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67화 (67/218)

와룡촉대(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목신을 얌전하게 만들 수도 있을 줄이야.

행희는 처음에 날카롭게 쏘아보던 거나 실에 목이 걸렸을 때 야무지게 화를 내던 모습이 무색하게 다소곳해져서, 자세도 조신하게 손을 모으고 서서는 고개를 외로 꼬며 소곤소곤 말했다.

“오랫동안 남자와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고 하오. 화는 이제 풀렸다는구려.”

그녀의 말을 물레 도깨비가 통역하듯 전해주었다. 내 사과에 대한 행희의 대답이었다.

아아, 드디어 풀렸다. 어쩐지 머리 위에서 팡파르가 울리는 기분이 든다. 힘들었어. 그치만 잘 견뎠다, 김해명.

목신이라도 역시 여자라는 건가. 귀엽다는 말에 그만 수줍어하면서 화가 풀려버리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아부를 해볼걸.

행희가 다시 소곤소곤 물레 도깨비에게 말했다.

“아까 김서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궁금해 하오.”

물레 도깨비가 곧 알려준다. 화가 풀렸을 뿐 아니라 먼저 대화를 시도하다니.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정말이었어.

물론 궁금한 것은 촛불을 켤 때마다 불어서 꺼버리는 이유지만 본론은 좀 늦추기로 했다. 이유를 알아도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일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목신과는 더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친해지기 전까지 나를 그림자취급 했던 도깨비들을 생각해보면 요괴들과의 관계도 확실히 인맥관리였다.

“무슨 이야기라기보다는, 내 집에 온 손님이잖아.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궁금했어.”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런데 내 말에 목신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나 또 뭐 실수한 거야? 어디 사는 누구인지 밝히는 게 곤란한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목신 행희는 잠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긴 소매 아래에서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우물거리는 것이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아니 뭐, 꼭 알고 싶은 건 아니니까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생각해 보니 이런 거 물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난처해하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행희 쪽에서는 반대로 알아들었는지 안절부절 하는 얼굴로 물레 도깨비에게 속삭였다. 물레 도깨비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동시통역하듯 내게 전했다.

“행희 낭자는 본래 마애도라는 작은 섬의 은행나무에 깃든 목신이었다 하오. 그러다 해랑신이 되어 마을 사람들을 돌봐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웬 도사 하나가 섬에 찾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바다에 풍랑이 심하고 고기잡이가 잘 안 되는 것은 해랑신이 심술을 부려서이다. 그러니 처녀인 해랑신과 골메기신(서낭신)을 혼인시키면 심술이 사라져 바다가 잔잔해질 거라 했다는 거요.”

맞는 말이기는 했다. 보통 바닷가 마을에서는 부부신을 함께 모신다. 마을 사람들도 도사의 말이 옳다고 여겨 그에게 해랑신의 혼인식을 맡겼다고 한다. 도사는 목신이 깃든 은행나무 한 가지를 잘라내 촛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신체로 삼아 하나의 촛대에 해랑신을 모시고 다른 하나에 골메기신을 모셔 혼인식을 치렀다.

“그래 행희 낭자가 혼인을 하고 신방에 들어갔더니…뭐요?”

물레 도깨비가 말을 전하다 말고 행희를 돌아보았다. 행희는 고개를 수그리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는데 듣고 있던 물레 도깨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험상궂게 변했다.

“아니 그런 육시를 할 놈이! 그래서? …뭐요? 천하의 개 호로자식 같으니라고! 그런 천벌 받을 놈이 있나!”

저, 물레 도깨비님…? 이봐요….

“그래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소. …저런? 저런? 참기름을 흠씬 발라서 벼락에 구워먹을 놈일세! 그런 놈을 그냥 뒀단 말이오?”

저기, 이봐요들…. 무슨 일인지 나도 알려달라고.

물레 도깨비가 잔뜩 흥분해서 말을 전해주지 않는 바람에 나는 잠시 두 여자들로부터 소외되었다. 원래도 성미가 급한 물레 도깨비였다. 행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길길이 날뛰는 그녀의 얼굴은 살기가 등등했다.

잠시 후 겨우 진정한 물레 도깨비가 “그 도사란 놈이…”라며 다시 입을 열었을 때도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서슬이 퍼랬다.

“글쎄 그 놈이 혼례를 치르는 척하더니 망석중이(꼭두각시의 일종)로 골메기신이라 속이고 행희 낭자를 유인해 이 촛대에 가둬버렸다지 뭐요. 천하에 흉악한 놈 같으니라고. 그리고는 뭍으로 건너가서 신이 깃든 촛대라며 팔아버렸다 하오.”

뭐야, 그거. 인신매매는 들어봤지만 목신매매라니?

