. 물론, 그 이름도 평범한 방법으로는 바꿀 수 없습니다만 차사의 먹물이라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차사의 먹물은 뭐야?
“저승차사 말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먹물이라면 획을 한두 개 더해서 이름을 바꾸는 일이 가능합니다.”
백은호가 덧붙여 말했다.
……저기요? 백은호씨? 지금 저승사자 말씀입니까? 죽은 사람의 혼을 염라대왕 앞으로 데려간다는 그 저승사자? 까만 옷 입고 얼굴 하얗게 핏기 없고 입술 까맣게 분장하는 그 저승사자?
“아니 차라리 그 차사더러 광개토 대왕을 데려가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혼령을 막으려고 저승사자를 상대하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잖아, 그거.”
“차사는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오히려 상대하기 수월한 존재입니다. 속이기도 쉽습니다. 다만, 차사 역시 보는 눈이 있으니 직접 상대하는 것은 눈이 어두운 보통 사람이 해야 할 것입니다만.”
뭐냐, 그건. 어쩐지 여우 요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시켜놓고 참 쉽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차사가 다니는 길목에 음식을 차려놓고 유인을 하면 간단합니다. 음식과 함께 독한 술을 준비해 두면 마시고 취할 겁니다. 허리춤에 휴대용 먹물통이 있을 테니 취해서 잠들었을 때 먹물을 조금 가져오면 됩니다.”
너 엄청 쉽게 말하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간단한 거냐?
“…다른 방법은 없어?”
“글쎄요. 염라국 화탕지옥이라면 부적 정도는 태울 수 있을 겁니다. 주작이 다루는 불도 꽤 강하다고 하니 찾아보시거나…”
그냥 저승사자 다니는 길이나 알려주세요.
“어휴….”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저승사자 포획이라는 건데…. 다니는 길목은 알고, 음식이라면 유하에게 부탁하면 될 테고.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는 거지.
일단 나는 나갈 수 없고 나갈 수 있어도 차사가 알아볼 테니 패스. 도깨비도 안 되겠지. 당장 주변에 인간이라야 음…유하와 수호 녀석인데. 유하의 경우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증거가 이미 있으니까 패스. 그렇다면 수호 녀석뿐이지만 어린애더러 저승사자의 주머니를 털라고 시킬 수는 없잖아.
두 명 세고 나니까 끝이다. 뭐 이렇게 인간관계가 단순명료하냐.
이거 난감한데. 정작 먹물을 가져올 사람이 없어. 박선생이라도 불러볼까? 음…노인네에게 저승사자를 만나러 가라고 시켜도 되나? 그건 좀…
이래서야 방법을 알아도 길이 없잖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하면서 한나절을 보내버렸다.
오후가 되자 여전히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내게 수호 녀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되어 가요?”
“몰라, 임마.”
고민하느라 지치고 힘없어서 대답도 퉁명스럽게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바로 저 녀석이잖아.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대충 만든 부적으로 광개토 대왕을 불러들이는 거냐. 사기 아냐? 말이 돼?
“제가 할게요.”
전화기에서 녀석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뭘 해?”
“저승사자의 먹물이요. 제가 가져올게요.”
뭐?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방금 잠꼬대라도 했나? 너 혹시 독심술…진짜냐?
“은호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스승님께는 못 물어보니까 은호 아저씨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전화했더니 이미 아저씨한테도 말해줬다던데요.”
저 입 가벼운 여우요괴가!
“시끄러. 지금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니까…”
“급하다고 했잖아요. 언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고민하고 있을 틈이 어디 있어요.”
“수리점 사장은 나거든? 쫌 기다리시지, 고객님.”
“길목이 어딘지도 들었으니까 나 혼자서라도 갈 거예요.”
“뭐야?!”
백은호 이자식이!
“야! 잠깐.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복잡한 문제도 아니에요. 기다렸다가 취하면 먹물만 조금 가져오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단순해 보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어린애를 저승사자에게 보낼 수는 없잖아. 이건 정말 어른 체면도 체면이고 자칫 떨다가 실수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야.
“너 안 무섭냐?”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스스로 말해놓고도 어이없어 하는데 전화기 안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제가 저승사자한테 잡히면, 구하러 와줄 거죠?”
“하…”
이 백은호스러운 놈.
“그냥 잡히지 마라.”
“그럴 거거든요.”
아아, 중2가 무섭다더니. 어쩐지 기백에서 져버린 것 같다.
