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66화 (66/218)

와룡촉대(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나는 남자 도깨비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창고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갑자기 여자들의 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억울해. 목신에게 한 잘못이 그렇게 큰 거였어? 그리고 도깨비들은 또 왜 그래? 여자들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어!

작업장으로 돌아와 촛대 앞에 앉았지만 목신이 대화를 거부하는 마당에야 도무지 방법이 없다. 문제가 뭔지 말이라도 해주면 좋잖아. 심지어 가까이도 못가.

무리하게 대화를 해보려다 실패한 뒤라 강하게 나갈 수도 없고, 목신이 좋아할법한 일들도 모두 시도해본 후다. 혹시 정보가 있을까 하고 물품출납서를 확인해 보았지만 심심풀이 족자 외에 목신과 관련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도 나무를 잘못 잘랐다가 목신에게 화를 입었다거나 석 달 동안 치성을 들인 끝에 목신을 감동시켰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야…‘목신과의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든가 ‘초보 목신대화법’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촛대만 노려보면서 시간은 흘렀다. 얼마나 오래 지켜봤는지, 몸체의 고리 같은 매듭장식이 몇 개인지 어디에 어떤 모양의 흠이 있는지 옻칠이 닳아서 색이 연해진 부분이 어디인지 훤해질 정도였다. 그러고 있으려니까 창고에서 물레 도깨비가 나오더니

“김서방, 행희 낭자가 부끄러우니 그만 좀 쳐다보라고 하오. 원 무슨 남자가 염치도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여자를 샅샅이 훑어본단 말이오?”

란다. 이 도깨비가 난데없이 사람을 변태 취급하네. 내가 쳐다보고 있던 건 촛대거든요. 샅샅이 훑어보긴 누가…. 음. 샅샅이 보기는 했나. 그야 할 일도 없고. 그리고 촛대를 지켜보는 게 왜 염치없는 짓인데! 마치 촛대가 목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음?

혹시 그런 걸까? 목신의 본체는 살아있는 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본래부터 나무로 만든 물건에 깃들기도 하는 걸까? 만일 이 촛대가 목신의 신체라면 굳이 그녀를 만나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촛대에게 말을 걸면 될 테니까. 대답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도는 해보는 게 좋겠지.

“저…아까는 말인데…”

촛대를 상대로, 목신의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리하게 대화 하려고 했던 것을 한 번 더 사과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 정도야 각오하고 있던 바다. 나는 벽에 대고 수다 떠는 심정으로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았다.

한심해 보이는 모습이겠지만 별 수 있나. 물건과 이야기하는 일쯤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 졌고, 어차피 작업장에 나 말고는 없는데 부끄러울 게 뭐…

“저녁 먹은지 오래 되어서 출출할 것 같아 가져왔어요.”

샌드위치와 커피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으며 유하가 말했다.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여자의 타이밍은 정말 귀신같아.

“응. 고마워.”

내가 촛대 앞에서 수다 떠는 거 봤을까?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얼굴을 보지도 않고 고맙다고 말했다. 언제나처럼 용건이 끝났으니 곧장 위층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작업 선반 위에 상체를 기울이며 촛대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진지한 옆모습을 흘낏 봤다가 목덜미를 가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았고 다음에는 민소매 상의의 어깨와 모시 웃옷을 밀어내며 부풀어 오른 가슴 쪽으로 미끄러졌다.

“은행나무네요.”

촛대를 보며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마음에 들어? 필요하면 비슷한 거 사줄까?”

잠깐 방정치 못했던 시선을 회수하며 아무렇게나 물은 다음에야 “필요하면 제가 사면 되죠.” 같은 대답을 들을만한 질문이었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생각한 것 같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쪽을 힐끗 보는 유하가 어쩐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언제 양동시장에 같이 가서…다른 필요한 것도 사야 하니까요. 괜찮을까요?”

장보러 가는 거 도와달라는 말을 꽤 어렵게 한다. 그 정도 부탁이야. 이래 뵈도 관대한 고용주인걸.

“좋아. 어…날씨가 흐려지면.”

“예”

와아. 웃었다.

백은호 못지않게 웃는 모습 보기 힘든 그녀의 얼굴에 하얀 치열이 드러날 정도로 밝은 웃음이 번지는 것을 봤다. 그리고는 곧 위층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잠시 그녀가 아직 작업 선반 옆에서 웃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미인을 꽃에 비유하는 이유를 체감하고 있었다. 미인은 꽃과 같고 웃으면 그 꽃이 활짝 피는 것 같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고 사람에게 있을 리 없는 향기를 맡는다. 이봐, 정신 차려. 임자 있는 여자야.

머릿속 어디서 양심이 속삭이는 것 같은데 무시했다.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니야. 저런 예쁜 여자가 옆에서 웃고 있으면 조금 망상에 빠져도 당연한 거라고.

