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촉대(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수호 녀석이 ‘수리비’를 지불하려고 찾아온 것은 광개토대왕을 만나고 사흘 뒤였다. 원래도 마른 녀석이 사흘 사이에 핼쑥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지난 사흘 동안 고열을 동반한 몸살에 시달렸단다. 대왕님 술만 한 잔 하고 가겠다더니 안주가 필요하셨나 보다.
“야, 그걸로 끝난 게 어디냐.”
위로 삼아 말하자 녀석이 “그렇죠.”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책가방에서 투명한 L자 홀더화일을 꺼내 놓았다. 안에는 뭔가 빽빽이 적힌 A4용지가 다섯 장 있었다.
“수리비요. 스승님이 그러시는데 옛날에는 이야기가 더 많았대요. 조선시대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고 요새는 해명도령에 대해 이만큼 알고 있는 사람도 우리나라에는 몇 안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정도로 조사해 왔으면 대단한 거라고 어필하는 거냐? 내가 적힌 것을 읽는 동안 녀석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자신의 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작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명도령에 대한 설명은 녀석을 처음 만난 날 들은 것과 똑같았다. 열 살 가량으로 보이는 동자로 푸른 옷을 입으며 그 모습은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다. 성정이 온화하여 어려운 사람을 돕고,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며 신선과 사람과 요괴를 두루 사귄다…라.
첨가된 것이 있다면 거구귀라 불리는 커다란 귀신의 입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정도?
“거구귀는 또 뭐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수호 녀석이 눈을 깜박였다.
“그거 아저씨가 기르는 거잖아요. 아니었어요?”
“내가 기르는 건 한량 같은 도깨비들하고 주인도 몰라보는 강아지 한 마리밖에 없거든.”
내 대꾸에 녀석은 실망한 얼굴로 설명했다.
“클 거(巨)에 입 구(口)를 써요. 입이 커다란 괴물이래요. 윗입술은 하늘에 닿고 아랫입술은 땅에 닿을 정도라나. 별로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신숙주랑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스승님께 여쭤보니까 그건 신빙성이 없다고 해서 안 적었어요. 그런데 역시 그냥 전설이었던 건가….”
뭘 길러도 입 안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괴물을 기르는 거냐. 취향 이상한 도령이네.
그 뒤로는 해명도령이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열되어 있었다.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시간은 수천 년을 가로질렀고 사람으로부터 요괴나 동물 신선까지 대상도 가리지 않았다.
설화라는 것은 전해지면서 과장과 각색이 반드시 생기는 법이니까 하늘땅에 입술이 닿는 괴물 이야기나 수천 년을 동자의 모습이었다거나 하는 걸 꼭 믿을 필요는 없다. 그렇더라도…
- 오랜 벗을 만났구나. 도령이여, 어째서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가? 나는 아직 함께 말을 달리던 기억이 선연하나 도령은 어린 모습과 함께 내 기억도 버렸는가?
그런 말을 천육백 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서 들었다는 거다. 수호 녀석의 조사를 안 믿는다고 해도 혼령에게 직접 들은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해명도령이라는 놈은. 그것이 나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이 내 이야기라는 걸 어떻게 납득하라는 거야. 이름 빼고는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페이지를 넘기자 전설 같은 내용이 끝나고 최근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미 기억을 해낸 백은호에 대한 부분과 환 부부의 이야기다.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던 내용들이었다.
백은호가 길상과를 노려 환과 다투었던 것도, 싸움 끝에 크게 다친 것도, 그때 내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 것도 짐작한 바다. 다만 백은호에 관해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환이 섭을 죽이려 하였으나 해명도령이 이 여우는 오래 전부터 아는 자라 하여 생각을 고쳤다 라고.