음식과 술을 유하에게 부탁하고 녀석에게는 학교 끝나는 대로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해가 건물들 위에 걸칠 즈음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달렸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학원은 어쩔 거야? 엄마한테 혼나지 않겠냐?”
저승사자를 만나러 갈 놈이 엄마라는 말에 긴장한 얼굴을 했다.
“아마…다음 주에 보강하면 되겠죠.”
유하가 준비해 놓은 음식 꾸러미를 내밀자 책가방을 비우더니 음식을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먹물을 넣을 작은 호리병이 하나.
“완전히 뻗을 때까지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 잠든 다음에도 좀 기다리고, 혹시 중간에 차사가 깨면 다 털고 그냥 이리 와버려. 그리고…”
“잔소리도 많네. 다녀올게요.”
내 말을 잘라버리고 녀석은 작업장을 뛰어나갔다.
“얌마! 뛰지 마!”
멀어지는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는데 들었는지 모르겠다.
녀석을 보내놓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작업 선반 앞에 앉아 출입문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도깨비들이 오락가락하며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들어가곤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따금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면 고장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바늘은 움직임이 없었다. 분명히 똑딱거리면서 초시계는 돌아가는 것 같은데….
유하가 한 번, 저녁이 준비되었다며 내려왔다가 내가 대답이 없자 조용히 올라갔다.
아홉시.
열시.
젠장,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일 끝나면 전화하라고 말해두는 건데. 지금 상황을 모르니 전화를 할 수도 없고.
열한시.
아 이건 좀…
집에서도 이 시각까지 안 들어오면 분명 걱정할 텐데.
백은호에게 연락해 볼까? 아니, 도깨비들에게 부탁해서 찾아달라고 할까? 그편이 빠르겠다. 찾는 것뿐이라면…
벌떡 일어나서 창고로 가려는데 마치 기다린 것처럼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완전 늦었잖아. 진짜 사람 걱정하게!
문소리를 듣고 돌아보자 출입문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백은호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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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3)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녀석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기대와 실망이 탁구공처럼 튀었다. 아니, 거기에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이쪽을 보고 있는 백은호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았다. 뭐야? 백은호.
묻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은호는 눈살을 한 번 찌푸리더니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도령이 둘이니 민폐도 두 배군요.”
뭐?
불평하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백은호의 뒤에서 수호 녀석이 따라 들어왔다.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호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안에서 찰랑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성공했구나!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 백은호는 어디서 만났고?”
반가움과 안심이 질문으로 터졌다.
“저승사자들이 주당이더라고요. 술을 여섯 병이나 비웠어요. 은호 아저씨는 제가 불렀어요. 버스도 끊어졌고 걸어오려면 두 시간은 걸리니까 태워 달랬거든요.”
오란다고 왔어? 저 백은호가? 대가로 뭘 준거야? 영혼이라도 팔았냐, 너?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꼬고 있는 여우 요괴를 힐끗 보자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 빨리 뭐라도 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 그렇지. 편지.
이 난리통이 모두 저 주제넘은 편지봉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우선 저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곧 자정입니다.”
의자 등받이에 느긋이 기대어 앉아 백은호는 남 일처럼 말했다. 아니, 남 일인 건 사실이구나.
“자정이 왜?”
“혼령은 자정에 오니까요.”
그 말에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은 고작 몇 분. 서둘러 붓과 종지 하나를 가져다 놓고 호리병 안의 먹물을 종지에 부었다. 겉보기에는 보통 먹물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까만 액체가 종지 밑바닥에 고였다. 붓끝을 대자 잿빛의 털이 먹물을 흡수하면서 까맣게 물든다.
“이걸로 이름을 고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
핑크빛 봉투를 쏘아보며 다짐처럼 묻자 백은호가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면 광개토 대왕은 바뀐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갈 겁니다.”
강재호란 이름에 획을 하나 더해서 장재호로 만들려던 내 손이 멈칫했다.
“바뀐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간다고?”
내 질문에 백은호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굳이 되물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중요하니까 그렇잖아! 그럼 장재호라고 고치면 장재호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광개토 대왕이 찾아갈 거라는 말이잖아. 그리고 네가 말한…불구라든가 우환이라든가 그런 일이 그 사람에게 생긴다는 말이고.”
“당연하잖습니까. 그 사람이 대신 우환을 당하니 이쪽은 무사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 걸 왜 이제야 말하는데! 그건 그냥 이쪽으로 떨어질 벼락을 다른 사람이 대신 맞게 하는 것뿐이잖아. 그 사람은 또 무슨 죄야!
