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65화 (65/218)

와룡촉대(2)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성냥개비 숫자만큼 울화가 쌓였다. 좋아. 해명도령이고 뭐고 이렇게 되면 자비는 없다. 꽁꽁 묶어놓고서라도 물어볼 테다.

유하에게 가서 맺은 사람만 풀 수 있는 붉은 실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실은 당신에게 준 한 타래가 전부였어요.”

엇? 없는 거야? 그야 흔해빠진 실은 아니겠지만….

“무엇에 필요한 거죠?”

실망한 내 얼굴을 봤는지 그녀가 책을 도로 펼치다 말고 물었다.

“쥐새끼같이 잽싸게 도망치는 목신이 하나 있어서 그 녀석을 잡는데 필요해.”

수십 번을 나타났다 사라진 목신을 생각하자 새삼 목소리에 열기가 스며들었다. 유하는 내심을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을 하고 있더니 이윽고 일어났다. 책상 옆으로 가서 반짇고리를 올려놓고 뒤적인다. 그녀는 거기에서 짙은 쪽빛 실타래를 하나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뭐야?”

겉보기에는 붉은 실과 같았다. 수실 정도의 굵기에 파란 물이 들어있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매듭을 지으면 누구도 풀 수 없는 실이에요.”

“뭐? 그런 걸로 묶으면 다시는 못 푸는 거잖아.”

목신을 평생 묶어놓을 생각은 아닌데요.

“그야 어떤 매듭인가에 따라 다르겠지요.”

유하는 그렇게 말하고 제자리에 돌아가 읽던 책을 펼쳤다.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떤 매듭인가에 따라…?

잠시 고민했지만 금세 알아차렸다. 어차피 실로 내가 만들려고 했던 매듭도 바로 그거였다. 이른바 에반스 매듭. 교살 매듭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갖고 있는 그것이다. 왜 교수형 당할 때 목에 거는 그 밧줄 묶는 매듭법 말이다.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휘두르는 올가미도 같은 종류다.

그거라면 매듭의 고리를 크게 만들어 놨다가 걸어서 당기면 크기에 맞춰 조여지니까 단숨에 목신을 낚아챌 수 있다는 말이다. 뭐, 실이 가늘고 가벼우니 카우보이처럼 휘둘러서 던질 수는 없겠지만.

유하가 준 푸른 실로 매듭을 지어놓고, 그 고리를 커다랗게 늘려놓은 다음 다시 초에 불을 켰다. 한 손에는 불이 붙은 성냥, 다른 손에는 실로 만든 올가미를 들었다. 재빨라야 했다. 불이 붙는 순간 나타나서 꺼버리는 여자니까.

과연 심지에 불이 붙자 다시 목신이 나타났다. 촛불을 향해 훅 하고 바람을 부는 순간 성냥을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벌려 잡은 고리를 목신에게 확 씌웠다. 내 행동에 놀랐는지 이쪽을 바라볼 때 실을 당겨 고리를 바짝 조였다.

걸렸다.

음…급하게 씌우느라 목에 딱 걸려서 좀 미안하게 되었다만. 어쨌든 목신은 사라지지 못하고 실에 목이 걸린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아, 도끼눈이라는 건 저런 거로구나. 서슬이 퍼래서 이쪽을 쏘아 보는 게 여간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미안한데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해서 말이다. 풀거나 자르려고 해도 안 될 거야.”

목신에게 내 손목을 들어서 보였다. 푸른 실의 반대편 끝이 내 손목에 똑같은 매듭으로 걸려 있었다. 매듭을 지으면 누구도 풀 수 없는 실이지만, 이 에반스 매듭은 굳이 풀 필요가 없다. 고리의 크기를 늘렸다 줄이기만 하면 될 뿐이니 말이다.

목신이 매듭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실을 팽팽하게 당기며 내가 말을 이었다.

“너 목신이지? 그것도 꽤 오래 된 나무에 깃든 목신 같은데 어째서 나무가 아니라 촛대에 붙어있는 거야? 그리고 초에 불을 붙이면 꺼버리는 이유는 뭐고? 말해 봐. 이유가 있다면 들어줄 테니까.”

그러나 말은커녕 내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목신은 실을 당기고 이로 물어뜯고 목에 걸린 고리를 넓히려고 손가락을 넣고 당기느라 바빴다.

“안 된다고 했잖아.”

고리가 넓어지지 않도록 실을 바짝 당겼다. 당기면 당기는 것보다 가까이 다가와서 재빨리 고리를 넓히려고 들었기 때문에 나도 계속 실을 당겨 결국에는 실을 둘둘 감은 손이 목신의 목 바로 앞까지 바짝 붙고 말았다.