“그런 일도 있는 거였어?”

“있다 뿐이오. 영물을 봉인해서 신물(神物)로 만들거나 영이나 신을 깃들게 하여 호부(護符)로 만들거나 하는 도사들이 많소. 그런 일이야 늘 있는 힘겨루기에 다름 아니니 상관할 바 없겠소만 하필이면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 서낭신을 빼돌리다니 그야말로 악질이지. 서낭 없는 마을은 보호받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지다 결국 망하고 마는 게요. 지금쯤 그 마을은 어찌 되었을꼬.”

물레 도깨비의 설명을 듣고 있던 행희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렇게 잡혀 온지 백년 가까이 된 모양이오만, 그간 촛대 안에서 꼼짝을 못하고 호부 노릇을 하다가 최근에야 겨우 힘을 되찾은 모양이오. 아마 도사의 술법이 약해졌거나 신체인 촛대가 나무인지라 시간의 영향을 받은 게지.”

“힘을 되찾았다면 그냥 원래 있던 섬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내가 단순하게 물었다. 내 질문에 행희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레 도깨비가 대신 대답했다.

“말했잖소. 도사 놈이 괴뢰와 혼례를 치르게 했다고 말이오. 상대가 골메기신도 아니고 한낱 도사가 나무와 부적으로 만든 망석중이라 하나, 절차에 따라 하늘에 부부가 됨을 고하였으니 행희 낭자는 천상 그 괴뢰의 안사람이란 말이오. 어찌 아내가 남편을 떠나겠소?”

순진한 처녀를 결혼을 핑계로 속여서 팔아먹는다든가 하는 일은 인간 사이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 막장 도사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행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욕을 퍼부었던 물레 도깨비의 태도가 이해된다.

“초에 불을 붙이면 꺼버렸던 건 그래서…?”

내가 묻자 행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내가 몇 번이나 초에 불을 붙일 때마다 나타나서 훼방한 일을 떠올린 모양이다.

“호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몸이라 그 정도의 심술밖에는 부릴 수 없었다 하오. 아까 김서방을 귀찮게 한 일은 미안하다고 하는구려.”

강제로 잡혀 와서 호부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 반항은 심술이랄 것도 없잖아.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멀쩡한 마을 서낭신을 봉인해서 팔아먹다니 행희의 처지도 가련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해가 되고. 이미 백 년 전의 일이라니 그 도사는 살아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촛대에서 벗어나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방법이 있기는 하겠지?”

내 물음에 물레 도깨비는 행희를 힐끗 보더니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

“그야 뻔하잖소. 남편에게 매인 몸이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혼을 하면 될 일.”

어? 그런 것도 돼? 아니, 사람이라면 당연하지만 신의 권속인 행희 같은 존재도 이혼이 되는 건가. 하긴 혼인이 가능하다면 이혼도 가능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좀 있소.”

물레 도깨비가 초승달 같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혼을 하려면 남편이 동의해야 하는데, 우선 혼례에 쓰인 망석중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오. 행희 낭자를 봉인하고 호부로 이용하려니 멀리 두지는 않았을 터요. 분명 집안 어디엔가 숨겨 두었겠지.”

속임수에 사용된 가짜 남편까지 있어야 하는 거로구나. 그야 이혼은 부부가 함께 동의해야 하는 거니까.

“너희들이 찾아보기는…힘들겠지?”

“서낭신을 봉인한 호부를 쓰는 집안이오. 필경 가택신들의 위세도 평범치 않을 게요.”

그럴 것 같았다. 가택신이 강하면 인간 아닌 존재는 출입하기도 어려울 터다. 결국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인데. 도둑처럼 남의 집을 뒤지는 것도 곤란하지만 어차피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결국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촛대를 맡긴 장본인뿐이다.

해 줄까?

행희를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촛대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게 되면 촛대는 더 이상 호부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알고도 그는 우리를 도와줄까? 아니면 거짓말로 속여서라도 가져오게 해야 할까…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 행희가 물레 도깨비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말이었는지 물레 도깨비가 눈을 흘겨 떴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쉬며 내게 말을 전했다.

“행희 낭자의 말이 범식 도령-그 손님 말이오-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으니 사실대로 말하면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하오. 다만 모친이 엄하고 도령은 효심이 깊어 그것이 걱정이라.”

말하자면 마마 보이?

행희를 힐끗 보니 마침 나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정말 괜찮을까?”

믿어도 될까? 내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행희의 눈길이 천천히 거슬러 올라와 내게 닿았다.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제법 야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믿은 사람은 범식 도령일 테지만, 어쩐지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면 나도 믿어볼까.”

내 말에 행희가 배시시 웃었다. 역시 인터넷에서 본 해랑 아씨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예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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