뭐라는 거냐. 지금…. 촛대 때문에 너무 고민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

그래, 촛대. 촛대…그러고 보니 촛대에 대해서 뭔가 들은 것 같은데.

- 은행나무네요.

맞다. 유하가 그렇게 말했었지. 몇 겹이나 옻칠이 되어 결을 알아보기도 힘든 나무의 종류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은행나무라…. 나무의 종류가 목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지만 은행나무라면 생각나는 것은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과 암수가 구분되었다는 정도? 그렇다면 목신이 여성이니 이 촛대는 암나무로 만들었다는 걸까.

하지만 목신의 개인차는 나무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게, 집 앞에서 항상 수다를 떠는 두 목신은 모두 이팝나무에 깃들어 있는데 하나는 호기심 많은 강아지처럼 들쑤시고 다니는 타입으로 항상 말이 많고 다른 하나는 주로 대꾸나 해주는 점잖은 성격이었다.

같은 종류의 나무에 깃들어 있어도 성격이 다른 걸 보면 나무의 종류는 별로 중요하지 않나 싶다.

저 행희라는 목신은 마치 조선시대의 양가집 규수 마냥 남자와는 상종하지 않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여자라도 짝이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직 짝 없는 여자만 그녀와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건데. 말하자면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처녀나 수절하는 과부 정도겠다. 어째서 그런 사람들만 만날 수 있는 거지?

아니, 질문의 방향을 바꿔 볼까. 그런 사람들이 흔한 곳은 어디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은 역시 여승이나 수녀 같은 이들의 거처겠지. 절이나 수도원에 사는 나무일까? 그러나 거의 삼국시대에 가까울 정도로 고색창연한 디자인에 알록달록한 옷차림을 보면 무채색을 사랑하는 절이나 수도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옷차림, 특이하단 말이지. 조선시대의 한복도 아니고 신라시대쯤 되는 것처럼 생겨가지고. 게다가 오른쪽으로 몰아서 실타래처럼 묘하게 묶어놓은 머리 모양도 그렇고.

어쩌면 그게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흔한 모습은 아니니까.

물레 도깨비 말처럼 샅샅이 훑어본 것은 아니지만 성냥개비를 무수히 태워먹으며 수십 번이나 나타나는 모습을 봤다. 얼굴도 머리 모양도 옷의 색이나 자수 같은 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자 이름인 행희에서는 총희(寵姬)와 비슷한 뜻의 단어가 하나 걸렸을 뿐이다.

기억을 토대로 머리 모양을 찾아보니 이번에는 좀 더 쓸 만한 것이 나왔다. 그림과 사진, 설명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행희의 머리 모양은 고려시대 부녀자들의 대중적인 헤어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물레 도깨비는 행희 낭자라고 부르던데. 어째서 머리 모양은 기혼녀인 거야?

의복 역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였다. 조선시대 이전의 복식은 자료가 거의 없어 어느 때인지 정확히 가늠되지 않는다. 하긴 뭐 논문 쓸 것도 아니고. 굉장히 옛날이구나 생각하는 수밖에.

고려 여자, 은행나무, 이런 키워드 검색으로 나온 이미지들을 대충 훑어보는데 흐릿하니 엉성한 그림하나가 휙 지나갔다. 마우스 휠을 움직여 돌아가 보자 오래되어 낡은 벽화를 찍은 사진이었다.

색은 희미하게 바래고 군데군데 물감이 벗겨진데다 벽에 금이 간 것을 시멘트로 메꾸어 자세한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형체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을 한 번 더 보게 된 이유는 색깔 때문이었다.

소매가 넓은 저고리는 흰 색에 분홍색 속저고리, 치마는 청록색이며 깃과 도련은 하늘색이다. 모양은 정확하게 알 수 없어도 색상만은 확실했다. 목신 행희의 것과 똑같았다. 머리 모양은 그림 자체가 조악해서 장담 못하겠지만 둥글게 부풀어 오른 모양을 보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사진을 클릭하자 주관심사가 여행인 것 같은 블로그로 이동했다. 여러 장의 사진이 설명과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글을 올린 시기는 이미 4년 쯤 전이다. 첫 번째 사진으로 바다에서 바라본 작은 섬, 다음으로는 바위투성이인 해변가 풍경, 그 다음이 고목 옆에 만들어진 작은 사당, 그리고 다음이 벽화였다.

사당의 사진 아래에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이 마을의 수호신인 해랑 아씨의 사당. 여신이라 그런지 남근 조각들이 봉헌되어 있다.]

벽화 사진 아래에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었다.

[해랑 아씨는 본래 이 섬에 사는 처녀였는데 얼굴이 추하여 혼인을 못하자 비관한 나머지 은행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후로 파도와 바람이 심해져서 마을 사람들은 사당을 지어 해랑 아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이 사당에는 남자가 올 수 없고 처녀나 과부만 참여해 제를 올린다니 처녀의 원한은 과연 무섭다. 노인정에서 막걸리 두 병으로 얻은 수확.]