아무래도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자 목신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다니까. 그리고 짜증이 나는 건 이쪽도 만만치 않다고. 봐라, 이 수북이 쌓인 성냥 시체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내 말에 목신이 고개를 홱 돌려 딴 곳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개처럼 목을 묶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겠다 하는 자가 있구나.”

드디어 목신이 말했다. 독 오른 목소리였다. 딴 데를 보며 하는 말이지만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하다.

“줄이 목에 묶인 건 미안한데, 고의는 아니야.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 해서 서두르다 보니…. 그러니까 몇 십 번이나 말을 걸 때 좀 들어줬으면 좋잖아.”

“호오라. 참으로 다정한 이가 아닌가. 목을 조일 지경으로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하니 이와 같은 관심을 언제 또 받아볼꼬.”

그러니까 진짜 미안한데요, 이거 풀어주면 또 사라질 거잖아.

나를 외면하며 말하고 있는 지금도 목신은 조금이라도 고리에 여유를 만들려고 실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몸을 당기고 있었다. 그래봐야 매듭은 더욱 목을 파고들 뿐이다. 어…좀 심하게 파고들었나. 파란색 실의 한 쪽이 목의 살 안에 파묻혀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설마 다치지는 않겠지? 그래도 목신인데. 하지만 이 실도 보통 실은 아니잖아. 저번의 붉은 실과 비슷하다면 스테인리스 정도는 우스운 강도일 테고. 게다가 목신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매듭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고 있는 목신을, 나는 망설이며 바라보았다. 단단히 화가 나 있어서 대화는 무리겠지만 그보다 대화를 위한 무력진압이라는 것도 역시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에 감았던 실을 풀었다. 목신이 벨 것처럼 날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미안해.”

고리를 당겨 넓혀서 목에 걸렸던 것을 빼내자 목신이 제 목을 쓰다듬으며 나로부터 멀어졌다. 목에는 실에 묶였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니 더 미안해진다. 목신은 일종의 정령이라 실로 조이는 것 같은 물리적인 피해에 영향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그거…다친 거냐?”

자국이 남은 목을 가리키며 묻자 목신은 고개를 홱 돌리고 외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게 확실히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행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미안하다. 다치게 될 줄은 몰랐어.”

사과했으나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난 옆모습을 보이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입 다물고 화내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레 도깨비처럼 주먹질을 하면 차라리 좋겠는데.

“저기…”

피부가 간질간질할 정도로 불편한 침묵을 못 견디고 다시 입을 뗐지만 할 말은 없었다. 입만 열어놓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목신이 힐끗 내 쪽을 보더니 갑자기 휙휙 걸어서 창고 쪽으로 갔다.

창고의 도깨비들 중 몇이 그녀를 향해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그 가운데 하나인 물레도깨비를 보자 목신이 한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귓가에 무어라 속삭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물레 도깨비가 눈을 깜박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물레 도깨비가 목신에게 귓속말을 했다.

두 여자는 주거니 받거니 귓속말로 수다를 떨었다. 잠시 후 물레 도깨비가 어쩐지 샐쭉한 얼굴로 사뿐사뿐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이름은 행희라 하며 뭍 것과 구분된 몸으로서 세 가지를 가리고 있다 하오. 그 중 하나가 사내요, 그 중 둘이 짝 있는 자요, 그 중 셋이 세 쌍 이상의 다리를 가진 자이니 도령은 그 중 두 가지에 해당하여 행희와 마주 대할 수 없다고 전하라 하였소.”

예? 그 무슨 말씀이신지…?

목신의 이름이 행희이고 뭔가 이유가 있어서 상대를 가린다는 데까지는 알아들었다. 가리는 대상이 되는 조건도 알아들었고. 그런데 왜 내가 그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는 거야? 남자라는 것 말고 뭐?

어차피 남자라 소용없지만 짝도 없고 다리도 한 쌍인 나란 말이다. 세 쌍의 다리라는 건 곤충이나 해당되는 이야기잖아. 설마 나더러 벌레라는 말…? 아니, 지금은 그보다…

“마주 대할 수 없다는 건 그냥 마주보고 있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야?”

그래서 아까 나를 똑바로 보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리고 있었나?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이오.”

물레 도깨비가 일러주고는 창고로 돌아갔다. 그렇다는 건, 아예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남자라서 말도 못 붙이게 하다니. 심지어 나는 벌레 취급까지 받고. 물론 아까 목을 묶은 건 잘못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목신과 대화하는 것은 유하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다. 그녀라면 여자이고 곤충도 아니고, 종일 이 건물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는 걸 보니 남자친구도 없을 것 같고.