돕기 전부터 백은호와 잘 알던 사이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왜 그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 걸까. 마치 선택적으로,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기억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사료와 구전 설화 가운데 해명도령이 아닐까 짐작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았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이름만 잔뜩이었다. 물론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수호 녀석이 가고 난 뒤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거기 나온 이야기나 사람들에 관해 검색해 보았다. 잘 알려진 설화 외에는 딱히 나오는 것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책의 제목들을 적어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책과 친한 체질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도서관에 가봐야 할 모양이다.
혹시 모르잖아. 거기에서 독서를 좋아하는 귀신이라든가 옛날이야기를 많이 아는 요괴라든가 그런 걸 만날지도.
그렇게 학구적인 고민을 하는데 유하가 손님이 왔다며 나를 불러냈다. 손님 받을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터덜터덜 내려가자 젊은 남녀 한 쌍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그들이 손님이라고 생각했다가 여자의 차림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남자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여자는 삼국시대에서나 입었을 것 같은 긴 상의와 치마 차림에 머리는 오른편에서 타래모양으로 묶어놓았다. 좀 더 가까이 가자 그녀로부터 풍겨오는 기운에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는 새침한 얼굴로 작업장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눈 꼬리를 치켜뜨며 흘겨보았다. 성격 별로 안 좋아 보인다.
내가 여자를 빤히 관찰하는 동안 진짜 손님인 남자는 나와 자신의 옆을 불안한 얼굴로 번갈아 보았다. 본의 아니게 손님을 겁먹게 만들었지만 뭐 장사에는 도움이 될지도.
남자는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 보자기에 싸서 가져온 물건을 작업 선반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보자기를 풀자 50cm 정도 길이의 촛대 두 개와 반쯤 사용한 양초가 드러났다.
초를 꽂기 위한 철심 외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촛대였다. 옻칠을 해서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길쭉한 몸체에 대나무 마디 같은 매듭이 여러 개 있을 뿐인 수수한 모양이다. 두 개가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집안에서 물려오는 와룡촉대입니다. 고조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가져오셨다는데 그 후로 우리 집안에서 결혼식과 제례에 사용하고 있지요.”
이름은 거창하니 와룡촉대라고 해도, 와룡 닮은 건 뭐 보이지도 않는 걸. 저 몸체에 고리처럼 만들어진 매듭을 와룡이라고 우기는 건가.
“오래 되어서 낡았습니다만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혼례의 초례상에 이 촛대를 써왔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유서 깊은 물건이지요. 저 역시 내년 봄에 결혼식이라 이 촛대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게…묘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묘한 일?
남자는 좀 머뭇거리더니 보자기에 함께 싸여 있던 양초를 촛대에 꽂고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양초에 노란색 불꽃이 옮겨 붙은 순간
훅 -
옆에 있던 여자가 입을 모으더니 바람을 불어 불을 꺼버렸다. 남자가 불이 꺼지는 것에 움찔 놀란다.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무서운 모양이었다.
“이렇게…불이 저절로 꺼집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분 것처럼요.”
남자는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여자의 모습이 안 보이는 그로서는 촛불이 혼자서 꺼졌다고 생각할 테니까.
“내년 봄이 결혼식인데, 이 촛대를 사용 못하면 큰일입니다. 안 그래도 아내 될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이 많은 터라 별 것도 아닌 일에 트집잡히기 쉬운데 이런 거라면…”
응. 안 봐도 뻔하지. 본인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사주나 관상 갖고도 반대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는데 이런 괴변이면.
“여기 오면 해결될 거라고 해서요. 부탁드립니다.”
여기 오면 해결될 거라고 도대체 누가 알려주는 거야. 뭐 덕분에 장사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남자에게는 걱정 마시라고 말해놓고 내보냈다. 손님보다는 불청객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였다.
남자가 나가자 옛스러운 복장의 여자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 번 힐끗할 뿐 따라가지 않고 서서 나를 노려본다. 역시 이 여자 촛대에 붙어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혼령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면서 본체인 나무를 두고 물건에 붙어 있다니. 목신이 말이다.