목신 행희와 겹치는 데가 많다. 아니 이름만 빼면 거의 같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벽화의 그림도 그렇고 제사에 남자가 참여할 수 없는 것이나, 은행나무를 신체로 삼고 있는 것이나.

아냐. 설마 진짜일라고…? 인터넷 검색으로 이렇게 쉽게 찾아지는 거라면 그동안 내가 한 고생은 뭐가 돼? 어딘지 포인트가 잘못된 이유를 핑계로 검색의 결과를 부정하며 나는 컴퓨터 앞을 떠났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 사당의 여자가 행희라고 하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본 목신 행희는 결혼도 못할 정도의 추녀가 아니었다는 거다. 오히려 통통하니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며, 눈매는 좀 날카롭지만 이목구비도 또렷해 귀엽게 보이는 처녀였는걸.

작업장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촛대 한 쌍이, 선반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란히 서 있었다.

“아…정말. 이유가 뭐냐고.”

설령 행희가 해랑 아씨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다. 그냥 그녀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는 정도? 촛불만 보면 꺼버리는 까닭은 여전히 짐작이 안 된다. 나무니까 불을 싫어하나? 하지만 고조할머니 때 가져와서 지금까지는 아무 일 없이 잘 사용했잖아.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유를 아는 이는 오직 행희 자신뿐인데 말을 해주지 않는다.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써 봐도 소용없고 도깨비들도 도와주지 않고.

여러 가지로 귀찮은 아가씨네. 촛대 같은 거 안에 숨어서는.

아무 생각 없이 팔을 뻗어 촛대를 잡았다. 잡고 나서 생각났는데 이거 목신 행희의 신체(神體)였지.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했는데 잡아버렸으니까…

끼아아아아 - !

귀곡성 같은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불처럼 뜨거운 기운이 촛대로부터 확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촛대를 놓치고 주르륵 밀려나가 버릴 정도의 힘이었다. 밀려나가서 벽에 부딪친 것까지는 참을만한데 이 소리는 뭐야. 귀청이 찢어지겠다.

“이봐! 이봐! 미안해! 깜박하고…”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곡성이 한 번 더 울렸다. 작업장 안의 유리창들이 깨질까 걱정될 정도로 바르르 떨었다.

“미안하다니까! 진짜 귀여운 얼굴 해가지고 성격은 뭐 이래!”

시끄러운 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나도 큰 소리로 외쳤다. 유리창을 깨뜨릴 기세로 울리던 귀곡성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뭐야. 끝난 거야? 목신 행희는 촛대에서 좀 떨어진, 창고 가까운 곳의 벽에 딱 붙어 서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나를 외면하고 약간 쌕쌕대며 뭐라 중얼거렸다.

귀에서 손을 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눈치를 보자 소리에 놀라 웅성거리고 있던 도깨비들 사이에서 물레 도깨비가 살짝 머리를 내밀었다.

“김서방, 행희 낭자가 말하기를 거짓말 말라 하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레 도깨비와 행희를 번갈아 보았다. 행희가 한 번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뭐라 말하는 것을 듣고 물레 도깨비가 묘한 얼굴로 웃었다.

“방금 김서방이 한 말 말이오. 귀엽다고 했다잖소.”

“그게 왜 거짓말이야?”

내 대꾸에 행희가 안절부절 하며 물레 도깨비에게 속삭였다.

“계속 놀리면 화내겠다고 하오.”

물레 도깨비가 그녀의 말을 전해주었다. 아까의 귀곡성을 또 듣는 건 사절인데.

그나저나 저 목신은 뭘 저렇게 안절부절 하는 거야?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서…

“놀리는 거 아니야. 너도 거울을 보면 알 거…아니, 목신은 거울을 못 보나?”

귀신은 거울에 안 비친다고 하니까.

내 말에 목신 행희가 울상을 지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봐, 이봐. 내가 무슨 울릴 만한 말을 했다고 그런 표정을 하고 그래? 제길, 또 뭘 잘못한 거지? 거울 못 본다고 말한 것 때문인가? 귀엽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예쁘다고 해줘야 하나?

이번에는 내가 안절부절 하게 되었다. 물레 도깨비가 풋 하고 웃더니 목신에게 말했다.

“이보오, 행희 낭자. 저 김서방이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고 생긴 것만 멀쩡한 사내요만, 부질없이 놀리거나 속이는 짓은 안 한다오. 이 몸의 말은 믿지 않겠소?”

편들어 줘서 고맙구나. 생긴 것만 멀쩡해서 미안하다.

물레 도깨비에게는 감사해야 할지 불평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이 확실히 효과는 있어 보였다. 울상을 짓고 있던 행희의 얼굴이 이번에는 발그레하니 붉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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