그런 생각으로 유하에게 목신과 대화를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뜻밖에 목신에게 다녀온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를 보더니 창고 안으로 도망가 버리는 걸요.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없어 보여요.”

또 왜? 무슨 조건이 해당되는 거야?

“너… 원래 남자이거나, 몸 어딘가에 다리가 두 쌍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유하에게 묻자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농담이야. 화내지 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는 조건은 하나뿐이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선 그녀에게, 한 번도 물을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계단을 디딘 발이 멈칫 섰다. 뒤늦게 고용인에게 너무 사적인 질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나쁜 건지도 모르겠다.

“있어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있구나. 하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말이 안 되나. 성격 빼고는 흠잡을 데가 없잖아. 뭐…딱히 성격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몰랐는데. 데이트 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남자친구가 화내지 않아?”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람. 내 입이 좀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아뇨. 어차피 멀리 있어서 일 년에 며칠밖에 못 보니까요.”

바보 같은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일 년에 며칠이라니 그건 별로 연애라고 할 수 없겠는데. 그런 장거리 연애라도 괜찮은 건가. 게다가 여자 쪽의 직업은 가사도우미 겸 비서로 거의 24시간 독신 남성 고용주와 함께인데.

“너 같은 여자를 혼자 두고 어떤 남자인지 굉장히 용감하네. 바보거나.”

“바보예요.”

좀 삐친 것 같은 대답을 하고 유하는 또박또박 계단을 올라갔다. 어쩌면 장거리 연애에 지쳐서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무심코 생각했다.

아…역시 설화 속의 해명도령과 나는 분명 다른 것 같다. 이쪽은 아무래도 쪼잔하고 속 좁은 주제에 20대 성인 남성인걸. 알 게 뭐야. 남의 연애 같은 거. 신경 안 써. 신경 안 써.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목신과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심지어 부탁할 사람도 없어. 내가 아는 여자 사람이란 유하 빼면 길상과인 규희와 단 두 번 만난 적 있는 박선생의 부인 정도인데 두 사람 모두 기혼자라 무리. 심지어 요괴인 노앵설조차 커플이야. 응? 잠깐.

목신의 조건에 사람이어야 한다는 건 없었잖아. 그리고 좀 전에 확실히 물레 도깨비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고. 그렇다면 물레 도깨비에게 부탁하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창고에 가서 물레도깨비에게 부탁을 했으나 샐쭉한 표정으로

“내가 왜 김서방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삐딱한 거야. 그새 행희라는 목신과 친해져서 나를 싫어하는 거 옮았나.

메밀묵과 술로 회유하려고 했지만 “오늘은 배가 부르네.”라며 휙 돌아서고, 대금 연주로 꼬드겨 보려고 했지만 “오늘은 조용히 잠이나 잤으면 좋겠네.”라면 휙 돌아눕는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다른 여자 도깨비에게 부탁해 볼까 하고 눈치를 살폈으나 내 시선이 닿자마자 모두 감쪽같이 물건으로 돌아가 시치미를 뗐다. 다들 너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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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빵 외전 - 화련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당신은 절대로, 사람이 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말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폐는 웃음소리 대신 피거품만 끌어올렸다.

<화련(花戀)>

“양화련이에요.”

물감 자국이 남은 손을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다른 손에서는 피우고 있던 담배가 하얀 연기를 실처럼 뽑아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처음 보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여자라. 요즘 유행한다는 모던 걸인가. 목덜미에 닿을락말락하게 자른 단발머리며 도전적인 눈빛은 확실히 평범한 양가의 규수가 아니었다.

열여덟에 동경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스물셋에는 파리 유학, 스물여섯이 된 지금은 고국에 돌아와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한다. 평안도 일대에 손꼽히는 갑부 집안 고명딸이라는 것도,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도 시선을 끄는 또렷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것도 이 여인의 당당함을 뒷받침하고 있겠지. 섭은 그녀의 내민 손을 가볍게 쥐었다.

“이섭이라고 합니다.”

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감기듯 달라붙었다. 공단에 휘감긴 것 같구나. 부드럽고, 따듯하다. 그는 아쉽게 손을 놓았다.

“더 나이 드신 분일 줄 알았어요.”

섭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박선생님이 친구라고 소개하셔서 비슷한 연배의 선비 같은 분일 거라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죠. 문인화가 빼어나시다구요? 박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언제 꼭 화실로 구경 가야겠어요.”

“과분한 칭찬을 들었군요. 화실이랄 것도 없이 집에서 소일거리로 붓을 잡는 게 고작입니다. 그 친구나 양선생처럼 정식으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닌 장사꾼에 불과하니까요.”