백은호에게 쏘아붙이려던 나는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잠깐, 그럼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만들면 되는 거 아냐? 이를 테면 걍쟤호라든가, 캉재횰이라든가 그런 이름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훌륭한 의견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은호는 불쌍한 것을 보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령. 수신인을 찾을 수 없으면 편지는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발신자에게 돌아가지.
어…이 경우에 광개토대왕을 받아야 할 사람은 강재호 녀석이고 부적을 이용해 광개토대왕을 보낸 사람은 수호 녀석이니까 발신자는…
고개를 삐그덕 돌려서 발신자를 보자 녀석도 깨달았는지 낯빛이 굳는다.
이거 난감한데.
붓을 든 채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름을 바꾸면 바뀐 이름을 가진 사람이 대신 벌을 받는다. 엉터리 이름으로 만들면 수호 녀석에게 대왕이 찾아온다. 어느 쪽도 원하는 결말은 아니었다.
“아예 이름을 지워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면? 그러니까 광개토 대왕과 겨뤄볼만한 다른 혼령이나 무슨 신 같은 걸로…”
새로운 의견을 내봤지만
“그 먹물은 저승차사의 것입니다. 차사가 이름을 지우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만.”
이라는 오싹한 대답을 들었다.
아아…, 붓질 한 번으로 멀쩡한 인생을 끝장낼 뻔했어. 하지만 이래서야. 도무지 방법이 없잖아. 게다가 시간은…
시계를 힐끗 보자 바늘 두 개가 거의 겹쳐진 채로 초바늘이 천천히 2자 위를 지나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결국 대왕은 셋 중 하나를 찾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잖아. 강재호, 수호 녀석, 아니면 다른 이름의 누군가.
“다른 방법은 없어? 백은호!”
초바늘을 쳐다보며 내가 물었다. 애원하는 심정이었지만 여우 요괴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냥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애초에 부적을 쓰면서 그 효용을 믿었다면 믿음만큼 정성을 다함이 옳습니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낙서를 하게 된 것은 사용한 사람의 실책입니다. 잘못의 대가는 스스로 받아야 할 터.”
그렇더라도 광개토대왕은 너무하잖아.
그런데 막상 백은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고, 나로서도 죄 없는 다른 사람이나 이미 부적이 손에서 떠난 수호 녀석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초바늘이 10자 위를 지나갔다.
아무래도 이번 수리는 실패한 것 같다. 붓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작업 선반에 붓을 내려놓는 순간 잽싼 손길이 그것을 낚아챘다. 수호 녀석이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편지 봉투 위에서 붓을 움직였다.
“야!”
붓을 뺏었을 때는 늦었다. 강재호란 이름 위에 이미 두 개의 획이 더해진 후였다. 컁재호.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분명…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졌다. 살갗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작업장 내부온도를 단숨에 5도는 내려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단순한 찬 공기가 아니다.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이 음령한 기운은 죽은 자의 혼령이 갖고 있는 특유의 한기였다.
한기와 함께 전등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귀신 나올 분위기라고 생각하는데 불이 팍 꺼진다. 작업장은 어두운 가운데, 백은호의 손안에서 푸르게 빛나는 구슬의 미명만으로 겨우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출입문 밖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한 구두굽이 부딪치는 것도 아닌, 가죽신이 흙을 밟는 것 같은 소리인데도 벽과 문을 뚫고 여기까지 들려온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자 마치 그 소리에 밀려난 것처럼 출입문이 끼익 열렸다. 가로등조차 꺼졌는지 바깥 역시 어두운 중에 푸르스름하니 별빛이 쏟아졌다. 그것을 까맣게 가로막으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저벅 저벅
그리고 거침없는 걸음으로 들어온다. 걷는 서슬에 부대끼는 옷자락 위에서 잘그락 잘그락 쇳소리가 났다. 단 한 사람의 혼령이 홀로 오는 것뿐인데, 작업장 안의 두 사람과 한 요괴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린 것처럼 주춤 주춤 뒷걸음하고 말았다. 저벅 저벅 울리던 발소리가 문득 멈췄다.