그 풍기는 기운은 분명 목신, 나무에 붙은 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집 앞의 목신들보다도 한층 강한 기운이 감도는 걸 보면 꽤 오래 산 나무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목신은 나무에 붙어있으니 목신인 거지. 물론…이 촛대도 나무는 나무인데.
혹시 심심풀이 족자 안의 목신처럼 어떤 도사의 술법으로 촛대에 갇히기라도 한 건가?
“혹시 무슨 불만…”
불만이나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입을 열자마자 여자는 콧방귀를 뀌며 휙 사라져버렸다.
뭐야.
어디로 간 것은 아니다. 목신이 풍기는 특유의 기운이 촛대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촛대 안으로 숨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대화하기 싫다는 거겠지. 성질머리 참.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말을 하지 않으면 뭐가 필요한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어떻게 아냐고. 불러내 볼까 싶지만 목신도 일단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 관대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족자의 경우를 생각해서 촛대는 유하에게 부탁해 햇빛과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그리고 물을 담은 대접도 놓아둔 다음 나는 하루를 기다렸다.
다음날 오후 해가 질 무렵까지 있다가 유하가 도로 가져온 촛대를 작업 선반에 놓고 잠시 기다렸다. 하루가 지났으니 대화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했으나, 한 쌍의 촛대는 아무 변화도 없이 평범한 촛대인척 조용했다.
하루로는 부족한 거냐?
좋아. 나는 온화하고 관대하니까 하루 정도는 더 기다려주지. 촛대를 다시 유하에게 부탁한 다음 또 하루 동안 기다렸다. 다시 해질 무렵이 되자 유하가 촛대를 작업장에 가져다 놓았고 나는 조명을 어둡게 한 다음 약간의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대체로 인간이고 요괴고 신이고 먹을 것에는 약하더라고.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촛대는 조용하다. 아무래도 기다리는 것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참으며 대금 도깨비를 불렀다. 심심풀이 족자도 연주를 좋아했으니 이 목신 역시 통하지 않을까?
어두운 가운데 춘야연 한 대목을 느긋이 연주하자 소리를 듣고 도깨비들이 하나둘 나오는데 연주가 끝나가도록 촛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한 곡 더. 한 곡 더.”라고 외치는 도깨비들에게 둘러싸여 몇 번을 더 연주했지만 작업장에 도깨비 놀이터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 목신 참 까다롭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오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 이제 온화고 관대고 필요 없다. 나는 성냥을 들고 와서 촛대에 꽂은 양초 심지에 불을 붙였다. 초에 불을 붙이면 불을 꺼버린다고 했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거다.
유황냄새를 풍기며 타오른 불꽃이 양초 심지에 옮겨 붙자, 과연 펄럭 옷자락소리와 함께 여자가 도로 나타났다. 나타나더니 훅 하고 바람을 불어 촛불을 꺼버린다.
“얼굴보기 참 힘드네. 나는 해명…”
소개를 하려는데, 이 여자가 다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야….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동방예의지국에서 목신이 인사를 안 받아? 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그거?
불만과 짜증이 똬리를 틀며 기어 올라오는 것을 꾸욱 눌러 참았다.
참자. 참자. 나는 온화하고 관대한 해명도령이다. 저 못 배워먹은 목신이 철없는 짓을 했다고 같이 화내면 지는 거다. 좋아. 한 번 더.
성냥을 그어 양초에 한 번 더 불을 붙였다. 양초 심지에서 불꽃이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나타나 다시 바람을 훅 불어 꺼버렸다.
“잠깐 가지 말고 술이나 한 잔…”
말을 시작하기 무섭게 그녀는 다시 사라졌다. 이것 봐라.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술이 싫으면 차나…”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떡이나 부침개는…?”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영화는 어떠…”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목신이 나타나 불을 끈다.
“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목신이 사라진다. 다시 불을 붙인다. 이런 식으로 성냥개비 숫자만큼 그녀를 불러냈지만 성냥갑이 텅 빌 때까지 목신은 불만 끄고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설화 속 해명도령의 성격은 잘못 구전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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