“화련이라고 부르세요. 저도 이섭씨라고 불러도 되죠?”

질문이지만 대답을 듣지도 않고 휙 돌아선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가서 작품이 진열된 방을 안내했다. 벽에 세워진 그림들보다 앞에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섭의 시선을 끌었다. 까만 단발머리 아래로 드러난 길고 흰 목덜미나, 개더스커트의 넓은 단이 나풀거릴 때마다 반쯤 드러나곤 하는 종아리선, 자연스레 흔들리는 흰 팔, 가는 발목에 감긴 스트렙, 반짝거리는 구두의 날씬한 굽 같은.

개화라든가 하면서 서양옷을 입은 남자도 여자도 늘어가고 단발이 놀라운 일도 아니게 된 지금에, 이런 차림의 여인이라면 경성 거리 어디에서고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흔할 뿐이지 보기 좋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잘 어울렸다.

“작업 중인 건 이게 전부예요. 개인전 때문에 다 내놔서 완성된 건 아직 하나뿐이고요.”

완성된 정물화 한 점과 스케치만 된 정물화 셋, 풍경화 한 점과 반쯤 그린 인물화 하나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다시 보니 인물화는 자화상이었다. 첫눈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어두운 조명과 감록색의 비현실적인 색조로 통일된 화면이 사뭇 음침해서다.

“그건 파는 거 아니에요.”

화련이 그림과 섭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림보다 모델을 직접 보는 편이 낫지 않아요?”

붉은 입술 사이로 흰 연기를 흘려보내며 그녀가 말했다. 연기 너머로 어른거리는 화련을  섭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그는 짧은 머리에 흰 셔츠를 어색하게 입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에게도 서양옷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나를 안 보는군요?”

화련이 말했다. 날카로운 여자다.

“거리가 너무 먼가요?”

그녀가 한 발 다가왔다. 서로의 몸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였다. 화장기 없이 투명한 피부 위로 솜털이 부스스 올라와 있는 것까지 보였다. 유난히 붉은 입술도, 조금 벌려진 입술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치아도.

“이제 날 보네요.”

화련이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는 신여성이었고 남자가 키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물감 투성이 바닥에서 몇 번이고 사랑을 나누고 매일같이 만나 시간을 보내게 된 후에도 그녀의 애정은 쉽게 커지지 않았다. 애정 없는 여인에게 여우 구슬로 정기를 가져가는 것은 힘들었다. 힘을 얻을 수 없는 여자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섭은 그녀를 계속 만났고 애정은 적으면서 화련 역시 그를 원했다.

섭은 호텔의 짐을 그녀의 집으로 옮기고 경성에 있는 동안 함께 지냈다. 그가 광주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화련이 옷가지와 그림 도구를 챙겨서 내려왔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화련의 말에 무작정 떠나 동해안을 헤매기도 하고 섭이 즐겨가는 산사에서 며칠씩 묵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함께 먹고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났다. 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도 화련의 애정은 변함없이 그 자리였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12월. 창밖으로 “천황의 군대가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신문팔이 청년의 외침을 들었을 때, 그들은 화련의 화실에서 언 손가락을 스토브에 쬐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미완성인 채로 세워진 화련의 자화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호외요 - 천황의 군대가 진주만 공습! 미해군 대격파! 호외요 -

그들의 이야기는 잠시 멈추었고 화련은 “바보같이 사자를 깨워버렸네.”하고 중얼거렸다.

여우에게 인간들끼리의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건 중국을 휩쓸었건 조선을 집어삼켰건, 그래서 땅의 권리가 뉘 손에 있다고 주장하건 말건 그 땅에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고 바람이 불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다. 가졌다고 좋아하라지. 여우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련은 여우가 아니었다.

그녀가 ‘인간끼리의 싸움’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섭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모르는 자의 냄새를 묻혀 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외출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돌아왔을 때는 피곤해 했다. 남자가 생겼을까.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정열적인 연인이었고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그에게 집중했다.

낯선 자들이 집 주변에 서성거리기 시작한 것이 다음 차례였다. 화련은 점점 초조해 했고 예민해졌다. 그림에 소홀하고 감정의 진폭도 커졌다. 섭에게 신경질적으로 구는가 하면 갑자기 약해져서 매달리고는 했다. 낯선 자들은 헌병대 소속이었다. 화련이 묻혀 오는 냄새 중에는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르는 서양인의 것도 있었다. 그녀가 독립군을 위해 일하건 미국을 위해 일하건 여우인 섭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평온한 삶에 상처를 낼 수도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그만 두라”고 말했을 때 화련은 낯선 것을 보는 눈으로 섭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난 여우거든. 냄새를 잘 맡아. 어째서 그만두라는 거죠? 당신은 조선 사람이 아닌가요? 말했잖아. 나는 여우라고.