다가와 멈춰 서자 그제야 나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젊은 모습이었다. 아직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훤칠한 몸에 아름다운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의 가죽보호대 위에는 잘 길들여 놓은 매가 한 마리 앉아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단정히 올린 머리에 쓴 흰 비단모자로부터, 붉은 빛이 도는 화려한 대수포며 금장식이 늘어진 허리의 띠와 풍성한 바지, 섬세한 가죽신 같은 차림은 마치 사극에서 튀어나온 배우 같았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를 마주보고 있다면 촬영장을 잠깐 벗어난 배우라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고아하고도 유쾌한 기품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눈이나 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있었다.
광개토왕, 담덕이란 이름을 가진 고구려의 대왕이 눈앞에 있었다.
“누가 강재호더냐.”
우리를 번갈아보며 그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말없는 우리를 보며 그가 어깨에 앉은 매를 쓰다듬었다.
“내 매가 낮 동안 헤매었다가 밤에야 이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여기에 강재호가 없다면 내 매는 누구를 찾아낸 것이냐.”
그의 시선이 한 번 더, 이번에는 아까보다 날카롭게 우리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은 수호 녀석이 흠칫 어깨를 움츠리고 백은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처음 보는 약한 모습이었다. 꼬리가 있었다면 말아 넣을 것 같았다.
“요괴가 사람과 함께 있느냐. 괴이하도다.”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버들잎처럼 유려하게 휘어진 눈매 안에서 검은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빛난다. 백은호조차 두려워하고 있는데도 어쩐지 나는 이 남자가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가…
“내 아는 이의 눈을 닮았건만 모르는 얼굴이로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물었다.
“해명.”
짧게 대답하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둥글게 휘어졌다. 웃는 낯이 되어 그가 말했다.
“이만하면 넋이 되어 이승을 헤맬만하지 않은가. 오랜 벗을 만났구나. 도령이여, 어째서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 함께 말을 달리던 기억이 선연하나 도령은 어린 모습과 함께 내 기억도 버렸는가?”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가 낯익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어린 모습과 함께 기억도 사라졌는지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과거가 있다고 해도 이미 천육백 년도 전의 일이다. 전생이면 모를까.
“그게…사정이 좀…”
그렇다고 반가워하는데 딱 잘라 기억 안 난다고 하기도 미안하고,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운 얼굴을 보았으니 족하다. 한 번 보았으면 두 번 볼 날도 오겠지.”
그의 시선이 나를 떠나 작업 선반 위로 옮겨갔다. 봤다. 거기에 놓인 핑크색 봉투에 눈길이 닿자 긴장한 수호 녀석의 어깨가 굳었다.
“내 매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이 물건의 임자가 누구인가.”
“그건…”
“저에요.”
해명 도령의 인맥으로 어떻게 넘어가보려고 내가 입을 열었지만 수호 녀석이 말을 잘랐다. 너 좀 과하게 정직한 거 아니냐? 사람이 말이야, 유도리가 있어야지. 응?
“네가 강재호냐?”
소년을 바라보며 물을 때의 그는 한순간 달라졌다. 목소리에, 눈짓에, 젊은 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짓누르는 듯한 위엄이 서리서리 맺혀 있다. 과연 광개토대왕이라는 걸까.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수호 녀석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아뇨. 부적을 만든 사람이 저니까…”
간신히 나온 대답에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소년과 편지봉투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의 마음을 방술로 움직이려 하다니 어리석은지고. 그것은 길을 아는 자의 행보가 아닐 터다.”
엄한 목소리에 다소 창백해졌던 녀석의 얼굴이 이번에는 붉어졌다.
“어린애잖아. 예전의 실수고. 이제 와서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녀석을 편들어 내가 끼어들었다. 아, 그런데 나 대왕님께 반말해도 되는 거야? 혼령이 된 대왕 담덕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눈가에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그대는 항시 그렇군. 모습이 변했어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가. 그러나 약한 이에게 관대함을 그대에게 배운 나이니, 긴 걸음은 술 한 잔으로 대신하고 가겠네.”
술 한 잔으로 퉁치겠다는 거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내가 전화하기도 전에 3층에서 유하가 작은 술상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 여자는 작업장에 도청 장치를 심어놨는지 술상 나올 일만 생기면 귀신 같이 온다니까.
담덕은 자신의 말대로 술 한 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는 올 때처럼 저벅 저벅 걸어서 작업장을 나섰다. 문이 열리자 어두운 바깥에 희끄무레하니 사람의 모양을 한 것들이 모여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모두 말처럼 보이는 것을 타고 있는데 어두워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희미한 모습으로 흔들흔들 서 있는 그들과 함께 그는 곧 어둠을 달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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