그를 사랑했던 여자들처럼, 그녀도 그가 여우라는 것을 납득했다. 애정의 정도는 훨씬 덜했지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처음 봤을 때 알았어요. 당신이 나를 봤을 때, 내가 아니라 그 너머의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건 언제나 당신 자신뿐이라는 걸.”

그것을 알고도 여우를 사랑한 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여인들도 있었다. 섭은 광주로 돌아갔고 화련은 일주일 뒤에 그의 짐을 정리해서 보내줬다. 그녀가 보낸 짐은 몇 달간 건드리지 않은 채로 행랑방에 내버려져 있다가 날씨가 더워져서야 여름옷이 필요한 섭의 손에 풀렸다.

큰 상자 안에 옷가지가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다. 그가 쓰던 붓 벼루 같은 문방구며 신발, 모자 따위는 종이로 쌓여 정리되었다. 필요한 여름옷만 꺼내고 나가려던 섭은 익숙한 냄새를 맡고 움칫 멈추었다. 물감 냄새다. 공기 속에 떠도는 냄새가 묻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덜 굳은 물감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냄새다. 섭은 상자속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고 가장 밑바닥에서 신문지로 포장한 캔버스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그가 잘 아는 그림이 있었다. 아니 잘 알았던 그림이.

감록색으로 통일된 화면 위에 얼룩이 점점이 생겨나 있었다. 얼룩 안의 색채는 따뜻하고도 활기차다. 그 얼룩의 정점은 흰 반사광, 거기서부터 퍼진 미광이 화면을 밝히고 있었다. 미완성이었을 때 화면의 감록색은 끝없이 낙하할 깊은 바닷속 같았는데, 똑같은 감록색이 지금은 녹음을 뚫고 들어오는 약한 햇빛의 색이었다. 그리고 그 녹색의 햇빛 속에서 화련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리하게도 상처 입힐 자를 알아보는 여인들이 있다. 그리고 알아보고도 결국에 피하지 못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림에서 묻어나는 애정을 섭은 민감하게 느꼈다. 그것은 여우인 그에게 힘이 되어 스며드니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눈으로 붓끝을 보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다시 한 번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섭은 곧장 상경하여 그녀의 집으로 갔다. 집은 이미 텅 비었고 누군가 뒤진 흔적으로 난잡했다. 화련의 냄새는 약하게 남겨져 있었다.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어디에 있을까. 온갖 사람과 물건과 동식물들의 냄새가 뒤섞인 도시 한복판에서 섭은 그녀의 냄새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인간보다 뛰어난 여우의 후각이라도 사실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경성은 넓었고 냄새는 너무나 많았다.

기진할 정도로 헤매다 포기한 순간, 놀리는 것처럼 그녀의 냄새가 돌아왔다. 짙고 따뜻한 피 냄새였다. 냄새를 따라 간 섭은 본정 2가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그녀와 다시 만났다. 발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개의 총상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그녀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섭은 그녀를 업고 자정이 다가오는 경성의 거리를 걸었다. 집으로 가야지. 여우에게는 사냥할 시각이지만 인간은 잘 시각이거든.

그의 어깨위로 늘어진 화련의 팔이 힘없이 흔들렸다.

“섭…섭은…은여우였군요. 머리카락…변했어요…”

문득 잠에서 깬 것처럼 화련이 말했다. 가래 끓는 목소리였다.

“응.”

섭은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참 그렇지. 다쳤으니 병원에 가야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전설 속의 여우들처럼.”

“아니.”

섭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총알 하나는 폐에, 다른 하나는 배에 박혀있었다. 옷 위의 핏자국이 말라붙은 걸 보면 이미 몇 시간 전에 맞은 것이다. 병원에 간들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도 이미 느끼고 있다. 그녀의 생명력이 시들어가고 있는 것을. 그럼 역시 집으로 가야겠다.

“그럼?”

묻고 나서 화련은 기침을 했다. 섭의 목덜미에 핏방울이 튀었다.

“아무것도…”

섭은 다시 걸었다. 그리고는 곧 멈춰 섰다. 어디로 가지? 어디로…

“…그러네요.”

가래 끓는 목소리로 화련이 말했다.

“정말 당신은 절대로 사람이 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말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폐는 웃음소리 대신 피거품만 끌어올렸다.

“그러니 여우인 채로 기다려줘요. 내가 다시…”

마지막 숨을 말과 함께 내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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